2018 마가복음 제 18 강 첫째가 되려면(막9:3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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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마가복음 제 18 강
말씀 | 마가복음 9:30-50
요절 | 마가복음 9:35
첫째가 되고자 하면
“예수께서 앉으사 열두 제자를 불러서 이르시되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 사람의 끝이 되며 뭇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하시고”
하나님은 인간을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하셨습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 안에는 하나님과 같이 위대해지고자 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위대한 삶이 무엇인지, 어떻게 위대해질 수 있는지 잘 알지 못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누가 더 크냐, 누가 첫째가 될 것인가를 고민하며 다투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위대해지고자 하고 첫째가 되고 싶어하는 제자들에게 진정한 위대성이 무엇인지, 어떻게 첫째가 될 수 있는지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우리도 말씀을 통해 하나님 안에서 위대한 삶을 살고자 하는 꿈을 꾸고 믿음으로 도전할 수 있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9:30-33절을 봅시다. “30.그 곳을 떠나 갈릴리 가운데로 지날새 예수께서 아무에게도 알리고자 아니하시니 31.이는 제자들을 가르치시며 또 인자가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죽임을 당하고 죽은 지 삼 일만에 살아나리라는 것을 말씀하셨기 때문이더라 32.그러나 제자들은 이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묻기도 두려워하더라” 예수님은 갈릴리를 지나 예루살렘을 향해 가고 계셨습니다. 이 길은 관광을 하며 즐기기 위해 가는 길이 아니라 모든 사람의 죄를 지고 십자가를 지기 위해 가는 고난의 길이었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면 백성들의 환영을 받으며 왕으로 등극하실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지금 그들이 가고 있는 길은 부귀영화의 길이요 영광의 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고난 받으시고 죽임을 당할 것이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이 말씀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평소 말씀이 어려우면 반드시 질문을 하던 제자들이 이번에는 질문하는 것조차 두려워하였습니다. 이는 고난과 죽음은 그들이 결코 원하지 않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그들이 원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들은 예수님이 왕으로 등극하길 원했고 그들은 예수님의 좌우편에 앉기를 원했습니다. 그들에게는 누가 예수님의 좌우편에 앉게 될 것인가가 큰 관심이었습니다. 그들은 예루살렘을 향해 가는 그 길에서 누가 크냐하는 문제로 서로 크게 다투고 있었습니다. 34절을 봅시다. “그들이 잠잠하니 이는 길에서 서로 누가 크냐 하고 쟁론하였음이라” 제자들은 어떤 자가 큰 자라고 주장했을까요? 그들은 누가 먼저 부르심을 받았는가? 누가 예수님과 가까운 친척인가? 예수님이 누구의 이름을 많이 불러 주었는가? 누가 회계장부를 맡았는가? 누가 변화산에 있었는가? 등 각자 주장하는 것이 달랐습니다. 그러면 그들은 왜 이렇게 다투면서까지 큰 자가 되고 싶어 했을까요? 그 이유는 세상에서는 큰 자가 되면 임의로 주관하며 섬김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누가 큰가 하는 다툼은 제자들만의 문제는 아닙니다. 이는 역사 이래 인간사에 항상 있었던 뜨거운 감자였습니다. 이는 세상은 큰 자가 기득권을 가지고 부와 권력을 독점해 왔기 때문입니다. 작은 자는 언제나 큰 자의 비위를 맞추며 섬겨야 하고 작은 자들은 부당하고 억울한 일을 당해도 참아야 하고 굴복해야 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의 비정한 현실입니다. 그래서 과거 우리 부모님들은 억울하면 출세해야 한다는 신념을 갖고 자녀들을 일류대학에 보내고 의사, 판검사를 만들기 위해 올인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나라는 전세계에서 가장 교육열이 높은 나라가 되었습니다.
우리나라는 어릴 때부터 등수를 매기고 서열을 세우는 교육시스템을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일등을 하면 많은 관심과 인정을 받지만 나머지는 그저 그런 사람으로 취급을 받습니다. 올림픽에서 메달을 따도 금메달을 따야 기뻐하고 은메달을 따면 눈물을 흘립니다. 부모님들은 어떻게 하든 내 아이가 일등하는 아이와 친구가 되기를 바랍니다. 일등하는 친구를 사귀면 내 아이도 왠지 공부를 더 열심히 할 것 같고 아이의 장래에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큰 자가 되려는 자와 큰 자의 곁에서 어떻게든 기득권을 누려 보려는 자들의 다툼은 오래된 세상의 생태계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들은 세상 사람들과는 달라야 합니다. 그런데 그들도 세상 사람들처럼 똑같이 누가 크냐하는 문제로 다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런 제자들을 책망하거나 비난하지 않으셨습니다. 왜냐하면 크고자 하고 위대해지고자 하는 마음은 그 자체로 나쁜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런 마음을 갖고 노력하고 실력을 쌓는 일은 좋은 일입니다. 그렇게 할 때 발전과 성장이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많은 사람들이 큰 자가 되고 첫째가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잘못 알고 있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 의미를 재해석해 주셨습니다.
35절을 봅시다. “예수께서 앉으사 열두 제자를 불러서 이르시되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 사람의 끝이 되며 뭇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하시고” 예수님은 한 사람의 위대성은 그 사람의 직책이나 소유에 있지 않고 내면성에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많은 사람을 섬기려면 많은 사람을 품을 수 있는 내면성이 있어야 합니다. 사람의 본성은 섬김을 받고 싶어하기 때문에 이런 내면성을 갖기 쉽지 않습니다. 이런 내면성을 가지려면 인간에 대한 깊은 성찰과 투철한 책임감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많은 자기 수양과 훈련이 필요합니다. 그렇지 않을 때 결코 위대한 삶을 살 수 없습니다.
예를들어 배가 파선하면 아이들, 여자들, 노인들, 병사들, 장교들 순으로 탈출을 해야 합니다. 모든 사람을 탈출시킨 후에 맨 끝에 선장이 탈출합니다. 이렇게 뭇사람의 끝이 되어 섬기는 선장은 위대한 선장입니다. 그런데 세월호 선장은 자기만 살겠다고 가장 먼저 탈출했습니다. 그 결과 그는 비열한 선장이 되고 말았고 그의 책임을 다하지 못한 죗값을 치르고 있습니다. 그런데 영화 타이타닉 호를 보면 그 배의 선장은 모든 사람들을 탈출시키느라 그는 탈출하지 못하고 배와 함께 장렬히 침몰하였습니다. 이렇게 맨 끝에서 모든 사람들을 섬긴 그는 많은 사람들에게 위대한 선장으로 기억되었습니다.
37절을 봅시다.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니라.” 당시는 어린 아이를 무시하던 시대였습니다. 그래서 어떤 모임에 참석한 사람 숫자를 셀 때도 어린 아이들은 숫자에 넣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는 것이 곧 나를 영접하는 것이라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우리의 왕이십니다. 그를 영접하고 섬기는 일은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하고 섬기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그런데 어린 아이 하나는 어떻습니까? 어린아이는 지극히 자기중심적입니다. 아무데서나 웃고 떠들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소리를 치르고 떼를 씁니다. 쉽게 화를 내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때립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가 어린 아이이기 때문에 그를 영접하고 감당해 줍니다. 저도 신우가 이렇게 하면 감당해 줍니다. 그런데 그 상대가 어린아이가 아닌데 어린 아이처럼 생각하고 행동한다면 어떨까요? 영접하기 어렵습니다. 그를 무시하고 관계성을 맺고 싶지 않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런 어린아이 같은 사람을 영접하는 것이 나를 영접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그런 삶을 살 수 있을까요? 사도바울은 예수님을 영접한 후에 그의 동족인 유대인들에게 열심히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동족은 그의 진심을 알아주지 않았습니다. 그를 없이할 자라, 전염병과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그를 핍박하고 죽이고자 했습니다. 사도바울에게 그의 동족 유대인들은 아무리 가르쳐도 깨닫지 못하는 어린아이였습니다. 그러나 사도바울은 이런 그들을 비난하지 않습니다. 원망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언젠가는 예수님을 영접하고 돌아올 소망을 바라보았습니다. 그가 그렇게 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도 예수님을 모르고 믿는 자들을 핍박하고 그들을 잡아 죽게 만들었던 어린아이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의 모든 죄를 용서해 주셨습니다. 이런 그를 이방인의 사도로 세우셨습니다. 그는 이처럼 자기를 영접하고 사랑하여 주신 예수님의 사랑에 강권되어 그를 핍박하고 죽이고자 한 그의 동족 유대인들을 변함없이 사랑하고 섬길 수 있었습니다. 그는 이 예수님의 사랑 때문에 모든 사도들보다 더 많이 수고했습니다. 그 결과 그는 소아시아와 유럽에 많은 교회를 개척했습니다. 그를 통해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영접하고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 자신에 대해 나는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 고백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합니다. 바로 이것이 사도바울의 위대성입니다.
여러분, 한 사람의 위대성은 어떤 대학에 가느냐 어떤 직업을 갖느냐 얼마나 돈을 많이 버느냐 얼마나 많은 업적을 남기느냐에 있지 않습니다. 한 사람의 위대성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품고 섬길 수 있느냐 하는 내면성과 그 사람의 영향력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진정 큰 자가 되길 원하셨습니다. 그렇게 될려면 그들은 뭇사람의 끝이 되며 많은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누가 크냐 다투고 있는 그들의 모습을 볼 때 그들은 참으로 실망스러운 수준이었습니다.
38절을 봅시다. “요한이 예수께 여짜오되 선생님 우리를 따르지 않는 어떤 자가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는 것을 우리가 보고 우리를 따르지 아니하므로 금하였나이다.” 제자들은 다른 제자들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는 것을 보고 그들을 금했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우리를 따르지 않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는 일은 기뻐하고 축복해줄 일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어린 아이를 영접하기를 커녕 그들과 같이 예수님을 따르는 다른 제자들도 영접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이 자기들보다 더 일을 잘하고 사람들의 인정받는 것을 싫어하였습니다. 그들을 보면 위대한 삶과는 너무나 먼 사람들처럼 보입니다.
39,40절을 봅시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금하지 말라 내 이름을 의탁하여 능한 일을 행하고 즉시로 나를 비방할 자가 없느니라.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우리를 위하는 자니라” 예수님은 제자들이 어린아이와 같고 많이 부족했지만 그들을 비난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이 진정 위대한 사람이 되기를 바라시면서 그들에게 진정한 위대성에 대해 또 다른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그것은 다양한 사람들을 품을 수 있는 포용력을 가지는 것입니다. 우리를 따르지 않는다고 우리와 다르다고 배척한다면 많은 사람을 품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처럼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우리를 위하는 자라는 마음을 가지면 다양한 사람을 이해하고 품을 수 있게 됩니다.
41절을 보십시오.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우리가 뭇사람의 끝이 되고 많은 사람들을 섬기기 위해서 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그것은 반드시 크고 대단한 일일 필요는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누군가에게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그것도 위대한 일이라고 하십니다. 많은 사람을 섬기는 위대한 삶의 시작은 반드시 거창할 필요는 없습니다. 누군가에게 물 한 그릇을 주는 일부터 아주 작은 일부터 섬김을 실천하면 됩니다. 예수님은 이런 작은 섬김도 반드시 상을 받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42-47절을 보십시오. “또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작은 자들 중 하나라도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맷돌이 그 목에 매여 바다에 던져지는 것이 나으리라 만일 네 손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찍어버리라 장애인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을 가지고 지옥 곧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나으니라. 만일 네 발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찍어버리라 다리 저는 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발을 가지고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빼버리라 한 눈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 우리가 뭇사람의 끝이 되고 많은 사람을 섬기는 삶을 살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일은 자기 안에 있는 죄와 싸우는 일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다른 사람을 섬기기는커녕 다른 사람들을 실족시키는 자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나의 허물과 죄 때문에 누군가 실족하는 것이 얼마나 심각한 일입니까? 예수님은 그런 사람은 차라리 목에 연자 맷돌을 매고 죽는 편이 낫다고 하셨습니다. 정말 그렇게 죽으라는 말씀이 아니라 그만큼 심각한 문제라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예수님은 누가 크냐 다투는 제자들에게 위대성의 의미를 바르게 해석해 주셨습니다. 그것은 뭇사람의 끝이 되고 많은 사람을 섬기는 마음을 가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구체적으로 어린 아이 같은 자들을 영접하고 자기와 다른 사람들을 포용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을 섬기는 삶은 거창한 것이 아니라 누군가에게 물 한 그릇을 대접하는 것부터 작은 섬김부터 시작하는 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일은 자기 안에 있는 죄와 철저히 싸우는 것입니다. 그래서 누군가 나의 허물과 죄 때문에 실족하지 않도록 하는 것입니다. 과연 우리도 이런 위대한 삶을 살 수 있을까요? 네 그렇게 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어린아이와 같이 참으로 부족하고 연약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어린 아이와 같은 그들을 영접하시고 그들의 허물을 감당해 주셨습니다. 그들이 말씀을 깨달을 때까지 말씀을 가르치셨고 여러 모양으로 그들을 섬기고 훈련하셨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잘 깨닫지 못하고 변화되지 않을 것같이 보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이 위대한 제자들이 될 것을 한번도 의심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은 결국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들은 마침내 죄와 어둠에 절망하는 세상에 복음이 빛을 비추는 사도들이 되었습니다. 위대한 1세기의 주인공들이 되었습니다. 우리도 제자들처럼 변화될 수 있습니다. 우리도 위대한 살 수 있습니다. 이는 우리를 부르신 예수님이 위대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친구들이 예수님을 믿음으로 많은 사람을 섬기는 진정 위대한 삶을 살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말씀 | 마가복음 9:30-50
요절 | 마가복음 9:35
첫째가 되고자 하면
“예수께서 앉으사 열두 제자를 불러서 이르시되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 사람의 끝이 되며 뭇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하시고”
하나님은 인간을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하셨습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 안에는 하나님과 같이 위대해지고자 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위대한 삶이 무엇인지, 어떻게 위대해질 수 있는지 잘 알지 못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누가 더 크냐, 누가 첫째가 될 것인가를 고민하며 다투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위대해지고자 하고 첫째가 되고 싶어하는 제자들에게 진정한 위대성이 무엇인지, 어떻게 첫째가 될 수 있는지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우리도 말씀을 통해 하나님 안에서 위대한 삶을 살고자 하는 꿈을 꾸고 믿음으로 도전할 수 있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9:30-33절을 봅시다. “30.그 곳을 떠나 갈릴리 가운데로 지날새 예수께서 아무에게도 알리고자 아니하시니 31.이는 제자들을 가르치시며 또 인자가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죽임을 당하고 죽은 지 삼 일만에 살아나리라는 것을 말씀하셨기 때문이더라 32.그러나 제자들은 이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묻기도 두려워하더라” 예수님은 갈릴리를 지나 예루살렘을 향해 가고 계셨습니다. 이 길은 관광을 하며 즐기기 위해 가는 길이 아니라 모든 사람의 죄를 지고 십자가를 지기 위해 가는 고난의 길이었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면 백성들의 환영을 받으며 왕으로 등극하실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지금 그들이 가고 있는 길은 부귀영화의 길이요 영광의 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고난 받으시고 죽임을 당할 것이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이 말씀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평소 말씀이 어려우면 반드시 질문을 하던 제자들이 이번에는 질문하는 것조차 두려워하였습니다. 이는 고난과 죽음은 그들이 결코 원하지 않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그들이 원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들은 예수님이 왕으로 등극하길 원했고 그들은 예수님의 좌우편에 앉기를 원했습니다. 그들에게는 누가 예수님의 좌우편에 앉게 될 것인가가 큰 관심이었습니다. 그들은 예루살렘을 향해 가는 그 길에서 누가 크냐하는 문제로 서로 크게 다투고 있었습니다. 34절을 봅시다. “그들이 잠잠하니 이는 길에서 서로 누가 크냐 하고 쟁론하였음이라” 제자들은 어떤 자가 큰 자라고 주장했을까요? 그들은 누가 먼저 부르심을 받았는가? 누가 예수님과 가까운 친척인가? 예수님이 누구의 이름을 많이 불러 주었는가? 누가 회계장부를 맡았는가? 누가 변화산에 있었는가? 등 각자 주장하는 것이 달랐습니다. 그러면 그들은 왜 이렇게 다투면서까지 큰 자가 되고 싶어 했을까요? 그 이유는 세상에서는 큰 자가 되면 임의로 주관하며 섬김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누가 큰가 하는 다툼은 제자들만의 문제는 아닙니다. 이는 역사 이래 인간사에 항상 있었던 뜨거운 감자였습니다. 이는 세상은 큰 자가 기득권을 가지고 부와 권력을 독점해 왔기 때문입니다. 작은 자는 언제나 큰 자의 비위를 맞추며 섬겨야 하고 작은 자들은 부당하고 억울한 일을 당해도 참아야 하고 굴복해야 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의 비정한 현실입니다. 그래서 과거 우리 부모님들은 억울하면 출세해야 한다는 신념을 갖고 자녀들을 일류대학에 보내고 의사, 판검사를 만들기 위해 올인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나라는 전세계에서 가장 교육열이 높은 나라가 되었습니다.
우리나라는 어릴 때부터 등수를 매기고 서열을 세우는 교육시스템을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일등을 하면 많은 관심과 인정을 받지만 나머지는 그저 그런 사람으로 취급을 받습니다. 올림픽에서 메달을 따도 금메달을 따야 기뻐하고 은메달을 따면 눈물을 흘립니다. 부모님들은 어떻게 하든 내 아이가 일등하는 아이와 친구가 되기를 바랍니다. 일등하는 친구를 사귀면 내 아이도 왠지 공부를 더 열심히 할 것 같고 아이의 장래에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큰 자가 되려는 자와 큰 자의 곁에서 어떻게든 기득권을 누려 보려는 자들의 다툼은 오래된 세상의 생태계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들은 세상 사람들과는 달라야 합니다. 그런데 그들도 세상 사람들처럼 똑같이 누가 크냐하는 문제로 다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런 제자들을 책망하거나 비난하지 않으셨습니다. 왜냐하면 크고자 하고 위대해지고자 하는 마음은 그 자체로 나쁜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런 마음을 갖고 노력하고 실력을 쌓는 일은 좋은 일입니다. 그렇게 할 때 발전과 성장이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많은 사람들이 큰 자가 되고 첫째가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잘못 알고 있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 의미를 재해석해 주셨습니다.
35절을 봅시다. “예수께서 앉으사 열두 제자를 불러서 이르시되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 사람의 끝이 되며 뭇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하시고” 예수님은 한 사람의 위대성은 그 사람의 직책이나 소유에 있지 않고 내면성에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많은 사람을 섬기려면 많은 사람을 품을 수 있는 내면성이 있어야 합니다. 사람의 본성은 섬김을 받고 싶어하기 때문에 이런 내면성을 갖기 쉽지 않습니다. 이런 내면성을 가지려면 인간에 대한 깊은 성찰과 투철한 책임감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많은 자기 수양과 훈련이 필요합니다. 그렇지 않을 때 결코 위대한 삶을 살 수 없습니다.
예를들어 배가 파선하면 아이들, 여자들, 노인들, 병사들, 장교들 순으로 탈출을 해야 합니다. 모든 사람을 탈출시킨 후에 맨 끝에 선장이 탈출합니다. 이렇게 뭇사람의 끝이 되어 섬기는 선장은 위대한 선장입니다. 그런데 세월호 선장은 자기만 살겠다고 가장 먼저 탈출했습니다. 그 결과 그는 비열한 선장이 되고 말았고 그의 책임을 다하지 못한 죗값을 치르고 있습니다. 그런데 영화 타이타닉 호를 보면 그 배의 선장은 모든 사람들을 탈출시키느라 그는 탈출하지 못하고 배와 함께 장렬히 침몰하였습니다. 이렇게 맨 끝에서 모든 사람들을 섬긴 그는 많은 사람들에게 위대한 선장으로 기억되었습니다.
37절을 봅시다.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니라.” 당시는 어린 아이를 무시하던 시대였습니다. 그래서 어떤 모임에 참석한 사람 숫자를 셀 때도 어린 아이들은 숫자에 넣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는 것이 곧 나를 영접하는 것이라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우리의 왕이십니다. 그를 영접하고 섬기는 일은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하고 섬기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그런데 어린 아이 하나는 어떻습니까? 어린아이는 지극히 자기중심적입니다. 아무데서나 웃고 떠들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소리를 치르고 떼를 씁니다. 쉽게 화를 내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때립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가 어린 아이이기 때문에 그를 영접하고 감당해 줍니다. 저도 신우가 이렇게 하면 감당해 줍니다. 그런데 그 상대가 어린아이가 아닌데 어린 아이처럼 생각하고 행동한다면 어떨까요? 영접하기 어렵습니다. 그를 무시하고 관계성을 맺고 싶지 않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런 어린아이 같은 사람을 영접하는 것이 나를 영접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그런 삶을 살 수 있을까요? 사도바울은 예수님을 영접한 후에 그의 동족인 유대인들에게 열심히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동족은 그의 진심을 알아주지 않았습니다. 그를 없이할 자라, 전염병과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그를 핍박하고 죽이고자 했습니다. 사도바울에게 그의 동족 유대인들은 아무리 가르쳐도 깨닫지 못하는 어린아이였습니다. 그러나 사도바울은 이런 그들을 비난하지 않습니다. 원망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언젠가는 예수님을 영접하고 돌아올 소망을 바라보았습니다. 그가 그렇게 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도 예수님을 모르고 믿는 자들을 핍박하고 그들을 잡아 죽게 만들었던 어린아이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의 모든 죄를 용서해 주셨습니다. 이런 그를 이방인의 사도로 세우셨습니다. 그는 이처럼 자기를 영접하고 사랑하여 주신 예수님의 사랑에 강권되어 그를 핍박하고 죽이고자 한 그의 동족 유대인들을 변함없이 사랑하고 섬길 수 있었습니다. 그는 이 예수님의 사랑 때문에 모든 사도들보다 더 많이 수고했습니다. 그 결과 그는 소아시아와 유럽에 많은 교회를 개척했습니다. 그를 통해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영접하고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 자신에 대해 나는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 고백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합니다. 바로 이것이 사도바울의 위대성입니다.
여러분, 한 사람의 위대성은 어떤 대학에 가느냐 어떤 직업을 갖느냐 얼마나 돈을 많이 버느냐 얼마나 많은 업적을 남기느냐에 있지 않습니다. 한 사람의 위대성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품고 섬길 수 있느냐 하는 내면성과 그 사람의 영향력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진정 큰 자가 되길 원하셨습니다. 그렇게 될려면 그들은 뭇사람의 끝이 되며 많은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누가 크냐 다투고 있는 그들의 모습을 볼 때 그들은 참으로 실망스러운 수준이었습니다.
38절을 봅시다. “요한이 예수께 여짜오되 선생님 우리를 따르지 않는 어떤 자가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는 것을 우리가 보고 우리를 따르지 아니하므로 금하였나이다.” 제자들은 다른 제자들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는 것을 보고 그들을 금했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우리를 따르지 않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는 일은 기뻐하고 축복해줄 일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어린 아이를 영접하기를 커녕 그들과 같이 예수님을 따르는 다른 제자들도 영접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이 자기들보다 더 일을 잘하고 사람들의 인정받는 것을 싫어하였습니다. 그들을 보면 위대한 삶과는 너무나 먼 사람들처럼 보입니다.
39,40절을 봅시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금하지 말라 내 이름을 의탁하여 능한 일을 행하고 즉시로 나를 비방할 자가 없느니라.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우리를 위하는 자니라” 예수님은 제자들이 어린아이와 같고 많이 부족했지만 그들을 비난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이 진정 위대한 사람이 되기를 바라시면서 그들에게 진정한 위대성에 대해 또 다른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그것은 다양한 사람들을 품을 수 있는 포용력을 가지는 것입니다. 우리를 따르지 않는다고 우리와 다르다고 배척한다면 많은 사람을 품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처럼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우리를 위하는 자라는 마음을 가지면 다양한 사람을 이해하고 품을 수 있게 됩니다.
41절을 보십시오.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우리가 뭇사람의 끝이 되고 많은 사람들을 섬기기 위해서 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그것은 반드시 크고 대단한 일일 필요는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누군가에게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그것도 위대한 일이라고 하십니다. 많은 사람을 섬기는 위대한 삶의 시작은 반드시 거창할 필요는 없습니다. 누군가에게 물 한 그릇을 주는 일부터 아주 작은 일부터 섬김을 실천하면 됩니다. 예수님은 이런 작은 섬김도 반드시 상을 받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42-47절을 보십시오. “또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작은 자들 중 하나라도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맷돌이 그 목에 매여 바다에 던져지는 것이 나으리라 만일 네 손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찍어버리라 장애인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을 가지고 지옥 곧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나으니라. 만일 네 발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찍어버리라 다리 저는 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발을 가지고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빼버리라 한 눈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 우리가 뭇사람의 끝이 되고 많은 사람을 섬기는 삶을 살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일은 자기 안에 있는 죄와 싸우는 일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다른 사람을 섬기기는커녕 다른 사람들을 실족시키는 자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나의 허물과 죄 때문에 누군가 실족하는 것이 얼마나 심각한 일입니까? 예수님은 그런 사람은 차라리 목에 연자 맷돌을 매고 죽는 편이 낫다고 하셨습니다. 정말 그렇게 죽으라는 말씀이 아니라 그만큼 심각한 문제라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예수님은 누가 크냐 다투는 제자들에게 위대성의 의미를 바르게 해석해 주셨습니다. 그것은 뭇사람의 끝이 되고 많은 사람을 섬기는 마음을 가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구체적으로 어린 아이 같은 자들을 영접하고 자기와 다른 사람들을 포용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을 섬기는 삶은 거창한 것이 아니라 누군가에게 물 한 그릇을 대접하는 것부터 작은 섬김부터 시작하는 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일은 자기 안에 있는 죄와 철저히 싸우는 것입니다. 그래서 누군가 나의 허물과 죄 때문에 실족하지 않도록 하는 것입니다. 과연 우리도 이런 위대한 삶을 살 수 있을까요? 네 그렇게 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어린아이와 같이 참으로 부족하고 연약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어린 아이와 같은 그들을 영접하시고 그들의 허물을 감당해 주셨습니다. 그들이 말씀을 깨달을 때까지 말씀을 가르치셨고 여러 모양으로 그들을 섬기고 훈련하셨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잘 깨닫지 못하고 변화되지 않을 것같이 보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이 위대한 제자들이 될 것을 한번도 의심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은 결국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들은 마침내 죄와 어둠에 절망하는 세상에 복음이 빛을 비추는 사도들이 되었습니다. 위대한 1세기의 주인공들이 되었습니다. 우리도 제자들처럼 변화될 수 있습니다. 우리도 위대한 살 수 있습니다. 이는 우리를 부르신 예수님이 위대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친구들이 예수님을 믿음으로 많은 사람을 섬기는 진정 위대한 삶을 살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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