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제 18 강 내 안에 거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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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요한복음 제 18 강
말씀 요한복음 15:1-27
요절 요한복음 15:4
내 안에 거하라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요한복음13장부터 시작된 다락방 강화에서 예수님은 제자들 곁을 떠나신다는 말씀을 여러번 하셨습니다. 이로 인해 제자들의 마음에 근심이 생겼습니다. 또한 예수님을 계속 따를 수 있을지 걱정이 되었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14장에서 근심하는 제자들에게 “너희는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고 말씀하셨고 예수님이 하나님께 이르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심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예수님이 그들의 곁을 떠나신다고 하니 그들도 떠나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그들에게 예수님은 “내 안에 거하라”고 하십니다. 내 안에 거할 때 그들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열매를 맺을 수 있고 그들도 나의 기쁨을 누릴 수 있다고 하십니다.
우리의 삶은 하나님 앞에서 열매로 평가를 받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열매는 무엇인지 그리고 그 열매를 어떻게 맺을 수 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오늘 말씀을 통해 열매맺는 삶의 비결을 배워서 우리의 삶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열매로 풍성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1절을 보십시오. “나는 참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라” 예수님은 하나님과 예수님, 그리고 제자들의 관계를 포도나무의 비유를 통해서 설명해 주셨습니다. 농부와 포도나무, 포도나무와 가지는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입니다. 특히 포도나무와 가지는 생명의 관계요, 연합된 관계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신 창조주로서 온 세상의 주인이 되십니다. 세상은 하나님의 포도원이요, 하나님은 그 포도원을 가꾸는 농부가 되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가꾸시는 포도원에 심겨진 참 포도나무요, 제자들은 그 가지입니다. 예수님을 참 포도나무라고 하신 것은 예수님만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생명의 열매를 맺을 수 있는 유일한 포도나무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2절을 보십시오. “무릇 내게 붙어 있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그것을 제거해 버리시고 무릇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열매를 맺게 하려 하여 그것을 깨끗하게 하시느니라” 농부는 포도나무를 관상용으로 심지 않습니다. 농부가 원하는 것은 포도나무의 아름다움이나 무성한 잎이 아니라 열매입니다. 그것도 보통의 열매가 아니라 극상품의 열매를 원합니다. 극상품의 포도를 얻기 위해 농부가 반드시 하는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포도나무의 가지를 치는 일입니다. 병들거나 죽은 가지만 치는 것이 아니라 괜찮은 가지도 과감하게 칩니다. 이렇게 해줘야 열매맺는 가지에 물과 양분이 집중되어 열매가 튼실해지기 때문입니다.
2절 말씀을 보면 예수님은 내게 붙어 있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가지가 있고 열매를 맺는 가지가 있다고 하는데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어떤 가지를 말하는 것일까요? 이 가지는 명목상의 신자를 의미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회개의 열매가 없습니다. 교회의 안에 있을 때는 신자인데 세상에 나가면 세상 사람들과 다를 바가 없이 살아갑니다. 그들은 교회 안에서 타이틀과 사람들의 인정을 추구합니다. 그들은 하나님 앞에 내세울 열매가 없습니다. 그들은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고 밖에서 울며 이를 갈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열매맺지 못하는 가지가 예수님의 열 두 제자 중에도 있었습니다. 그는 바로 가룟 유다입니다. 그는 3년 반 동안 예수님을 따라 다녔습니다. 그러나 그는 실상 예수님을 따른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이용해 자신의 야망을 이루고자 했습니다. 자신의 뜻대로 예수님이 움직여주지 않자 그는 예수님을 배반하고 은삼십에 예수님을 팔아버렸습니다. 그는 제자그룹에서 제하여졌고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는 비참한 최후를 맞고 말았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말씀에 기초하여 내가 열매를 맺는 가지인지 열매를 맺지 못하는 가지인지를 돌아봐야 합니다. 내가 열매맺는 가지로 살아가고 있다면 참으로 감사한 일이지만 만일 열매맺지 않는 가지로 살아가고 있다면 이는 실로 심각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열매맺지 않는 가지는 반드시 천국에서 제하여질 것이고 지옥의 땔감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어떻게 하면 열매맺는 가지로 살아갈 수 있는지를 진지하게 배워야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살아갈 수 있도록 진심으로 기도하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해야 합니다. 우리 JBF 친구들이 하나님이 보실 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극상품의 열매를 맺는 가지로 살아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제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또 근심하기 시작했습니다. 무슨 근심을 했을까요? 혹시 내가 열매를 맺지 아니한 가지는 아닌가? 하나님이 나를 제하여 버리시면 어떻하지? 하고 근심을 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렇게 근심하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어떻게 하면 열매를 맺는 가지로 살아갈 수 있는지를 가르쳐 주십니다.
4-6절을 보십시오.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려져 마르나니 사람들이 그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
예수님은 열매를 맺기 위해 “율법을 열심히 지키라”거나 “제사를 열심히 드리라” 혹은 “공부를 열심히 하라”거나 “일을 열심히 하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는 “내 안에 거하라”라고 하십니다.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으면 열매를 맺는 것 같이 너희도 내 안에 거하면 열매를 맺을 수 있다고 하십니다. 그러면 예수님 안에 거한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첫째로 말씀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7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예수님이 오병이어로 오천명을 먹이시는 표적을 행하셨습니다. 이 표적을 본 사람들이 이제는 예수님께 떡을 얻어 먹고자 나왔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그들에게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때 사람들이 실망하고 예수님을 떠나갔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열 두 제자들에게 이렇게 물으셨습니다. “너희도 가려느냐?” 그때 베드로가 대답합니다.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 그렇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따른 이유는 그 안에 영생의 말씀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안에 예수님의 말씀이 있으면 우리는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예수님 안에 거할 수 있습니다. 제가 지난 번 메시지에서 소개한 토미워커를 기억하시나요? 그는 우리가 애창하는 “네 이름 아시죠?(You know my name?)”를 지은 찬양사역자인데 그는 무명시절 하나님이 그의 이름을 손바닥에 새겼다 그를 아신다 그를 기억하신다는 이사야서 말씀을 통해 그는 예수님 안에 거할 수 있었고 힘든 시기를 극복할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살다보면 근심할 때가 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그들의 곁을 떠난다고 하니 근심합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 일상의 일들을 걱정합니다. 그런데 물질이 떨어지고 건강이 나빠지고 무슨 큰 사고라도 당하면 그 사람은 얼마나 근심이 많겠습니까? 여러분들은 어떤 일들로 근심하고 있나요? 조금 있으면 중간고사를 봐야 하니 시험 때문에 걱정이 되나요? 원하는 대학에 들어갈 수 있을지 근심하나요? 부모님들과의 관계에, 친구들과의 관계에 문제가 있어서 근심하나요? 우리는 우리의 삶에 일어나는 이런 저런 일들 때문에 근심을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진짜 근심하는 이유는 이런 문제들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가 근심하는 진짜 이유는 우리 안에 예수님의 말씀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근심합니다.
내 안에 예수님의 말씀이 있는지 없는지 어떻게 알까요? 예수님의 말씀이 있는 사람은 이렇게 근심된 일들이 생길 때 남다른 일을 합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7절을 다시한번 읽어봅시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그것은 바로 기도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있는 사람은 기도를 합니다. 그냥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에 기초해서 기도합니다. 중간고사를 생각하면 근심이 됩니다. 그때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4:13)말씀을 붙잡고 믿음으로 기도하고 공부를 합니다. 나의 장래가 어떻게 될지 막막하고 두려울 때가 있습니다. 그때 “너희는 근심하지 마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는 말씀을 붙잡고 믿음으로 살고자 기도합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말씀이 있는 사람은 기도를 합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예수님의 말씀으로 기도하는 자들의 기도를 들으십니다. 그리고 그 말씀의 열매를 맺도록 응답해 주십니다.
여러분 저도 그런 경험이 있습니다. 저는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미국공인회계사 시험을 준비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모세가 한돌 되던 해였습니다. 이렇게 한 집안의 가장으로서 돈을 벌지 않고 공부를 시작하게 된 것이 제게는 너무나 큰 부담이었고 두려움이었습니다. 그때 저는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요11:40) 말씀을 매일 100번을 쓰며 이 말씀에 기초해서 제가 믿음으로 공부할 수 있도록 기도했습니다. 그때 저는 두려움에 시달리지 않고 매일 8시간을 집중하여 공부할 수 있었고 기도한대로 한번에 시험에 합격을 할 수 있었습니다. 이를 통해 내 안에 예수님의 말씀이 있으면 반드시 열매를 맺는다는 것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여러분들도 예수님의 말씀 안에 거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의 말씀으로 기도하는 모든 기도를 들으시고 그 말씀을 열매로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이렇게 말씀의 열매를 맺는 것을 통해 영광을 받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JBF 친구들도 예수님의 말씀 안에서 많은 열매를 맺으시고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삶을 살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드립니다. 아멘
둘째로 예수님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9,10절을 보십시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제자들은 예수님이 그들의 곁을 떠나신다고 말씀하시니 근심이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이 그들을 버리고 떠나시는 것 같아 예수님의 사랑에 대한 의심이 생겼습니다. 이런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그들을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아니하셨습니다. 그의 사랑은 십자가의 사랑입니다. 그의 사랑은 죽음보다 강한 사랑입니다. 예수님은 그 사랑으로 그들의 허다한 죄와 허물을 품으셨고 그들을 구원하셨습니다. 그 사랑을 깨달을 때, 그 사랑을 기억할 때 우리는 어떤 상황 속에서도 예수님 안에 거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한 베드로는 수제자로서 깊은 죄책감과 실패의식에 빠져 있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이런 베드로를 찾아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너 왜 그랬니? 그러고도 니가 수제자냐?”라고 호통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세 번을 반복해서 물으셨습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예수님께 세 번 사랑고백을 하였습니다. 이를 통해 그가 다시금 예수님 안에 거할 수 있도록 하신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이 예수님의 사랑을 이렇게 고백합니다. “그는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연약할 때에, 원수 되었을 때에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롬5:6-10) 그는 이 예수님의 사랑에 강권되어 일생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 아무것도 빚지지 않기로 결심을 했습니다. 우리는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자기 목숨을 내어주시기까지 나를 사랑하신 주님의 사랑 안에 거해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사랑 안에 거할 때 우리는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주님을 배반하지 않고 자기의 길로 가지 않고 주님을 따를 수 있습니다. 주님이 맡기신 사명을 완수할 수 있습니다. 그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실 때 우리는 어떠한 상황속에서도 기뻐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는 것이 예수님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입니까? 10절과 12절을 보십시오.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10),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12)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것이 구체적으로 예수님의 사랑 안에 거하는 방법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사랑 안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예수님 안에 거하길 원하시나요? 그렇다면 서로 사랑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의 사랑 안에 예수님이 함께 하실 것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이 말씀을 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11절을 보십시오.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여러분 진정한 신앙은 예수님의 기쁨이 내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내 기쁨을 추구하면 우리는 예수님 밖에 있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기쁨을 추구하면 우리는 예수님 안에 있을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진정한 신앙은 예수님의 기쁨이 내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교회 안에 있다고 해서 예수님 안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예배를 드리고 있다고 해서 예수님 안에 있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 안에, 예수님의 사랑 안에 있을 때 우리는 예수님 안에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참포도나무이십니다. 우리는 그의 가지입니다. 우리는 그를 떠나서 아무런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의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그의 말씀 안에,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은 우리를 친구라 불러 주시고 우리로 풍성한 열매를 맺게 해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우리 JBF 친구들이 이 예수님의 말씀과 사랑 안에서 일생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극상품의 열매를 풍성히 맺게 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드립니다. 아멘
말씀 요한복음 15:1-27
요절 요한복음 15:4
내 안에 거하라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요한복음13장부터 시작된 다락방 강화에서 예수님은 제자들 곁을 떠나신다는 말씀을 여러번 하셨습니다. 이로 인해 제자들의 마음에 근심이 생겼습니다. 또한 예수님을 계속 따를 수 있을지 걱정이 되었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14장에서 근심하는 제자들에게 “너희는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고 말씀하셨고 예수님이 하나님께 이르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심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예수님이 그들의 곁을 떠나신다고 하니 그들도 떠나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그들에게 예수님은 “내 안에 거하라”고 하십니다. 내 안에 거할 때 그들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열매를 맺을 수 있고 그들도 나의 기쁨을 누릴 수 있다고 하십니다.
우리의 삶은 하나님 앞에서 열매로 평가를 받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열매는 무엇인지 그리고 그 열매를 어떻게 맺을 수 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오늘 말씀을 통해 열매맺는 삶의 비결을 배워서 우리의 삶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열매로 풍성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1절을 보십시오. “나는 참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라” 예수님은 하나님과 예수님, 그리고 제자들의 관계를 포도나무의 비유를 통해서 설명해 주셨습니다. 농부와 포도나무, 포도나무와 가지는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입니다. 특히 포도나무와 가지는 생명의 관계요, 연합된 관계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신 창조주로서 온 세상의 주인이 되십니다. 세상은 하나님의 포도원이요, 하나님은 그 포도원을 가꾸는 농부가 되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가꾸시는 포도원에 심겨진 참 포도나무요, 제자들은 그 가지입니다. 예수님을 참 포도나무라고 하신 것은 예수님만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생명의 열매를 맺을 수 있는 유일한 포도나무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2절을 보십시오. “무릇 내게 붙어 있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그것을 제거해 버리시고 무릇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열매를 맺게 하려 하여 그것을 깨끗하게 하시느니라” 농부는 포도나무를 관상용으로 심지 않습니다. 농부가 원하는 것은 포도나무의 아름다움이나 무성한 잎이 아니라 열매입니다. 그것도 보통의 열매가 아니라 극상품의 열매를 원합니다. 극상품의 포도를 얻기 위해 농부가 반드시 하는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포도나무의 가지를 치는 일입니다. 병들거나 죽은 가지만 치는 것이 아니라 괜찮은 가지도 과감하게 칩니다. 이렇게 해줘야 열매맺는 가지에 물과 양분이 집중되어 열매가 튼실해지기 때문입니다.
2절 말씀을 보면 예수님은 내게 붙어 있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가지가 있고 열매를 맺는 가지가 있다고 하는데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어떤 가지를 말하는 것일까요? 이 가지는 명목상의 신자를 의미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회개의 열매가 없습니다. 교회의 안에 있을 때는 신자인데 세상에 나가면 세상 사람들과 다를 바가 없이 살아갑니다. 그들은 교회 안에서 타이틀과 사람들의 인정을 추구합니다. 그들은 하나님 앞에 내세울 열매가 없습니다. 그들은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고 밖에서 울며 이를 갈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열매맺지 못하는 가지가 예수님의 열 두 제자 중에도 있었습니다. 그는 바로 가룟 유다입니다. 그는 3년 반 동안 예수님을 따라 다녔습니다. 그러나 그는 실상 예수님을 따른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이용해 자신의 야망을 이루고자 했습니다. 자신의 뜻대로 예수님이 움직여주지 않자 그는 예수님을 배반하고 은삼십에 예수님을 팔아버렸습니다. 그는 제자그룹에서 제하여졌고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는 비참한 최후를 맞고 말았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말씀에 기초하여 내가 열매를 맺는 가지인지 열매를 맺지 못하는 가지인지를 돌아봐야 합니다. 내가 열매맺는 가지로 살아가고 있다면 참으로 감사한 일이지만 만일 열매맺지 않는 가지로 살아가고 있다면 이는 실로 심각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열매맺지 않는 가지는 반드시 천국에서 제하여질 것이고 지옥의 땔감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어떻게 하면 열매맺는 가지로 살아갈 수 있는지를 진지하게 배워야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살아갈 수 있도록 진심으로 기도하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해야 합니다. 우리 JBF 친구들이 하나님이 보실 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극상품의 열매를 맺는 가지로 살아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제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또 근심하기 시작했습니다. 무슨 근심을 했을까요? 혹시 내가 열매를 맺지 아니한 가지는 아닌가? 하나님이 나를 제하여 버리시면 어떻하지? 하고 근심을 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렇게 근심하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어떻게 하면 열매를 맺는 가지로 살아갈 수 있는지를 가르쳐 주십니다.
4-6절을 보십시오.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려져 마르나니 사람들이 그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
예수님은 열매를 맺기 위해 “율법을 열심히 지키라”거나 “제사를 열심히 드리라” 혹은 “공부를 열심히 하라”거나 “일을 열심히 하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는 “내 안에 거하라”라고 하십니다.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으면 열매를 맺는 것 같이 너희도 내 안에 거하면 열매를 맺을 수 있다고 하십니다. 그러면 예수님 안에 거한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첫째로 말씀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7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예수님이 오병이어로 오천명을 먹이시는 표적을 행하셨습니다. 이 표적을 본 사람들이 이제는 예수님께 떡을 얻어 먹고자 나왔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그들에게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때 사람들이 실망하고 예수님을 떠나갔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열 두 제자들에게 이렇게 물으셨습니다. “너희도 가려느냐?” 그때 베드로가 대답합니다.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 그렇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따른 이유는 그 안에 영생의 말씀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안에 예수님의 말씀이 있으면 우리는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예수님 안에 거할 수 있습니다. 제가 지난 번 메시지에서 소개한 토미워커를 기억하시나요? 그는 우리가 애창하는 “네 이름 아시죠?(You know my name?)”를 지은 찬양사역자인데 그는 무명시절 하나님이 그의 이름을 손바닥에 새겼다 그를 아신다 그를 기억하신다는 이사야서 말씀을 통해 그는 예수님 안에 거할 수 있었고 힘든 시기를 극복할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살다보면 근심할 때가 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그들의 곁을 떠난다고 하니 근심합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 일상의 일들을 걱정합니다. 그런데 물질이 떨어지고 건강이 나빠지고 무슨 큰 사고라도 당하면 그 사람은 얼마나 근심이 많겠습니까? 여러분들은 어떤 일들로 근심하고 있나요? 조금 있으면 중간고사를 봐야 하니 시험 때문에 걱정이 되나요? 원하는 대학에 들어갈 수 있을지 근심하나요? 부모님들과의 관계에, 친구들과의 관계에 문제가 있어서 근심하나요? 우리는 우리의 삶에 일어나는 이런 저런 일들 때문에 근심을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진짜 근심하는 이유는 이런 문제들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가 근심하는 진짜 이유는 우리 안에 예수님의 말씀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근심합니다.
내 안에 예수님의 말씀이 있는지 없는지 어떻게 알까요? 예수님의 말씀이 있는 사람은 이렇게 근심된 일들이 생길 때 남다른 일을 합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7절을 다시한번 읽어봅시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그것은 바로 기도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있는 사람은 기도를 합니다. 그냥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에 기초해서 기도합니다. 중간고사를 생각하면 근심이 됩니다. 그때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4:13)말씀을 붙잡고 믿음으로 기도하고 공부를 합니다. 나의 장래가 어떻게 될지 막막하고 두려울 때가 있습니다. 그때 “너희는 근심하지 마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는 말씀을 붙잡고 믿음으로 살고자 기도합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말씀이 있는 사람은 기도를 합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예수님의 말씀으로 기도하는 자들의 기도를 들으십니다. 그리고 그 말씀의 열매를 맺도록 응답해 주십니다.
여러분 저도 그런 경험이 있습니다. 저는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미국공인회계사 시험을 준비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모세가 한돌 되던 해였습니다. 이렇게 한 집안의 가장으로서 돈을 벌지 않고 공부를 시작하게 된 것이 제게는 너무나 큰 부담이었고 두려움이었습니다. 그때 저는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요11:40) 말씀을 매일 100번을 쓰며 이 말씀에 기초해서 제가 믿음으로 공부할 수 있도록 기도했습니다. 그때 저는 두려움에 시달리지 않고 매일 8시간을 집중하여 공부할 수 있었고 기도한대로 한번에 시험에 합격을 할 수 있었습니다. 이를 통해 내 안에 예수님의 말씀이 있으면 반드시 열매를 맺는다는 것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여러분들도 예수님의 말씀 안에 거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의 말씀으로 기도하는 모든 기도를 들으시고 그 말씀을 열매로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이렇게 말씀의 열매를 맺는 것을 통해 영광을 받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JBF 친구들도 예수님의 말씀 안에서 많은 열매를 맺으시고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삶을 살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드립니다. 아멘
둘째로 예수님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9,10절을 보십시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제자들은 예수님이 그들의 곁을 떠나신다고 말씀하시니 근심이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이 그들을 버리고 떠나시는 것 같아 예수님의 사랑에 대한 의심이 생겼습니다. 이런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그들을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아니하셨습니다. 그의 사랑은 십자가의 사랑입니다. 그의 사랑은 죽음보다 강한 사랑입니다. 예수님은 그 사랑으로 그들의 허다한 죄와 허물을 품으셨고 그들을 구원하셨습니다. 그 사랑을 깨달을 때, 그 사랑을 기억할 때 우리는 어떤 상황 속에서도 예수님 안에 거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한 베드로는 수제자로서 깊은 죄책감과 실패의식에 빠져 있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이런 베드로를 찾아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너 왜 그랬니? 그러고도 니가 수제자냐?”라고 호통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세 번을 반복해서 물으셨습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예수님께 세 번 사랑고백을 하였습니다. 이를 통해 그가 다시금 예수님 안에 거할 수 있도록 하신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이 예수님의 사랑을 이렇게 고백합니다. “그는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연약할 때에, 원수 되었을 때에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롬5:6-10) 그는 이 예수님의 사랑에 강권되어 일생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 아무것도 빚지지 않기로 결심을 했습니다. 우리는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자기 목숨을 내어주시기까지 나를 사랑하신 주님의 사랑 안에 거해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사랑 안에 거할 때 우리는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주님을 배반하지 않고 자기의 길로 가지 않고 주님을 따를 수 있습니다. 주님이 맡기신 사명을 완수할 수 있습니다. 그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실 때 우리는 어떠한 상황속에서도 기뻐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는 것이 예수님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입니까? 10절과 12절을 보십시오.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10),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12)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것이 구체적으로 예수님의 사랑 안에 거하는 방법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사랑 안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예수님 안에 거하길 원하시나요? 그렇다면 서로 사랑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의 사랑 안에 예수님이 함께 하실 것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이 말씀을 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11절을 보십시오.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여러분 진정한 신앙은 예수님의 기쁨이 내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내 기쁨을 추구하면 우리는 예수님 밖에 있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기쁨을 추구하면 우리는 예수님 안에 있을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진정한 신앙은 예수님의 기쁨이 내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교회 안에 있다고 해서 예수님 안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예배를 드리고 있다고 해서 예수님 안에 있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 안에, 예수님의 사랑 안에 있을 때 우리는 예수님 안에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참포도나무이십니다. 우리는 그의 가지입니다. 우리는 그를 떠나서 아무런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의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그의 말씀 안에,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은 우리를 친구라 불러 주시고 우리로 풍성한 열매를 맺게 해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우리 JBF 친구들이 이 예수님의 말씀과 사랑 안에서 일생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극상품의 열매를 풍성히 맺게 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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