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명기 7강 "여호와께서 택하신 곳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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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신명기 제 7 강
말씀 | 신명기 12:1-13:18
요절 | 신명기 12:18
여호와께서 택하신 곳에서
“오직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택하실 곳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너는 네 자녀와 노비와 성중에 거주하는 레위인과 함께 그것을 먹고 또 네 손으로 수고한 모든 일로 말미암아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즐거워하되”
최근 우리가 배우고 있는 신명기 말씀은 모세가 시내산에서 받은 율법을 다시 해설한 두 번째 율법이라 불리웁니다. 신명기란 뜻이 거듭 거듭 되풀이 되는 명령이란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의 명하신 계명의 말씀을 청종하면 그들이 약속하신 땅을 얻고 그 땅에서 장구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렇기에 모세는 가나안 입성을 앞둔 그들에게 거듭 거듭 하나님의 계명의 말씀을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 모세가 그의 백성에게 가르친 내용은 예배에 관한 것입니다. 그들이 차지하게 될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그들이 하나님을 어떻게 예배해야 하는지를 가르치십니다. 더불어 예배의 변질과 타락에 관한 주의와 경고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우리가 오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이 명하신 바른 예배에 대해 배우고 우리의 예배를 돌아볼 수 있길 기도합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예배가 하나님이 임재하시고 기뻐 받으시는 산예배가 될 수 있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1-3절을 봅시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들이 차지할 땅에서 지켜야할 규례와 법도에 대해 가르치십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가장 먼저 명하신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그곳에 있는 우상의 이름을 멸하라는 것입니다. 왜 그곳에 우상을 멸해야 하는 것입니까? 그곳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택하신 곳에 다른 신의 이름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이 말씀은 십계명 중 제1계명에 순종하라는 말씀입니다. 제1계명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나 외에 다른 신에 네게 있게 말지니라"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또 다른 이유는 그 땅의 죄를 심판하고 우상으로 더럽혀진 그 땅을 회복하라는 것입니다. 이는 가나안 정복전쟁을 앞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전쟁의 명분이 어디에 있는지를 다시한번 가르치신 것입니다. 가나안 정복전쟁의 명분은 단순히 그 땅을 차지하는데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우상에게 빼앗긴 그 땅을 회복하고 하나님의 것이 되게 하라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그 땅의 우상들을 멸해야 합니다. 그 땅의 신들의 이름을 그곳에서 제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에 하나님이 명하신 바른 예배를 드리기 위한 첫출발입니다.
오늘날 하나님께서 당신의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은 어디입니까? 그곳은 하나님의 성전된 우리 자신입니다. 고린도전서3:16,17절에서 사도바울은 이러게 말씀합니다.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 그렇기에 우리가 하나님께 바른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의 성전인 우리 안에 다른 신의 이름이 있다면 그 신들의 이름을 먼저 멸해야하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다른 신들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돈과 인기와 명예일 수도 있고 내 가족, 내 자신일 수도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든 내 안에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고 하나님보다 더 높아진 이름이 있다면 그 이름을 제거해야 합니다. 그것을 제거하는 방법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구체적으로 내 안에 있는 우상들의 이름을 고백하며 회개하는 것입니다. 요한일서1:9절은 말씀합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그렇기에 바른 예배의 시작은 제1계명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즉 내 안에 있는 다른 신들의 이름을 고백하며 회개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오늘 말씀에 기초해서 내 안에 있는 다른 신들의 이름을 발견하고 회개하므로 하나님의 성전된 우리 자신을 하나님 앞에 온전히 드릴 수 있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이제부터는 하나님이 명하신 바른 예배는 무엇인지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이 명하신 바른 예배는 무엇입니까?
첫째, 예배는 하나님이 택하신 곳에서 드려야 합니다. 하나님은 왜 예배를 하나님이 택하신 곳에서 드리라고 하실까요? 이를 이해하기 위해선 두 가지를 생각해 봐야 합니다. 첫째로 이 말씀을 할 당시 그들은 어떻게 예배를 드리고 있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8절을 봅시다. "우리가 오늘 여기에서는 각기 소견대로 하였거니와 너희가 거기에서는 그렇게 하지 말지니라"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 그들이 각기 소견대로 즉 자기 생각대로, 자기 눈에 보기 좋은 대로 드렸다는 것을 알 있습니다. 그래도 광야에서는 크게 문제될 것이 없었습니다. 그곳에서는 다른 신을 섬길 일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가나안 땅에 들어가면 그렇지 않습니다. 그곳에는 가는 곳마다 우상을 섬기는 산당이 있습니다. 그들이 각기 소견대로 예배를 드린다면 그들은 금방 우상숭배에 물들고 그들의 예배는 변질되고 타락하고 말 것입니다. 이를 우려하신 하나님은 그들이 예배할 장소로 세 곳을 택하셨는데 그곳이 바로 예루살렘, 세겜, 실로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최소한 일 년에 세 번 절기 때마다 이곳에 나와 예배를 드리도록 명하셨습니다. 이를 통해 그들이 예배의 통일성과 순수성을 지키도록 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이 오늘날 우리에게는 어떻게 적용이 될까요?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우리 주변에는 수많은 교회들이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교회가 어찌나 많은지 밤에 남산에 올라가서 보면 빨간 십자가로 가득하다고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렇게 많은 교회들 중에 어디서 예배를 드려야할까요? 이에 대해 하나님은 각기 소견대로, 눈에 보기 좋은 대로 하면 된다고 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자기 이름을 위하여 택하신 곳에서 예배를 드리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택하신 곳으로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택하신 곳에서 말씀을 배우고 영적인 훈련을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하나님이 맡기신 사명에 헌신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를 소명이라고 부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부르신 곳에서 예배해야 합니다. 그곳이 크던지 작던지, 그곳이 아무리 멀어도, 그곳에 어떠한 갈등과 아픔이 있어도 그곳에서 예배해야 합니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가 드릴 영적인 예배입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이렇게 당신 앞에 나아가 예배할 자들을 간절히 찾고 계십니다. 우리 JBF 친구들이 이 시대 하나님이 찾으시는 진정한 예배자들이 다 되시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둘째, 예배는 기쁨과 감사함으로 나와야 합니다. 6,7절을 봅시다. "너희의 번제와 너희의 제물과 너희의 십일조와 너희 손의 거제와 너희의 서원제와 낙헌 예물과 너희 소와 양의 처음 난 것들을 너희는 그리로 가져다가 드리고 거기 곧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먹고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의 손으로 수고한 일에 복 주심으로 말미암아 너희와 너희의 가족이 즐거워할지니라" 우리는 지난번에 헌금의 종류와 자세에 대해 상세히 배운 적이 있습니다. 십일조는 무엇입니까? 모든 소득의 십분의 일을 하나님께 구별하여 드리는 헌금입니다. 십일조는 십의 십을 대표하는 것으로 실상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임을 고백하는 창조신앙입니다. 거제, 서원제와 낙헌제 예물은 모두 감사의 예물입니다. 소와 양이 처음 난 것을 드리는 것을 첫 열매 헌금을 의미합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입니다. 하늘의 하늘이라도 하나님을 담을 수 없을만큼 하나님은 크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께서 왜 우리에게 예물을 들고 나오라고 하시는 것입니까? 왜냐하면 이 예물은 단순한 예물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감사와 기쁨의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감사의 마음을 예물에 담아 표현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예배에 나올 때 빈손으로 나오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담아 헌금도 준비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손으로 수고한 모든 일을 하나님이 축복해 주셨음을 기억할 때 기쁨으로 감사의 예물을 드릴 수 있습니다. 우리 JBF 친구들이 헌금생활을 통해 하나님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드려 예배하는 법을 배우고 그로인한 영적인 축복을 깨닫고 누릴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셋째, 예배는 소외되는 사람이 없어야 합니다. 11,12절을 봅시다. "너희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자기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실 그 곳으로 내가 명령하는 것을 모두 가지고 갈지니 곧 너희의 번제와 너희의 희생과 너희의 십일조와 너희 손의 거제와 너희가 여호와께서 원하시는 모든 아름다운 서원물을 가져가고 너희와 너희의 자녀와 노비와 함께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즐거워할 것이요 네 성중에 있는 레위인과도 그리할지니 레위인은 너희 중에 분깃이나 기업이 없음이니라" 하나님은 예배를 드리러 나올 때 너희의 자녀뿐만 아니라 노비도 함께 나오라고 하십니다. 당시 노비는 가축이나 가구와 같이 주인의 소유로 여겨지던 시대입니다. 당시 사회에서는 가장 소외된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그들이 예배에 소외되어선 안된다고 명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은 예배에는 귀천이 없고 차별이 있을 수 없다는 뜻입니다.
톨스토이의 단편집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아내와 자식을 먼저 보내고 허망한 삶을 살고 있던 구두 수선공 마틴이란 노인은 친구의 권유로 성경을 읽는 중에 죄많은 여인이 예수님의 머리에 향유를 붓는 장면을 읽으며 감동을 받고 이런 생각을 합니다. '아무래도 내가 그 바리새인과 같아. 오직 내 자신만을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야. 차를 마시고 싶거나 따뜻한 옷을 입고 싶은 욕망은 오직 나만을 위한 생각이었을 뿐 손님을 위한 생각은 털끝만큼도 없었어. 손님의 일은 나 몰라라 하고 오직 나만 편하게 살았어. 그렇다면 나에게 있어서 손님은 누구인가? 분명히 하나님이실 거야. 만일 하나님께서 나를 찾아오신다면 과연 나는 어떻게 대할까?" 그리고 잠시 잠이 들었는데 그때 꿈속에서 예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마틴, 마틴아! 내일 창 너머로 한길을 내다보아라. 내가 이곳에 올 테니" 그 다음 날 아침이 되어 마틴은 창가에 앉아 일을 하기 보다는 창 너머를 내다보는 때가 많았습니다. 그날 마틴은 눈을 치우다 말고 삽을 벽에 기대어 놓고 우두커니 서 있는 스체파누이치 노인을 집으로 들어오게 해 따뜻한 차를 대접했습니다. 그리고 갓난아이와 밖에서 떨고 있는 초라한 옷차림의 다른 마을에 사는 여인도 집에 들여 난로 가까이 앉히고, 따뜻한 수프와 빵을 대접하고, 아이를 감쌀 낡은 외투도 주었습니다. 그리고 여인이 전당포에 잡혔다는 목도리도 되찾으라고 20카페이카를 줍니다. 그리고 사내아이가 할머니의 사과를 하나 훔쳐 달아나다 붙잡힌 사내아이가 할머니께 용서를 구하도록 하고, 할머니가 아이를 용서해주도록 했습니다. 그러나 그날 그를 찾아 오시겠다던 예수님은 오시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날 저녁 밤에 마틴은 꿈속에서 똑같은 음성을 듣습니다. "마틴, 마틴, 너는 나를 모르겠나?" '누구를 말입니까?' '나 말이야. 오늘 네가 만난 사람이 나라니까'
톨스토이는 사랑이 있는 곳에 하나님이 계신다는 이야기를 하기 위해 이 이야기를 썼습니다. 오늘 하나님의 말씀도 이와 동일합니다. 하나님은 예배의 장소나 형식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내 주변에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 특히 예배하는 즐거움, 말씀을 받는 즐거움, 성도간의 교제의 즐거움에 소외된 사람들을 찾고 그들을 돌보는 그런 예배에, 그런 모임에 함께 하십니다, 우리의 예배가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예배가 되려면 소외되는 사람이 없도록 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우리 가운데 소외된 사람들이 누구인지를 찾아야 합니다. 그들이 예배 가운데 나올 수 있도록 예배하는 즐거움 말씀을 받는 즐거움 교제의 즐거움에 참여하도록 도와야 합니다. 이를 위해 우리 JBF 친구들이 톨스토이의 단편에 나오는 마틴과 같이 내 가족, 내 친구 더 나아가 내 주변 사람들을 돌아보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사랑하는 자가 될 수 있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넷째, 예배의 변질과 타락을 일으키는 것들에 주의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면 그들은 그곳 사람들이 섬기는 우상들을 접하게될 것입니다. 그들이 어떤 신을 섬기는지 그리고 그 신을 어떻게 섬기는지를 보게 될 것입니다. 사람은 본성상 이렇게 새로운 것을 보고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되면 그 다음에는 자연스럽게 그것을 연구하고자 하는 지적 호기심이 생깁니다. 그런데 이렇게 다른 신들을 연구하다 그들이 제사를 드리는 방법이나 수양하는 방법이 좋아 보여서 따라할 수가 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이 명하신 것이 아닌데 하나 둘 이방신들의 제사를 모방하다보면 하나님이 명하신 예배가 변질되거나 타락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천주교에서 마리아를 신으로 숭배하는 것이나 천사를 숭배하는 것, 죽을 자를 위해 미사를 드리는 것들이 대표적으로 변질된 부분입니다. 많은 이단교회들이 꿈과 이적을 따르다 복음을 변질시키고 타락했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하나님이 명하신대로 순종하여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우리 JBF 친구들은 호기심이 생긴다고 이단이나 다른 신들을 섬기는 곳에 기웃거리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을 부지런히 공부하여 하나님을 바르게 알고 바르게 믿을 수 있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다음으로 모세는 꿈이나 이적으로 미혹하는 거짓 선지자를 주의하라고 합니다. 꿈이나 이적이 기독교에만 일어나는 일이 아닙니다. 불교나 이슬람교, 힌두교나 샤머니즘을 신봉하는 종교에서도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꿈과 이적에 미혹되어 이런 것들을 따라가다 보면 무분별하게 다른 신들을 받아들이게 되고 이단이나 불신에 빠질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꿈과 이적보다는 하나님의 완전한 계시인 성경말씀을 통해 바른 신앙, 바른 믿음을 배우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상에서 바른 예배에 대해서 그리고 바른 예배를 방해하는 것들에 대해서 배웠습니다. 예배는 하나님이 택하신 곳에서 드려야 합니다. 감사와 기쁨으로 드려야 합니다. 예배에는 소외되는 사람이 없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오늘날 이같이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십니다. 우리가 모두 이 시대의 하나님이 찾으시는 그 예배자, 그 한 사람이 될 수 있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이를 위해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 위에 바른 신앙, 바른 믿음의 집을 지을 수 있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바른 예배를 결단하는 우리 JBF 친구들이 모두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아멘
말씀 | 신명기 12:1-13:18
요절 | 신명기 12:18
여호와께서 택하신 곳에서
“오직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택하실 곳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너는 네 자녀와 노비와 성중에 거주하는 레위인과 함께 그것을 먹고 또 네 손으로 수고한 모든 일로 말미암아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즐거워하되”
최근 우리가 배우고 있는 신명기 말씀은 모세가 시내산에서 받은 율법을 다시 해설한 두 번째 율법이라 불리웁니다. 신명기란 뜻이 거듭 거듭 되풀이 되는 명령이란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의 명하신 계명의 말씀을 청종하면 그들이 약속하신 땅을 얻고 그 땅에서 장구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렇기에 모세는 가나안 입성을 앞둔 그들에게 거듭 거듭 하나님의 계명의 말씀을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 모세가 그의 백성에게 가르친 내용은 예배에 관한 것입니다. 그들이 차지하게 될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그들이 하나님을 어떻게 예배해야 하는지를 가르치십니다. 더불어 예배의 변질과 타락에 관한 주의와 경고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우리가 오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이 명하신 바른 예배에 대해 배우고 우리의 예배를 돌아볼 수 있길 기도합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예배가 하나님이 임재하시고 기뻐 받으시는 산예배가 될 수 있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1-3절을 봅시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들이 차지할 땅에서 지켜야할 규례와 법도에 대해 가르치십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가장 먼저 명하신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그곳에 있는 우상의 이름을 멸하라는 것입니다. 왜 그곳에 우상을 멸해야 하는 것입니까? 그곳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택하신 곳에 다른 신의 이름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이 말씀은 십계명 중 제1계명에 순종하라는 말씀입니다. 제1계명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나 외에 다른 신에 네게 있게 말지니라"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또 다른 이유는 그 땅의 죄를 심판하고 우상으로 더럽혀진 그 땅을 회복하라는 것입니다. 이는 가나안 정복전쟁을 앞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전쟁의 명분이 어디에 있는지를 다시한번 가르치신 것입니다. 가나안 정복전쟁의 명분은 단순히 그 땅을 차지하는데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우상에게 빼앗긴 그 땅을 회복하고 하나님의 것이 되게 하라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그 땅의 우상들을 멸해야 합니다. 그 땅의 신들의 이름을 그곳에서 제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에 하나님이 명하신 바른 예배를 드리기 위한 첫출발입니다.
오늘날 하나님께서 당신의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은 어디입니까? 그곳은 하나님의 성전된 우리 자신입니다. 고린도전서3:16,17절에서 사도바울은 이러게 말씀합니다.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 그렇기에 우리가 하나님께 바른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의 성전인 우리 안에 다른 신의 이름이 있다면 그 신들의 이름을 먼저 멸해야하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다른 신들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돈과 인기와 명예일 수도 있고 내 가족, 내 자신일 수도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든 내 안에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고 하나님보다 더 높아진 이름이 있다면 그 이름을 제거해야 합니다. 그것을 제거하는 방법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구체적으로 내 안에 있는 우상들의 이름을 고백하며 회개하는 것입니다. 요한일서1:9절은 말씀합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그렇기에 바른 예배의 시작은 제1계명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즉 내 안에 있는 다른 신들의 이름을 고백하며 회개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오늘 말씀에 기초해서 내 안에 있는 다른 신들의 이름을 발견하고 회개하므로 하나님의 성전된 우리 자신을 하나님 앞에 온전히 드릴 수 있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이제부터는 하나님이 명하신 바른 예배는 무엇인지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이 명하신 바른 예배는 무엇입니까?
첫째, 예배는 하나님이 택하신 곳에서 드려야 합니다. 하나님은 왜 예배를 하나님이 택하신 곳에서 드리라고 하실까요? 이를 이해하기 위해선 두 가지를 생각해 봐야 합니다. 첫째로 이 말씀을 할 당시 그들은 어떻게 예배를 드리고 있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8절을 봅시다. "우리가 오늘 여기에서는 각기 소견대로 하였거니와 너희가 거기에서는 그렇게 하지 말지니라"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 그들이 각기 소견대로 즉 자기 생각대로, 자기 눈에 보기 좋은 대로 드렸다는 것을 알 있습니다. 그래도 광야에서는 크게 문제될 것이 없었습니다. 그곳에서는 다른 신을 섬길 일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가나안 땅에 들어가면 그렇지 않습니다. 그곳에는 가는 곳마다 우상을 섬기는 산당이 있습니다. 그들이 각기 소견대로 예배를 드린다면 그들은 금방 우상숭배에 물들고 그들의 예배는 변질되고 타락하고 말 것입니다. 이를 우려하신 하나님은 그들이 예배할 장소로 세 곳을 택하셨는데 그곳이 바로 예루살렘, 세겜, 실로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최소한 일 년에 세 번 절기 때마다 이곳에 나와 예배를 드리도록 명하셨습니다. 이를 통해 그들이 예배의 통일성과 순수성을 지키도록 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이 오늘날 우리에게는 어떻게 적용이 될까요?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우리 주변에는 수많은 교회들이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교회가 어찌나 많은지 밤에 남산에 올라가서 보면 빨간 십자가로 가득하다고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렇게 많은 교회들 중에 어디서 예배를 드려야할까요? 이에 대해 하나님은 각기 소견대로, 눈에 보기 좋은 대로 하면 된다고 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자기 이름을 위하여 택하신 곳에서 예배를 드리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택하신 곳으로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택하신 곳에서 말씀을 배우고 영적인 훈련을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하나님이 맡기신 사명에 헌신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를 소명이라고 부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부르신 곳에서 예배해야 합니다. 그곳이 크던지 작던지, 그곳이 아무리 멀어도, 그곳에 어떠한 갈등과 아픔이 있어도 그곳에서 예배해야 합니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가 드릴 영적인 예배입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이렇게 당신 앞에 나아가 예배할 자들을 간절히 찾고 계십니다. 우리 JBF 친구들이 이 시대 하나님이 찾으시는 진정한 예배자들이 다 되시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둘째, 예배는 기쁨과 감사함으로 나와야 합니다. 6,7절을 봅시다. "너희의 번제와 너희의 제물과 너희의 십일조와 너희 손의 거제와 너희의 서원제와 낙헌 예물과 너희 소와 양의 처음 난 것들을 너희는 그리로 가져다가 드리고 거기 곧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먹고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의 손으로 수고한 일에 복 주심으로 말미암아 너희와 너희의 가족이 즐거워할지니라" 우리는 지난번에 헌금의 종류와 자세에 대해 상세히 배운 적이 있습니다. 십일조는 무엇입니까? 모든 소득의 십분의 일을 하나님께 구별하여 드리는 헌금입니다. 십일조는 십의 십을 대표하는 것으로 실상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임을 고백하는 창조신앙입니다. 거제, 서원제와 낙헌제 예물은 모두 감사의 예물입니다. 소와 양이 처음 난 것을 드리는 것을 첫 열매 헌금을 의미합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입니다. 하늘의 하늘이라도 하나님을 담을 수 없을만큼 하나님은 크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께서 왜 우리에게 예물을 들고 나오라고 하시는 것입니까? 왜냐하면 이 예물은 단순한 예물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감사와 기쁨의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감사의 마음을 예물에 담아 표현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예배에 나올 때 빈손으로 나오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담아 헌금도 준비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손으로 수고한 모든 일을 하나님이 축복해 주셨음을 기억할 때 기쁨으로 감사의 예물을 드릴 수 있습니다. 우리 JBF 친구들이 헌금생활을 통해 하나님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드려 예배하는 법을 배우고 그로인한 영적인 축복을 깨닫고 누릴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셋째, 예배는 소외되는 사람이 없어야 합니다. 11,12절을 봅시다. "너희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자기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실 그 곳으로 내가 명령하는 것을 모두 가지고 갈지니 곧 너희의 번제와 너희의 희생과 너희의 십일조와 너희 손의 거제와 너희가 여호와께서 원하시는 모든 아름다운 서원물을 가져가고 너희와 너희의 자녀와 노비와 함께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즐거워할 것이요 네 성중에 있는 레위인과도 그리할지니 레위인은 너희 중에 분깃이나 기업이 없음이니라" 하나님은 예배를 드리러 나올 때 너희의 자녀뿐만 아니라 노비도 함께 나오라고 하십니다. 당시 노비는 가축이나 가구와 같이 주인의 소유로 여겨지던 시대입니다. 당시 사회에서는 가장 소외된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그들이 예배에 소외되어선 안된다고 명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은 예배에는 귀천이 없고 차별이 있을 수 없다는 뜻입니다.
톨스토이의 단편집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아내와 자식을 먼저 보내고 허망한 삶을 살고 있던 구두 수선공 마틴이란 노인은 친구의 권유로 성경을 읽는 중에 죄많은 여인이 예수님의 머리에 향유를 붓는 장면을 읽으며 감동을 받고 이런 생각을 합니다. '아무래도 내가 그 바리새인과 같아. 오직 내 자신만을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야. 차를 마시고 싶거나 따뜻한 옷을 입고 싶은 욕망은 오직 나만을 위한 생각이었을 뿐 손님을 위한 생각은 털끝만큼도 없었어. 손님의 일은 나 몰라라 하고 오직 나만 편하게 살았어. 그렇다면 나에게 있어서 손님은 누구인가? 분명히 하나님이실 거야. 만일 하나님께서 나를 찾아오신다면 과연 나는 어떻게 대할까?" 그리고 잠시 잠이 들었는데 그때 꿈속에서 예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마틴, 마틴아! 내일 창 너머로 한길을 내다보아라. 내가 이곳에 올 테니" 그 다음 날 아침이 되어 마틴은 창가에 앉아 일을 하기 보다는 창 너머를 내다보는 때가 많았습니다. 그날 마틴은 눈을 치우다 말고 삽을 벽에 기대어 놓고 우두커니 서 있는 스체파누이치 노인을 집으로 들어오게 해 따뜻한 차를 대접했습니다. 그리고 갓난아이와 밖에서 떨고 있는 초라한 옷차림의 다른 마을에 사는 여인도 집에 들여 난로 가까이 앉히고, 따뜻한 수프와 빵을 대접하고, 아이를 감쌀 낡은 외투도 주었습니다. 그리고 여인이 전당포에 잡혔다는 목도리도 되찾으라고 20카페이카를 줍니다. 그리고 사내아이가 할머니의 사과를 하나 훔쳐 달아나다 붙잡힌 사내아이가 할머니께 용서를 구하도록 하고, 할머니가 아이를 용서해주도록 했습니다. 그러나 그날 그를 찾아 오시겠다던 예수님은 오시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날 저녁 밤에 마틴은 꿈속에서 똑같은 음성을 듣습니다. "마틴, 마틴, 너는 나를 모르겠나?" '누구를 말입니까?' '나 말이야. 오늘 네가 만난 사람이 나라니까'
톨스토이는 사랑이 있는 곳에 하나님이 계신다는 이야기를 하기 위해 이 이야기를 썼습니다. 오늘 하나님의 말씀도 이와 동일합니다. 하나님은 예배의 장소나 형식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내 주변에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 특히 예배하는 즐거움, 말씀을 받는 즐거움, 성도간의 교제의 즐거움에 소외된 사람들을 찾고 그들을 돌보는 그런 예배에, 그런 모임에 함께 하십니다, 우리의 예배가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예배가 되려면 소외되는 사람이 없도록 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우리 가운데 소외된 사람들이 누구인지를 찾아야 합니다. 그들이 예배 가운데 나올 수 있도록 예배하는 즐거움 말씀을 받는 즐거움 교제의 즐거움에 참여하도록 도와야 합니다. 이를 위해 우리 JBF 친구들이 톨스토이의 단편에 나오는 마틴과 같이 내 가족, 내 친구 더 나아가 내 주변 사람들을 돌아보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사랑하는 자가 될 수 있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넷째, 예배의 변질과 타락을 일으키는 것들에 주의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면 그들은 그곳 사람들이 섬기는 우상들을 접하게될 것입니다. 그들이 어떤 신을 섬기는지 그리고 그 신을 어떻게 섬기는지를 보게 될 것입니다. 사람은 본성상 이렇게 새로운 것을 보고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되면 그 다음에는 자연스럽게 그것을 연구하고자 하는 지적 호기심이 생깁니다. 그런데 이렇게 다른 신들을 연구하다 그들이 제사를 드리는 방법이나 수양하는 방법이 좋아 보여서 따라할 수가 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이 명하신 것이 아닌데 하나 둘 이방신들의 제사를 모방하다보면 하나님이 명하신 예배가 변질되거나 타락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천주교에서 마리아를 신으로 숭배하는 것이나 천사를 숭배하는 것, 죽을 자를 위해 미사를 드리는 것들이 대표적으로 변질된 부분입니다. 많은 이단교회들이 꿈과 이적을 따르다 복음을 변질시키고 타락했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하나님이 명하신대로 순종하여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우리 JBF 친구들은 호기심이 생긴다고 이단이나 다른 신들을 섬기는 곳에 기웃거리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을 부지런히 공부하여 하나님을 바르게 알고 바르게 믿을 수 있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다음으로 모세는 꿈이나 이적으로 미혹하는 거짓 선지자를 주의하라고 합니다. 꿈이나 이적이 기독교에만 일어나는 일이 아닙니다. 불교나 이슬람교, 힌두교나 샤머니즘을 신봉하는 종교에서도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꿈과 이적에 미혹되어 이런 것들을 따라가다 보면 무분별하게 다른 신들을 받아들이게 되고 이단이나 불신에 빠질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꿈과 이적보다는 하나님의 완전한 계시인 성경말씀을 통해 바른 신앙, 바른 믿음을 배우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상에서 바른 예배에 대해서 그리고 바른 예배를 방해하는 것들에 대해서 배웠습니다. 예배는 하나님이 택하신 곳에서 드려야 합니다. 감사와 기쁨으로 드려야 합니다. 예배에는 소외되는 사람이 없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오늘날 이같이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십니다. 우리가 모두 이 시대의 하나님이 찾으시는 그 예배자, 그 한 사람이 될 수 있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이를 위해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 위에 바른 신앙, 바른 믿음의 집을 지을 수 있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바른 예배를 결단하는 우리 JBF 친구들이 모두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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