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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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말씀 / 요한복음 12:1-26
요절 / 요한복음 12: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지난 6월 엘리자베스 엘리엇 여사가 88세를 일기로 소천하셨습니다.
엘리엇 여사의 남편 짐 엘리엇은 남미 에콰도르에서 마지막 '식인 부족'인 아우카 부족에게 복음을 전하다가 28세에 목숨을 잃었습니다.
이때 타임지는 이 사건을 10 페이지에 걸쳐 다루었는데 기사의 제목은
‘이것이 무슨 낭비인가’였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가롯 유다가 향유를 부은 마리아에게 했던 말과 꼭 같은 말이었습니다.
그런데 짐 엘리엇의 일기장에 이런 글귀가 남아 있었습니다.
“영원한 것을 위해 영원하지 않은 것을 버리는 자는 결코 바보가 아니다”
엘리엇 여사는 남편의 뒤를 이어 아우카 부족에게 가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녀의 용서와 헌신에 감동을 받은 원주민 모두가 예수님을 영접했습니다. 한 알의 밀이 되었던 남편과 향유를 부은 마리아와 같았던 아내, 엘리엇 부부는 역사 상 가장 아름다운 부부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우리가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를 살리기 위해 한 일의 밀이 되어 죽으신 예수님을 만나고 그 죽으심의 가치를 온전히 드러내는 인생을 살고자 하는 소원을 덧입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12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다음날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셨습니다. 유대의 최대명절인 유월절을 보내기 위해서 예루살렘 올라온 수많은 사람들은 있었습니다.
그들은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들고 예수님을 맞으러 나가서 외쳤습니다.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종려나무는 유다 마카비 시대 이후로 유대인의 민족주의를 상징하는 나무였습니다.
그들이 이런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서 흔든 것은 자신들의 민족의 왕으로서 예수님을 환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그들이 기대하고 외치는 유대인의 왕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이루는
구원의 왕, 겸손의 왕으로 오셨음을 보여주시기 위해 나귀 새끼를 타셨습니다.
어찌되었든 예수님은 수많은 무리의 외침 속에 당당히 예루살렘에 입성하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의 인생에서 이보다 더 화려한 순간은 없었습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은 ‘보라 온 세상이 그를 따르는도다’라고 할 정도였습니다. 말이 씨가 된다고 아니나 다를까 명절에 예배하러 올라온 사람 중에 헬라인 몇 사람이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이들의 방문을 받은 제자들은 아주 의기양양했습니다. “드디어 우리 스승의 명성이 해외까지 퍼졌구나” 인간적으로 예수님도 기뻐하실 만 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종려나무를 흔들며 환호하고 외국인들까지 찾아오니 얼마나 기분 좋은 일입니까? 여기서 깃발만 꽂으면 대권은 따 놓은 당상이나 다름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때 무슨 말씀을 하십니까?
23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다’고 하십니다. 여기서 영광은 대권을 차지하는 영광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 것을 의미합니다.
십자가는 수치와 저주의 상징이 아닙니까? 그런데 어떻게 십자가의 죽으심이 영광이 될 수 있습니까?
24절을 다 함께 읽겠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2009년 5월에 경남 함안군 성산산성에서 고려시대 연꽃 씨앗이 700여 년 만에 발견이 되었습니다. 이 씨앗을 물에 담근지 5일 만에 싹이 나기 시작하였고, 다음 해 7월 7일 드디어 7개의 연꽃이 피었다고 합니다. 이 연꽃에 ‘아라홍련’이라는 이름을 붙여졌습니다. 그러니까 이 씨앗은 단지 심기어지지 않았다는 그 이유 하나 때문에 700년 이상의 길고긴 세월 동안 한 알 그대로 있었던 것입니다.
한 알의 밀알이 가진 가능성이 얼마나 클까요? 보통 하나의 밀알에게서 100-125개의 열매가 나온다고 합니다. 이것을 그대로 다시 심어서 수확하는 일을 5년 정도만 해도 100-125억개의 밀알이 나옵니다.
이는 우리 예배에 나온 모든 사람들이 40년 동안 삼시세끼 밥을 해먹을 수 있는 어마어마한 양입니다. 한 알의 밀은 사실 별 볼 일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죽어서 싹을 틔우고 자라서 열매를 맺게 되면 이렇게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여기서 한 알의 밀은 예수님 자신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은 이미 하늘 보좌를 버리고 이 땅에 낮고 천한 마굿간 구유 위에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태어나셨습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진 것입니다.
가난하고 병든 밑바닥 사람들을 친구삼고 그들의 목자가 되셨습니다. 가장 높으신 분이 가장 낮은 자리로 떨어진 것만도 위대한 겸손이며 자기 비움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죽어야겠다고 하십니다. 무서운 채찍에 맞고, 침 뱉음을 당하고, 대못에 박혀, 물과 피를 다 쏟고, 돌아가십니다.
그분의 죽음은 보통 죽음이 아닙니다. 인생들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저주와 심판을 온 몸으로 받아내야 하는 죽음입니다. 그리고 땅에 뭍이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죽으심은 결코 무의미한 것이 아닙니다. 인류구속역사에 밑거름이 되는 죽음입니다. 이로서 많은 열매를 맺습니다. 수많은 영혼들이 구원을 얻습니다. 떨어져 죽는 길은 많은 생명을 살리는 승리의 길입니다. 모든 인류를 구원하는 영광의 길입니다. 여기에 십자가가 영광이 되는 비밀이 있습니다.
누구나 이 예수님처럼 열매 맺는 삶을 살고 싶습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한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죽어야합니다. 죽는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본문이 말하는 ‘죽는다’는 의미를 이해하려면 실제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어떻게 죽는가를 살펴보면 됩니다.
땅에 떨어져 죽는다는 것은 그 밀알이 땅에 완전히 묻혀서 사람들 눈에 보이지 않게 되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이렇게 땅에 묻히면 밀알은 분해되기 시작합니다. 이때 나온 열과 영양분을 공급 받은 배아는 아래로 뿌리가 내려고 위로는 싹을 내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 밀알이 완전히 분해되어 없어질 때쯤이면 그 싹은 스스로 양분을 취하면서 본격적으로 성장하기 시작합니다.
이때 처음 땅에 묻힌 밀알은 이미 그 존재가 사라졌습니다. 밑동을 파서 아무리 살펴보아도 처음 밀알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러면 밀알은 도대체 어디로 간 것입니까? 밀알은 없어진 것 같지만 없어진 것이 아닙니다. 4개월 후 그 자리에 열린 수많은 열매들 속에 들어 있습니다. 한 알의 밀은 죽어서 더 큰 100배의 열매로 다시 살아난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밀알의 진리를 그 누구보다 제자들이 마음에 새기길 원하셨습니다. 지금 제자들은 무척 들뜬 상태였습니다. 곧 예수님이 메시아로서 왕위에 오르면 나도 한 몫 챙기고 영광스럽게 될 것을 기대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영광을 얻기 위해서는 그에 따른 마땅한 대가를 치루어야함을 알지 못했습니다.
25, 26절을 보십시오.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전하리라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귀히 여기시리라” 예수님을 따르고 섬기는 제자라면 자기 생명을 사랑하면 잃어버리고 도리어 자기 생명을 미워하면 보존한다는 이 역설의 진리를 영접하고 실천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는 남을 살리기 위해 자기가 죽는 사람이요 남을 행복하게 하려고 자기를 버리는 사람입니다.
종교개혁 당시 독일의 유명한 화가인 알프레드 뒤러라는 분이 있었습니다.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난 뒤러는 그림공부를 위해 한 친구와 함께 도시로 나왔습니다. 두 사람은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그림공부를 했는데, 두 가지 일을 모두 수행한다는 것이 그리 쉽지 않았습니다. 어느 날 친구가 뒤러에게 이런 제안을 했습니다. “친구여, 내가 일을 해서 돈을 벌겠네. 자네는 그림공부에만 전념하게. 그리고 자네의 공부가 끝나면 그때부터 자네가 내 그림공부를 도와주게” 그리고 그 친구는 노동현장에서 돈을 벌어 뒤러의 그림공부를 도와주었습니다.
수년이 지난 후 뒤러가 공부를 마치고 친구가 있는 집에 왔을 때 뒤러는 혼자서 울면서 기도하는 친구의 기도 소리를 듣게 되었습니다. “하나님 내 친구 뒤러가 훌륭한 화가가 되게 해 주십시오. 이미 제 손은 노동으로 굳어져버려서 저는 더 이상 화가가 될 수 없습니다.” 친구의 기도하는 모습에 가슴이 떨렸던 뒤러는 급히 그 자리에서 기도하는 친구의 손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그 그림이 바로 ‘기도하는 손’입니다.
뒤러가 훌륭한 화가가 된 것은 우연이 아니었습니다. 모든 위대한 것은 누군가의 희생을 통해 얻어집니다. 마찬가지로 제자들이 생명의 역사를 이루고자 할 때 거기 그들의 자기 비움이 있어야하고 죽음이 있어야 합니다. 풍성한 생명의 열매를 맺고 싶으면 예수님과 같이 땅에 묻혀 사람들 사이에 망각의 존재가 되어야합니다. 자기 몸을 새 생명 탄생을 위한 양분이요 밑거름으로 주어야합니다.
진짜 남는 인생은 한 알의 밀이 되어 죽는 인생입니다. 나의 가장 귀한 옥합을 깨뜨려 향유를 주님께 모두 쏟아 붓는 인생입니다. 주님을 위해 잃어버리면 주님이 풍성한 열매를 주십니다. 죽으면 영광스럽게 하십니다. 이 말씀은 역설입니다. 그러나 한 치도 오차가 없는 가장 확실한 진리입니다. 예수님께 몸소 자신의 죽으심으로 보증하신 약속의 말씀입니다. 우리가 이 말씀대로 살아서 한 알의 밀의 비밀을 깨닫고 풍성한 열매를 맺을 수 있길 기도합니다.
말씀 / 요한복음 12:1-26
요절 / 요한복음 12: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지난 6월 엘리자베스 엘리엇 여사가 88세를 일기로 소천하셨습니다.
엘리엇 여사의 남편 짐 엘리엇은 남미 에콰도르에서 마지막 '식인 부족'인 아우카 부족에게 복음을 전하다가 28세에 목숨을 잃었습니다.
이때 타임지는 이 사건을 10 페이지에 걸쳐 다루었는데 기사의 제목은
‘이것이 무슨 낭비인가’였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가롯 유다가 향유를 부은 마리아에게 했던 말과 꼭 같은 말이었습니다.
그런데 짐 엘리엇의 일기장에 이런 글귀가 남아 있었습니다.
“영원한 것을 위해 영원하지 않은 것을 버리는 자는 결코 바보가 아니다”
엘리엇 여사는 남편의 뒤를 이어 아우카 부족에게 가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녀의 용서와 헌신에 감동을 받은 원주민 모두가 예수님을 영접했습니다. 한 알의 밀이 되었던 남편과 향유를 부은 마리아와 같았던 아내, 엘리엇 부부는 역사 상 가장 아름다운 부부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우리가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를 살리기 위해 한 일의 밀이 되어 죽으신 예수님을 만나고 그 죽으심의 가치를 온전히 드러내는 인생을 살고자 하는 소원을 덧입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12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다음날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셨습니다. 유대의 최대명절인 유월절을 보내기 위해서 예루살렘 올라온 수많은 사람들은 있었습니다.
그들은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들고 예수님을 맞으러 나가서 외쳤습니다.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종려나무는 유다 마카비 시대 이후로 유대인의 민족주의를 상징하는 나무였습니다.
그들이 이런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서 흔든 것은 자신들의 민족의 왕으로서 예수님을 환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그들이 기대하고 외치는 유대인의 왕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이루는
구원의 왕, 겸손의 왕으로 오셨음을 보여주시기 위해 나귀 새끼를 타셨습니다.
어찌되었든 예수님은 수많은 무리의 외침 속에 당당히 예루살렘에 입성하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의 인생에서 이보다 더 화려한 순간은 없었습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은 ‘보라 온 세상이 그를 따르는도다’라고 할 정도였습니다. 말이 씨가 된다고 아니나 다를까 명절에 예배하러 올라온 사람 중에 헬라인 몇 사람이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이들의 방문을 받은 제자들은 아주 의기양양했습니다. “드디어 우리 스승의 명성이 해외까지 퍼졌구나” 인간적으로 예수님도 기뻐하실 만 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종려나무를 흔들며 환호하고 외국인들까지 찾아오니 얼마나 기분 좋은 일입니까? 여기서 깃발만 꽂으면 대권은 따 놓은 당상이나 다름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때 무슨 말씀을 하십니까?
23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다’고 하십니다. 여기서 영광은 대권을 차지하는 영광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 것을 의미합니다.
십자가는 수치와 저주의 상징이 아닙니까? 그런데 어떻게 십자가의 죽으심이 영광이 될 수 있습니까?
24절을 다 함께 읽겠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2009년 5월에 경남 함안군 성산산성에서 고려시대 연꽃 씨앗이 700여 년 만에 발견이 되었습니다. 이 씨앗을 물에 담근지 5일 만에 싹이 나기 시작하였고, 다음 해 7월 7일 드디어 7개의 연꽃이 피었다고 합니다. 이 연꽃에 ‘아라홍련’이라는 이름을 붙여졌습니다. 그러니까 이 씨앗은 단지 심기어지지 않았다는 그 이유 하나 때문에 700년 이상의 길고긴 세월 동안 한 알 그대로 있었던 것입니다.
한 알의 밀알이 가진 가능성이 얼마나 클까요? 보통 하나의 밀알에게서 100-125개의 열매가 나온다고 합니다. 이것을 그대로 다시 심어서 수확하는 일을 5년 정도만 해도 100-125억개의 밀알이 나옵니다.
이는 우리 예배에 나온 모든 사람들이 40년 동안 삼시세끼 밥을 해먹을 수 있는 어마어마한 양입니다. 한 알의 밀은 사실 별 볼 일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죽어서 싹을 틔우고 자라서 열매를 맺게 되면 이렇게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여기서 한 알의 밀은 예수님 자신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은 이미 하늘 보좌를 버리고 이 땅에 낮고 천한 마굿간 구유 위에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태어나셨습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진 것입니다.
가난하고 병든 밑바닥 사람들을 친구삼고 그들의 목자가 되셨습니다. 가장 높으신 분이 가장 낮은 자리로 떨어진 것만도 위대한 겸손이며 자기 비움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죽어야겠다고 하십니다. 무서운 채찍에 맞고, 침 뱉음을 당하고, 대못에 박혀, 물과 피를 다 쏟고, 돌아가십니다.
그분의 죽음은 보통 죽음이 아닙니다. 인생들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저주와 심판을 온 몸으로 받아내야 하는 죽음입니다. 그리고 땅에 뭍이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죽으심은 결코 무의미한 것이 아닙니다. 인류구속역사에 밑거름이 되는 죽음입니다. 이로서 많은 열매를 맺습니다. 수많은 영혼들이 구원을 얻습니다. 떨어져 죽는 길은 많은 생명을 살리는 승리의 길입니다. 모든 인류를 구원하는 영광의 길입니다. 여기에 십자가가 영광이 되는 비밀이 있습니다.
누구나 이 예수님처럼 열매 맺는 삶을 살고 싶습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한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죽어야합니다. 죽는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본문이 말하는 ‘죽는다’는 의미를 이해하려면 실제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어떻게 죽는가를 살펴보면 됩니다.
땅에 떨어져 죽는다는 것은 그 밀알이 땅에 완전히 묻혀서 사람들 눈에 보이지 않게 되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이렇게 땅에 묻히면 밀알은 분해되기 시작합니다. 이때 나온 열과 영양분을 공급 받은 배아는 아래로 뿌리가 내려고 위로는 싹을 내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 밀알이 완전히 분해되어 없어질 때쯤이면 그 싹은 스스로 양분을 취하면서 본격적으로 성장하기 시작합니다.
이때 처음 땅에 묻힌 밀알은 이미 그 존재가 사라졌습니다. 밑동을 파서 아무리 살펴보아도 처음 밀알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러면 밀알은 도대체 어디로 간 것입니까? 밀알은 없어진 것 같지만 없어진 것이 아닙니다. 4개월 후 그 자리에 열린 수많은 열매들 속에 들어 있습니다. 한 알의 밀은 죽어서 더 큰 100배의 열매로 다시 살아난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밀알의 진리를 그 누구보다 제자들이 마음에 새기길 원하셨습니다. 지금 제자들은 무척 들뜬 상태였습니다. 곧 예수님이 메시아로서 왕위에 오르면 나도 한 몫 챙기고 영광스럽게 될 것을 기대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영광을 얻기 위해서는 그에 따른 마땅한 대가를 치루어야함을 알지 못했습니다.
25, 26절을 보십시오.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전하리라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귀히 여기시리라” 예수님을 따르고 섬기는 제자라면 자기 생명을 사랑하면 잃어버리고 도리어 자기 생명을 미워하면 보존한다는 이 역설의 진리를 영접하고 실천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는 남을 살리기 위해 자기가 죽는 사람이요 남을 행복하게 하려고 자기를 버리는 사람입니다.
종교개혁 당시 독일의 유명한 화가인 알프레드 뒤러라는 분이 있었습니다.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난 뒤러는 그림공부를 위해 한 친구와 함께 도시로 나왔습니다. 두 사람은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그림공부를 했는데, 두 가지 일을 모두 수행한다는 것이 그리 쉽지 않았습니다. 어느 날 친구가 뒤러에게 이런 제안을 했습니다. “친구여, 내가 일을 해서 돈을 벌겠네. 자네는 그림공부에만 전념하게. 그리고 자네의 공부가 끝나면 그때부터 자네가 내 그림공부를 도와주게” 그리고 그 친구는 노동현장에서 돈을 벌어 뒤러의 그림공부를 도와주었습니다.
수년이 지난 후 뒤러가 공부를 마치고 친구가 있는 집에 왔을 때 뒤러는 혼자서 울면서 기도하는 친구의 기도 소리를 듣게 되었습니다. “하나님 내 친구 뒤러가 훌륭한 화가가 되게 해 주십시오. 이미 제 손은 노동으로 굳어져버려서 저는 더 이상 화가가 될 수 없습니다.” 친구의 기도하는 모습에 가슴이 떨렸던 뒤러는 급히 그 자리에서 기도하는 친구의 손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그 그림이 바로 ‘기도하는 손’입니다.
뒤러가 훌륭한 화가가 된 것은 우연이 아니었습니다. 모든 위대한 것은 누군가의 희생을 통해 얻어집니다. 마찬가지로 제자들이 생명의 역사를 이루고자 할 때 거기 그들의 자기 비움이 있어야하고 죽음이 있어야 합니다. 풍성한 생명의 열매를 맺고 싶으면 예수님과 같이 땅에 묻혀 사람들 사이에 망각의 존재가 되어야합니다. 자기 몸을 새 생명 탄생을 위한 양분이요 밑거름으로 주어야합니다.
진짜 남는 인생은 한 알의 밀이 되어 죽는 인생입니다. 나의 가장 귀한 옥합을 깨뜨려 향유를 주님께 모두 쏟아 붓는 인생입니다. 주님을 위해 잃어버리면 주님이 풍성한 열매를 주십니다. 죽으면 영광스럽게 하십니다. 이 말씀은 역설입니다. 그러나 한 치도 오차가 없는 가장 확실한 진리입니다. 예수님께 몸소 자신의 죽으심으로 보증하신 약속의 말씀입니다. 우리가 이 말씀대로 살아서 한 알의 밀의 비밀을 깨닫고 풍성한 열매를 맺을 수 있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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