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21강 진리의 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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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요한복음 제 21 강
말씀 요한복음 18:1-40
요절 요한복음 18:37
진리의 왕
“빌라도가 이르되 그러면 네가 왕이 아니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 내가 이를 위하여 태어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언하려 함이로라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음성을 듣느니라 하신대”
오늘 말씀은 체포당하신 예수님이 대제사장과 빌라도에게 심문을 받는 내용입니다. 오늘 본문 내용에는 세 사람이 나옵니다. 진리의 길을 가신 예수님, 실리를 선택한 빌라도, 진리와 실리 사이를 방황하는 베드로입니다. 그들은 우리의 삶을 대표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그들을 통해 현재 나의 삶이 누구를 닮아있는지를 볼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나의 삶을 성찰하고 어떻게 하면 진리의 길을 가신 예수님을 따를 수 있는지를 배울 수 있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첫째, 진리의 길을 가신 예수님
1-3절을 봅시다.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배반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체포할 수 있도록 그가 계신 곳으로 군대를 데리고 왔습니다. 그들은 등과 횃불과 무기를 가지고 왔습니다. 그들이 이렇게 중무장을 한 이유는 그들이 예수님을 체포하는 과정에서 그를 추종하는 자들과 일전을 치를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체포되신 후에 모진 심문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임을 당하셔야 합니다. 그는 그가 당할 모든 것을 이미 아셨습니다. 그러나 그는 고난을 피하지 않으셨습니다.
4-9절을 봅시다. 그는 모든 것을 아시면서도 자신을 감추려 하지 않고 도리어 그를 잡으러 온 자들에게 당당히 물으셨습니다. “너희가 누구를 찾느냐?” 그들이 나사렛 예수를 찾는다고 하자 그는 “내가 그로라” 하셨습니다. 이 말을 듣은 군인들은 깜짝 놀라 엎드러졌습니다. 이는 그들이 평소 예수님이 행하신 능력에 대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체포하기 위해 출동하게 된 것을 알고 그들은 이미 겁을 잔뜩 먹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기에 그들은 예수님이 “내가 그로라”하시니 엎드려진 것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예수님이 자신을 들어내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9절을 봅시다. “이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 중에서 하나도 잃지 아니하였사옵나이다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 이는 제자들을 보호하기 위함입니다. 작년에 세월호 참사로 온 나라가 슬픔에 빠진 적이 있습니다. 그때 세월호 선장이 자기만 살겠다고 배와 승객을 버리고 가장 먼저 탈출하여 국민의 공분을 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고난 앞에서 자신보다 제자들을 먼저 생각하셨습니다. 그는 십자가의 고난 앞에서도 목숨을 걸고 제자들을 지킨 참목자이셨습니다.
예수님의 생각대로 일이 잘 되어가고 있었는데 시몬 베드로가 돌발적인 행동을 하였습니다. 그는 갑자기 품에 갖고 있던 칼을 빼어 휘두르더니 대제사장의 종 말고의 귀를 베어 버렸습니다. 그 순간 제자들과 군인들이 충돌할 수 있는 일촉측발의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되면 제자들은 그 자리에서 체포되거나 죽임을 당할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베드로의 행동은 용기가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망하게 할 수 있는 무모한 행동이었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칼을 칼집에 꽃으라”고 하시고 아버지께서 주신 잔, 곧 고난의 잔을 마시고자 결심하셨음을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얼마든지 자신을 구원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자신의 능력을 내려놓고 무장해제를 하고 순순히 체포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이것이 범죄한 인간을 구원하고자 하나님께서 창세전부터 예정하신 하나님의 계획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길만이 죄인들을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도 당할 고난을 생각할 때 마음이 민망하고 고통스러웠습니다. 그러나 그는 체포되시기 전날 밤, 겟세마네 동산에서 밤새도록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도록 하나님께 통곡의 기도를 드리셨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의 기도는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로 마치게 되었습니다.
아버지의 잔을 마시고자 결단하신 후 예수님은 그의 죽음을 통해 얻게 될 수많은 열매들과 죽음 후에 얻게 될 부활의 영광을 바라보셨습니다. 이 땅에서 당하는 고난은 잠깐이지만 그가 얻게 될 영광은 영원함을 바라보셨습니다. 그는 고난과 죽음 뒤에 있는 영광을 바라보셨기에 다가오는 고난이 두렵지 않았습니다. 그는 고난 뒤에 얻게 될 영광에 대한 확신으로 고난에 당당히 맞설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기에 그는 고난 앞에 굴복하지 않고, 온 인류를 구원할 진리의 길, 십지가의 길을 가실 수 있었습니다.
우리도 내가 가는 길이 고난과 죽음으로 끝나지 않는다. 그 뒤에는 반드시 부활이 있고 영광이 있고 하나님의 나라가 있음을 바라볼 때 환란과 핍박 속에서도 확신가운데 기뻐하며 예수님을 따를 수 있습니다. 끝까지 진리의 길을 갈 수 있습니다. 우리 안에 이 세상에서 죽음과 함께 사라질 영광이 아닌 영원한 영광을 바라볼 수 있는 믿음을 주시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둘째, 실리의 길을 선택한 빌라도
12,13절을 봅시다. 군병들에게 체포되신 예수님은 결박당한체로 그 해의 대제사장 안나스의 장인인 가야바에게 심문을 받으셨습니다. 가야바는 유대인들에게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유익하다고 권고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진리의 왕이신 예수님을 죽이고 자신들의 기득권이라는 실리를 얻고자 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그에게 큰 문제가 하나 있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예수님을 사형에 언도할 권한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꾸민 계략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예수님을 로마를 반역한 죄로 빌라도의 법정에 고소하는 것이었습니다.
28-30절을 봅시다. “그들이 예수님을 가야바에게서 관정으로 끌고 가니 새벽이라 그들은 더럽힘을 받지 아니하고 유월절 잔치를 먹고자 하여 관정에 들어가지 아니하더라 그러므로 빌라도가 밖으로 나가서 그들에게 말하되 너희가 무슨 일로 이 사람을 고발하느냐 대답하여 이르되 이 사람이 행악자가 아니었더라면 우리가 당신에게 넘기지 아니하였겠나이다” 유대의 종교지도자들은 더럽힘을 받지 아니하고 유월절 잔치를 먹고자 빌라도의 관정에 들어가지 않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마치 진리의 수호자인 것처럼 요란을 떨고 있지만 실상 그들은 철저히 자신들의 종교적 기득권이란 실리를 추구하는 위선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실을 빌라도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의 아내도 꿈 이야기를 하며 그에게 이 일에 관여하지 말라는 충고를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그는 재판관으로서 예수님의 무죄를 선언하고 그를 석방해야 마땅합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로마황제는 그가 추종하는 실리의 왕이었습니다. 그런데 만일 민란이 일어나면 그는 로마황제에게 파면을 당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렇기에 그는 민란이 일어나는 것을 가장 두려워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유대의 총독을 발판으로 로마의 원로원에 진출하고자 하는 야망이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야망이라는 실리를 잃지 않기 위해 예수님을 무죄판결하고 석방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는 더 나아가 실리를 추구하되 나름대로 명분도 얻고자 하였습니다. 그는 이 둘을 모두 얻을 수 있는 방법으로 유월절 특사로 죄수 하나를 놓아주는 전례를 이용하고자 하였습니다. 이를 통해 예수님을 놓아줄 명분을 얻고 민란이 일어나는 것을 막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당시 사람을 죽이고 사형언도를 받은 흉악범 강도 바라바와 예수님을 백성들 앞에 세웠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물었습니다. “너희는 내가 누구를 놓아주기를 원하느냐? 너희의 왕, 예수냐? 아니면 바라바냐?” 예수님과 바라바는 비교할 수 없는 대상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이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하라고 하면 당연히 예수님을 선택해야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백성들은 바라바를 외쳤습니다. “바라바를 놓아주시오” 빌라도는 놀라고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는 백성들에게 물었습니다. “너희의 왕은 어떻게 하랴?” 그때 백성들이 외쳤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그를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실리와 명분을 얻고자 한 빌라도는 결국 이렇게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도록 내어준 역사의 죄인이 되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이를 통해 명분도 얻고 실리도 챙길 수 있다고 생각한 빌라도의 생각이 얼마나 비참한 결과를 낳게 되었는지 그리고 그 결과에 대한 책임이 얼마나 무거운 것인지를 배울 수 있습니다. 세상과 타협하면서 결코 진리의 길을 갈 수 없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내어준 후에 양심을 가책을 받아 괴워합니다. 그는 로마황제에게 파면당한 후 유배지에서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고 맙니다. 진리의 길을 가고자 할 때 총독의 자리를 내려놓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 각오를 하지 않고 그런 결단을 하지 않고 명분도 얻고 실리를 챙기려고 한다면 필경 빌라도의 길을 갈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세상의 실리와 타협치 않고 진리의 왕이신 예수님을 절대적인 자세로 따를 수 있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셋째, 진리와 실리 사이에서 방황하는 베드로
베드로는 누구보다도 예수님을 사랑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진리의 왕으로 믿고 죽는 데까지 그를 따르기를 원했습니다. 그것은 그의 진심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믿음대로 살지 못했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심문받으시던 가야바의 뜰에서 불을 쬐다가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하고 말았습니다. 이는 그가 진리를 알지만 진리를 따를 준비를 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를 아시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그에게 시험에 들지 않도록 깨어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이 기도하실 동안 근심하며 잠만 잤습니다. 그 결과 그는 그에게 닥치는 고난을 감당할 준비를 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로인해 그는 예수님이 체포되실 때 두려운 나머지 칼을 휘두룬 것입니다. 이는 그 자신뿐 아니라 제자들을 위험에 빠뜨릴 수 있는 치명적인 실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런 그의 모든 허물을 감당해 주셨기에 그는 예수님이 체포되실 때 안전하게 피할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진리와 실리 사이에서 방황하고 실수하고 실패하는 베드로의 모습은 우리의 모습과 너무나도 닮은 점이 많습니다. 그래서 이런 베드로의 모습을 우리는 “우리의 자화상”이라고 부르곤 합니다. 그는 진리의 왕이신 예수님과 자신의 안전이라는 실리 사이에서 이러지도 저리지도 못하는 멀찍이서 예수님을 어정쩡하게 따랐습니다. 그러나 마침내는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하게 됩니다. 그는 이 사건을 통해 자신이 얼마나 나약한 자인가를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이런 그를 끝까지 사랑하신 예수님의 사랑을 깨닫고 뜨거운 회개의 눈물을 흘립니다. 그는 이 실패를 거울삼아 그 후에는 자신을 과신하지 않고 기도하는 사람이 됩니다. 자신과 같이 연약한 자를 이해하고 위로하는 목자가 됩니다. 그리고 마침내는 그 자신도 예수님과 같이 십자가에 못 박혀 순교를 합니다. 그는 예수님과 같이 못 박혀 주는 것도 황송하다고 하면서 거꾸로 매달려 죽임을 당했다고 합니다.
우리도 때로 베드로처럼 연약해서 넘어지고 준비하지 못해 실패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사실은 그것이 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그 실패를 거울삼아 더욱더 진리의 왕이신 예수님을 따를 수 있는 철저한 준비를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그는 매일같이 깨어 기도하는 삶을 살고 자신을 의지하지 않고 철저히 주님을 의지하는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일생 진리의 왕 되신 예수님을 따르며 복음의 진리를 전파하는 삶을 살 수 있었습니다.
엊그제 10월2일 미국의 한 대학에서 끔찍한 총기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총격 사건으로 10명이 숨지고 7명이 다쳤는데 총격 범은 총격 범은 '네가 기독교 신자면 일어서'라고 하고 학생들이 일어서자 '좋아, 네가 기독교 신자니까 1초 뒤에 하나님을 만나게 될 거야' 그러면서 총을 쏴 죽였다고 합니다. 참으로 비통한 일입니다. 그런데 저는 이 소식을 듣고 이런 생각을 들었습니다. 만일 내가 그 상황 속에 있었다면 일어날 수 있었을까? 이 질문 앞에 제 마음이 떨리고 두려웠습니다. 제게 믿음이 필요함을 깨달았습니다. 여러분은 어떨까요? 여러분은 지금 당장 죽어도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는 믿음이 있나요?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그 사건 현장에는 그러한 믿음으로 일어난 학생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지금 하나님과 함께 있을 것을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슬픔에 빠진 희생자들의 유족들을 위로해 주시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진리의 길을 갈 수 있을까? 어떻게 진리의 왕 되신 예수님을 끝까지 따를 수 있을까요? 그것은 베드로처럼 나의 약함을 알고 겸손히 기도하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자신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를 믿는 자들을 위해 하나님이 예비하신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가 매일 매일을 삶을 살다보면 우리는 우리의 삶의 결정적이 순간에 빌라도와 같이 실리를 선택하지 않고 베드로와 같이 진리와 실리 사이에서 방황하지 않고 예수님처럼 진리의 길을 갈 수 있습니다. 그 순간이 바로 내 목숨을 내놓아야 하는 순간일지라도 우리는 그 길을 갈 수 있습니다. 우리 JBF 친구들이 자신의 약점과 실패를 거울삼아 베드로처럼 더욱더 주님을 의지하고 기도하는 사람이 되어 끝까지 진리의 왕되신 예수님을 따르고 복음의 진리를 전파하는 삶을 살게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말씀 요한복음 18:1-40
요절 요한복음 18:37
진리의 왕
“빌라도가 이르되 그러면 네가 왕이 아니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 내가 이를 위하여 태어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언하려 함이로라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음성을 듣느니라 하신대”
오늘 말씀은 체포당하신 예수님이 대제사장과 빌라도에게 심문을 받는 내용입니다. 오늘 본문 내용에는 세 사람이 나옵니다. 진리의 길을 가신 예수님, 실리를 선택한 빌라도, 진리와 실리 사이를 방황하는 베드로입니다. 그들은 우리의 삶을 대표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그들을 통해 현재 나의 삶이 누구를 닮아있는지를 볼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나의 삶을 성찰하고 어떻게 하면 진리의 길을 가신 예수님을 따를 수 있는지를 배울 수 있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첫째, 진리의 길을 가신 예수님
1-3절을 봅시다.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배반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체포할 수 있도록 그가 계신 곳으로 군대를 데리고 왔습니다. 그들은 등과 횃불과 무기를 가지고 왔습니다. 그들이 이렇게 중무장을 한 이유는 그들이 예수님을 체포하는 과정에서 그를 추종하는 자들과 일전을 치를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체포되신 후에 모진 심문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임을 당하셔야 합니다. 그는 그가 당할 모든 것을 이미 아셨습니다. 그러나 그는 고난을 피하지 않으셨습니다.
4-9절을 봅시다. 그는 모든 것을 아시면서도 자신을 감추려 하지 않고 도리어 그를 잡으러 온 자들에게 당당히 물으셨습니다. “너희가 누구를 찾느냐?” 그들이 나사렛 예수를 찾는다고 하자 그는 “내가 그로라” 하셨습니다. 이 말을 듣은 군인들은 깜짝 놀라 엎드러졌습니다. 이는 그들이 평소 예수님이 행하신 능력에 대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체포하기 위해 출동하게 된 것을 알고 그들은 이미 겁을 잔뜩 먹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기에 그들은 예수님이 “내가 그로라”하시니 엎드려진 것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예수님이 자신을 들어내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9절을 봅시다. “이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 중에서 하나도 잃지 아니하였사옵나이다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 이는 제자들을 보호하기 위함입니다. 작년에 세월호 참사로 온 나라가 슬픔에 빠진 적이 있습니다. 그때 세월호 선장이 자기만 살겠다고 배와 승객을 버리고 가장 먼저 탈출하여 국민의 공분을 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고난 앞에서 자신보다 제자들을 먼저 생각하셨습니다. 그는 십자가의 고난 앞에서도 목숨을 걸고 제자들을 지킨 참목자이셨습니다.
예수님의 생각대로 일이 잘 되어가고 있었는데 시몬 베드로가 돌발적인 행동을 하였습니다. 그는 갑자기 품에 갖고 있던 칼을 빼어 휘두르더니 대제사장의 종 말고의 귀를 베어 버렸습니다. 그 순간 제자들과 군인들이 충돌할 수 있는 일촉측발의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되면 제자들은 그 자리에서 체포되거나 죽임을 당할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베드로의 행동은 용기가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망하게 할 수 있는 무모한 행동이었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칼을 칼집에 꽃으라”고 하시고 아버지께서 주신 잔, 곧 고난의 잔을 마시고자 결심하셨음을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얼마든지 자신을 구원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자신의 능력을 내려놓고 무장해제를 하고 순순히 체포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이것이 범죄한 인간을 구원하고자 하나님께서 창세전부터 예정하신 하나님의 계획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길만이 죄인들을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도 당할 고난을 생각할 때 마음이 민망하고 고통스러웠습니다. 그러나 그는 체포되시기 전날 밤, 겟세마네 동산에서 밤새도록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도록 하나님께 통곡의 기도를 드리셨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의 기도는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로 마치게 되었습니다.
아버지의 잔을 마시고자 결단하신 후 예수님은 그의 죽음을 통해 얻게 될 수많은 열매들과 죽음 후에 얻게 될 부활의 영광을 바라보셨습니다. 이 땅에서 당하는 고난은 잠깐이지만 그가 얻게 될 영광은 영원함을 바라보셨습니다. 그는 고난과 죽음 뒤에 있는 영광을 바라보셨기에 다가오는 고난이 두렵지 않았습니다. 그는 고난 뒤에 얻게 될 영광에 대한 확신으로 고난에 당당히 맞설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기에 그는 고난 앞에 굴복하지 않고, 온 인류를 구원할 진리의 길, 십지가의 길을 가실 수 있었습니다.
우리도 내가 가는 길이 고난과 죽음으로 끝나지 않는다. 그 뒤에는 반드시 부활이 있고 영광이 있고 하나님의 나라가 있음을 바라볼 때 환란과 핍박 속에서도 확신가운데 기뻐하며 예수님을 따를 수 있습니다. 끝까지 진리의 길을 갈 수 있습니다. 우리 안에 이 세상에서 죽음과 함께 사라질 영광이 아닌 영원한 영광을 바라볼 수 있는 믿음을 주시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둘째, 실리의 길을 선택한 빌라도
12,13절을 봅시다. 군병들에게 체포되신 예수님은 결박당한체로 그 해의 대제사장 안나스의 장인인 가야바에게 심문을 받으셨습니다. 가야바는 유대인들에게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유익하다고 권고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진리의 왕이신 예수님을 죽이고 자신들의 기득권이라는 실리를 얻고자 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그에게 큰 문제가 하나 있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예수님을 사형에 언도할 권한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꾸민 계략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예수님을 로마를 반역한 죄로 빌라도의 법정에 고소하는 것이었습니다.
28-30절을 봅시다. “그들이 예수님을 가야바에게서 관정으로 끌고 가니 새벽이라 그들은 더럽힘을 받지 아니하고 유월절 잔치를 먹고자 하여 관정에 들어가지 아니하더라 그러므로 빌라도가 밖으로 나가서 그들에게 말하되 너희가 무슨 일로 이 사람을 고발하느냐 대답하여 이르되 이 사람이 행악자가 아니었더라면 우리가 당신에게 넘기지 아니하였겠나이다” 유대의 종교지도자들은 더럽힘을 받지 아니하고 유월절 잔치를 먹고자 빌라도의 관정에 들어가지 않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마치 진리의 수호자인 것처럼 요란을 떨고 있지만 실상 그들은 철저히 자신들의 종교적 기득권이란 실리를 추구하는 위선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실을 빌라도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의 아내도 꿈 이야기를 하며 그에게 이 일에 관여하지 말라는 충고를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그는 재판관으로서 예수님의 무죄를 선언하고 그를 석방해야 마땅합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로마황제는 그가 추종하는 실리의 왕이었습니다. 그런데 만일 민란이 일어나면 그는 로마황제에게 파면을 당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렇기에 그는 민란이 일어나는 것을 가장 두려워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유대의 총독을 발판으로 로마의 원로원에 진출하고자 하는 야망이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야망이라는 실리를 잃지 않기 위해 예수님을 무죄판결하고 석방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는 더 나아가 실리를 추구하되 나름대로 명분도 얻고자 하였습니다. 그는 이 둘을 모두 얻을 수 있는 방법으로 유월절 특사로 죄수 하나를 놓아주는 전례를 이용하고자 하였습니다. 이를 통해 예수님을 놓아줄 명분을 얻고 민란이 일어나는 것을 막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당시 사람을 죽이고 사형언도를 받은 흉악범 강도 바라바와 예수님을 백성들 앞에 세웠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물었습니다. “너희는 내가 누구를 놓아주기를 원하느냐? 너희의 왕, 예수냐? 아니면 바라바냐?” 예수님과 바라바는 비교할 수 없는 대상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이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하라고 하면 당연히 예수님을 선택해야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백성들은 바라바를 외쳤습니다. “바라바를 놓아주시오” 빌라도는 놀라고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는 백성들에게 물었습니다. “너희의 왕은 어떻게 하랴?” 그때 백성들이 외쳤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그를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실리와 명분을 얻고자 한 빌라도는 결국 이렇게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도록 내어준 역사의 죄인이 되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이를 통해 명분도 얻고 실리도 챙길 수 있다고 생각한 빌라도의 생각이 얼마나 비참한 결과를 낳게 되었는지 그리고 그 결과에 대한 책임이 얼마나 무거운 것인지를 배울 수 있습니다. 세상과 타협하면서 결코 진리의 길을 갈 수 없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내어준 후에 양심을 가책을 받아 괴워합니다. 그는 로마황제에게 파면당한 후 유배지에서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고 맙니다. 진리의 길을 가고자 할 때 총독의 자리를 내려놓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 각오를 하지 않고 그런 결단을 하지 않고 명분도 얻고 실리를 챙기려고 한다면 필경 빌라도의 길을 갈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세상의 실리와 타협치 않고 진리의 왕이신 예수님을 절대적인 자세로 따를 수 있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셋째, 진리와 실리 사이에서 방황하는 베드로
베드로는 누구보다도 예수님을 사랑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진리의 왕으로 믿고 죽는 데까지 그를 따르기를 원했습니다. 그것은 그의 진심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믿음대로 살지 못했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심문받으시던 가야바의 뜰에서 불을 쬐다가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하고 말았습니다. 이는 그가 진리를 알지만 진리를 따를 준비를 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를 아시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그에게 시험에 들지 않도록 깨어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이 기도하실 동안 근심하며 잠만 잤습니다. 그 결과 그는 그에게 닥치는 고난을 감당할 준비를 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로인해 그는 예수님이 체포되실 때 두려운 나머지 칼을 휘두룬 것입니다. 이는 그 자신뿐 아니라 제자들을 위험에 빠뜨릴 수 있는 치명적인 실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런 그의 모든 허물을 감당해 주셨기에 그는 예수님이 체포되실 때 안전하게 피할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진리와 실리 사이에서 방황하고 실수하고 실패하는 베드로의 모습은 우리의 모습과 너무나도 닮은 점이 많습니다. 그래서 이런 베드로의 모습을 우리는 “우리의 자화상”이라고 부르곤 합니다. 그는 진리의 왕이신 예수님과 자신의 안전이라는 실리 사이에서 이러지도 저리지도 못하는 멀찍이서 예수님을 어정쩡하게 따랐습니다. 그러나 마침내는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하게 됩니다. 그는 이 사건을 통해 자신이 얼마나 나약한 자인가를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이런 그를 끝까지 사랑하신 예수님의 사랑을 깨닫고 뜨거운 회개의 눈물을 흘립니다. 그는 이 실패를 거울삼아 그 후에는 자신을 과신하지 않고 기도하는 사람이 됩니다. 자신과 같이 연약한 자를 이해하고 위로하는 목자가 됩니다. 그리고 마침내는 그 자신도 예수님과 같이 십자가에 못 박혀 순교를 합니다. 그는 예수님과 같이 못 박혀 주는 것도 황송하다고 하면서 거꾸로 매달려 죽임을 당했다고 합니다.
우리도 때로 베드로처럼 연약해서 넘어지고 준비하지 못해 실패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사실은 그것이 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그 실패를 거울삼아 더욱더 진리의 왕이신 예수님을 따를 수 있는 철저한 준비를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그는 매일같이 깨어 기도하는 삶을 살고 자신을 의지하지 않고 철저히 주님을 의지하는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일생 진리의 왕 되신 예수님을 따르며 복음의 진리를 전파하는 삶을 살 수 있었습니다.
엊그제 10월2일 미국의 한 대학에서 끔찍한 총기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총격 사건으로 10명이 숨지고 7명이 다쳤는데 총격 범은 총격 범은 '네가 기독교 신자면 일어서'라고 하고 학생들이 일어서자 '좋아, 네가 기독교 신자니까 1초 뒤에 하나님을 만나게 될 거야' 그러면서 총을 쏴 죽였다고 합니다. 참으로 비통한 일입니다. 그런데 저는 이 소식을 듣고 이런 생각을 들었습니다. 만일 내가 그 상황 속에 있었다면 일어날 수 있었을까? 이 질문 앞에 제 마음이 떨리고 두려웠습니다. 제게 믿음이 필요함을 깨달았습니다. 여러분은 어떨까요? 여러분은 지금 당장 죽어도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는 믿음이 있나요?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그 사건 현장에는 그러한 믿음으로 일어난 학생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지금 하나님과 함께 있을 것을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슬픔에 빠진 희생자들의 유족들을 위로해 주시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진리의 길을 갈 수 있을까? 어떻게 진리의 왕 되신 예수님을 끝까지 따를 수 있을까요? 그것은 베드로처럼 나의 약함을 알고 겸손히 기도하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자신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를 믿는 자들을 위해 하나님이 예비하신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가 매일 매일을 삶을 살다보면 우리는 우리의 삶의 결정적이 순간에 빌라도와 같이 실리를 선택하지 않고 베드로와 같이 진리와 실리 사이에서 방황하지 않고 예수님처럼 진리의 길을 갈 수 있습니다. 그 순간이 바로 내 목숨을 내놓아야 하는 순간일지라도 우리는 그 길을 갈 수 있습니다. 우리 JBF 친구들이 자신의 약점과 실패를 거울삼아 베드로처럼 더욱더 주님을 의지하고 기도하는 사람이 되어 끝까지 진리의 왕되신 예수님을 따르고 복음의 진리를 전파하는 삶을 살게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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