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명기11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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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신명기 11강
말씀 | 신명기 22:9-24:4
요절 | 신명기 23:14
네 진영을 거룩히 하라
“이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구원하시고 적군을 네게 넘기시려고 네 진영 중에 행하심이라 그러므로 네 진영을 거룩히 하라 그리하면 네게서 불결한 것을 보시지 않으므로 너를 떠나지 아니하시리라.”
오늘 말씀은 간음하지 말라는 7계명을 적용한 본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은 소돔과 고모라 같이 참으로 음란한 시대가 되었습니다.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더 나은 세상이 되어야 할 것 같은데, 도리어 음란물이 넘쳐나는 악한 시대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음란한 세상 속에서 순결하고 거룩한 백성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말씀을 통해 거룩한 백성이 되고자 결단하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섞어 하지 말라(22:9-12). 9절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포도원에 두 종자를 섞어 뿌리지 말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왜 같은 밭에서 서로 다른 농산물을 재배하는 것을 금하시는 것일까요? 서로 다른 품종을 함께 재배하면 서로 다른 시기에 추수를 할 수 있고, 수확량이 많아져 더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런 행위를 금하고 있습니다. 오늘날은 퓨전, 융합이 대세입니다. 자장면과 짬뽕을 섞은 짬짜면, 짜파게티와 너구리 라면을 섞은 짜파구리 등이 유행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렇게 입맛에 따라 유행에 따라 이렇게 섞고 저렇게 섞다 보면 결국은 본래의 순수한 맛을 잃어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택한 백성이 불순물이 섞이지 않은 순결한 백성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10절을 보십시오. 또 소와 나귀를 겨리하여 밭을 갈지 말라고 하십니다. 나귀와 소는 크기도 다르고 힘도 다릅니다. 그런데 이 둘을 한 멍에에 매어 쟁기질을 시킨다면 힘이 약한 짐승은 쉽게 지치고 다칠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 율법은 힘이 약하고 작은 짐승의 안전을 배려한 인도적 차원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또 직물을 짤 때 양 털과 베 실로 섞어 짠 것을 입지 말라고 합니다. 양 털은 짐승에게서 얻는 것이고 무명실은 나무에서 얻는 것입니다. 두 가지를 섞어서 옷감을 만들면 더 튼튼해진다고 합니다. 그런데 율법은 이런 옷감으로 만든 옷을 입지 말라고 합니다. 요세푸스는 이 율법이 제사장들이 사역할 때 이런 옷감으로 만든 옷을 입었기 때문이라고 풀이했습니다. 즉 이런 옷감으로 만든 옷은 안수를 할 때 사용하는 기름과 성소에서 사용하는 향처럼 거룩한 것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에 일반인들은 입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12절을 보십시오. “너희는 너희가 입는 겉옷의 네 귀에 술을 만들지니라.” 겉옷의 네 귀에 다는 술은 양털로 만들고 나머지는 무명실인데 이런 예외를 허용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또 옷자락 끝에 다는 술은 청색으로 되어 있습니다. 청색은 희귀한 물감이기에 값이 비싸고 귀한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술을 볼 때마다 자신의 신분이 하나님의 백성임을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이는 그들로 죄를 멀리하고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도록 인도하였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성도의 표시인 예수 그리스도의 옷을 입어야 합니다. 롬13:12-14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며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우리가 다만 예수 그리스도로 옷입고 육신의 정욕을 버리고 구별되고 거룩한 삶을 살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둘째, 순결한 결혼과 성생활(22:13-29). 이 부분에서는 성범죄에 대한 여러 가지 규례를 다루고 있습니다. 먼저 아내를 맞이한 후에 미워하여 비방거리를 만들어 동침했을 때 처녀임을 보지 못했다고 할 경우입니다. 누명을 씌운 것이라면 처녀의 부모가 자리옷을 가지고 성읍 장로들에게 가서 보여줌으로 누명을 벗으라고 합니다. 남편이 아내를 미워하여 이혼하려면 가만히 보내면 되지 왜 이런 비방거리를 찾았을까요? 돈이 문제입니다. 당시에 신부의 몸값으로 돈을 지불하고 결혼을 했습니다. 만약 이혼을 할 경우 신부의 몸값의 일부 또는 전부를 받고자 이런 소송을 했던 것입니다. 만약 누명을 씌운 것이 밝혀지면 그 사람을 잡아 때리고 은 백 세겔을 벌금으로 여자 아버지에게 주고 평생 버릴 수 없는 아내가 되게 해야 합니다. 은 백 세겔은 노예 몸값의 세 배 이상이었습니다. 만약 처녀의 표적이 없다면 여자를 끌어내어 돌로 쳐 죽여야 합니다. 창기의 행동을 하여 이스라엘 중에 악을 행했기 때문에 이렇게 하여 그들 가운데 악을 제거해야 합니다.
22절에서는 남자가 유부녀와 동침한 것이 드러났을 때는 둘 다 죽여 이스라엘 중에서 악을 제거해야 합니다. 약혼한 처녀가 남자와 만나 성읍 중에서 동침했을 때는 둘 다 끌어내어 돌로 쳐 죽여야 합니다. 여자는 성 안에 있었는데 소리를 지르지 않고 간음죄를 지은 것이고 남자는 이웃의 아내를 욕보였기 때문에 둘 다 죽여 악을 제거해야 합니다.
남자가 어떤 약혼한 처녀를 들에서 만나 강간하였을 경우는 남자만 죽입니다. 소리질러도 구원할 자가 없었기에 처녀는 죄가 없습니다. 전적으로 피해자일 뿐입니다.
남자가 약혼하지 아니한 처녀를 붙들고 동침했으면 처녀 아버지에게 은 오십 세겔을 주고 처녀를 아내로 삼아야 합니다. 그가 그 처녀를 욕보였은즉 평생에 그를 버리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간음죄에 대해 무엇이라 말씀하십니까? 마5:27-28 "또 간음하지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사실 모든 죄는 행동 이전에 그 마음에서 부터 시작됩니다. 예수님은 이를 정확하게 지적하십니다. 우리가 마음으로부터 먼저 죄와의 싸움에 승리해야 실제 삶의 현장에서 죄와의 싸움에 승리할 수 있습니다. 반면 마음에서 죄에 넘어지면 구체적인 삶에서 죄에 넘어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이 세상은 너무나 음란합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넘쳐나는 음란물에 중독되어 있습니다. 음란물이 교회 공동체 안에 있는 많은 젊은이들을 병들이고 있고 고귀한 하나님의 형상을 잃게 만들며 그 내면이 짐승과 같이 추하게 만듭니다. 이런 시대에 이 죄문제 앞에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요일 1:9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먼저 우리는 우리의 내면의 모든 더러운 죄악을 하나님께 나아가 자백해야 합니다. 이 때 하나님은 회개하는 우리의 심령에 죄사함과 깨끗함을 주십니다. 그리고 주님 주시는 은혜를 힘입어 이 시대의 음란한 문화와 싸워야 합니다. 마음 중심에서 부터 승리해야 비로서 음란의 죄와의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JBF 학생들이 날마다 죄를 하나님께 고백하며 회개하게 하시고 주님 주시는 은혜와 능력으로 거룩하고 순결한 삶 사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세워 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셋째, 총회 회원 자격(23:1-8). 고환이 상한 자나 음경이 잘린 자는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올 수 없습니다. 사생자는 십 대에 이르기까지도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합니다.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한다’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드리는 공식 집회나 예배에 참여할 수 없다는 의미’ 혹은, ‘이스라엘 공동체나 회합에서 어떠한 직책도 맡을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암몬 사람과 모압 사람은 십대 뿐 아니라 영원히 들어오지 못합니다. 그들은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올 때 길에서 떡과 물로 영접치 않고 발람에게 뇌물을 주어 저주하게 하려 하였기 때문입니다. 에돔 사람은 형제이기에, 애굽 사람은 그 땅에서 이스라엘이 객이 되었었기에 미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비록 이스라엘 백성이 강성해진 후에 압제를 당하기는 했지만 애초에 이스라엘이 스스로 애굽으로 내려갔고 그곳의 보호된 환경 속에서 큰 민족으로 자라날 수 있었기에 사실 은혜를 입은 것입니다. 에돔과 애굽 사람들의 삼 대 후 자손은 여호와 신앙으로 개종한 후에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올 수 있었습니다. 이들이 삼대 째에 이르면 이스라엘 총회 멤버가 될 수 있다는 것은 이스라엘 공동체에 속하는 일이 혈통보다는 믿음에 근거하고 있음을 시사합니다.
넷째, 전쟁 중 청결(23:9-14). 이스라엘은 전쟁을 할 때에 진영을 거룩하게 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 모든 악한 일을 스스로 삼가야 합니다. 구체적으로 몽정함으로 부정하면 진영 밖으로 나가 들어오지 말고 해 질 때에 목욕하고 해 진 후에 진에 들어와야 합니다. 진영 밖에 변소를 마련하고 대변을 본 후 삽으로 땅을 파 덮어야 합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진에 거하시면서 전쟁을 지휘하시기 때문입니다. 14절 말씀을 같이 읽어봅시다. "이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구원하시고 적군을 네게 넘기시려고 네 진영 중에 행하심이라 그러므로 네 진영을 거룩히 하라 그리하면 네게서 불결한 것을 보시지 않으므로 너를 떠나지 아니하시리라"
제2차 세계대전 중 영국군이 사막의 여우라 불리는 독일의 롬멜의 기갑부대에 의해 이집트 카이로 근처까지 밀려나게 되었습니다. 계속되는 패배로 전의를 상실한 영국군은 매우 절망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때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 나타난 한 사람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몽고메리 장군입니다. 그가 부임하고 처음으로 한 일은 독일군을 이길 수 있는 혹독한 훈련을 시키거나 엄청난 물자를 이송시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장병들의 군복을 손가락이 베일 정도로 칼 같이 다림질하게 하고 두발과 전투화 손질을 깔끔하게 하며 개인 식기가 번쩍번쩍 빛이 나게 닦도록 날마다 잔소리를 했습니다. 사실 치열한 전장에서 군복을 아무리 잘 다려봤자 무슨 소용이 있으며 군화에 얼굴이 비칠 정도로 광이 나게 닦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조금만 지나면 다 쭈글쭈글 해지고 더러워질 뿐입니다. 그러나 몽고메리는 진정한 싸움은 자신을 군인답게 하여 스스로 군기를 엄정하게 세우는 것에서 시작한다고 보았습니다. 결국 엄정하게 군기를 갖추었을 때 영국군은 기나긴 패배의 종지부를 찍고 엘 알라망에서 최후의 승리를 쟁취하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전쟁은 단순한 무기와 병력의 싸움이 아니라 그 진영을 거룩하게 하고 엄정하게 하는 것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사탄과의 영적인 전쟁이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사탄은 우는 사자와 같이 삼킬 자를 두루 찾아 돌아다니고 있습니다.(벤전5:8) 사탄이 하와를 속여서 선악과를 먹게 하여 이 세상에 비극을 가져온 것 처럼 지금도 사탄은 우리를 속이며 멸망의 길로 이끌려고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사탄에 속아 죄를 범하고 멸망의 길로 가고 있습니다. 특히 한국은 OECD 국가 중 자살률이 1위입니다. 그 배후에는 사탄의 속임수가 숨어 있습니다. 죽으면 모든 것이 끝이니 그냥 죽으라고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렇게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한 번 죽는 것은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사탄은 지금도 우리를 속이고 죄를 짓도록 유혹하며 하나님께로 부터 떠나도록 유혹합니다. 그러나 사탄의 유혹에 넘어가 죄를 지으면 어떻게 됩니까? 잠깐 죄의 쾌락이 있지만, 결국에는 죄의 종이 되고 부끄럽고 수치스러운 열매만 맺게 됩니다. 이 사탄과의 전쟁에서 어떻게 승리할 수 있습니까? 이 싸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의 진영을 거룩하게 하고 내면을 깨끗하게 하는 것입니다.
특히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 족속과의 치열한 전투가 곧 시작됩니다. 이들이 이 전투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도움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보시는 것은 우리가 얼마나 잘 싸울 수 있는지 얼마나 전투경험이 많은지 하는 것들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 진영이 얼마나 거룩한지, 우리 내면이 깨끗한지 보고자 하십니다. 그리고 이런 우리와 함께 하사 떠나지 아니하시므로 승리하게 하십니다. 우리가 불결할 때 성령께서 함께 하실 수가 없습니다. 승리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많으나 성결에 힘쓰는 사람은 적습니다. 그러나 승리는 성결에 달려 있습니다.
요셉은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그는 이집트에 노예로 팔려갔기 때문에 자기 몸을 함부로 내팽개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을 의식하며 하나님 앞에서 성결한 삶을 살고자 힘썼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와 함께 하셨고 그가 하는 모든 일에 복을 주시고 형통하게 하셨습니다. 보디발 여사의 유혹을 뿌리침으로 감옥에 갇히는 억울한 일을 당했지만 그것이 지도자의 꿈을 갖고 있던 그에게 총리가 되는 지름길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의식하며 성결한 삶을 살았던 요셉을 하나님은 결국 크게 축복하셨습니다. 우리 JBF 학생들이 요셉과 같이 하나님을 의식하며 성결한 삶을 살기를 기도합니다. 음란한 시대에 음란한 문화와 싸우며 성결한 삶을 살므로 하나님께 귀하게 쓰임 받는 한 사람 한 사람이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15-16절에서는 탈출한 노예를 주인에게 돌려주지 말고 그가 원하는 곳에 거주하게 하고 압제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일반적으로 주인에게 돌려주는 것이 원칙일 것 같은데 성경은 그렇게 하지 말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인권을 대단히 존중하고 있습니다. 노예를 해방시켜 자유롭게 살도록 하는 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입니다. 또 이스라엘 중에는 창녀나 남창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돈이든 양식이든 형제에게 꾸어준 모든 것의 이자를 받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범사에 복을 내려주십니다. 가난한 형제가 생계를 위해 꾸는 것인데 이자를 받고자 할 때 가난한 형제를 더욱 어렵고 힘들게 하는 결과가 됩니다. 근동에서는 돈을 빌렸을 경우 이자가 20-25퍼센트, 곡식을 빌렸을 경우는 33.3-50퍼센트에 달했다고 합니다. 이로 인해 결국 가난한 자들이 땅을 팔고 자신까지 노예로 팔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형제에게는 절대 이자를 받지 말도록 했습니다. 약자 보호 및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의 실천인 것입니다. 서구 기독교 사회는 종교개혁 시대까지 이자를 받고 돈을 빌려 주는 것을 금했습니다. 그러다가 루터와 칼빈 등 종교개혁자들이 돈을 빌려주고 이자를 받는 것을 허락했습니다. 특히 칼빈이 더 적극적이었는데 그의 관점은 서구 사회의 경제발전을 촉진시키는 사상적인 뒷받침이 되었습니다.
21-23절은 하나님께 서원하거든 갚기를 더디 하지 말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반드시 그것을 요구하시리니 더디면 그것이 죄가 될 것입니다. 포도원에 들어갈 때 마음대로 먹어도 되지만 그릇에 담지는 말아야 합니다. 이웃의 곡식밭에 들어갈 때 손으로 이삭을 따도 되지만 낫을 대지는 말아야 합니다. 가난하고 배고픈 자들이 허기를 면할 수 있게 하는 이웃사랑의 표현입니다. 그릇에 담거나 낫을 대는 것은 욕심을 부리는 도적질과 같은 행위입니다. 세월이 지나면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 율법을 들판에서 추수하는 인부들과 과수원 주인을 위하여 일하는 사람에게만 적용했습니다. 아마도 이 규례가 주인에게 입힌 손실이 너무 컸기 때문에 보완된 것으로 생각합니다.
말씀의 결론입니다. 이 시대는 점점 더 소돔과 고모라와 같이 음란하고 악한 시대가 되어 가고 있습니다. 이런 시대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성결입니다. 승리하는 삶의 비결은 성결에 있습니다. 성결의 핵심중 하나는 성적 순결입니다. 성결한 삶은 하나님의 임재를 불러옵니다. 성결한 삶 속에 행복이 있습니다. 우리가 성적인 죄가 만연해 가는 시대와 타협하지 아니하고 음란한 문화의 종이 되지 않고 음란한 문화와 싸우며 하나님 앞에서 성결한 삶을 살기에 힘쓰기를 기도합니다.
말씀 | 신명기 22:9-24:4
요절 | 신명기 23:14
네 진영을 거룩히 하라
“이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구원하시고 적군을 네게 넘기시려고 네 진영 중에 행하심이라 그러므로 네 진영을 거룩히 하라 그리하면 네게서 불결한 것을 보시지 않으므로 너를 떠나지 아니하시리라.”
오늘 말씀은 간음하지 말라는 7계명을 적용한 본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은 소돔과 고모라 같이 참으로 음란한 시대가 되었습니다.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더 나은 세상이 되어야 할 것 같은데, 도리어 음란물이 넘쳐나는 악한 시대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음란한 세상 속에서 순결하고 거룩한 백성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말씀을 통해 거룩한 백성이 되고자 결단하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섞어 하지 말라(22:9-12). 9절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포도원에 두 종자를 섞어 뿌리지 말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왜 같은 밭에서 서로 다른 농산물을 재배하는 것을 금하시는 것일까요? 서로 다른 품종을 함께 재배하면 서로 다른 시기에 추수를 할 수 있고, 수확량이 많아져 더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런 행위를 금하고 있습니다. 오늘날은 퓨전, 융합이 대세입니다. 자장면과 짬뽕을 섞은 짬짜면, 짜파게티와 너구리 라면을 섞은 짜파구리 등이 유행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렇게 입맛에 따라 유행에 따라 이렇게 섞고 저렇게 섞다 보면 결국은 본래의 순수한 맛을 잃어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택한 백성이 불순물이 섞이지 않은 순결한 백성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10절을 보십시오. 또 소와 나귀를 겨리하여 밭을 갈지 말라고 하십니다. 나귀와 소는 크기도 다르고 힘도 다릅니다. 그런데 이 둘을 한 멍에에 매어 쟁기질을 시킨다면 힘이 약한 짐승은 쉽게 지치고 다칠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 율법은 힘이 약하고 작은 짐승의 안전을 배려한 인도적 차원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또 직물을 짤 때 양 털과 베 실로 섞어 짠 것을 입지 말라고 합니다. 양 털은 짐승에게서 얻는 것이고 무명실은 나무에서 얻는 것입니다. 두 가지를 섞어서 옷감을 만들면 더 튼튼해진다고 합니다. 그런데 율법은 이런 옷감으로 만든 옷을 입지 말라고 합니다. 요세푸스는 이 율법이 제사장들이 사역할 때 이런 옷감으로 만든 옷을 입었기 때문이라고 풀이했습니다. 즉 이런 옷감으로 만든 옷은 안수를 할 때 사용하는 기름과 성소에서 사용하는 향처럼 거룩한 것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에 일반인들은 입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12절을 보십시오. “너희는 너희가 입는 겉옷의 네 귀에 술을 만들지니라.” 겉옷의 네 귀에 다는 술은 양털로 만들고 나머지는 무명실인데 이런 예외를 허용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또 옷자락 끝에 다는 술은 청색으로 되어 있습니다. 청색은 희귀한 물감이기에 값이 비싸고 귀한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술을 볼 때마다 자신의 신분이 하나님의 백성임을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이는 그들로 죄를 멀리하고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도록 인도하였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성도의 표시인 예수 그리스도의 옷을 입어야 합니다. 롬13:12-14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며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우리가 다만 예수 그리스도로 옷입고 육신의 정욕을 버리고 구별되고 거룩한 삶을 살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둘째, 순결한 결혼과 성생활(22:13-29). 이 부분에서는 성범죄에 대한 여러 가지 규례를 다루고 있습니다. 먼저 아내를 맞이한 후에 미워하여 비방거리를 만들어 동침했을 때 처녀임을 보지 못했다고 할 경우입니다. 누명을 씌운 것이라면 처녀의 부모가 자리옷을 가지고 성읍 장로들에게 가서 보여줌으로 누명을 벗으라고 합니다. 남편이 아내를 미워하여 이혼하려면 가만히 보내면 되지 왜 이런 비방거리를 찾았을까요? 돈이 문제입니다. 당시에 신부의 몸값으로 돈을 지불하고 결혼을 했습니다. 만약 이혼을 할 경우 신부의 몸값의 일부 또는 전부를 받고자 이런 소송을 했던 것입니다. 만약 누명을 씌운 것이 밝혀지면 그 사람을 잡아 때리고 은 백 세겔을 벌금으로 여자 아버지에게 주고 평생 버릴 수 없는 아내가 되게 해야 합니다. 은 백 세겔은 노예 몸값의 세 배 이상이었습니다. 만약 처녀의 표적이 없다면 여자를 끌어내어 돌로 쳐 죽여야 합니다. 창기의 행동을 하여 이스라엘 중에 악을 행했기 때문에 이렇게 하여 그들 가운데 악을 제거해야 합니다.
22절에서는 남자가 유부녀와 동침한 것이 드러났을 때는 둘 다 죽여 이스라엘 중에서 악을 제거해야 합니다. 약혼한 처녀가 남자와 만나 성읍 중에서 동침했을 때는 둘 다 끌어내어 돌로 쳐 죽여야 합니다. 여자는 성 안에 있었는데 소리를 지르지 않고 간음죄를 지은 것이고 남자는 이웃의 아내를 욕보였기 때문에 둘 다 죽여 악을 제거해야 합니다.
남자가 어떤 약혼한 처녀를 들에서 만나 강간하였을 경우는 남자만 죽입니다. 소리질러도 구원할 자가 없었기에 처녀는 죄가 없습니다. 전적으로 피해자일 뿐입니다.
남자가 약혼하지 아니한 처녀를 붙들고 동침했으면 처녀 아버지에게 은 오십 세겔을 주고 처녀를 아내로 삼아야 합니다. 그가 그 처녀를 욕보였은즉 평생에 그를 버리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간음죄에 대해 무엇이라 말씀하십니까? 마5:27-28 "또 간음하지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사실 모든 죄는 행동 이전에 그 마음에서 부터 시작됩니다. 예수님은 이를 정확하게 지적하십니다. 우리가 마음으로부터 먼저 죄와의 싸움에 승리해야 실제 삶의 현장에서 죄와의 싸움에 승리할 수 있습니다. 반면 마음에서 죄에 넘어지면 구체적인 삶에서 죄에 넘어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이 세상은 너무나 음란합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넘쳐나는 음란물에 중독되어 있습니다. 음란물이 교회 공동체 안에 있는 많은 젊은이들을 병들이고 있고 고귀한 하나님의 형상을 잃게 만들며 그 내면이 짐승과 같이 추하게 만듭니다. 이런 시대에 이 죄문제 앞에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요일 1:9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먼저 우리는 우리의 내면의 모든 더러운 죄악을 하나님께 나아가 자백해야 합니다. 이 때 하나님은 회개하는 우리의 심령에 죄사함과 깨끗함을 주십니다. 그리고 주님 주시는 은혜를 힘입어 이 시대의 음란한 문화와 싸워야 합니다. 마음 중심에서 부터 승리해야 비로서 음란의 죄와의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JBF 학생들이 날마다 죄를 하나님께 고백하며 회개하게 하시고 주님 주시는 은혜와 능력으로 거룩하고 순결한 삶 사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세워 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셋째, 총회 회원 자격(23:1-8). 고환이 상한 자나 음경이 잘린 자는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올 수 없습니다. 사생자는 십 대에 이르기까지도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합니다.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한다’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드리는 공식 집회나 예배에 참여할 수 없다는 의미’ 혹은, ‘이스라엘 공동체나 회합에서 어떠한 직책도 맡을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암몬 사람과 모압 사람은 십대 뿐 아니라 영원히 들어오지 못합니다. 그들은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올 때 길에서 떡과 물로 영접치 않고 발람에게 뇌물을 주어 저주하게 하려 하였기 때문입니다. 에돔 사람은 형제이기에, 애굽 사람은 그 땅에서 이스라엘이 객이 되었었기에 미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비록 이스라엘 백성이 강성해진 후에 압제를 당하기는 했지만 애초에 이스라엘이 스스로 애굽으로 내려갔고 그곳의 보호된 환경 속에서 큰 민족으로 자라날 수 있었기에 사실 은혜를 입은 것입니다. 에돔과 애굽 사람들의 삼 대 후 자손은 여호와 신앙으로 개종한 후에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올 수 있었습니다. 이들이 삼대 째에 이르면 이스라엘 총회 멤버가 될 수 있다는 것은 이스라엘 공동체에 속하는 일이 혈통보다는 믿음에 근거하고 있음을 시사합니다.
넷째, 전쟁 중 청결(23:9-14). 이스라엘은 전쟁을 할 때에 진영을 거룩하게 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 모든 악한 일을 스스로 삼가야 합니다. 구체적으로 몽정함으로 부정하면 진영 밖으로 나가 들어오지 말고 해 질 때에 목욕하고 해 진 후에 진에 들어와야 합니다. 진영 밖에 변소를 마련하고 대변을 본 후 삽으로 땅을 파 덮어야 합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진에 거하시면서 전쟁을 지휘하시기 때문입니다. 14절 말씀을 같이 읽어봅시다. "이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구원하시고 적군을 네게 넘기시려고 네 진영 중에 행하심이라 그러므로 네 진영을 거룩히 하라 그리하면 네게서 불결한 것을 보시지 않으므로 너를 떠나지 아니하시리라"
제2차 세계대전 중 영국군이 사막의 여우라 불리는 독일의 롬멜의 기갑부대에 의해 이집트 카이로 근처까지 밀려나게 되었습니다. 계속되는 패배로 전의를 상실한 영국군은 매우 절망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때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 나타난 한 사람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몽고메리 장군입니다. 그가 부임하고 처음으로 한 일은 독일군을 이길 수 있는 혹독한 훈련을 시키거나 엄청난 물자를 이송시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장병들의 군복을 손가락이 베일 정도로 칼 같이 다림질하게 하고 두발과 전투화 손질을 깔끔하게 하며 개인 식기가 번쩍번쩍 빛이 나게 닦도록 날마다 잔소리를 했습니다. 사실 치열한 전장에서 군복을 아무리 잘 다려봤자 무슨 소용이 있으며 군화에 얼굴이 비칠 정도로 광이 나게 닦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조금만 지나면 다 쭈글쭈글 해지고 더러워질 뿐입니다. 그러나 몽고메리는 진정한 싸움은 자신을 군인답게 하여 스스로 군기를 엄정하게 세우는 것에서 시작한다고 보았습니다. 결국 엄정하게 군기를 갖추었을 때 영국군은 기나긴 패배의 종지부를 찍고 엘 알라망에서 최후의 승리를 쟁취하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전쟁은 단순한 무기와 병력의 싸움이 아니라 그 진영을 거룩하게 하고 엄정하게 하는 것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사탄과의 영적인 전쟁이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사탄은 우는 사자와 같이 삼킬 자를 두루 찾아 돌아다니고 있습니다.(벤전5:8) 사탄이 하와를 속여서 선악과를 먹게 하여 이 세상에 비극을 가져온 것 처럼 지금도 사탄은 우리를 속이며 멸망의 길로 이끌려고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사탄에 속아 죄를 범하고 멸망의 길로 가고 있습니다. 특히 한국은 OECD 국가 중 자살률이 1위입니다. 그 배후에는 사탄의 속임수가 숨어 있습니다. 죽으면 모든 것이 끝이니 그냥 죽으라고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렇게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한 번 죽는 것은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사탄은 지금도 우리를 속이고 죄를 짓도록 유혹하며 하나님께로 부터 떠나도록 유혹합니다. 그러나 사탄의 유혹에 넘어가 죄를 지으면 어떻게 됩니까? 잠깐 죄의 쾌락이 있지만, 결국에는 죄의 종이 되고 부끄럽고 수치스러운 열매만 맺게 됩니다. 이 사탄과의 전쟁에서 어떻게 승리할 수 있습니까? 이 싸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의 진영을 거룩하게 하고 내면을 깨끗하게 하는 것입니다.
특히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 족속과의 치열한 전투가 곧 시작됩니다. 이들이 이 전투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도움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보시는 것은 우리가 얼마나 잘 싸울 수 있는지 얼마나 전투경험이 많은지 하는 것들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 진영이 얼마나 거룩한지, 우리 내면이 깨끗한지 보고자 하십니다. 그리고 이런 우리와 함께 하사 떠나지 아니하시므로 승리하게 하십니다. 우리가 불결할 때 성령께서 함께 하실 수가 없습니다. 승리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많으나 성결에 힘쓰는 사람은 적습니다. 그러나 승리는 성결에 달려 있습니다.
요셉은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그는 이집트에 노예로 팔려갔기 때문에 자기 몸을 함부로 내팽개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을 의식하며 하나님 앞에서 성결한 삶을 살고자 힘썼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와 함께 하셨고 그가 하는 모든 일에 복을 주시고 형통하게 하셨습니다. 보디발 여사의 유혹을 뿌리침으로 감옥에 갇히는 억울한 일을 당했지만 그것이 지도자의 꿈을 갖고 있던 그에게 총리가 되는 지름길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의식하며 성결한 삶을 살았던 요셉을 하나님은 결국 크게 축복하셨습니다. 우리 JBF 학생들이 요셉과 같이 하나님을 의식하며 성결한 삶을 살기를 기도합니다. 음란한 시대에 음란한 문화와 싸우며 성결한 삶을 살므로 하나님께 귀하게 쓰임 받는 한 사람 한 사람이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15-16절에서는 탈출한 노예를 주인에게 돌려주지 말고 그가 원하는 곳에 거주하게 하고 압제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일반적으로 주인에게 돌려주는 것이 원칙일 것 같은데 성경은 그렇게 하지 말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인권을 대단히 존중하고 있습니다. 노예를 해방시켜 자유롭게 살도록 하는 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입니다. 또 이스라엘 중에는 창녀나 남창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돈이든 양식이든 형제에게 꾸어준 모든 것의 이자를 받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범사에 복을 내려주십니다. 가난한 형제가 생계를 위해 꾸는 것인데 이자를 받고자 할 때 가난한 형제를 더욱 어렵고 힘들게 하는 결과가 됩니다. 근동에서는 돈을 빌렸을 경우 이자가 20-25퍼센트, 곡식을 빌렸을 경우는 33.3-50퍼센트에 달했다고 합니다. 이로 인해 결국 가난한 자들이 땅을 팔고 자신까지 노예로 팔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형제에게는 절대 이자를 받지 말도록 했습니다. 약자 보호 및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의 실천인 것입니다. 서구 기독교 사회는 종교개혁 시대까지 이자를 받고 돈을 빌려 주는 것을 금했습니다. 그러다가 루터와 칼빈 등 종교개혁자들이 돈을 빌려주고 이자를 받는 것을 허락했습니다. 특히 칼빈이 더 적극적이었는데 그의 관점은 서구 사회의 경제발전을 촉진시키는 사상적인 뒷받침이 되었습니다.
21-23절은 하나님께 서원하거든 갚기를 더디 하지 말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반드시 그것을 요구하시리니 더디면 그것이 죄가 될 것입니다. 포도원에 들어갈 때 마음대로 먹어도 되지만 그릇에 담지는 말아야 합니다. 이웃의 곡식밭에 들어갈 때 손으로 이삭을 따도 되지만 낫을 대지는 말아야 합니다. 가난하고 배고픈 자들이 허기를 면할 수 있게 하는 이웃사랑의 표현입니다. 그릇에 담거나 낫을 대는 것은 욕심을 부리는 도적질과 같은 행위입니다. 세월이 지나면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 율법을 들판에서 추수하는 인부들과 과수원 주인을 위하여 일하는 사람에게만 적용했습니다. 아마도 이 규례가 주인에게 입힌 손실이 너무 컸기 때문에 보완된 것으로 생각합니다.
말씀의 결론입니다. 이 시대는 점점 더 소돔과 고모라와 같이 음란하고 악한 시대가 되어 가고 있습니다. 이런 시대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성결입니다. 승리하는 삶의 비결은 성결에 있습니다. 성결의 핵심중 하나는 성적 순결입니다. 성결한 삶은 하나님의 임재를 불러옵니다. 성결한 삶 속에 행복이 있습니다. 우리가 성적인 죄가 만연해 가는 시대와 타협하지 아니하고 음란한 문화의 종이 되지 않고 음란한 문화와 싸우며 하나님 앞에서 성결한 삶을 살기에 힘쓰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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