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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요한복음 제 2강 와서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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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웨슬레조
댓글 0건 조회 44회 작성일 15-05-31 1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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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요한복음 제 2 강 
말씀 | 요한복음 1:29-51
요절 | 요한복음 1:39
 
와서 보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와서 보라 그러므로 그들이 가서 계신 데를 보고 그 날 함께 거하니 때가 열 시쯤 되었더라.”

  오늘 말씀은 예수님께서 첫 제자들을 부르시는 내용입니다. 성육신 하신 예수님은 전도를 하심으로 구원역사를 시작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사람들을 구원하기를 기뻐하십니다. “와서 보라.” 예수님의 전도는 매우 단순했습니다. 그러자 제자들도 같은 방식으로 친구들에게 “와 보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말을 잘 해야 사람을 예수님께로 인도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주님을 만난 체험만 있으면 누구나 전도할 수 있습니다.

  첫째,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29-34). 29절을 보십시오.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이르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구약에서는 사람이 어린 양을 지고 가서 제사를 지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하나님이 지고 오신 하나님의 어린 양이십니다. 그는 하나님이 준비하신 희생양입니다. 예수님은 세상 죄를 지고 가십니다. 이 세상을 이렇게 망가뜨린 그 죄가 단수로 되어 있습니다. 그 죄가 무엇일까요? 반역의 죄입니다. 아담의 죄는 선악을 알고자 하고 하나님 같이 되고자 한 것입니다. 선악을 아는 일에서 하나님을 배제하려는 죄입니다. 하나님 없이 살고자 하는 죄, 곧 자신이 하나님이 되고자 한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용서의 기도를 하신 죄는 아들을 못 박는 죄, 곧 반역의 죄입니다. 죄는 하나입니다. 근본적으로 거스르는 죄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제물을 바치면서도 반역을 했습니다. 우리도 하나님께 많은 은혜를 받았지만 그를 경외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며 자기 생각대로 살았습니다. 반역하는 것을 멋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아들 이삭을 낳고 축복 가운데 지내다가 하나님께로부터 놀라운 명령을 듣습니다.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 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창22:2).”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순종하기 위해서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 종과 그의 아들 이삭과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 가지고 길을 떠납니다. 길을 가다가 이삭이 묻습니다.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 그러자 아브라함은 “내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신 어린 양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죄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에 있어서 홍수 심판처럼 쓸어버리시거나, 자기 백성을 뽑아서 이방 나라에 던져 버리는 방법을 쓰실 수도 있는데 하나님은 성육신하셔서 친히 짊어지고 가십니다. 스스로 우리 죄를 대신 ‘지고’ 가심으로써 우리에게 속죄와 대속의 은혜가 주어졌습니다. 창조주가 속죄양이 되셨습니다. 

  요한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어린 양이란 사실을 어떻게 알았습니까? 그는 자기 뒤에 오는 사람이 있는데 자기보다 앞선 것은 그가 자기보다 먼저 계심이라 한 것이 예수님을 가리킨다고 고백했습니다. 요한이 또 증언합니다. 그가 예수님께 물 세례를 베풀었을 때에 성령이 비둘기 같이 하늘로부터 내려와서 그의 위에 머무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에게 물로 세례를 베풀라 하신 하나님께서 그에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성령이 내려서 누구 위에든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는 이인 줄 알라 하셨기에 내가 보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언하였노라 하니라(33,34).” 요한은 이 광경을 보고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알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십니다. 성령 세례는 예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성령 세례는 요한의 물세례의 한계를 극복하고 죄를 태워버리십니다. 죄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십니다.

  둘째, 와서 보라(35-51). 또 이튿날 요한이 자기 제자 중 두 사람과 함께 섰다가 예수님께서 거니심을 보고 말했습니다.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두 제자는 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예수님께서 돌이켜 그 따르는 것을 보시고 물으셨습니다. “무엇을 구하느냐?”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르는 동기가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그에게서 무엇을 얻기를 바라느냐는 것입니다. 너희가 찾고 있는 것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에게서 무엇을 바라고 따르십니까? 제자들은 선문답을 하듯이 대답합니다. “랍비여 어디 계시오니이까?” 이는 예수님의 주소를 묻는 말이 아니라 예수님과 함께 생활하면서 당신의 제자가 되겠다는 요청입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와서 보라고 초청하셨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생활하면서 그의 인격과 사상을 배우라는 것입니다.

  40,41절을 보십시오. “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를 따르는 두 사람 중의 하나는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라 그가 먼저 자기의 형제 시몬을 찾아 말하되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 하고 (메시야는 번역하면 그리스도라).” 안드레는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시몬에게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고 증거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시몬을 보시고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 하시니라 (게바는 번역하면 베드로라)(42).” 게바는 반석이라는 뜻인데 베드로는 초대 교회를 이끈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세례 요한으로부터 두 제자를 받았을 뿐만 아니라 직접 전도하십니다. 43,44절을 보십시오. “이튿날 예수께서 갈릴리로 나가려 하시다가 빌립을 만나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빌립은 안드레와 베드로와 한 동네 벳새다 사람이라.” 예수님은 빌립을 만나 나를 따르라 하시자 그가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은 끌어당기는 힘이 있었습니다. 빌립은 매우 명석한 사람인데 예수님이 성경에서 약속하신 분이라는 것을 금방 깨달았습니다. 그 깨달음이 놀랍고 감격적이었기 때문에 친구 나다나엘에게 찾아와서 이렇게 증거한 것입니다.

  그러자 나다나엘의 반응이 어떠했습니까?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나다나엘은 매우 경건하고 순수한 정통 유대인이었습니다. 빌립은 명석한 사람이지만 친구 나다나엘과 논쟁하지 않았습니다. 그도 할 말이 많이 있었지만 단순하게 초청했습니다. “와서 보라!” 얼마나 확신이 넘치는 초청입니까? 와서 보라. 네가 와서 체험해 보라는 말입니다. 와서 보면 너도 알게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나다나엘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시고 그를 이미 아셨습니다. “보라 이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47).” 이 말을 듣고 나다나엘이 여쭈었습니다.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에 보았노라(48).” 나다나엘은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하나님을 찾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가 하나님을 찾는 것을 주님은 보셨고 그의 고민을 아셨습니다. 그의 속 마음을 아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그를 찾기 전에 우리를 보시고 아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을 찾고 찾는 사람은 반드시 만나게 됩니다. 진리를 사모하는 사람들은 진리 되신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우리가 전하는 하나님의 어린 양 예수님을 통해서 이 세상의 죄인들이 구원을 받고 새 피조물로 태어나서 새로운 인생을 사는 것을 보는 것이야 말로 기쁘고 보람된 일입니다. 주님께서 우리 가운데 와서 보라는 초청의 역사를 이루도록 은혜를 부어 주시고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을 만나는 역사가 왕성하게 일어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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