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요한복음 제 14 강.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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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요한복음 제 14 강
말씀 | 요한복음 11:1-44
요절 | 요한복음 11:25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은 죽어서 무덤에서 썩어가고 있는 나사로를 살리십니다. 이로써 자신이 부활이요 생명이심을 증거하십니다.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은 죽음의 권세 아래서 슬퍼하며 고통하고 있는 우리 인생들에게 유일한 희망이 되십니다. 이 시간 부활이요 생명되신 예수님을 깊이 영접하므로 우리 안에 죽음으로 인한 모든 어두움을 다 몰아낼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1-16). 어떤 병자가 있으니 이는 마리아와 그 자매 마르다의 마을 베다니에 사는 나사로였습니다. 두 자매는 오라버니가 병들어 죽어가는 것을 보고만 있을 수 없었습니다. 그 동네에서 퀵 서비스가 가장 빠른 사람에게 부탁하여 예수님께 이 소식을 전달했습니다. “주여 보시옵소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 이 말씀만 전해도 그들은 예수님께서 두 말 없이 달려올 줄로 믿었습니다. 예수님과 이 가정 사이에 깊은 사랑의 관계성이 맺어져 있었습니다(5). 두 자매는 예수님께서 빨리 오셔서 오라버니를 살려 주시기를 목이 빠져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나사로가 병들어 죽어가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어떤 반응을 보이셨습니까? 4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이 이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라 하시더라.” 그리고 그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유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틀을 더 유하심으로 마리아와 마르다의 요청을 묵살하신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마리아와 마르다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죽음이라는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해 주고자 하십니다. 마르다와 마리아에게 오라버니의 죽음이라는 아픔이 있지만 예수님은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고 부활신앙을 심기를 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틀이 지난 후에 제자들에게 유대로 다시 가자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은 놀라면서 말하였습니다. “랍비여 방금도 유대인들이 돌로 치려하였는데 또 그리로 가시려 하나이까?” 제자들은 돌에 맞아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시달렸습니다. 9,10절.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낮이 열두 시간이 아니냐 사람이 낮에 다니면 이 세상의 빛을 보므로 실족하지 아니하고 밤에 다니면 빛이 그 사람 안에 없는 고로 실족하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빛’이십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빛이신 예수님이 계시면 낮인 것이며, 넘어지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계시는 한 제자들은 두려워 할 필요가 없습니다. 제자들이 두려워하는 이유는 그들의 마음에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그 마음에 빛되신 예수님이 없는 사람은 밤에 다니는 것과 같습니다. 두려움이 그들을 지배합니다. 지금 제자들의 마음이 그랬습니다. 반면 내 안에 예수님의 빛이 가득하면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우리 안에는 어떤 어두움이 있습니까? 염려와 두려움이 가득하지는 않습니까? 어떤 종류의 어두움도 빛이 비치면 다 사라집니다. 빛되신 예수님이 내 안에 계시면 우리는 더 이상 어두움에 거하지 않고 빛 가운데 창의적으로 하나님 기뻐하시는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우리 JBF학생들이 빛되신 예수님을 영접하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은 두려워하는 제자들에게 왜 다시 유대로 가야 하는지 이유를 말씀하셨습니다. 11절.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11).” 제자들은 나사로가 잠들었으면 낫겠다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죽음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나 그들은 잠들어 쉬는 것을 가리켜 말씀하심인 줄 생각했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밝히 이르셨습니다. “나사로가 죽었느니라.” 예수님은 거기에 있지 아니한 것을 제자들을 위하여 기뻐하셨습니다. 이는 그들로 믿게 하려 함입니다.
둘째,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17-38). 예수님께서 와서 보시니 나사로가 무덤에 있은 지 이미 나흘이었습니다. 많은 유대인이 마르다와 마리아에게 그 오라비의 일로 위문하러 왔습니다. 마르다는 예수님이 오신다는 말을 듣고 곧 나가 맞이하되 마리아는 집에 앉아 있었습니다. 마리아는 오라버니의 죽음으로 너무 상심한 나머지 움직일 기력도 없었던 것 같습니다. 마르다는 예수님을 만나자마자 원망의 말을 쏟아냈습니다. 21절.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식사하실 때는 빨리 빨리 오시더니 내 오라버니가 죽어간다는 소식을 전했는데도 어찌 함흥차사이셨습니까? 22절 “그러나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 예수님은 이런 마르다에게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르다는 마지막 날 부활 때에는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아나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바로 살리겠다는 것인데 마르다는 까마득한 미래에 일어날 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녀의 믿음은 과거와 미래만 있었고 현재는 없었습니다. 현재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믿음은 우리에게 아무 힘도 위로도 되지 못합니다. 그런 믿음은 공허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마르다에게 무엇이라 말씀하십니까?
25,26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예수님은 자신을 부활이요 생명이라고 선언하셨습니다. 마르다는 부활이 마지막 날에 있을 것이라고 하는데 예수님은 지금 내가 바로 부활이라고 선언하십니다. 예수님이 부활이요 생명이시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는 자는 지금 영생을 사는 것입니다. 지금 부활의 생명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영생은 우리가 죽은 다음에 받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는 순간부터 시작됩니다. 요5:24절에서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예수님 안에는 죽음이 없습니다. 종말 때에 있을 부활이 현재 와 있습니다. 물론 믿는 사람도 생물학적인 죽음은 피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생물학적인 죽음이 우리를 지배할 수 없습니다. 살아서 예수님을 믿는 자는 죽지 않는다는 말씀은 바로 내 안에 영생이 이미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죽더라도 마지막 날 일어납니다. 지금 믿는 사람들에게 이 일은 반드시 일어날 것입니다. 마지막 날에 이루어질 것이 이미 우리 안에 시작되었고 주님은 이미 우리를 영화롭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마르다는 고백했습니다. 27절을 보십시오. “이르되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 마르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힘이 생겼습니다. 그리고 마리아를 찾아가서 선생님이 오셔서 너를 부르신다고 전했습니다. 마리아는 이 말을 듣고 급히 일어나 예수님께 나아갔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이 계신 곳에 가서 뵈옵고 그 발 앞에 엎드리어 원망했습니다.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예수님은 마리아가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이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비통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사망 권세 아래 흐느끼는 영혼들을 볼 때 불쌍히 여기신 것입니다. 죽음의 고통과 저주 아래 있는 인간의 모습에 안타까워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눈물을 흘리시는 것을 보고 “보라 그를 얼마나 사랑하셨는가” 말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맹인의 눈을 뜨게 한 이 사람이 그 사람은 죽지 않게 할 수 없었더냐” 비꼬기도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이런 죄악으로 인해 다시 속으로 비통히 여기셨습니다. 예수님은 죽음을 넘어설 수 있는 분이신데 그들은 예수님을 무시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지금 부활이요 생명이십니다.
셋째, 나사로야 나오라(39-44). 예수님은 무덤 앞에까지 가셨습니다. 그리고 돌을 옮겨 놓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방금 전에 믿는다고 신앙 고백을 했던 마르다가 말했습니다.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마르다의 말은 죽은 사람을 가지고 어쩌자는 것입니까? 시체가 썩어서 냄새가 나는데 죽은 자에 대한 예의나 지켜주세요 라는 말로 들립니다. 마르다는 현실 앞에 불신이 들어왔습니다. 사실 이는 우리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말씀을 들을 때는 믿음이 생기다가도 냄새를 맡으면 믿음이 죽는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이란 죽음의 냄새를 맡으면서도 부활의 영광을 바라보는 것이요, 죽음의 냄새 속에서 생명의 향기를 맡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르다의 불신의 말에 동의하시기보다 강하게 책망하십니다. 40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시니” 우리는 불신을 회개하고 주님의 말씀을 붙잡아야 합니다. 내 마음에 있는 불신의 돌을 옮겨 놓아야 합니다. 주님이 말씀하실 때 때로는 이해가 되지 않지만 순종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들이 돌을 옮겨 놓으니 예수님께서 눈을 들어 우러러 보시고 기도하셨습니다. 41,42절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그러나 이 말씀하옵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그들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 예수님은 이 말씀을 하시고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셨습니다. 이 때 어떤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까? 44절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나오는데 그 얼굴은 수건에 싸였더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썩어서 냄새나는 나사로도 살리시므로 현재적으로 부활이요 생명되심을 증명하셨습니다. 부활이요 생명되신 예수님 안에서는 죽음이 더 이상 힘을 쓰지 못합니다. 예수님 안에서의 죽음은 잠과 같습니다. 잠깐 자다가 다시 일어나게 됩니다. 우리 중 아무도 잠을 무서워하지 않습니다. 도리어 잠을 사랑합니다. 예수님 안에서 죽음은 잠과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지 않는 인생들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죽음권세에 사로잡혀 어두운 삶을 살아갑니다. 그 결과는 때로는 쾌락주의로 때로는 허무주의로 나타납니다. 얼마전 70세인 영국의 한 간호사가 스위스로 가서 안락사를 받았습니다. 그녀는 오랫동안 노인들을 돌보는 삶을 살았으며 굉장히 활동적인 삶을 살았는데, 대상포진을 앓고 나서부터 예전처럼 활동적인 삶을 살 수 없었다 하였습니다. 그후 건강은 회복되었지만 그녀는 자신의 전성기는 끝났고 삶이 이후에는 점점 더 나빠질 수 밖에 없음을 잘 알고 차라리 건강할 때 안락사 함으로 자신의 비참한 모습을 보지 않겠다 하였습니다. 벤전1:24-25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 그녀는 시들어져 말라 비틀어져갈 수 밖에 없는 자신의 비참한 모습을 생각하며 안락사를 선택하였습니다. 저는 이 분의 결정을 물론 찬성하지 않지만 그 마음을 굉장히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분을 통해서 죽음권세 아래 있는 인생들의 한 단면을 보게 됩니다. 반면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어떤 선택을 할까요? 이들은 나이가 들어도 그들의 전성기가 아직 오지 않았음을 믿습니다. 잠깐 잠 들었다가 깨어났을 때 곧 부활 때가 그들의 최고의 전성기임을 믿고 그 날을 간절히 기다립니다. 그리고 이 땅에서는 영원한 것을 위해서 삽니다. 마지막 순간까지 영원한 것을 위해 수고하는 이들에게 죽음권세와 허무주의가 힘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우리가 왜 때때로 허무함을 느낄까요? 이는 우리가 영원한 것이 아니라 잠깐 있다가 사라지는 것을 추구하는 삶을 살기 때문입니다. 영원한 것을 추구하는 삶을 사는 이들에게는 허무주의가 머무를 곳이 없습니다. 이들의 마음에는 죽음의 어두운 그림자가 없습니다. 생명과 부활의 빛이 가득합니다. 부활이요 생명되신 예수님은 죽음 권세 아래 있는 우리 인생들에게 하나님이 주신 최고의 선물입니다.
25,26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우리 JBF 학생들 마음에는 현재적으로 부활이요 생명되신 예수님이 살아계십니까? 우리는 또 부활의 소망 가운데 영원한 것을 위해 살고 있습니까? 아니면 잠시 후 사라질 수 밖에 없는 것만을 위해 살고 있습니까? 부활과 영생의 믿음이 없어 잠시후 사라질 것을 위해서만 산다면 우리 인생은 죽음과 허무주의에 종 노릇하며 어두움 가운데 살 수 밖에 없습니다. 부활과 영생을 믿으므로 영원한 것을 위해 살 때, 허무주의와 어두움이 우리를 건드릴 수도 없게 됩니다. 우리 JBF 학생들이 부활이요 생명되신 예수님을 깊이 영접하므로 영생하는 삶을 살며 영원한 것을 위해 살게 하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말씀 | 요한복음 11:1-44
요절 | 요한복음 11:25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은 죽어서 무덤에서 썩어가고 있는 나사로를 살리십니다. 이로써 자신이 부활이요 생명이심을 증거하십니다.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은 죽음의 권세 아래서 슬퍼하며 고통하고 있는 우리 인생들에게 유일한 희망이 되십니다. 이 시간 부활이요 생명되신 예수님을 깊이 영접하므로 우리 안에 죽음으로 인한 모든 어두움을 다 몰아낼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1-16). 어떤 병자가 있으니 이는 마리아와 그 자매 마르다의 마을 베다니에 사는 나사로였습니다. 두 자매는 오라버니가 병들어 죽어가는 것을 보고만 있을 수 없었습니다. 그 동네에서 퀵 서비스가 가장 빠른 사람에게 부탁하여 예수님께 이 소식을 전달했습니다. “주여 보시옵소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 이 말씀만 전해도 그들은 예수님께서 두 말 없이 달려올 줄로 믿었습니다. 예수님과 이 가정 사이에 깊은 사랑의 관계성이 맺어져 있었습니다(5). 두 자매는 예수님께서 빨리 오셔서 오라버니를 살려 주시기를 목이 빠져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나사로가 병들어 죽어가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어떤 반응을 보이셨습니까? 4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이 이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라 하시더라.” 그리고 그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유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틀을 더 유하심으로 마리아와 마르다의 요청을 묵살하신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마리아와 마르다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죽음이라는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해 주고자 하십니다. 마르다와 마리아에게 오라버니의 죽음이라는 아픔이 있지만 예수님은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고 부활신앙을 심기를 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틀이 지난 후에 제자들에게 유대로 다시 가자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은 놀라면서 말하였습니다. “랍비여 방금도 유대인들이 돌로 치려하였는데 또 그리로 가시려 하나이까?” 제자들은 돌에 맞아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시달렸습니다. 9,10절.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낮이 열두 시간이 아니냐 사람이 낮에 다니면 이 세상의 빛을 보므로 실족하지 아니하고 밤에 다니면 빛이 그 사람 안에 없는 고로 실족하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빛’이십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빛이신 예수님이 계시면 낮인 것이며, 넘어지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계시는 한 제자들은 두려워 할 필요가 없습니다. 제자들이 두려워하는 이유는 그들의 마음에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그 마음에 빛되신 예수님이 없는 사람은 밤에 다니는 것과 같습니다. 두려움이 그들을 지배합니다. 지금 제자들의 마음이 그랬습니다. 반면 내 안에 예수님의 빛이 가득하면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우리 안에는 어떤 어두움이 있습니까? 염려와 두려움이 가득하지는 않습니까? 어떤 종류의 어두움도 빛이 비치면 다 사라집니다. 빛되신 예수님이 내 안에 계시면 우리는 더 이상 어두움에 거하지 않고 빛 가운데 창의적으로 하나님 기뻐하시는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우리 JBF학생들이 빛되신 예수님을 영접하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은 두려워하는 제자들에게 왜 다시 유대로 가야 하는지 이유를 말씀하셨습니다. 11절.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11).” 제자들은 나사로가 잠들었으면 낫겠다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죽음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나 그들은 잠들어 쉬는 것을 가리켜 말씀하심인 줄 생각했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밝히 이르셨습니다. “나사로가 죽었느니라.” 예수님은 거기에 있지 아니한 것을 제자들을 위하여 기뻐하셨습니다. 이는 그들로 믿게 하려 함입니다.
둘째,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17-38). 예수님께서 와서 보시니 나사로가 무덤에 있은 지 이미 나흘이었습니다. 많은 유대인이 마르다와 마리아에게 그 오라비의 일로 위문하러 왔습니다. 마르다는 예수님이 오신다는 말을 듣고 곧 나가 맞이하되 마리아는 집에 앉아 있었습니다. 마리아는 오라버니의 죽음으로 너무 상심한 나머지 움직일 기력도 없었던 것 같습니다. 마르다는 예수님을 만나자마자 원망의 말을 쏟아냈습니다. 21절.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식사하실 때는 빨리 빨리 오시더니 내 오라버니가 죽어간다는 소식을 전했는데도 어찌 함흥차사이셨습니까? 22절 “그러나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 예수님은 이런 마르다에게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르다는 마지막 날 부활 때에는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아나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바로 살리겠다는 것인데 마르다는 까마득한 미래에 일어날 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녀의 믿음은 과거와 미래만 있었고 현재는 없었습니다. 현재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믿음은 우리에게 아무 힘도 위로도 되지 못합니다. 그런 믿음은 공허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마르다에게 무엇이라 말씀하십니까?
25,26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예수님은 자신을 부활이요 생명이라고 선언하셨습니다. 마르다는 부활이 마지막 날에 있을 것이라고 하는데 예수님은 지금 내가 바로 부활이라고 선언하십니다. 예수님이 부활이요 생명이시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는 자는 지금 영생을 사는 것입니다. 지금 부활의 생명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영생은 우리가 죽은 다음에 받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는 순간부터 시작됩니다. 요5:24절에서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예수님 안에는 죽음이 없습니다. 종말 때에 있을 부활이 현재 와 있습니다. 물론 믿는 사람도 생물학적인 죽음은 피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생물학적인 죽음이 우리를 지배할 수 없습니다. 살아서 예수님을 믿는 자는 죽지 않는다는 말씀은 바로 내 안에 영생이 이미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죽더라도 마지막 날 일어납니다. 지금 믿는 사람들에게 이 일은 반드시 일어날 것입니다. 마지막 날에 이루어질 것이 이미 우리 안에 시작되었고 주님은 이미 우리를 영화롭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마르다는 고백했습니다. 27절을 보십시오. “이르되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 마르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힘이 생겼습니다. 그리고 마리아를 찾아가서 선생님이 오셔서 너를 부르신다고 전했습니다. 마리아는 이 말을 듣고 급히 일어나 예수님께 나아갔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이 계신 곳에 가서 뵈옵고 그 발 앞에 엎드리어 원망했습니다.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예수님은 마리아가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이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비통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사망 권세 아래 흐느끼는 영혼들을 볼 때 불쌍히 여기신 것입니다. 죽음의 고통과 저주 아래 있는 인간의 모습에 안타까워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눈물을 흘리시는 것을 보고 “보라 그를 얼마나 사랑하셨는가” 말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맹인의 눈을 뜨게 한 이 사람이 그 사람은 죽지 않게 할 수 없었더냐” 비꼬기도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이런 죄악으로 인해 다시 속으로 비통히 여기셨습니다. 예수님은 죽음을 넘어설 수 있는 분이신데 그들은 예수님을 무시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지금 부활이요 생명이십니다.
셋째, 나사로야 나오라(39-44). 예수님은 무덤 앞에까지 가셨습니다. 그리고 돌을 옮겨 놓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방금 전에 믿는다고 신앙 고백을 했던 마르다가 말했습니다.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마르다의 말은 죽은 사람을 가지고 어쩌자는 것입니까? 시체가 썩어서 냄새가 나는데 죽은 자에 대한 예의나 지켜주세요 라는 말로 들립니다. 마르다는 현실 앞에 불신이 들어왔습니다. 사실 이는 우리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말씀을 들을 때는 믿음이 생기다가도 냄새를 맡으면 믿음이 죽는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이란 죽음의 냄새를 맡으면서도 부활의 영광을 바라보는 것이요, 죽음의 냄새 속에서 생명의 향기를 맡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르다의 불신의 말에 동의하시기보다 강하게 책망하십니다. 40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시니” 우리는 불신을 회개하고 주님의 말씀을 붙잡아야 합니다. 내 마음에 있는 불신의 돌을 옮겨 놓아야 합니다. 주님이 말씀하실 때 때로는 이해가 되지 않지만 순종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들이 돌을 옮겨 놓으니 예수님께서 눈을 들어 우러러 보시고 기도하셨습니다. 41,42절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그러나 이 말씀하옵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그들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 예수님은 이 말씀을 하시고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셨습니다. 이 때 어떤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까? 44절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나오는데 그 얼굴은 수건에 싸였더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썩어서 냄새나는 나사로도 살리시므로 현재적으로 부활이요 생명되심을 증명하셨습니다. 부활이요 생명되신 예수님 안에서는 죽음이 더 이상 힘을 쓰지 못합니다. 예수님 안에서의 죽음은 잠과 같습니다. 잠깐 자다가 다시 일어나게 됩니다. 우리 중 아무도 잠을 무서워하지 않습니다. 도리어 잠을 사랑합니다. 예수님 안에서 죽음은 잠과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지 않는 인생들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죽음권세에 사로잡혀 어두운 삶을 살아갑니다. 그 결과는 때로는 쾌락주의로 때로는 허무주의로 나타납니다. 얼마전 70세인 영국의 한 간호사가 스위스로 가서 안락사를 받았습니다. 그녀는 오랫동안 노인들을 돌보는 삶을 살았으며 굉장히 활동적인 삶을 살았는데, 대상포진을 앓고 나서부터 예전처럼 활동적인 삶을 살 수 없었다 하였습니다. 그후 건강은 회복되었지만 그녀는 자신의 전성기는 끝났고 삶이 이후에는 점점 더 나빠질 수 밖에 없음을 잘 알고 차라리 건강할 때 안락사 함으로 자신의 비참한 모습을 보지 않겠다 하였습니다. 벤전1:24-25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 그녀는 시들어져 말라 비틀어져갈 수 밖에 없는 자신의 비참한 모습을 생각하며 안락사를 선택하였습니다. 저는 이 분의 결정을 물론 찬성하지 않지만 그 마음을 굉장히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분을 통해서 죽음권세 아래 있는 인생들의 한 단면을 보게 됩니다. 반면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어떤 선택을 할까요? 이들은 나이가 들어도 그들의 전성기가 아직 오지 않았음을 믿습니다. 잠깐 잠 들었다가 깨어났을 때 곧 부활 때가 그들의 최고의 전성기임을 믿고 그 날을 간절히 기다립니다. 그리고 이 땅에서는 영원한 것을 위해서 삽니다. 마지막 순간까지 영원한 것을 위해 수고하는 이들에게 죽음권세와 허무주의가 힘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우리가 왜 때때로 허무함을 느낄까요? 이는 우리가 영원한 것이 아니라 잠깐 있다가 사라지는 것을 추구하는 삶을 살기 때문입니다. 영원한 것을 추구하는 삶을 사는 이들에게는 허무주의가 머무를 곳이 없습니다. 이들의 마음에는 죽음의 어두운 그림자가 없습니다. 생명과 부활의 빛이 가득합니다. 부활이요 생명되신 예수님은 죽음 권세 아래 있는 우리 인생들에게 하나님이 주신 최고의 선물입니다.
25,26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우리 JBF 학생들 마음에는 현재적으로 부활이요 생명되신 예수님이 살아계십니까? 우리는 또 부활의 소망 가운데 영원한 것을 위해 살고 있습니까? 아니면 잠시 후 사라질 수 밖에 없는 것만을 위해 살고 있습니까? 부활과 영생의 믿음이 없어 잠시후 사라질 것을 위해서만 산다면 우리 인생은 죽음과 허무주의에 종 노릇하며 어두움 가운데 살 수 밖에 없습니다. 부활과 영생을 믿으므로 영원한 것을 위해 살 때, 허무주의와 어두움이 우리를 건드릴 수도 없게 됩니다. 우리 JBF 학생들이 부활이요 생명되신 예수님을 깊이 영접하므로 영생하는 삶을 살며 영원한 것을 위해 살게 하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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