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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강. 벧전4:13 그리스도의 고난을 즐거워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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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곽누가
댓글 0건 조회 31회 작성일 15-06-07 11:16

본문

JBF 특강
그리스도의 고난을 즐거워하라
말씀/베드로전서 4:13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본문말씀이 전해졌던 주후 64년경, 로마 황제 네로는 기독교인들에게 극심한 박해를 가했습니다. 신앙의 순결을 지킨 신자들은 가족과 집과 고향을 잃고 사방으로 흩어진 나그네들이 되었습니다. 붙잡힌 신자들은 불에 태워지거나, 넓은 경기장에서 맹수들에게 찢겨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당시 로마에서 복음을 전하고 있던 사도 베드로에게도 순교의 죽음이 눈앞에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이런 가운데서 베드로는 편지를 써서 흩어진 성도들을 격려했습니다. 1장에서 베드로는 예수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 나라 산소망이 얼마나 놀라운 것인가 말씀합니다. 2장에서는 이 땅에서는 쫓겨 다니며 보잘 것 없어 보이는 그들의 진짜 신분이 하나님의 택하신 족속이요 왕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임을 일깨워줍니다. 그리고 오늘 말씀에서는 큰 고난 가운데서도 왜 즐거워하고 기뻐할 수 있는가 가르쳐 줍니다. 오늘날 우리에게는 많은 고난이 있습니다. 신자나 불신자나 할 것 없이 우리에게는 다양한 모양의 고난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 고난들을 피하고 싶지만 살아있는 동안에는 이 고난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에서 베드로는 극심한 고난 가운데 있는 성도들에게 고난을 이기는 놀라운 비밀을 가르쳐 줍니다. 말씀을 통해 고난을 이길 뿐만 아니라 즐거워하는 믿음의 비밀을 가진 자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I. 그리스도의 고난
 
  13a절을 다시 읽어 봅시다.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여기서 “그리스도의 고난”이란 말 그대로 ‘그리스도께서 당하신 고난’, 혹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고난’을 말합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는 어떤 고난을 당하셨습니까? 

  첫째로, 자기 비움과 낮아짐입니다. 예수님은 누구이십니까? 예수님 오시기 수백년전 하나님은 선지자들을 통해 오실 예수님이 누구신지 예언하셨습니다.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영원에 있느니라"(미5:2)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사9:6) 세례요한도 요1:30에서 예수님을 소개하기를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는 사람이 있는데 나보다 앞선 것은 그가 나보다 먼저 계심이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 하였습니다. 요한복음에서도 사도 요한은 예수님을 태초부터 계신 말씀 하나님으로 증거합니다. 그런데 이 창조주 하나님이 어떻게 낮아지셨습니까? 요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빌2:6-8에서는 이렇게 증거합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전능하신 창조주, 성자 하나님께서 자기를 비우고 낮추시되 인간이 되셨고, 죄인들의 종이 되셨습니다. 선지자 이사야도 오래 전에 그리스도의 오심을 예언했는데, 그가 영광을 받으러 오시는 것이 아니라, 고난을 받으러 세상에 오신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사야는 53:3-5절에서 그리스도의 고난을 12가지로 묘사했습니다. 그것들은 멸시, 버림받음, 간고, 질고, 슬픔, 아픔, 고난, 찔림, 상함, 징계, 채찍질, 죽임 당함입니다. 예수님의 낮아지심과 고난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예수님은 그 본체가 하나님이신데, 우리에게 평화를 주시고 나음을 주시기 위해서, 우리의 죄를 담당하시기 위해서 지극히 낮아지셨고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사람들은 무시받는 것을 잘 참지 못합니다. 우리도 살면서 때때로 무시를 받을 때가 있습니다. 그것이 큰 상처가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를 위해 친히 낮아져 오셨고 멸시, 천대를 당하신 예수님을 기억할 때, 우리가 받는 멸시나 고난들은 아무 것도 아님을 깨닫습니다. 우리에게 여러 모양의 고난이 있을 때 눈을 들어 예수님을 바라보십시오. 이 때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내면의 상처가 치유되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둘째로, 예수님은 영적으로 눈 먼 우리 죄인들에게 생명의 말씀을 가르치시느라 많은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사마리아의 목마른 한 여인에게 영생수를 가르치시려고 중동의 뙤약볕 아래를 걸어서 먼 길을 가셨습니다. 교만하여 말씀을 안 받아들이는 니고데모를 품고 밤새도록 거듭남의 진리를 가르치셨습니다. 오라버니 나사로가 죽어 깊은 슬픔에 빠진 마리아와 마르다 자매에게 부활의 복음을 가르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언제 어디서나, 평생, 심지어는 십자가 죽음이 임박한 상황에서도 사람들에게 성경을 가르치셨습니다. 오늘날 영적으로 둔하고 자기세계에 갇혀 사는 청년들에게 성경을 가르치는 것은 많은 인내와 고난이 따릅니다. 그러나 성경 가르침이 없이는 구원과 영생의 열매가 맺힐 수 없습니다.

  셋째로, 예수님은 세상 만민을 가슴에 품고 새벽 마다 홀로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하시느라, 그리고 틈만 나면 중보 기도를 하시느라 많은 고난을 감당하셨습니다. 막1:34,35 "예수께서 각종 병이 든 많은 사람을 고치시며 많은 귀신을 내쫓으시되 귀신이 자기를 알므로 그 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시니라 새벽 아직도 밝기 전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 완악한 죄인들의 구원을 위해서, 나라와 민족과 세계만민의 구원을 위해서,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위해서 마음을 드려 기도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기도하는 것이 고난임을 깨닫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동시에 큰 특권이요 축복이기도 합니다.

  넷째로, 예수님은 12제자를 해산하시느라 많은 고난을 감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을 키우기 위해서 3년 동안 동거동락하셨습니다. 문제 많고 좀처럼 변화되지 않는 이들과 모든 시간을 함께 하시면서 그들을 용납하셨고 그들이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이 되기까지 섬기셨습니다. 예수님 십자가 지시기 며칠 전에 제자들의 모습이 어떠했습니까? 최후의 만찬 때의 일입니다. 이 때 예수님께서 낮아지셔서 제자들의 냄새나는 발을 씻기셨습니다. 본래 발을 씻기는 것은 종들 처럼 낮은 사람들이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자들 중 아무도 이 일을 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자주 자기가 더 크다고 주장하며 다투었습니다. 먼저 낮아져 섬기고자 하지 않았습니다. 낮아져 섬기면 지는 것이라 생각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때 예수님께서 일어나 친히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셨습니다. 이는 정말 충격적인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이런 헌신적인 섬김이 그들을 변화시켰고 위대한 사도가 되게 하셨습니다.

  다섯째로, 예수님은 가난한 자, 병든 자, 연약한 자들을 실제적으로 돌보시느라 많은 고난을 감당하셨습니다.  막3장을 보면 안식일에 회당에 한 손 마른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고소하고자 기회를 찾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모든 것을 아셨지만 공개적으로 그 사람을 치료하셨고 이 일로 인해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죽이고자 계략을 꾸미기 시작하였습니다. 마태는 우리의 연약함과 질병을 감당하시는 예수님에 대해 이렇게 증언합니다. 마8:16-17 "저물매 사람들이 귀신 들린 자를 많이 데리고 예수께 오거늘 예수께서 말씀으로 귀신들을 쫓아 내시고 병든 자들을 다 고치시니
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에 우리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

  무엇보다도, 그리스도의 고난의 핵심이자 절정은 십자가의 대속적 죽음이었습니다. 십자가 처형은 역사상 가장 고통스럽고 수치스런 처형방법이었습니다. 발가벗겨진 채 채찍질을 당하여 살이 찢기고 온 몸에서 피를 흘리신 예수님은 산 채로 십자가에 못 박혀 기절과 깨어남을 천 번 이상 반복하며 말로 할 수 없는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그리고 죽으셨습니다. 죽으시고 무덤에 갇혀있는 동안만큼은 아버지 하나님에게까지 버림을 받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거룩하신 예수님께서 왜 이런 수치와 모욕과 고통과 고난을 당하셨습니까? 바로 저와 여러분들의 교만과 이기심과 정욕과 온갖 더러운 죄악들을 대속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의 고난은 우리 죄인들에게 죄 사함과 영생과 하나님의 나라를 준 고난입니다. 참된 위로와 평화를 준 고난이요, 세상 죄를 대속하신 고난입니다. 이 땅에 오실 때부터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우리를 위해 고난 받으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찬양합니다.

II.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13a절을 다시 봅시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믿는다는 이유로 극심한 고난을 당하고 있는 성도들에게 권면합니다.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 말씀은 예수님의 산상수훈을 생각나게 합니다. 마5:11-12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고난을 당하는 것이 복이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왜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고 명합니까? 13b절을 읽어봅시다.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사망권세를 파하시고 부활하사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신 예수님은 최후의 심판장으로 다시 오십니다. 그날에 예수님은 만물을 회복하시고 영원토록 통치하십니다. 그 날에 신자나 불신자나 한 사람도 예외 없이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서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 날에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나라의 영생복락에 들어가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고 고난을 허락하십니다. 표준새번역은 기뻐 뛰면서 즐거워하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 기쁨은 세상에서 맛보는 기쁨과는 본질이 다릅니다. 벧전 1:8절에, “말할 수 없는(설명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는 기쁨”이라고 했습니다. 그날에 우리는 예수님과 같은 부활의 몸을 입고 사랑하는 예수님을 얼굴과 얼굴로 보게 됩니다. 별과 같이 영원히 빛나게 됩니다(단 12:3). 그 날에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위해서 고난 받은 자들에게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주십니다(벧전 1:7b).
  그러면 우리가 구체적으로 그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일차적으로 예수님의 발자취를 좇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낮아져 오신 예수님을 배워 섬기는 삶을 살고 또 기도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배워 용서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성경은 또 일상적인 우리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 이렇게 말씀합니다.  골3:23-24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 이는 기업의 상을 주께 받을 줄 아나니 너희는 주 그리스도를 섬기느니라" 고전 10:31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우리가 무엇을 하든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을 의식하고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한다면 그 삶이 어떨까요?  다른 사람이 박수를 쳐 줄까요? 아닙니다. 부정을 저지르는 많은 사람들의 핍박을 받게 됩니다. 오늘날 우리나라에 왜 이렇게 안전사고가 많을까요?  작년의 세월호 사건 이면에는 많은 부정부패가 숨겨져 있습니다. 부정부패가 가득한 사회에서 하나님을 의식하며 정직한 삶을 사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지금 우리나라를 휩쓸고 있는 메르스의 초기 방역의 실패는 무엇이 원인일까요? 무사안일주의가 그 원인이지 않을까요?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초기부터 과하다 싶을 정도로 철저하게 격리를 하였다면 지금처럼 상황이 어렵게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 혼자 이렇게 하고자 할 때 자신이 속한 공동체로 부터 핍박과 고난이 있습니다. 또 자신의 몸도 힘이 듭니다. JBF 학생들이 학업을 감당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를 부인하며 공부하는 것은 고난입니다. 게임도 하고 영화도 보고 쉬엄쉬엄 공부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또 인류에 작은 것 하나라도 기여하고 사람들을 섬기기 위해서, 자기를 부인하며 공부를 한다면 이것 역시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무엇을 하느냐 보다 무엇을 위해서 하느냐가 더 중요합니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우리 JBF 학생들이 무엇을 하든지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므로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삶을 살기를 기도합니다. 또한 주님의 발자취를 따르므로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삶을 살기를 기도합니다. 주님 주실 놀라운 영광을 바라보며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는 한 사람 한 사람이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 이사무엘 선교사님 간증 >
4년 전에 제가 한국대표직을 위임하고 제 나이 68세, 안나 선교사 63세에 예수님의 선교명령에 순종하여 아프리카로 떠나는 것이 쉽지는 않았습니다. 가장 어려웠던 것은 당시 5살 4살 2살 1살로 할아버지 할머니의 돌봄이 필요한 네 명의 손녀 손자들을 두고 떠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을 성령님께 맡기고 오직 믿음으로 순종할 수 있었습니다. 이때 성령님께서는 앞서서 일하셨습니다. 아무런 꼬투리가 없던 저로 하여금 짐바브웨 국립 대학교에 한국어 과정을 개설하게 하시고, 교수 선교사로서 가르치며 목양하게 하셨습니다. 한국을 떠나기 며칠 전 어느 밤 저는 잠을 이루지 못하고 새벽까지 뒤척이다가 일어나 기도를 하면서 몇 가지 결심을 하게 됐습니다. 그 중 하나가 짐바브웨에 가면 지난 40년 동안 한결 같이 나를 섬겨준 안나 선교사를 위해서 아침식사를 준비하고 모든 설거지를 해주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도착 첫 날부터 지난 4년 동안 이를 실천해왔습니다. 새벽 4-5시에 일어나면, 저는 조용히 거실로 나와 양식을 먹고 기도를 한 후, 운동을 하고, 아침을 준비합니다. 7시 반쯤 됩니다. 저는 “공주님 아침식사가 준비됐습니다. 나오세요!”라고 말하지는 못하고, “아침 먹읍시다!” 라고 하면, 안나 선교사는 그때까지 안방에서 양식 먹고, 기도하며, 개인시간을 충분히 갖다가, “예!”하며 거실로 나옵니다. 영광의 영께서 날마다 우리 마음에 찬송과 감사를 넘치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짐바브웨의 수도 하라레는 해발 1,800미터의 고지대입니다. 산소가 부족하니 심장이 더 열심히 일해야 하므로 심장에 무리가 가고, 나이든 우리로서는 넉 달을 살고나면 심한 두통과 온 몸에 힘이 빠지는 고지대 증상이 나타납니다. 거의 매일 몇 시간씩 전기가 나가고, 자주 수도가 끊깁니다. 밤이면 강도들 때문에 경보보안장치를 켜고 자야만 합니다. 대부분이 시골출신인 학생들은 너무나 가난하고, 평균수명이 38세니 우리가 양육하고 있는 양들 중에도 고아들이 많습니다. 학비가 없어 등록을 못하고, 생활비가 없어 굶는 날이 많은 이들을 실제적으로 도우면서 말씀을 심어야 합니다. 노년에 영어로 살아야 하는 것도 고난입니다. 산업화가 되지 않아 졸업을 해도 일자리를 찾기 힘드니 장래와 인생에 희망을 갖지 못하고, 의존심의 뿌리가 깊고, 씨족사회에서 형성된 가족중심의 가치관이 철벽과 같은 이들에게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라고 가르치는 것, 제사장 나라 거룩한 백성의 정체성을 심는 것은 큰 고난입니다. 70대인 제가 19,20살 먹은 아프리카 청년들의 문화와 내면세계를 이해하고 사랑하며 인내하는 것 자체가 고난입니다. 이들을 향한 하나님의 소망과 사랑을 덧입기 위해 저의 본성을 죽이며 주님께 매어 달리는 기도의 투쟁도 고난입니다. 한참 자라고 있는 손녀 손자들이 눈에 밟히는 것을 부인하는 것도 큰 고난입니다. 돌이켜보면 지난 4년 동안 이런 고난들을 인내로 감당할 때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날들은 성육신하신 예수님을 바라봄으로 이런 고난들을 즐길 수 있었습니다. 저를 보는 분마다 제가 더 젊어졌다고 합니다. 그런데 마음으로 즐길 수 없는 한 가지 고난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죽음의 고난입니다. 재작년에 중부 아프리카 가나에서 열린 현지인 선교지도자 수련회에 참석한 일이 있었는데, 날씨는 무덥고, 음식은 맞지 않았습니다. 둘째 날 새벽에 안나 선교사가 갑자기 심한 어지럼증으로 식은땀을 흘리며, 구토와 설사를 반복하고, 점점 힘이 빠지고 거의 정신을 잃었습니다. 그곳은 외딴 곳이고, 병원도 의사도 없었습니다. 이렇게 죽을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났지만 이후로는 죽음이 현실로 느껴졌습니다. 나이가 많고 혈압과 당뇨가 있고, 심장이 약한 안나 선교사를 생각할 때, 갑자기 혈관이 막힌다든지 터진다든지 하면 짐바브웨에서는 꼼짝없이 하나님 나라에 가야합니다. 죽으면 천국입성이요 출세라고 가르쳐왔으나, 그 죽음이 나의 현실로 다가오니 마음을 짓눌렀습니다. 한 날 한 시에 함께 하나님의 부름을 받는다고 해도 아직은 떠날 마음이 조금밖에 없는데, 안나 선교사가 없는 세상은 상상하고 싶지도 않았습니다. 이런 저에게 주님께서는 벧전 4:13절을 올해의 요절로 새롭게 주시면서 저의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에 대한 믿음 없음을 책망하셨습니다. 이생에 갇혀 살고 있는 죄를 회개하게 하셨습니다. 저는 이후로 그리스도의 영광을 많이 묵상합니다. 그리할 때 주님은 저의 심령에 영혼의 안식과 참 만족과 넘치는 행복감을 주십니다. ‘그리스도의 영광’은 우리의 영원한 복락의 마르지 않는 샘 근원입니다.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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