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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마가복음 제 14 강 이 말을 하였으니 (막7:24-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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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정베드로
댓글 0건 조회 57회 작성일 18-07-01 0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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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마가복음 제 14 강
말씀 | 마가복음 7:24-37
요절 | 마가복음 7:29
이 말을 하였으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 말을 하였으니 돌아가라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느니라 하시매”

우리는 지난주 예수님의 제자들이 식사할 때 손을 씻지 않고 먹는 것을 보고 장로들의 전통인 정결예식을 범했다고 비난하는 바리새인들에게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은 입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 안에 있는 죄라는 것을 배웠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열심히 씻고 청결히 하였기에 겉은 깨끗해 보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마음에 있는 온갖 더러운 죄를 보지 못했고 더러운 죄를 어떻게 씻어야 하는지 알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보면 겉은 유대인들이 더럽다고 멸시하는 이방인인데 마음이 매우 아름다운 여인이 나옵니다. 그녀의 믿음의 말에 감동하신 예수님은 귀신들린 그녀의 딸을 고쳐주셨습니다. 그녀는 마음이 매우 겸손하고 아름다운 여인이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도 어떻게 하면 이 여인과 같은 아름다운 믿음을 가질 수 있는지 배울 수 있길 기도합니다.

8:24절을 봅시다. “예수께서 일어나사 거기를 떠나 두로 지방으로 가서 한 집에 들어가 아무도 모르게 하시려 하나 숨길 수 없더라” 예수님은 정결예식으로 유대인들과 논쟁하던 곳을 떠나 두로지방으로 가셨습니다. 두로는 베니게의 수도로 부유한 도시였습니다. 베니게는 최초의 알파벳을 만든 곳으로 그곳은 문화과 기술이 발달한 곳이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이방인이 사는 지역에는 가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이는 그들과 접촉하면 부정해진다는 그들의 유전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유대인들과 불필요한 갈등을 피해 제자들과 조용히 쉬면서 제자들을 돕는 일에 집중하고자 이곳에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곳에 오셔서 한 집에 들어가 아무도 모르게 하시려고 조용히 숨으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예수님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습니다. 어떻게 알았는지 한 여인이 예수님이 오셨다는 소문을 듣고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8:25-26절을 봅시다. “이에 더러운 귀신 들린 어린 딸을 둔 한 여자가 예수의 소문을 듣고 곧 와서 그 발 아래에 엎드리니 그 여자는 헬라인이요 수로보니게 족속이라 자기 딸에게서 귀신 쫓아내 주시기를 간구하거늘” 예수님을 찾아온 여인은 헬라인이요 수로보니게 족속이었습니다. 당시 헬라인은 선진국 시민이요 엘리트 지성인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꽃피운 헬라철학과 문명에 대한 무한한 자부심이 갖고 있었고 그들은 유대인들을 무시했습니다. 그렇기에 이런 헬라인이 유대인을 찾아와 무엇을 부탁하는 일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녀는 비록 헬라인이지만 예수님께 나올 수 밖에 없었던 절박한 사정이 있었습니다. 그녀에게는 귀신에 들리 어린 딸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녀는 예수님께 나아와 그 발 아래 엎드려 자기 딸에게서 귀신 쫓아내 주시기를 간구했습니다.

귀신들린 딸을 둔 어머니의 삶이 어떠했을까요? 어머니에게 딸은 어여뿐 딸이기도 하지만 친구같은 존재입니다. 딸의 머리를 비서 주고 머리 끈으로 묶어 주고 예쁜 옷을 입혀 줄 때 어머니는 무한히 행복감을 느낍니다. 딸들은 아들들과 달리 애교가 많습니다. 물론 모든 딸이 그렇다는 것은 압니다. 대부분의 딸들은 애교가 많습니다. 딸들이 “엄마~ 아빠~”하고 애교를 부리면서 부탁을 하면 안 들어줄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예쁜 딸이 귀신에 들려 성난 얼굴을 하고 소리 지르고 또 눈이 뒤집혀 흰자만 보이고 물이든 불이든 가리지 않고 뛰어들고 집을 뛰쳐나가고 반항하는 것을 볼 때 이런 딸을 바라보는 어머니의 마음은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듯 억장이 무너지고 죽고 싶을 만큼 절망스러웠을 것입니다. 그녀는 이 딸을 고칠 수만 있으면 자기 목숨이라도 내놓고 싶었을 것입니다.

죽어가는 자식에 대한 어머니의 사랑에 대한 감동적인 일화가 있습니다. 신바람 박사로 유명하신 황수관 박사님의 이야기입니다. 황 수관 박사님의 어린 시절에는 홍역을 앓다 죽는 아이들이 많았다고 합니다. 박사님도 홍역을 앓게 되었고 거의 죽게 되어 갖다 묻을라고 아버지가 가마니와 지게를 준비해 놓으시고 아이를 달라하는데 어머니가 품에 않으시고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하셨답니다. “하나님, 하나님이 계시다며 내 아들을 살려주세요.” 그렇기 기도하시고 홍역으로 열꽃이 피고 짓무르고 고름이 흐르는 그의 얼굴을 혀로 다 핥아주셨다고 합니다. 그렇데 이게 무슨 일입니까? 그렇게 어머니가 그를 혀로 핥아 주신 후에 그는 기적같이 살아났다고 합니다. 그는 어머니의 사랑이 그를 살리셨다고 고백했습니다.  아마도 귀신들린 딸아이를 고쳐달라고 예수님께 나아온 수로보니게 여인의 마음도 그와 같았을 것입니다. 이토록 절박한 어머니의 기도를 외면하는 일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여인의 간절히 기도에도 불구하고 매우 충격적인 말씀을 하셨습니다.

8:27절을 봅시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지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예수님은 수로보니게 여인이 간청을 거절하셨습니다. 그것도 그냥 거절하신 것이 아니라 그녀의 입장에서는 개무시를 당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만큼 심한 말로 거절하셨습니다. 그토록 사랑이 많으신 예수님께서 왜 이렇게 하셨을까? 예수님도 어쩔 수 없는 유대인이셨을까요? 잘 이해가 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로 예수님의 선교원칙 때문입니다. 그것은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둘째는 헬라인에게라는 선교원칙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전도여행 보내시면서 이 원칙을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이 열둘을 내보내시며 명하여 이르시되 이방인의 길로도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말고 6.오히려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마10:5,6) 예수님이 세우신 원칙을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깨뜨리기 어려운 입장이 있을 실 수 있습니다.
둘째로 그녀의 믿음을 들어내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은 이미 그녀가 얼마나 훌륭한 믿음을 갖고 있는지 아셨습니다. 그러나 그녀의 귀신들린 딸을 그냥 고쳐주면 그녀의 믿음이 들어나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은 그녀의 믿음을 들어내기 위해 시험하신 것입니다. 시험을 보는 목적은 공부를 하게 하려는 것도 있지만 얼마나 공부가 잘 되었는지 들어내려는데 그 목적이 있습니다. 이 여인의 경우는 그녀의 믿음을 들어내려는데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시험하실 때 하나의 원칙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감당할만한 시험을 하신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전 10:13) 예수님도 이 원칙을 지키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이 원칙을 지키셨다는 것을 그가 사용한 개라는 표현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사용하신 개라는 표현은 더럽고 혐오스러운 이미지의 야생들개 즉 ‘똥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집에서 사랑을 받는 애완견을 의미합니다. 요즘에는 애완경의 권리가 상승해서 가족과 같은 존재라는 의미로 반려견이라고 불리웁니다. 유대인들은 개를 더럽고 탐욕스러운 동물로 여겼지만 헬라문화권에서는 집에서 같이 지내는 반려견의 문화를 갖고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자녀나 개나 사랑을 받는 존재이나 자녀가 우선이라는 것은 문화적으로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면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인데 그것이 애완견일지라도 개 취급 받는 일은 결코 유쾌한 일은 아닐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그녀에게 큰 상처가 될 수도 있는 충격적인 말씀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그녀의 대답이 무엇입니까?

8:28절을 봅시다. “여자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상 아래 개들도 아이들이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그녀는 먼저 ‘주여 옳소이다’라고 고백합니다. 무엇이 옳다는 것입니까? 주인이 자녀를 우선시 하는 것은 주인의 권리임을 인정한 것입니다. 그 권리가 잘못되었다고 아무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음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상아래 있는 개들도 아이들이 먹다 버리는 부르러기를 먹습니다. 그녀는 이를 통해 예수님의 말씀이 그의 기도를 거절한 것이 아님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녀에게도 부스러기기를 받아먹을 권리가 있음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때 그녀는 예수님께 더욱 자신을 낮추어 자녀의 떡이 아니라 부스러기를 달라고 요청한 것입니다. 상처받을 수도 있는 말에 그녀는 매우 지혜로운 말을 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여인의 말을 듣고 크게 감동하셨습니다.

8:29,30절을 봅시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 말을 하였으니 돌아가라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느니라 하시매 여자가 집에 돌아가 본즉 아이가 침상에 누웠고 귀신이 나갔더라” 예수님은 여인에게 ‘이 말을 하였으니’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예수님은 그녀의 딸을 고치신 이유가 그녀의 말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녀의 말에는 예수님을 주님으로 인정하는 마음, 딸 아이를 사랑하는 마음, 예수님의 말씀의 행간을 일어내는 통찰의 마음이 모두 들어 있었습니다. 그 마음을 보고 감동하신 예수님은 조용히 있다 가시려고 했던 두로에서 귀신들린 딸아이를 고치는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여인의 말을 통해 믿음의 말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배울 수 있습니다. 이 여인이 예수님의 말씀을 오해해서 나를 개취급하다니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느냐고 대들고 반발했다면 그녀는 딸을 고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녀가 믿음의 말로 예수님의 마음을 감동케 했을 때 예수님은 예정에도 없었던 기적을 행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결코 정해진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을 축복하시며 믿음이 있는 곳이라면 하나님은 어디든 기적을 행하십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평소 믿음의 생각을 하고 믿음을 말을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믿음의 생각과 믿음의 말이 어느 날 갑자기 생기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평소에 우리가 말씀을 묵상하고 암송하고 꾸준히 기도할 때 수로보니게 여인처럼 결정적일 때 믿음의 말을 하고 믿음의 고백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31-37절을 봅시다. 예수님은 두로지방을 나와 시돈을 지나 데가볼리 지방을 통과하여 갈릴리 호수에 이르셨습니다. 그는 이방 땅을 떠나 다시금 고향 갈릴리로 오셨습니다. 그곳에서 사람들이 귀 먹고 말 더듬는 사람 하나를 데리고 왔습니다. 그런데 그를 고쳐 주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기이합니다. 예수님은 그 사람을 따로 데리고 무리를 떠나서 손가락을 그의 귀에 넣고 침을 뱉어 그의 혀에 손을 대시며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시며 ‘에바다’라고 외치셨습니다. ‘에바다’는 아람어로 ‘열리라’는 뜻입니다. 말씀 한마디로 이 사람을 고치실 수도 있는 예수님께서 왜 이렇게 하신 것일까요? 그 이유는 이 사람이 귀가 먹어 예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는 것이고 그 다음에는 이 사람과 같이 영적으로 귀 먹고 말 더듬는 유대인들을 보실 때 탄식하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했던 이방인들이 말씀을 듣게 되고 그들이 믿음을 고백할 날을 바라보시며 ‘열리라’라고 하신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해 수로보니게 여인의 믿음의 말을 들고 예수님이 귀신들린 딸 아이를 고치셨음을 배웠습니다. 예수님은 믿음의 말을 들으실 때 기뻐하십니다. 믿음의 말을 들을 때 놀라운 일을 행하십니다. 예수님은 진실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며 믿음의 말을 할 수 있기를 간절히 원하고 계십니다. 이를 위해선 우리가 세상의 이야기로 가득한 스마트폰을 동영상이나 웹툰만을 볼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과 생각에 둘 수 있도록 암송해야 합니다. 우리 JBF 친구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믿음의 고백을 할 수 있는 이 시대의 믿음의 용사들의 될 수 있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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