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부활절 특강 : 내가 주를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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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JBF 부활절 특강
말씀 | 요한복음 20:1-31
요절 | 요한복음 20:18
내가 주를 보았다
“막달라 마리아가 가서 제자들에게 내가 주를 보았다 하고 또 주께서 자기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르니라.”
Happy Ester! 지난 주일이 교회절기로 부활절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JBF 친구들은 한 주 늦게 부활절 메시지를 나가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기독교 복음의 핵심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예수님이 성경대로 우리 죄를 위해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복음을 믿을 때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고 구원하신다는 것입니다. 만일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으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요? 이 질문에 대해 사도바울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만일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으면 우리의 믿음은 헛된 일이 되고 우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게 됩니다.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부활이 없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우리는 참으로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나의 내 죄 위해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을 만나야 할 뿐 아니라 나의 삶을 위해 부활하신 예수님을 반드시 만나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의 신앙이 양 날개를 펴고 훨훨 날 수 있는 온전한 신앙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오늘 메시지에서 부활의 역사적 증거보다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막달라 마리아와 제자들을 중심으로 그들이 어떻게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는지를 다루고 이를 통해 우리는 어떻게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날 수 있는지를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이를 위해 제가 오늘 제 메시지에서 던진 질문은 이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어디에 계신가?” 이 질문을 하게 된 이유는 이것입니다. 요한복음 1장을 보면 세례요한이 예수님의 거니심을 보고 이렇게 외칩니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 그 때 그 말을 들은 세례요한의 두 제자가 예수님을 따라가 이렇게 묻습니다. “선생님, 어디 계십니까?” 그때 예수님은 그들에게 “와 보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그가 계신 곳을 가 본 후에 그들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
여러분들도 이 질문을 갖고 오늘 메시지를 들으시기 바랍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어디에 계신가?” 그리고 그 분이 계신 곳에서 그 분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오늘 메시지의 핵심입니다. 그럼 오늘 부활절 메시지를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제1장 그들은 어디에 있었는가?
저는 부활하신 예수님이 어디 계셨는지를 생각해 보기에 앞서서 그들은 어디에 있었는지를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그들은 오늘 본문에 나오는 막달라 마리아와 제자들입니다. 특히 제자들 중에서는 의심이 많았다는 오명을 쓰고 있는 도마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어디에 있었습니까? 그녀는 본래 일곱 귀신 들린 자로서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 중에 예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은 자입니다. 그녀는 구원을 받은 후에 예수님을 따라다니며 그와 그의 제자들을 돌보고 후원하는 일에 헌신하였습니다. 그녀는 예수님이 고난을 받으시기 전 주 예루살렘 근처에 있는 베다니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 계실 때 예수님에게 향유 옥합을 깨어 드려 예수님을 죽으심을 예배한 여인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에 대한 그녀의 사랑과 헌신은 참으로 아름다웠습니다. 그런데 그토록 사랑하여 따르던 예수님이 어떻게 되셨습니까? 아무 죄 없으신 예수님께서 억울한 누명을 쓰고 십자가에 못 박혀 처참하게 죽으셨습니다. 그녀는 예수님이 고난 받으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후에 장사되시는 그 현장에서 그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그토록 사랑하는 예수님을 잃어버린 막달라 마리아는 어디에 있었습니까? 그녀는 깊은 슬픔 중에 있었습니다. 그녀는 너무나 슬퍼서 먹을 수도 없었고 한 숨도 잠을 잘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안식일이 지나자마자 아직 날이 밝기도 전에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갔습니다. 그곳에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예수님을 만나고자 하였습니다. 그곳에서 그녀는 예수님의 시체에 향품을 발라 드리며 자신의 마지막 사랑을 다하고 싶었습니다. 예수님의 시신이라도 붙들고 통곡을 하며 눈물을 흘리고 싶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무덤을 찾은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을 잃은 슬픔과 인생의 허무함에 갖혀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어디에 있었습니까?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시기 전날 밤, 제자들과 최후의 만찬을 하시면 그들에게 오늘밤 너희가 다 나를 버리고 도망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베드로에게는 네가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나를 세 번 부인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때 그들은 예수님께 절대 주님을 버리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베드로는 주님을 죽는 데까지 따라가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군병들이 들이닥쳐 예수님을 체포하던 날 그들은 모두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을 갔습니다. 베드로는 어린 계집종 앞에서 세 번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했습니다. 이는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렇게 그들은 제자로서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그로인해 그들은 깊은 죄책감과 실패의식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원수들이 그들의 생명도 찾고 있었습니다. 그 때문에 그들은 죽음에 대한 깊은 두려움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들은 그 두려움 때문에 문을 꼭 걸어 잠그고 절망하며 어찌할 바를 모르고 바들바들 떨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대부분 어부들입니다. 그들 중에는 세금징수원인 세리도 있고 열심당원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당시 그 사회에서 별로 내세울만한 것이 없는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세리 마태와 같은 경우는 공인된 죄인으로 멸시천대를 받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예수님의 제자로 부르심을 받은 후 그와 함께 다니며 예수님의 말씀의 권위와 행하시는 능력, 그리고 이런 그를 따르는 수많은 군중들을 보았습니다. 그 군중들이 예수님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고자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를 통해 본래 별다른 꿈이 없던 그들에게도 꿈이 생겼습니다. 그 꿈은 예수님이 이스라엘의 왕으로 등극하시면 그들은 예수님의 좌우편에 앉아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비록 제자의 삶이 힘들었지만 이 꿈을 생각하며 예수님의 제자로 부르심을 받은 것에 무한한 자부심을 느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처참하게 돌아가셨습니다. 그 결과 예수님의 죽음과 함께 그들의 꿈도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습니다. 그들에게 꿈의 무대였던 예루살렘은 그들을 삼키려는 죽음의 무대가 되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할 때 꿈만 같았던 하루하루의 삶이 악몽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또 무슨 말씀을 하실까? 무슨 일을 행하실까?” 설레이며 기대하던 내일은 차라리 오지 않았으면 하는 두려움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없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예전에 하던 데로 물고기를 잡는 일 뿐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없는 그들은 예전의 연약하고 두려움 많던 그 오합지졸로 돌아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저는 이제까지 막달라 마리아와 제자들이 어디에 있었는지에 대해 이야기 하였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지 못한 그들은 어디에 있었습니까? 그들은 깊은 슬픔 중에 있었습니다. 그들은 깊은 죄책감과 두려움에, 연약함과 절망에 빠져 있었습니다. 이런 그들이 할 수 일이란 그저 눈물을 흘리고 놀라고 바들바들 떠는 일 뿐이었습니다. 그들의 옛 사람으로 돌아가는 것뿐이었습니다. 바로 그때 예수님은 어디에 계셨습니까?
제2장 예수님은 어디에 계셨는가?
막달라 마리아가 슬퍼할 때 제자들이 죄책감에 빠져 좌절하고 원수들의 추격에 두려워하며 절망할 때, 바로 그때 예수님은 어디에 계셨습니까? 예수님이 무덤에 계셨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는 무덤에 계시지 않았습니다. 그는 무덤에 계시지 않고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그런데 막달라 마리아와 제자들은 예수님이 어디 계신다고 생각했습니까? 그들은 예수님이 무덤에 계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무덤에는 예수님을 장사지낼 때 사용된 세마포와 수건만이 놓여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빈 무덤을 보고도, 세마포와 수건을 보고도,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셨다는 생각을 전혀 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원수들이 예수님을 시체를 훔쳐갔다고 생각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마지막으로 향품을 발라 드리려고 했던 예수님의 시체마저 만날 수 없다는 사실에 더욱 큰 슬픔에 빠졌습니다. 그때 부활하신 예수님은 어디에 계셨습니까?
13-15절을 봅시다. “천사들이 이르되 여자여 어찌하여 우느냐? 이르되 사람들이 내 주님을 옮겨다가 어디 두었는지 내가 알지 못함이니이다. 이 말을 하고 뒤로 돌이켜 예수께서 서 계신 것을 보았으나 예수이신 줄은 알지 못하더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 하시니 마리아는 그가 동산지기인 줄 알고 이르되 주여 당신이 옮겼거든 어디 두었는지 내게 이르소서 그리하면 내가 가져가리이다” 예수님은 어디에 계셨습니까? 예수님은 그녀의 뒤에 계셨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너무나 슬픈 나머지, 너무나 눈물을 많이 흘린 나머지, 그 분이 자신을 찾아오신 부활하신 예수님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녀는 아니러니하게도 부활하신 예수님께 죽으신 예수님의 시체가 어디에 있는지 알려달라고 묻습니다. 여러분 부활하신 예수님은 어디에 계셨습니다. 그는 마리아의 슬픔 중에 계셨습니다. 그렇기에 부활은 아니러니 곧 역설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살면서 슬픈 일을 당할 때가 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처럼 우리가 사랑하는 분들이 병들고 다치고 죽는 일을 당할 수 있습니다. 부모님들이 하시는 사업이 망하고 원하는 목표를 이루지 못하고 실패하는 것도 무척이나 슬픈일입니다. 이런 슬픈 일을 당할 때 우리 안에는 하나님을 원망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하나님, 나는 이렇게 슬픈데 이런 나를 내버려 두시고 당신은 어디에 계신 것입니까? 하나님이 저와 함께 하신다면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 건가요?” 그런데 여러분 부활하신 예수님은 이런 우리의 슬픔 가운데 함께 계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 분을 보지 못하는 것은 막달라 마리아처럼 우리의 슬픔이, 우리의 눈물이 우리의 눈을 가리웠기 때문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이런 막달리 마리아를 어떻게 도와주셨습니까? 16-18절을 봅시다. “예수께서 마리아야 하시거늘 마리아가 돌이켜 히브리 말로 랍오니 하니 (이는 선생님이라는 말이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붙들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아니하였노라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하시니 막달라 마리아가 가서 제자들에게 내가 주를 보았다 하고 또 주께서 자기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르니라” 슬픔에 빠져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지 못하는 막달라 마리아에게 예수님은 “마리아야”하고 불러 주셨습니다. 그녀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나서야 그가 주님이신 줄을 알았습니다. 그녀는 부활하신 예수님이 다른 계시지 않고 바로 그와 함께 계심을 보았습니다. 그녀의 슬픔 중에 계심을 보았습니다. 그때 그녀의 슬픔은 사라지고 그녀의 눈물은 그치고 그녀는 기쁨과 확신에 찬 부활의 중인이 되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슬픔이 있었습니까? 어떤 눈물이 있습니까? 부활하신 예수님은 여러분의 슬픔 중에 계십니다. 여러분의 눈물 가운데 계십니다. 우리는 슬픔 중에 있을 때 눈물을 흘리고 있는 나를 부르시는 부활하신 주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지선아, 하경아”, “모세야, 마가야, 엘리아야” 우리가 그의 음성을 들을 때 우리의 슬픔은 변하여 기쁨이 되고 우리의 눈물은 변하여 찬송이 될 것입니다.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가 버린 제자들은 죄책감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 빠져 다락방문을 꼭 걸어 잠그고 아무데도 나가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있는 곳은 아무도 찾을 수 없는 곳이었고 아무도 들어올 수 없는 절망의 방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예수님은 어디에 계셨습니까? 예수님은 죄책감과 두려움에 빠져 있는 그들을 찾아오셨습니다. 그들이 문을 걸어 잠그고 아무도 들어올 수 없는 방에 있었는데 그는 그 방의 벽을 뚫고 들어오셨습니다. 이렇게 하실 수 있었던 것은 부활하신 예수님은 시공간을 넘나드는 신령한 몸을 입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한 자들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했습니다. 이런 그들에게 부활하신 예수님을 너무나 반가우면서도 부담스러운 분이셨습니다. 벼룩도 낯짝이 있다는데 그들은 예수님을 볼 낯짝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서 너무나 기뻤지만 아무도 예수님께 기쁨으로 달려가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제자들을 어떻게 도와주십니까? 19-23절을 봅시다.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 예수께서 또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누구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먼저 그들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인사하셨습니다. 이 평강은 단순한 인사가 아닙니다. 이 평강은 죄사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평강입니다. 죄사함이 없이는 참된 평강은 있을 수 없습니다. 이처럼 부활하신 예수님은 먼저 제자들의 죄와 허물을 용서해 주시므로 참된 평강을 주고자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향해 숨을 내시며 성령을 받으라고 하십니다. 이는 성령으로 기름부어 그들을 주님의 사도로 다시금 세워주시는 의식입니다. 그들이 사도로서 이 세상에서 해야할 일이 무엇입니까? 그들은 이 세상에 예수님으로 말미암은 죄사함의 복음을 선포해야 합니다. 그들이 전하는 복음을 받아들이는 자는 죄사함을 받고 이를 거부하며 정죄를 받게 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제자로서 실패한 그들을 다시금 사도로서 굳게 세워주신 것입니다.
우리도 살면서 제자들처럼 죄짓고 실패하고 그로인해 두려움과 절망에 빠져 있을 때가 있습니다. 그때는 사람들을 만나는 것도 두렵고 그래서 관계의 문을 다 닫아 버리고 나 혼자 있고 싶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은 내가 아무리 문을 꼭 닫아 놓아도 나를 찾아오시는 분이십니다. 그는 굳게 닫힌 나의 마음의 문을 두드리시는 주님이십니다. 그는 이런 우리를 찾아오셔서 죄사함의 복음을 주시고 하나님의 평강을 주시는 평강의 주님이십니다. 여러분 가운데 죄책감과 실패의식에 빠져 있는 분들이 있습니까? 나는 왜 이럴까? 자신의 연약함과 실수에 대해 후회할 때가 있습니까? 그때 여러분을 찾아오시는 예수님의 음성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샬롬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우리가 실패했다고 생각하는 바로 그 때에, 그 자리에 우리를 찾아오시는 주님이십니다. 이 예수님의 음성을 들으시고 주님이 주시는 평강 가운데 다시 시작하시기 바랍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실패한 우리를 다시금 시작하게 하시는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 중에 도마라고 하는 제자는 의심이 많아도 너무나 많았습니다. 게다가 고집이 보통 고집이 아니라 황소고집이었습니다. 그는 제자들이 이구동성으로 다 우리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다고 하는데도 그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내 눈으로 그 손의 못자국과 허리 창자국을 보며 내 손으로 그것을 만져 보기 전에는 절대로 믿을 수 없다고 버텼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이런 도마를 찾아오셨습니다. 그에게 그 손의 못자국과 허리에 창자국을 보여주시고 또 만져 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고 하셨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이야기는 아닌데 “Jesus of Nazareth”이란 영화를 보면 예수님이 의심하는 도마에게 “너는 확실한 것을 찾는구나”하는 말씀을 하신 것이 제게 인상적이었습니다. 우리는 도마와 같이 의심이 많은 고집불통들을 볼 때 혼줄을 내줘야 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은 그가 믿을 수 있도록 그가 원하는 모든 것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때 그는 예수님을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으로 고백할 수 있었습니다.
결론적으로 부활하신 예수님은 어디에 계셨습니까? 그는 무덤에 계시지 않았습니다. 그는 무덤에 계시지 않고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마리아의 슬픔 중에 그리고 제자들의 죄책감과 두려움에, 도마의 회의와 의심 속에 계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 가운데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러면 지금 부활하신 예수님은 어디에 계십니까? 부활하신 예수님은 바로 여러분의 슬픔 중에, 죄책감과 두려움에, 회의와 의심 속에 계십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에게 이렇게 약속하셨습니다. “볼찌어다 세상 끝날까지 내가 너희와 함께 하리라” 이 약속대로 부활하신 예수님은 지금 나와 함께, 우리와 함께 하시는 주님이십니다. 지금뿐만 아니라 영원히 나와 함께 하시는 주님이십니다. 우리가 오늘 말씀을 통해 나를 찾아오시는 예수님, 나와 함께 하시는 예수님을 부활의 주님으로 만나고 도마와 같이 신앙고백할 수 있길 기도합니다. “예수님, 당신은 나의 주님이시오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이 고백을 예수님께 드리는 우리 JBF 친구들이 모두 되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 드립니다.
할 렐 루 야 아멘
말씀 | 요한복음 20:1-31
요절 | 요한복음 20:18
내가 주를 보았다
“막달라 마리아가 가서 제자들에게 내가 주를 보았다 하고 또 주께서 자기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르니라.”
Happy Ester! 지난 주일이 교회절기로 부활절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JBF 친구들은 한 주 늦게 부활절 메시지를 나가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기독교 복음의 핵심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예수님이 성경대로 우리 죄를 위해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복음을 믿을 때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고 구원하신다는 것입니다. 만일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으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요? 이 질문에 대해 사도바울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만일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으면 우리의 믿음은 헛된 일이 되고 우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게 됩니다.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부활이 없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우리는 참으로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나의 내 죄 위해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을 만나야 할 뿐 아니라 나의 삶을 위해 부활하신 예수님을 반드시 만나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의 신앙이 양 날개를 펴고 훨훨 날 수 있는 온전한 신앙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오늘 메시지에서 부활의 역사적 증거보다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막달라 마리아와 제자들을 중심으로 그들이 어떻게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는지를 다루고 이를 통해 우리는 어떻게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날 수 있는지를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이를 위해 제가 오늘 제 메시지에서 던진 질문은 이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어디에 계신가?” 이 질문을 하게 된 이유는 이것입니다. 요한복음 1장을 보면 세례요한이 예수님의 거니심을 보고 이렇게 외칩니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 그 때 그 말을 들은 세례요한의 두 제자가 예수님을 따라가 이렇게 묻습니다. “선생님, 어디 계십니까?” 그때 예수님은 그들에게 “와 보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그가 계신 곳을 가 본 후에 그들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
여러분들도 이 질문을 갖고 오늘 메시지를 들으시기 바랍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어디에 계신가?” 그리고 그 분이 계신 곳에서 그 분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오늘 메시지의 핵심입니다. 그럼 오늘 부활절 메시지를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제1장 그들은 어디에 있었는가?
저는 부활하신 예수님이 어디 계셨는지를 생각해 보기에 앞서서 그들은 어디에 있었는지를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그들은 오늘 본문에 나오는 막달라 마리아와 제자들입니다. 특히 제자들 중에서는 의심이 많았다는 오명을 쓰고 있는 도마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어디에 있었습니까? 그녀는 본래 일곱 귀신 들린 자로서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 중에 예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은 자입니다. 그녀는 구원을 받은 후에 예수님을 따라다니며 그와 그의 제자들을 돌보고 후원하는 일에 헌신하였습니다. 그녀는 예수님이 고난을 받으시기 전 주 예루살렘 근처에 있는 베다니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 계실 때 예수님에게 향유 옥합을 깨어 드려 예수님을 죽으심을 예배한 여인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에 대한 그녀의 사랑과 헌신은 참으로 아름다웠습니다. 그런데 그토록 사랑하여 따르던 예수님이 어떻게 되셨습니까? 아무 죄 없으신 예수님께서 억울한 누명을 쓰고 십자가에 못 박혀 처참하게 죽으셨습니다. 그녀는 예수님이 고난 받으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후에 장사되시는 그 현장에서 그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그토록 사랑하는 예수님을 잃어버린 막달라 마리아는 어디에 있었습니까? 그녀는 깊은 슬픔 중에 있었습니다. 그녀는 너무나 슬퍼서 먹을 수도 없었고 한 숨도 잠을 잘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안식일이 지나자마자 아직 날이 밝기도 전에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갔습니다. 그곳에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예수님을 만나고자 하였습니다. 그곳에서 그녀는 예수님의 시체에 향품을 발라 드리며 자신의 마지막 사랑을 다하고 싶었습니다. 예수님의 시신이라도 붙들고 통곡을 하며 눈물을 흘리고 싶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무덤을 찾은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을 잃은 슬픔과 인생의 허무함에 갖혀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어디에 있었습니까?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시기 전날 밤, 제자들과 최후의 만찬을 하시면 그들에게 오늘밤 너희가 다 나를 버리고 도망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베드로에게는 네가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나를 세 번 부인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때 그들은 예수님께 절대 주님을 버리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베드로는 주님을 죽는 데까지 따라가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군병들이 들이닥쳐 예수님을 체포하던 날 그들은 모두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을 갔습니다. 베드로는 어린 계집종 앞에서 세 번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했습니다. 이는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렇게 그들은 제자로서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그로인해 그들은 깊은 죄책감과 실패의식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원수들이 그들의 생명도 찾고 있었습니다. 그 때문에 그들은 죽음에 대한 깊은 두려움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들은 그 두려움 때문에 문을 꼭 걸어 잠그고 절망하며 어찌할 바를 모르고 바들바들 떨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대부분 어부들입니다. 그들 중에는 세금징수원인 세리도 있고 열심당원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당시 그 사회에서 별로 내세울만한 것이 없는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세리 마태와 같은 경우는 공인된 죄인으로 멸시천대를 받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예수님의 제자로 부르심을 받은 후 그와 함께 다니며 예수님의 말씀의 권위와 행하시는 능력, 그리고 이런 그를 따르는 수많은 군중들을 보았습니다. 그 군중들이 예수님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고자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를 통해 본래 별다른 꿈이 없던 그들에게도 꿈이 생겼습니다. 그 꿈은 예수님이 이스라엘의 왕으로 등극하시면 그들은 예수님의 좌우편에 앉아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비록 제자의 삶이 힘들었지만 이 꿈을 생각하며 예수님의 제자로 부르심을 받은 것에 무한한 자부심을 느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처참하게 돌아가셨습니다. 그 결과 예수님의 죽음과 함께 그들의 꿈도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습니다. 그들에게 꿈의 무대였던 예루살렘은 그들을 삼키려는 죽음의 무대가 되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할 때 꿈만 같았던 하루하루의 삶이 악몽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또 무슨 말씀을 하실까? 무슨 일을 행하실까?” 설레이며 기대하던 내일은 차라리 오지 않았으면 하는 두려움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없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예전에 하던 데로 물고기를 잡는 일 뿐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없는 그들은 예전의 연약하고 두려움 많던 그 오합지졸로 돌아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저는 이제까지 막달라 마리아와 제자들이 어디에 있었는지에 대해 이야기 하였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지 못한 그들은 어디에 있었습니까? 그들은 깊은 슬픔 중에 있었습니다. 그들은 깊은 죄책감과 두려움에, 연약함과 절망에 빠져 있었습니다. 이런 그들이 할 수 일이란 그저 눈물을 흘리고 놀라고 바들바들 떠는 일 뿐이었습니다. 그들의 옛 사람으로 돌아가는 것뿐이었습니다. 바로 그때 예수님은 어디에 계셨습니까?
제2장 예수님은 어디에 계셨는가?
막달라 마리아가 슬퍼할 때 제자들이 죄책감에 빠져 좌절하고 원수들의 추격에 두려워하며 절망할 때, 바로 그때 예수님은 어디에 계셨습니까? 예수님이 무덤에 계셨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는 무덤에 계시지 않았습니다. 그는 무덤에 계시지 않고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그런데 막달라 마리아와 제자들은 예수님이 어디 계신다고 생각했습니까? 그들은 예수님이 무덤에 계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무덤에는 예수님을 장사지낼 때 사용된 세마포와 수건만이 놓여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빈 무덤을 보고도, 세마포와 수건을 보고도,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셨다는 생각을 전혀 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원수들이 예수님을 시체를 훔쳐갔다고 생각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마지막으로 향품을 발라 드리려고 했던 예수님의 시체마저 만날 수 없다는 사실에 더욱 큰 슬픔에 빠졌습니다. 그때 부활하신 예수님은 어디에 계셨습니까?
13-15절을 봅시다. “천사들이 이르되 여자여 어찌하여 우느냐? 이르되 사람들이 내 주님을 옮겨다가 어디 두었는지 내가 알지 못함이니이다. 이 말을 하고 뒤로 돌이켜 예수께서 서 계신 것을 보았으나 예수이신 줄은 알지 못하더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 하시니 마리아는 그가 동산지기인 줄 알고 이르되 주여 당신이 옮겼거든 어디 두었는지 내게 이르소서 그리하면 내가 가져가리이다” 예수님은 어디에 계셨습니까? 예수님은 그녀의 뒤에 계셨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너무나 슬픈 나머지, 너무나 눈물을 많이 흘린 나머지, 그 분이 자신을 찾아오신 부활하신 예수님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녀는 아니러니하게도 부활하신 예수님께 죽으신 예수님의 시체가 어디에 있는지 알려달라고 묻습니다. 여러분 부활하신 예수님은 어디에 계셨습니다. 그는 마리아의 슬픔 중에 계셨습니다. 그렇기에 부활은 아니러니 곧 역설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살면서 슬픈 일을 당할 때가 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처럼 우리가 사랑하는 분들이 병들고 다치고 죽는 일을 당할 수 있습니다. 부모님들이 하시는 사업이 망하고 원하는 목표를 이루지 못하고 실패하는 것도 무척이나 슬픈일입니다. 이런 슬픈 일을 당할 때 우리 안에는 하나님을 원망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하나님, 나는 이렇게 슬픈데 이런 나를 내버려 두시고 당신은 어디에 계신 것입니까? 하나님이 저와 함께 하신다면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 건가요?” 그런데 여러분 부활하신 예수님은 이런 우리의 슬픔 가운데 함께 계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 분을 보지 못하는 것은 막달라 마리아처럼 우리의 슬픔이, 우리의 눈물이 우리의 눈을 가리웠기 때문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이런 막달리 마리아를 어떻게 도와주셨습니까? 16-18절을 봅시다. “예수께서 마리아야 하시거늘 마리아가 돌이켜 히브리 말로 랍오니 하니 (이는 선생님이라는 말이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붙들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아니하였노라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하시니 막달라 마리아가 가서 제자들에게 내가 주를 보았다 하고 또 주께서 자기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르니라” 슬픔에 빠져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지 못하는 막달라 마리아에게 예수님은 “마리아야”하고 불러 주셨습니다. 그녀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나서야 그가 주님이신 줄을 알았습니다. 그녀는 부활하신 예수님이 다른 계시지 않고 바로 그와 함께 계심을 보았습니다. 그녀의 슬픔 중에 계심을 보았습니다. 그때 그녀의 슬픔은 사라지고 그녀의 눈물은 그치고 그녀는 기쁨과 확신에 찬 부활의 중인이 되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슬픔이 있었습니까? 어떤 눈물이 있습니까? 부활하신 예수님은 여러분의 슬픔 중에 계십니다. 여러분의 눈물 가운데 계십니다. 우리는 슬픔 중에 있을 때 눈물을 흘리고 있는 나를 부르시는 부활하신 주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지선아, 하경아”, “모세야, 마가야, 엘리아야” 우리가 그의 음성을 들을 때 우리의 슬픔은 변하여 기쁨이 되고 우리의 눈물은 변하여 찬송이 될 것입니다.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가 버린 제자들은 죄책감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 빠져 다락방문을 꼭 걸어 잠그고 아무데도 나가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있는 곳은 아무도 찾을 수 없는 곳이었고 아무도 들어올 수 없는 절망의 방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예수님은 어디에 계셨습니까? 예수님은 죄책감과 두려움에 빠져 있는 그들을 찾아오셨습니다. 그들이 문을 걸어 잠그고 아무도 들어올 수 없는 방에 있었는데 그는 그 방의 벽을 뚫고 들어오셨습니다. 이렇게 하실 수 있었던 것은 부활하신 예수님은 시공간을 넘나드는 신령한 몸을 입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한 자들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했습니다. 이런 그들에게 부활하신 예수님을 너무나 반가우면서도 부담스러운 분이셨습니다. 벼룩도 낯짝이 있다는데 그들은 예수님을 볼 낯짝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서 너무나 기뻤지만 아무도 예수님께 기쁨으로 달려가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제자들을 어떻게 도와주십니까? 19-23절을 봅시다.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 예수께서 또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누구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먼저 그들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인사하셨습니다. 이 평강은 단순한 인사가 아닙니다. 이 평강은 죄사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평강입니다. 죄사함이 없이는 참된 평강은 있을 수 없습니다. 이처럼 부활하신 예수님은 먼저 제자들의 죄와 허물을 용서해 주시므로 참된 평강을 주고자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향해 숨을 내시며 성령을 받으라고 하십니다. 이는 성령으로 기름부어 그들을 주님의 사도로 다시금 세워주시는 의식입니다. 그들이 사도로서 이 세상에서 해야할 일이 무엇입니까? 그들은 이 세상에 예수님으로 말미암은 죄사함의 복음을 선포해야 합니다. 그들이 전하는 복음을 받아들이는 자는 죄사함을 받고 이를 거부하며 정죄를 받게 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제자로서 실패한 그들을 다시금 사도로서 굳게 세워주신 것입니다.
우리도 살면서 제자들처럼 죄짓고 실패하고 그로인해 두려움과 절망에 빠져 있을 때가 있습니다. 그때는 사람들을 만나는 것도 두렵고 그래서 관계의 문을 다 닫아 버리고 나 혼자 있고 싶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은 내가 아무리 문을 꼭 닫아 놓아도 나를 찾아오시는 분이십니다. 그는 굳게 닫힌 나의 마음의 문을 두드리시는 주님이십니다. 그는 이런 우리를 찾아오셔서 죄사함의 복음을 주시고 하나님의 평강을 주시는 평강의 주님이십니다. 여러분 가운데 죄책감과 실패의식에 빠져 있는 분들이 있습니까? 나는 왜 이럴까? 자신의 연약함과 실수에 대해 후회할 때가 있습니까? 그때 여러분을 찾아오시는 예수님의 음성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샬롬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우리가 실패했다고 생각하는 바로 그 때에, 그 자리에 우리를 찾아오시는 주님이십니다. 이 예수님의 음성을 들으시고 주님이 주시는 평강 가운데 다시 시작하시기 바랍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실패한 우리를 다시금 시작하게 하시는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 중에 도마라고 하는 제자는 의심이 많아도 너무나 많았습니다. 게다가 고집이 보통 고집이 아니라 황소고집이었습니다. 그는 제자들이 이구동성으로 다 우리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다고 하는데도 그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내 눈으로 그 손의 못자국과 허리 창자국을 보며 내 손으로 그것을 만져 보기 전에는 절대로 믿을 수 없다고 버텼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이런 도마를 찾아오셨습니다. 그에게 그 손의 못자국과 허리에 창자국을 보여주시고 또 만져 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고 하셨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이야기는 아닌데 “Jesus of Nazareth”이란 영화를 보면 예수님이 의심하는 도마에게 “너는 확실한 것을 찾는구나”하는 말씀을 하신 것이 제게 인상적이었습니다. 우리는 도마와 같이 의심이 많은 고집불통들을 볼 때 혼줄을 내줘야 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은 그가 믿을 수 있도록 그가 원하는 모든 것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때 그는 예수님을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으로 고백할 수 있었습니다.
결론적으로 부활하신 예수님은 어디에 계셨습니까? 그는 무덤에 계시지 않았습니다. 그는 무덤에 계시지 않고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마리아의 슬픔 중에 그리고 제자들의 죄책감과 두려움에, 도마의 회의와 의심 속에 계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 가운데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러면 지금 부활하신 예수님은 어디에 계십니까? 부활하신 예수님은 바로 여러분의 슬픔 중에, 죄책감과 두려움에, 회의와 의심 속에 계십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에게 이렇게 약속하셨습니다. “볼찌어다 세상 끝날까지 내가 너희와 함께 하리라” 이 약속대로 부활하신 예수님은 지금 나와 함께, 우리와 함께 하시는 주님이십니다. 지금뿐만 아니라 영원히 나와 함께 하시는 주님이십니다. 우리가 오늘 말씀을 통해 나를 찾아오시는 예수님, 나와 함께 하시는 예수님을 부활의 주님으로 만나고 도마와 같이 신앙고백할 수 있길 기도합니다. “예수님, 당신은 나의 주님이시오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이 고백을 예수님께 드리는 우리 JBF 친구들이 모두 되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 드립니다.
할 렐 루 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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