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제13강 나는 선한 목자라 (요10: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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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요한복음 제 13 강
말씀 요한복음 10:1-18
요절 요한복음 10:11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오늘 말씀은 요한복음 9장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나면서부터 맹인된 자의 눈을 뜨게 해주셨습니다. 창세로부터 이런 일이 없었고 이 일은 예수님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분이라는 명백한 증거였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안식일에 이 일을 했다고 예수님을 죄인으로 정죄하고 그들의 말을 듣지 않는다고 맹인을 출교 시켰습니다. 그들의 악함을 보신 예수님은 마음이 너무나 아프신 나머지 선한 목자의 비유를 통해 그들에게 참된 목자상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우리가 오늘 말씀을 통해 참된 목자상을 무엇인지를 배우고 예수님이 왜 선한 목자이신지를 배울 수 있길 기도합니다. 또한 우리도 예수님을 배워서 선한 목자가 되고자 하는 결단을 할 수 있길 기도합니다.
우리가 목자와 양의 비유를 이해하는데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양치는 일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알면 도움이 됩니다. 1절부터 6절까지는 사람들이 많이 사는 도시근교의 목장을 배경으로 합니다. 당시 목자들은 낮에는 자기 양 떼를 데리고 목초지를 찾아다니며 물과 꼴을 먹였습니다. 해가 뉘엿뉘엿 서산을 기울 즈음이 되면 목자들은 공동 우리가 있는 곳으로 양 떼를 몰고 옵니다. 거기에 자기 양 떼를 넣어 두고 목자는 집으로 퇴근을 했습니다. 그러면 밤사이에 문지기가 여러 목자들이 맡겨 놓고 간 양 떼들을 지켰습니다. 다음 날 아침이 밝으면 목자들이 공동 우리로 출근을 합니다. 문지기는 문에 서서 목자를 일일이 확인한 후에 우리 안으로 들여보내주었습니다.
수많은 양 떼들이 섞여 있는 공동 우리를 향해 목자는 “얘들아! 내가 왔다.”라고 큰 소리로 외칩니다. 그러면 신기하게도 양들이 자기 목자의 음성을 알고 우르르 몰려듭니다. 그러면 목자는 자기 양들을 일일이 살펴봅니다. “에구, 우리 막둥이 요즘 많이 컸네.” “아이구, 우리 예쁜이는 자고 나니 더 예뻐졌네” 이렇게 목자는 자기 양들의 이름을 일일이 부르며 양들을 우리 밖으로 인도합니다. 그리고 목자가 앞서가면 양들은 일제히 ‘매에’ 소리를 내며 목자의 뒤를 종종 따라갔습니다. 그런데 양들은 타인이 목자의 음성을 흉내 내면 목자의 음성이 아닌 줄을 기가 막히게 알고 그 타인을 따르지 않고 도리어 도망을 갑니다.
1절부터 6절까지는 도시근교의 공동우리를 배경으로 한 비유라면 7절부터 10절까지 말씀은 시골의 목장을 배경으로 합니다. 시골에는 공동 우리가 없었습니다. 밤새워 우리를 지켜 줄 문지기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목자는 밤에 양들을 우리에 넣은 후에 아예 문에 누워서 잠을 잤습니다. 만약 한밤중에 우리에서 탈출을 시도하는 양이 있었다면 목자의 배를 밟고 지나가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때 목자는 잠에서 깨어나 탈출하는 양의 뒷다리를 꽉 붙잡을 수 있었습니다. “요 녀석! 어딜 도망가려고. 얼른 우리 안으로 들어가지 못해. 여길 나가면 밖에는 너를 잡아먹으려고 기다리는 사나운 이리떼들이 진을 치고 있단 말이야.” 그러면 양은 ‘큰 일 날 뻔 했구나’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면서 다시 우리 안으로 돌아갔습니다. 이 경우는 목자가 양의 문까지 겸하게 된 경우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목자가 이렇게 밤새 양떼들 곁에서 문이 되어 주었기 때문에 양들은 절도나 강도, 이리떼를 걱정하지 않고 평안하게 잠을 잘 수 있었습니다. 이상으로 우리는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목자와 양에 대해 간략히 살펴보았습니다. 예수님은 양과 목자의 비유를 통해 당신을 선한 목자로 나타내셨습니다. 그러면 선한 목자되신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첫째로 선한 목자 예수님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시는 분이십니다. 3절을 읽어봅시다.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제가 강릉에 있는 대관령 대목장에서 양들을 보았을 때 다 그 양이 그 양인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신기하게 목자는 자기 양들을 다 압니다. 그리고 양들에게 이름을 붙여 줍니다. 양의 이름을 짓기 위해서는 그 양의 특징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려면 지속적으로 양에 대한 관심을 갖고 관찰을 해야 합니다. 그래야 그 양의 이름을 붙일 수 있습니다. 이처럼 선한 목자되신 예수님은 우리 각 사람을 아시고 한 사람 한 사람 관심을 갖고 계시는 분이십니다. 내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무엇을 싫어하는지 내 장점과 단점을 아시고 내 마음도 내 생각도 나의 모든 것을 것을 알고 계십니다.
우리가 애창한 찬양 중에 토미 워커가 작사 작곡한 “내 이름 아시죠 (He Knows My name)"라는 곡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가 이 곡을 쓰게 된 사연이 있습니다. 그가 필리핀에 있는 어떤 고아원에 갔을 때 한 아이를 만났는데 그 아이는 토미를 볼 때마다 “내 이름 아시죠?”라고 물었다고 합니다. 그는 이 아이가 왜 이 질문을 계속하는지 생각해 보았고 고아로 자란 그 아이는 누군가 자신의 이름을 불러 주기를 원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방황하던 과거를 떠올렸습니다. 한때 그는 오랜 무명 가수의 시기를 보낸 적이 있었습니다. 세상에서 아무도 자기를 알아주지 않는다는 사실에 크게 좌절하고 낙담하고 있었습니다. 이때 그는 하나님께서 너의 이름을 손바닥에 새겨 놓으셨다는 이사야서 49장 16절 말씀을 듣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이름을 아신다는 사실, 그것도 결코 잊을 수 없도록 손바닥에 그 이름을 새겨 놓으셨다는 사실이 너무나 감격스러웠습니다. 이 말씀이 그가 다시 일어날 힘을 주었습니다. 이런 배경에서 만들어진 곳이 바로 “내 이름 아시죠”라는 찬양입니다.
우리의 삶에서 누군가 나를 알아주고 내 이름을 불러준다는 것이 이렇게 중요한 일입니다. 그런데 다른 누가 아닌 나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나를 아시고 나의 이름을 불러 주십니다. 이보다 더 중요하고 감격스런 일은 없습니다. 이렇게 누군가 나를 알아주고 나를 불러준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의미인지를 노래한 시가 바로 시인 김춘수 님의 “꽃”이라는 시입니다. 이 시를 고려대를 섬기는 안암 UBF 목자님이 목자버전으로 바꿔 쓰셨는데 함께 감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예수님이 나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나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예수님이 나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예수님은 나에게로 와서/ 목자가 되어주셨다./ 예수님이 나의 이름을 불러 준 것처럼/ 너의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이름을 불러다오 /너에게로 가서 나도 너의 목자가 되고 싶다./ 나는 너에게 너는 나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의미가 되고 싶다.” 이처럼 우리의 모든 것을 아시며 나를 불러 주신 선한 목자되신 예수님께 찬양을 올려드립니다. 우리도 그분을 닮아 사람을 알고 인격적으로 섬길 수 있는 참된 목자가 될 수 있길 기도합니다.
둘째로 선한 목자 예수님은 앞서 가시며 부드러운 음성으로 인도하시는 분이십니다. 4절과 5절을 읽어 봅시다. “자기 양을 다 내놓은 후에 앞서 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오되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는 고로 타인을 따르지 아니하고 도리어 도망하느니라” 목자는 양을 뒤에서 몰아가는 몰이꾼이 아니라 앞서 가는 인도자입니다. 돼지치기는 기다란 막대기를 들고 돼지 뒤에서 따라갑니다. 막대기로 오른쪽으로 가야 할 때는 왼쪽 엉덩이를 때리고 왼쪽으로 가야할 때는 오른쪽 엉덩이를 때립니다. 그러나 양은 이런 방식으로는 절대 앞으로 가지 않습니다. 오히려 때리면 때릴수록 그 자리에 버티고 서서 꼼짝도 하지 않습니다. 양은 목자가 앞서 가야 따라갑니다.
여기서 앞서 간다는 것은 “인도한다. 안내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목자가 양을 안전하게 키우려면 우리 안에서 키우면 됩니다. 그러나 우리 안에서는 싱싱한 풀을 먹일 수 없습니다. 양이 좁은 우리 안에만 있으면 병들기 쉽습니다. 그렇기에 비록 양이 가기에는 길이 험하고 사나운 짐승의 위협이 있지만 목자는 양들을 우리 밖으로 이끌어 내는 것입니다. 선한 목자 예수님은 이처럼 우리의 삶을 인도하시는 분이십니다. 그가 인도하시는 길이 평탄한 길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때론 거친 광야 길로 인도하기도 하시고 사나운 짐승을 만나 찢기고 상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때라도 우리는 선한 목자 예수님을 따라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는 우리를 갈 길을 아시고 우리를 인도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를 따르는 것이 가장 안정한 길이요 승리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를 따르는 것이 진리의 길이요 생명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어떤 상황 속에서도 선한 목자 예수님을 따를 수 있길 기도합니다.
또한 앞서 간다는 것은 “앞서 행하다. 본을 보인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선한 목자이신 이유는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에게 말씀만 하지 않으시고 앞서 행하시며 본을 보이셨기 때문입니다. 그는 누가 크냐 서로 다투는 제자들에게 남을 섬기는 자가 큰 자라고 가르치셨습니다. 그리고 허리에 수건을 두르시고 제자들의 냄새나는 발을 씻어주셨습니다. 그는 원수을 사랑하고 그를 축복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은 자들을 위해 “아버지여 저희들 사하여 주옵소서” 용서의 기도를 드리셨습니다. 자기를 3번이나 부인한 베드로를 찾아오셔서 조반을 만들어 주시고 그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3번이나 물으셨습니다. 그는 이렇게 여러 방면에서 우리보다 앞서 행하시며 본을 보여 주셨습니다. 우리가 이 예수님을 본받고 따를 때 우리도 생명을 살리고 생명을 풍성케 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선한 목자 예수님을 잘 따르며 그를 본받는 삶을 살 수 있을까요? 4절과 5절을 다시한번 읽겠습니다. “자기 양을 다 내놓은 후에 앞서 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오되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는 고로 타인을 따르지 아니하고 도리어 도망하느니라” 그것은 예수님의 음성을 듣는 것입니다. 9장에 나오는 맹인은 바리새인들이 위협하며 예수님을 죄인으로 인정하라는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들의 음성을 듣지 않았습니다. 비록 출교를 당할지라도 그는 그의 눈을 뜨게 하신 예수님을 부인하지 않고 그의 음성을 듣고 그를 따랐습니다. 우리가 타인의 음성을 들으면 길을 잃고 건강을 잃고 생명을 잃을 수 있습니다. 우리를 인도하시는 예수님의 음성은 부드러운 음성입니다. 그러나 타인의 음성은 부드러운에서 “부”자를 뺀 음성입니다. 즉 드러운 음성입니다. 드러운 음성을 많이 들으면 우리의 삶도 분노와 짜증으로 가득하게 되고 드러워집니다. 우리가 부드러운 주님의 음성만을 듣을 수 있길 기도합니다. 그 음성 듣기를 사모함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하고 기도하는 생활을 할 수 있길 기도합니다.
셋째로 선한 목자 예수님은 양들을 위해서 목숨을 버리신 분이십니다. 11절부터 18절까지는 당시 양을 치는 일을 하던 두 종류의 사람들을 배경으로 합니다. 하나는 목자이고 다른 하나는 삯군입니다. 목자는 자기 양떼를 소유한 목자라면 삯군은 고용된 목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평소에 양 치는 모습을 보면 누가 목자이고 누가 삯군인지 구별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똑같이 양들에게 먹이를 주고 돌보아 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목자와 삯군이 확연하게 구별할 수 있는 때가 있었습니다. 바로 이리떼가 나타났을 때였습니다. 이때 삯군은 양떼를 버려두고 도망을 가버렸습니다. 왜냐하면 자기 양떼가 아니기 때문이었습니다. 삯군은 말 그대로 삯이 목적입니다. 목숨까지 걸고 양떼를 지켜 줄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목자는 다릅니다. 목자는 양떼가 자기 양떼이기 때문에 도망가지 않았습니다. 선한 목자는 끝까지 목숨을 잃을 위험을 무릅쓰고 이리떼와 맞서 양들을 지켜내었습니다. 이처럼 선한 목자는 자기를 위해 살지 않고 양들을 위해 삽니다. 양이 수단이 아니라 목적이 됩니다. 선한 목자는 양들을 아끼고 사랑하고 양들을 중심으로 생각하고 생활합니다. 선한 목자는 자기 목숨보다 양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양들을 위해 살고 양들을 위해 죽습니다.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은 자기 양을 위해 목숨을 버리셨습니다. 그는 자기 목숨을 구원할 능력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 양을 구원하기 위해 스스로 자기 목숨을 버리셨습니다. 그렇기에 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14,15절을 보십시오.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이는 자기 양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자기 양이 스스로 자신을 구원할 수 없다는 것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오직 흠없고 죄없는 당신 자신만이 그들을 위한 대속제물이 되실 수 있음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하나님 아버지의 기뻐하시는 뜻임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중요한 사실을 하나 깨달을 수 있습니다. “희생”은 알아야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지난해 세월호 사건이 일어났을 때 현장에 삯군 같은 선장만 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고 박지영 승무원은 4층에서 구명조끼를 구해 3층으로 내려가 학생들에게 건네며 가슴에 물이 차오를 때까지 학생들을 구했습니다. 그녀는 학생들에게 이렇게 말을 했다고 합니다. “너희들 다 구하고 난 나중에 나갈게. 선원이 마지막이야” 선원이라고 하지만 그녀는 매점에서 물건을 파는 비정규직일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을 선원으로 알았고 위기상황에서 선원이 마지막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렇기에 그녀는 비록 매정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비정규직에 불과했지만 학생들을 구조하는 일에 희생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기 양을 아셨기에 자기 목숨을 버리셨습니다. 그리고 그의 양들은 그의 사랑을 알았기에 그가 부활이요 생명임을 알았기에 그를 위해 목숨도 아까워하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신앙생활하면서 힘써야 할 일은 다른 것이 아니라 바로 주님을 아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기 하나 감당하기 힘든 연약한 자들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님을 선한 목자로 알고 그의 음성을 듣고 그를 따르면 우리는 수많은 생명을 살리고 생명을 풍성케 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우리 JBF 친구들이 선한 목자되신 예수님을 알고자 하는 소원을 새롭게 하고 그의 음성을 듣기를 사모하는 자들이 모두 되실 수 있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말씀 요한복음 10:1-18
요절 요한복음 10:11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오늘 말씀은 요한복음 9장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나면서부터 맹인된 자의 눈을 뜨게 해주셨습니다. 창세로부터 이런 일이 없었고 이 일은 예수님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분이라는 명백한 증거였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안식일에 이 일을 했다고 예수님을 죄인으로 정죄하고 그들의 말을 듣지 않는다고 맹인을 출교 시켰습니다. 그들의 악함을 보신 예수님은 마음이 너무나 아프신 나머지 선한 목자의 비유를 통해 그들에게 참된 목자상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우리가 오늘 말씀을 통해 참된 목자상을 무엇인지를 배우고 예수님이 왜 선한 목자이신지를 배울 수 있길 기도합니다. 또한 우리도 예수님을 배워서 선한 목자가 되고자 하는 결단을 할 수 있길 기도합니다.
우리가 목자와 양의 비유를 이해하는데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양치는 일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알면 도움이 됩니다. 1절부터 6절까지는 사람들이 많이 사는 도시근교의 목장을 배경으로 합니다. 당시 목자들은 낮에는 자기 양 떼를 데리고 목초지를 찾아다니며 물과 꼴을 먹였습니다. 해가 뉘엿뉘엿 서산을 기울 즈음이 되면 목자들은 공동 우리가 있는 곳으로 양 떼를 몰고 옵니다. 거기에 자기 양 떼를 넣어 두고 목자는 집으로 퇴근을 했습니다. 그러면 밤사이에 문지기가 여러 목자들이 맡겨 놓고 간 양 떼들을 지켰습니다. 다음 날 아침이 밝으면 목자들이 공동 우리로 출근을 합니다. 문지기는 문에 서서 목자를 일일이 확인한 후에 우리 안으로 들여보내주었습니다.
수많은 양 떼들이 섞여 있는 공동 우리를 향해 목자는 “얘들아! 내가 왔다.”라고 큰 소리로 외칩니다. 그러면 신기하게도 양들이 자기 목자의 음성을 알고 우르르 몰려듭니다. 그러면 목자는 자기 양들을 일일이 살펴봅니다. “에구, 우리 막둥이 요즘 많이 컸네.” “아이구, 우리 예쁜이는 자고 나니 더 예뻐졌네” 이렇게 목자는 자기 양들의 이름을 일일이 부르며 양들을 우리 밖으로 인도합니다. 그리고 목자가 앞서가면 양들은 일제히 ‘매에’ 소리를 내며 목자의 뒤를 종종 따라갔습니다. 그런데 양들은 타인이 목자의 음성을 흉내 내면 목자의 음성이 아닌 줄을 기가 막히게 알고 그 타인을 따르지 않고 도리어 도망을 갑니다.
1절부터 6절까지는 도시근교의 공동우리를 배경으로 한 비유라면 7절부터 10절까지 말씀은 시골의 목장을 배경으로 합니다. 시골에는 공동 우리가 없었습니다. 밤새워 우리를 지켜 줄 문지기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목자는 밤에 양들을 우리에 넣은 후에 아예 문에 누워서 잠을 잤습니다. 만약 한밤중에 우리에서 탈출을 시도하는 양이 있었다면 목자의 배를 밟고 지나가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때 목자는 잠에서 깨어나 탈출하는 양의 뒷다리를 꽉 붙잡을 수 있었습니다. “요 녀석! 어딜 도망가려고. 얼른 우리 안으로 들어가지 못해. 여길 나가면 밖에는 너를 잡아먹으려고 기다리는 사나운 이리떼들이 진을 치고 있단 말이야.” 그러면 양은 ‘큰 일 날 뻔 했구나’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면서 다시 우리 안으로 돌아갔습니다. 이 경우는 목자가 양의 문까지 겸하게 된 경우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목자가 이렇게 밤새 양떼들 곁에서 문이 되어 주었기 때문에 양들은 절도나 강도, 이리떼를 걱정하지 않고 평안하게 잠을 잘 수 있었습니다. 이상으로 우리는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목자와 양에 대해 간략히 살펴보았습니다. 예수님은 양과 목자의 비유를 통해 당신을 선한 목자로 나타내셨습니다. 그러면 선한 목자되신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첫째로 선한 목자 예수님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시는 분이십니다. 3절을 읽어봅시다.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제가 강릉에 있는 대관령 대목장에서 양들을 보았을 때 다 그 양이 그 양인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신기하게 목자는 자기 양들을 다 압니다. 그리고 양들에게 이름을 붙여 줍니다. 양의 이름을 짓기 위해서는 그 양의 특징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려면 지속적으로 양에 대한 관심을 갖고 관찰을 해야 합니다. 그래야 그 양의 이름을 붙일 수 있습니다. 이처럼 선한 목자되신 예수님은 우리 각 사람을 아시고 한 사람 한 사람 관심을 갖고 계시는 분이십니다. 내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무엇을 싫어하는지 내 장점과 단점을 아시고 내 마음도 내 생각도 나의 모든 것을 것을 알고 계십니다.
우리가 애창한 찬양 중에 토미 워커가 작사 작곡한 “내 이름 아시죠 (He Knows My name)"라는 곡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가 이 곡을 쓰게 된 사연이 있습니다. 그가 필리핀에 있는 어떤 고아원에 갔을 때 한 아이를 만났는데 그 아이는 토미를 볼 때마다 “내 이름 아시죠?”라고 물었다고 합니다. 그는 이 아이가 왜 이 질문을 계속하는지 생각해 보았고 고아로 자란 그 아이는 누군가 자신의 이름을 불러 주기를 원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방황하던 과거를 떠올렸습니다. 한때 그는 오랜 무명 가수의 시기를 보낸 적이 있었습니다. 세상에서 아무도 자기를 알아주지 않는다는 사실에 크게 좌절하고 낙담하고 있었습니다. 이때 그는 하나님께서 너의 이름을 손바닥에 새겨 놓으셨다는 이사야서 49장 16절 말씀을 듣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이름을 아신다는 사실, 그것도 결코 잊을 수 없도록 손바닥에 그 이름을 새겨 놓으셨다는 사실이 너무나 감격스러웠습니다. 이 말씀이 그가 다시 일어날 힘을 주었습니다. 이런 배경에서 만들어진 곳이 바로 “내 이름 아시죠”라는 찬양입니다.
우리의 삶에서 누군가 나를 알아주고 내 이름을 불러준다는 것이 이렇게 중요한 일입니다. 그런데 다른 누가 아닌 나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나를 아시고 나의 이름을 불러 주십니다. 이보다 더 중요하고 감격스런 일은 없습니다. 이렇게 누군가 나를 알아주고 나를 불러준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의미인지를 노래한 시가 바로 시인 김춘수 님의 “꽃”이라는 시입니다. 이 시를 고려대를 섬기는 안암 UBF 목자님이 목자버전으로 바꿔 쓰셨는데 함께 감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예수님이 나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나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예수님이 나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예수님은 나에게로 와서/ 목자가 되어주셨다./ 예수님이 나의 이름을 불러 준 것처럼/ 너의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이름을 불러다오 /너에게로 가서 나도 너의 목자가 되고 싶다./ 나는 너에게 너는 나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의미가 되고 싶다.” 이처럼 우리의 모든 것을 아시며 나를 불러 주신 선한 목자되신 예수님께 찬양을 올려드립니다. 우리도 그분을 닮아 사람을 알고 인격적으로 섬길 수 있는 참된 목자가 될 수 있길 기도합니다.
둘째로 선한 목자 예수님은 앞서 가시며 부드러운 음성으로 인도하시는 분이십니다. 4절과 5절을 읽어 봅시다. “자기 양을 다 내놓은 후에 앞서 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오되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는 고로 타인을 따르지 아니하고 도리어 도망하느니라” 목자는 양을 뒤에서 몰아가는 몰이꾼이 아니라 앞서 가는 인도자입니다. 돼지치기는 기다란 막대기를 들고 돼지 뒤에서 따라갑니다. 막대기로 오른쪽으로 가야 할 때는 왼쪽 엉덩이를 때리고 왼쪽으로 가야할 때는 오른쪽 엉덩이를 때립니다. 그러나 양은 이런 방식으로는 절대 앞으로 가지 않습니다. 오히려 때리면 때릴수록 그 자리에 버티고 서서 꼼짝도 하지 않습니다. 양은 목자가 앞서 가야 따라갑니다.
여기서 앞서 간다는 것은 “인도한다. 안내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목자가 양을 안전하게 키우려면 우리 안에서 키우면 됩니다. 그러나 우리 안에서는 싱싱한 풀을 먹일 수 없습니다. 양이 좁은 우리 안에만 있으면 병들기 쉽습니다. 그렇기에 비록 양이 가기에는 길이 험하고 사나운 짐승의 위협이 있지만 목자는 양들을 우리 밖으로 이끌어 내는 것입니다. 선한 목자 예수님은 이처럼 우리의 삶을 인도하시는 분이십니다. 그가 인도하시는 길이 평탄한 길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때론 거친 광야 길로 인도하기도 하시고 사나운 짐승을 만나 찢기고 상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때라도 우리는 선한 목자 예수님을 따라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는 우리를 갈 길을 아시고 우리를 인도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를 따르는 것이 가장 안정한 길이요 승리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를 따르는 것이 진리의 길이요 생명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어떤 상황 속에서도 선한 목자 예수님을 따를 수 있길 기도합니다.
또한 앞서 간다는 것은 “앞서 행하다. 본을 보인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선한 목자이신 이유는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에게 말씀만 하지 않으시고 앞서 행하시며 본을 보이셨기 때문입니다. 그는 누가 크냐 서로 다투는 제자들에게 남을 섬기는 자가 큰 자라고 가르치셨습니다. 그리고 허리에 수건을 두르시고 제자들의 냄새나는 발을 씻어주셨습니다. 그는 원수을 사랑하고 그를 축복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은 자들을 위해 “아버지여 저희들 사하여 주옵소서” 용서의 기도를 드리셨습니다. 자기를 3번이나 부인한 베드로를 찾아오셔서 조반을 만들어 주시고 그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3번이나 물으셨습니다. 그는 이렇게 여러 방면에서 우리보다 앞서 행하시며 본을 보여 주셨습니다. 우리가 이 예수님을 본받고 따를 때 우리도 생명을 살리고 생명을 풍성케 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선한 목자 예수님을 잘 따르며 그를 본받는 삶을 살 수 있을까요? 4절과 5절을 다시한번 읽겠습니다. “자기 양을 다 내놓은 후에 앞서 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오되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는 고로 타인을 따르지 아니하고 도리어 도망하느니라” 그것은 예수님의 음성을 듣는 것입니다. 9장에 나오는 맹인은 바리새인들이 위협하며 예수님을 죄인으로 인정하라는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들의 음성을 듣지 않았습니다. 비록 출교를 당할지라도 그는 그의 눈을 뜨게 하신 예수님을 부인하지 않고 그의 음성을 듣고 그를 따랐습니다. 우리가 타인의 음성을 들으면 길을 잃고 건강을 잃고 생명을 잃을 수 있습니다. 우리를 인도하시는 예수님의 음성은 부드러운 음성입니다. 그러나 타인의 음성은 부드러운에서 “부”자를 뺀 음성입니다. 즉 드러운 음성입니다. 드러운 음성을 많이 들으면 우리의 삶도 분노와 짜증으로 가득하게 되고 드러워집니다. 우리가 부드러운 주님의 음성만을 듣을 수 있길 기도합니다. 그 음성 듣기를 사모함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하고 기도하는 생활을 할 수 있길 기도합니다.
셋째로 선한 목자 예수님은 양들을 위해서 목숨을 버리신 분이십니다. 11절부터 18절까지는 당시 양을 치는 일을 하던 두 종류의 사람들을 배경으로 합니다. 하나는 목자이고 다른 하나는 삯군입니다. 목자는 자기 양떼를 소유한 목자라면 삯군은 고용된 목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평소에 양 치는 모습을 보면 누가 목자이고 누가 삯군인지 구별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똑같이 양들에게 먹이를 주고 돌보아 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목자와 삯군이 확연하게 구별할 수 있는 때가 있었습니다. 바로 이리떼가 나타났을 때였습니다. 이때 삯군은 양떼를 버려두고 도망을 가버렸습니다. 왜냐하면 자기 양떼가 아니기 때문이었습니다. 삯군은 말 그대로 삯이 목적입니다. 목숨까지 걸고 양떼를 지켜 줄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목자는 다릅니다. 목자는 양떼가 자기 양떼이기 때문에 도망가지 않았습니다. 선한 목자는 끝까지 목숨을 잃을 위험을 무릅쓰고 이리떼와 맞서 양들을 지켜내었습니다. 이처럼 선한 목자는 자기를 위해 살지 않고 양들을 위해 삽니다. 양이 수단이 아니라 목적이 됩니다. 선한 목자는 양들을 아끼고 사랑하고 양들을 중심으로 생각하고 생활합니다. 선한 목자는 자기 목숨보다 양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양들을 위해 살고 양들을 위해 죽습니다.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은 자기 양을 위해 목숨을 버리셨습니다. 그는 자기 목숨을 구원할 능력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 양을 구원하기 위해 스스로 자기 목숨을 버리셨습니다. 그렇기에 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14,15절을 보십시오.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이는 자기 양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자기 양이 스스로 자신을 구원할 수 없다는 것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오직 흠없고 죄없는 당신 자신만이 그들을 위한 대속제물이 되실 수 있음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하나님 아버지의 기뻐하시는 뜻임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중요한 사실을 하나 깨달을 수 있습니다. “희생”은 알아야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지난해 세월호 사건이 일어났을 때 현장에 삯군 같은 선장만 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고 박지영 승무원은 4층에서 구명조끼를 구해 3층으로 내려가 학생들에게 건네며 가슴에 물이 차오를 때까지 학생들을 구했습니다. 그녀는 학생들에게 이렇게 말을 했다고 합니다. “너희들 다 구하고 난 나중에 나갈게. 선원이 마지막이야” 선원이라고 하지만 그녀는 매점에서 물건을 파는 비정규직일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을 선원으로 알았고 위기상황에서 선원이 마지막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렇기에 그녀는 비록 매정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비정규직에 불과했지만 학생들을 구조하는 일에 희생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기 양을 아셨기에 자기 목숨을 버리셨습니다. 그리고 그의 양들은 그의 사랑을 알았기에 그가 부활이요 생명임을 알았기에 그를 위해 목숨도 아까워하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신앙생활하면서 힘써야 할 일은 다른 것이 아니라 바로 주님을 아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기 하나 감당하기 힘든 연약한 자들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님을 선한 목자로 알고 그의 음성을 듣고 그를 따르면 우리는 수많은 생명을 살리고 생명을 풍성케 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우리 JBF 친구들이 선한 목자되신 예수님을 알고자 하는 소원을 새롭게 하고 그의 음성을 듣기를 사모하는 자들이 모두 되실 수 있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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