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요한복음 제 8강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이신 예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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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요한복음 제 8강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이신 예수님
말씀 요한복음 6:1-21
요절 요한복음 6:9 “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졌나이다 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삽나이까 ”
오늘 말씀은 예수님께서 안드레의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이신 사건과 물위를 걸으신 사건, 두 가지의 기적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특히 오병이어의 기적은 사 복음서 모두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기적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목자로서, 하나님의 양 무리의 영적 지도자들로서 알아야 할 매우 중요한 영적 교훈을 담고 있습니다. 이시간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법과 예수님이 우리에게 가장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배우게 도와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I. 여기 한 아이가 있어 (1-15)
1,2 절을 보십시오. “ 그 후에 예수께서 갈릴리 바다 곧 디베랴 바다 건너편으로 가시매 큰 무리가 따르니 이는 병인들에게 행하시는 표적을 봄이러라 ” 때는 유대인의 명절이 다가 오고 있었을 때였습니다. 성인유대인들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명절은 유월절, 오순절, 초막절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전도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피곤한 제자들과 함께 휴식을 취하시고 그들과만 함께 시간을 갖기 위해서 호수 저편으로 가시고자 하셨습니다.(막6:31) 무리들은 예루살렘으로 가는 데 필요한 시간이 다가옴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예수님께서 병자들에게 행하시는 표적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예수님께서 38년 된 병자를 고치시는 표적을 보았을 때 그들은 예수님 안에서 살아계신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을 보았고 한 영혼에 대한 예수님의 긍휼과 자비를 보았습니다. 종교지도자들이 적의를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그 사람을 안식일에 고치셨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안에서 양무리를 위해서 목숨도 버리실 수 있는 선한 목자의 형상을 보았습니다.
3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산에 오르사 제자들과 함께 거기 앉으시니 예수님은 산으로 올라가셨습니다. 이것은 자신이 무리들을 잘 보고 무리들도 자신을 잘 보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하나님의 사랑으로 영접하셨습니다. 예수님께 나오는 무리들은 어떤 사람들이었습니까? 그들은 대부분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 중 어떤 이들은 중풍병자들이었고 어떤 이들은 문둥병자들이었습니다. 어떤 이들은 귀신들린 이들이었습니다. 간단히 말해, 그들은 인간적으로 볼 때 매우 부담스러운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눈으로 볼 때 그들은 목자 없는 양과 같았습니다. (막 6:34) 예수님은 그들을 도움이 필요한 하나님의 양 무리들로 보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로 하여금 자신과 함께 앉게 앉으셨습니다. 이것은 제자들이 예수님의 눈으로 무리들을 바라보도록 하기위함이셨습니다. 무리들에게 있어서도 제자들이 그들의 영적 지도자임을 알도록 하기 위함이셨습니다.
예수님이 무리들을 보셨을 때 예수님은 그들이 굶주려 있다는 것을 아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먹이길 원하셨습니다. 5절을 보십시오. “ 예수께서 눈을 들어 큰 무리가 자기에게로 오는 것을 보시고 빌립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로 먹게 하겠느냐 하시니 ” 예수님은 무리들을 먹이길 원하셨습니다. 그와 동시에 그의 제자들을 훈련하길 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특별히 제자중 빌립에게 질문하셨습니다. “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로 먹게 하겠느냐 ”이 말씀에는 예수님의 목자의 충만한 심정이 담겨져 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왜 이 질문을 특별히 빌립에게 하신 것입니까? 6절을 보십시오. “ 이렇게 말씀하심은 친히 어떻게 하실 것을 아시고 빌립을 시험코자 하심이라. ” 예수님은 목자의 심정에서 이미 무리들을 먹이고자 결심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빌립에게 질문하신 것은 자신이 어떻게 하실 지를 몰라서 머리좋고 벳세다 출신으로서 이곳사정에 밝은 빌립에게 도움을 청하기 위해서 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시험하고자 하심’이었다고 했습니다. 선생님들이 학생들에게 시험문제를 내는 것은 그 문제의 답을 몰라서 내는 것이 아닙니다. 시험이란 학생들이 자신들의 부족한 점을 깨닫고 성장하도록 하기 위해서 내는 것입니다. 빌립은 머리가 똑똑한 사람이었습니다. 요한복음 1장에서 안드레와 빌립이 각각 예수님을 증거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안드레는 단순히 “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 ” 라고 증거했습니다. 그러나 빌립은 “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요1:25) ” 라고 증거했습니다. 그는 안드레보다 좀더 분석적이고 냉철한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그는 성경공부도 잘했을 것입니다. 또한 그는 제자들중 유일하게 헬라어를 구사할 줄 아는 지성인이기도 했습니다.(요12:20). 또한 그는 눈에 보이는 것만 믿는 실증주의자였습니다.(요14:8) 이런 빌립은 세상적으로 볼 때 훌륭한 리더의 자질을 갖추고 있었으나 영적인 리더가 되기위해서는 그의 차가운 가슴과 믿음없음을 극복해야 했습니다. 즉 목자의 심정과 믿음측면에서 성장해야 했습니다. 시험에는 종종 헷갈리게 하는 단어가 있는 데 예수님이 낸 시험문제에는 ‘사서’ 라는 단어가 그 역할을 했습니다. 예수님은 무리를 먹이시면서 제자들을 교훈하길 원하셨습니다. 특별히 빌립을 사랑하시고 그가 영적인 리더로서 단점을 깨닫고 성장하도록 돕고자 하셨습니다. 이 예수님은 훌륭한 제자양성가이십니다.
질문을 받은 빌립은 잠깐 머뭇거리더니 즉시 컴퓨터처럼 답을 말하였습니다. “ 각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 이 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하리이다. ” 눈 깜짝할 사이에 그는 사람들의 수가 약 5000 명이라는 것과 한 사람당 조금씩 받게 하더라도, 즉 2000원짜리 한솥도시락 하나씩을 준다하더라도 적어도 200 데나리온 즉 1000만원이 필요하다는 분석을 냈습니다. 그런데 그의 말은 단순한 분석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말은 무리를 먹이기위해서는 도시락 5000개가 필요한데 그것을 살 곳도 살 돈도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의 말에는 예수님께 대한 예의상 “ 안됩니다. ” “ 그것은 비현실적인 무모한 시도입니다. ” 라는 말은 넣을 순 없었지만 사실상 예수님이 그 많은 무리를 먹이고시고자 하는 것은 어림도 없는 일이라는 단언이 담겨져 있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주신 방향에 대해서 순종하고자 어떤 가능성을 찾고 어떤 시도를 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분석적이었으나 부정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빌립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첫째 목자의 심정이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어찌하든지 무리들을 먹이고자 하셨습니다. 배고파서 기진한 그들을 먹이고자 하셨습니다. 그러나 빌립은 차가왔습니다. 무리들이야 어떻게 되든 말든 게의치 않고자 했습니다. 그는 지성은 살아있었으나 가슴이 차가왔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목자의 심정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가 목자의 심정이 있었다면 그는 배고픈 무리를 어떻게라도 먹여 볼려고 노력했을 것입니다.
둘째 믿음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는 계산을 잘 했습니다. 상황파악도 잘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계산할 때 예수님을 자기 계산에 넣지는 않았습니다. 모든 계산에 예수님을 넣는 것이 믿음입니다. 반면에 예수님을 빼먹는 것은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셋째 그는 부정적이었고 냉소적이었습니다. 그는 돈이 없고 빵을 살 곳이 없기 때문에 무리들을 먹일 수 없다고 결론을 내었습니다. 부정적인 사람들은 뭐가 없고 뭐가 없기 때문에 결론적으로 주님의 명령에, 주님의 뜻에 순종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역사에 대해서 냉소적이고 그 어떤 시도도 하지 않습니다.
빌립이 예수님을 실망시켰을 때 누가 무슨 제안을 했습니까?
8,9절을 보십시오. “ 제자중 하나 곧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가 예수께 여짜오되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졌나이다 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삽나이까 ” 안드레의 이미지는 뭔가 좀 부족해 보이는 사람입니다. 전에 그는 그의 형 시몬 베드로를 예수님께 인도했었습니다.(요1:42) 그 때에도 예수님은 훌륭한 안드레에게 “ 너는 장차 게바가 되리라” 하셔야 했는 데 그 말을 베드로에게 하셨습니다. 여기 8절에서도 저자는 안드레를 시몬 베드로의 형제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안드레는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다른 사람들이 자신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든지 관계없이 믿음으로 행동했습니다.
그는 예수님과 빌립사이의 대화를 어깨너머로 들었습니다. 그 때 그는 조용히 사라졌습니다. 그는 어떤 먹을 것이 있는 가를 찾았습니다. 그는 사람들 사이를 돌아다니다가 마침내 한 소년을 발견했습니다. 그 소년은 자신의 점심도시락을 포기하길 원치 않았음에 틀림없습니다. 그래서 안드레는 그 아이를 설득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 소년을 예수님께 데리고 나왔습니다. 그리고 안드레는 흥분해서 말했습니다. “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졌나이다 그러나 이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삽나이까? ” 그는 그 큰 무리를 먹이기위해서 그렇게 적은 음식을 가져왔다는 점에서 거의 바보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는 완전히 바보는 아니었습니다. 그는 그 음식이 그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적은 것인가를 알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이런 안드레를 통해서 무엇을 배울 수 있습니까?
첫째로, 그의 심정을 배울 수 있습니다. 그는 무리들을 먹이고자 하는 예수님의 마음을 공유했습니다. 목자의 심정으로 그는 무언가를 찾기 시작했습니다. 빌립의 머리는 냉철했으나 가슴은 차가웠습니다. 반면 안드레는 머리는 좀 부족해도 심정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단순하게 예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고 싶었습니다. 또한 무리를 먹이고자 하시는 예수님의 마음에 동참했습니다. 배고픈 무리들의 심정을 이해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필요로 하시는 떡을 찾고자 했습니다.
둘째로, 그의 믿음을 배울 수 있습니다. 그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찾은 그 오병이어를 들고 예수님께 나왔습니다. 믿음이란 뭔가를 예수님께 들고 나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무엇인가를 하실 수 있다고 기대하는 것입니다. 그는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셋째로, 그의 기도를 배울 수 있습니다. 그는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너무나 적다는 것을 잘 알았습니다. 그것으로 오천 명을 먹인다는 것은 택도 없다는 것을 잘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말했습니다. “ 그러나 이것이 이 많은 사람들에게 얼마나 되겠삽니이까? ” 그러나 이것은 그의 절망이나 한탄이나 아니라 그의 기도였습니다. 그는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넷째로 그의 긍정적인 사고방식을 배울 수 있습니다. 자신이 가지지 못한 것만 생각하는 사람들은 항상 부정적이고 냉소적이고 운명적이 됩니다. 그러나 가진 것에 대해서 생각하는 사람들은 긍정적입니다. 안드레는 그가 가진 것을 통해서 가능성을 찾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말했습니다. “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졌습니다. ” 빌립은 자신이 ‘가지지 않은 것’들에 대해서 말했습니다. 그러나 안드레는 ‘여기 있는 것’에 대해서 말했습니다. ‘가지고 있는’ 아이에 대해서 말했습니다. ‘작은’ 이라는 말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그 소년이 가진 떡은 질이 낮았고 양도 매우 적었습니다. 안드레가 예수님께 가져온 것은 정말 말 그대로 보잘 것 없는 것이었습니다. 게다가 그것은 안드레의 것도 아니요 소년의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오늘 말씀에서 어서 배워야 할 것중에 하나도 긍정적인 사고방식입니다. 우리가 자꾸 없는 것을 생각할 때 부정적인 결론을 내릴 수 밖에 없습니다.
안드레의 오병이어를 받으신 예수님은 무엇을 하셨습니까? 10절을 보십시오. “ 예수께서 사람들로 앉게 하라 하시니 그 곳에 잔디가 있는 지라 사람들이 앉으매 약 오천 쯤 되었더라 ” 예수님은 제자들로 하여금 사람들이 앉게 하도록 했습니다. 그들은 약 5000 쯤 되었습니다. 11절을 보십시오. “ 예수께서 떡을 가져 축사하사 앉은 자들에게 나눠 주시고 고기도 그렇게 저희의 원대로 주시다. ” 축사란 감사기도를 뜻합니다. 와! 예수님은 안드레의 오병이어를 놓고 감사기도를 하셨습니다.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놓고 예수님은 감사하셨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이 200 데나리온이 아니라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인 것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 적은 양의 음식을 가지고 백성들에게 나눠주시기 시작하셨습니다. 각 사람에게 조금이 아니라 그들이 원하는 만큼 나누어 풍성하게 주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법을 배우게 됩니다. 하나님은 200데나리온이 아니라 오병이어를 통하여 역사하십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것을 주님께 드리면 됩니다. 우리는 오병이어를 하찮게 여길 수 있습니다. “ 그 까짓 것 드리나, 안 드리나 마찬가지야 ”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오병이어를 드리는 것과 드리지 않는 것은 지금 당장은 아무런 차이도 없는 것 같습니다.
결론적으로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법은 200 데나리온을 통해서가 아니라 적고 보잘것없는 오병이어를 통해서입니다. 우리는 200 데나리온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오병이어를 가지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우리는 우리가 가진 최선의 것을 예수님께 들고 나가면 됩니다. 그러면 주님께서는 그것이 얼마나 적든지 상관하지 않으시고 그것을 수천의 무리들을 먹이시는 데 사용하실 것입니다. 우리를 냉소적인 사람들에서 하나님의 마음을 가진 사람들로 자라길 원하시는 예수님을 찬양합니다. 아멘 !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이신 예수님
말씀 요한복음 6:1-21
요절 요한복음 6:9 “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졌나이다 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삽나이까 ”
오늘 말씀은 예수님께서 안드레의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이신 사건과 물위를 걸으신 사건, 두 가지의 기적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특히 오병이어의 기적은 사 복음서 모두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기적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목자로서, 하나님의 양 무리의 영적 지도자들로서 알아야 할 매우 중요한 영적 교훈을 담고 있습니다. 이시간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법과 예수님이 우리에게 가장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배우게 도와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I. 여기 한 아이가 있어 (1-15)
1,2 절을 보십시오. “ 그 후에 예수께서 갈릴리 바다 곧 디베랴 바다 건너편으로 가시매 큰 무리가 따르니 이는 병인들에게 행하시는 표적을 봄이러라 ” 때는 유대인의 명절이 다가 오고 있었을 때였습니다. 성인유대인들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명절은 유월절, 오순절, 초막절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전도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피곤한 제자들과 함께 휴식을 취하시고 그들과만 함께 시간을 갖기 위해서 호수 저편으로 가시고자 하셨습니다.(막6:31) 무리들은 예루살렘으로 가는 데 필요한 시간이 다가옴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예수님께서 병자들에게 행하시는 표적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예수님께서 38년 된 병자를 고치시는 표적을 보았을 때 그들은 예수님 안에서 살아계신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을 보았고 한 영혼에 대한 예수님의 긍휼과 자비를 보았습니다. 종교지도자들이 적의를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그 사람을 안식일에 고치셨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안에서 양무리를 위해서 목숨도 버리실 수 있는 선한 목자의 형상을 보았습니다.
3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산에 오르사 제자들과 함께 거기 앉으시니 예수님은 산으로 올라가셨습니다. 이것은 자신이 무리들을 잘 보고 무리들도 자신을 잘 보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하나님의 사랑으로 영접하셨습니다. 예수님께 나오는 무리들은 어떤 사람들이었습니까? 그들은 대부분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 중 어떤 이들은 중풍병자들이었고 어떤 이들은 문둥병자들이었습니다. 어떤 이들은 귀신들린 이들이었습니다. 간단히 말해, 그들은 인간적으로 볼 때 매우 부담스러운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눈으로 볼 때 그들은 목자 없는 양과 같았습니다. (막 6:34) 예수님은 그들을 도움이 필요한 하나님의 양 무리들로 보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로 하여금 자신과 함께 앉게 앉으셨습니다. 이것은 제자들이 예수님의 눈으로 무리들을 바라보도록 하기위함이셨습니다. 무리들에게 있어서도 제자들이 그들의 영적 지도자임을 알도록 하기 위함이셨습니다.
예수님이 무리들을 보셨을 때 예수님은 그들이 굶주려 있다는 것을 아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먹이길 원하셨습니다. 5절을 보십시오. “ 예수께서 눈을 들어 큰 무리가 자기에게로 오는 것을 보시고 빌립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로 먹게 하겠느냐 하시니 ” 예수님은 무리들을 먹이길 원하셨습니다. 그와 동시에 그의 제자들을 훈련하길 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특별히 제자중 빌립에게 질문하셨습니다. “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로 먹게 하겠느냐 ”이 말씀에는 예수님의 목자의 충만한 심정이 담겨져 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왜 이 질문을 특별히 빌립에게 하신 것입니까? 6절을 보십시오. “ 이렇게 말씀하심은 친히 어떻게 하실 것을 아시고 빌립을 시험코자 하심이라. ” 예수님은 목자의 심정에서 이미 무리들을 먹이고자 결심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빌립에게 질문하신 것은 자신이 어떻게 하실 지를 몰라서 머리좋고 벳세다 출신으로서 이곳사정에 밝은 빌립에게 도움을 청하기 위해서 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시험하고자 하심’이었다고 했습니다. 선생님들이 학생들에게 시험문제를 내는 것은 그 문제의 답을 몰라서 내는 것이 아닙니다. 시험이란 학생들이 자신들의 부족한 점을 깨닫고 성장하도록 하기 위해서 내는 것입니다. 빌립은 머리가 똑똑한 사람이었습니다. 요한복음 1장에서 안드레와 빌립이 각각 예수님을 증거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안드레는 단순히 “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 ” 라고 증거했습니다. 그러나 빌립은 “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요1:25) ” 라고 증거했습니다. 그는 안드레보다 좀더 분석적이고 냉철한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그는 성경공부도 잘했을 것입니다. 또한 그는 제자들중 유일하게 헬라어를 구사할 줄 아는 지성인이기도 했습니다.(요12:20). 또한 그는 눈에 보이는 것만 믿는 실증주의자였습니다.(요14:8) 이런 빌립은 세상적으로 볼 때 훌륭한 리더의 자질을 갖추고 있었으나 영적인 리더가 되기위해서는 그의 차가운 가슴과 믿음없음을 극복해야 했습니다. 즉 목자의 심정과 믿음측면에서 성장해야 했습니다. 시험에는 종종 헷갈리게 하는 단어가 있는 데 예수님이 낸 시험문제에는 ‘사서’ 라는 단어가 그 역할을 했습니다. 예수님은 무리를 먹이시면서 제자들을 교훈하길 원하셨습니다. 특별히 빌립을 사랑하시고 그가 영적인 리더로서 단점을 깨닫고 성장하도록 돕고자 하셨습니다. 이 예수님은 훌륭한 제자양성가이십니다.
질문을 받은 빌립은 잠깐 머뭇거리더니 즉시 컴퓨터처럼 답을 말하였습니다. “ 각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 이 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하리이다. ” 눈 깜짝할 사이에 그는 사람들의 수가 약 5000 명이라는 것과 한 사람당 조금씩 받게 하더라도, 즉 2000원짜리 한솥도시락 하나씩을 준다하더라도 적어도 200 데나리온 즉 1000만원이 필요하다는 분석을 냈습니다. 그런데 그의 말은 단순한 분석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말은 무리를 먹이기위해서는 도시락 5000개가 필요한데 그것을 살 곳도 살 돈도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의 말에는 예수님께 대한 예의상 “ 안됩니다. ” “ 그것은 비현실적인 무모한 시도입니다. ” 라는 말은 넣을 순 없었지만 사실상 예수님이 그 많은 무리를 먹이고시고자 하는 것은 어림도 없는 일이라는 단언이 담겨져 있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주신 방향에 대해서 순종하고자 어떤 가능성을 찾고 어떤 시도를 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분석적이었으나 부정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빌립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첫째 목자의 심정이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어찌하든지 무리들을 먹이고자 하셨습니다. 배고파서 기진한 그들을 먹이고자 하셨습니다. 그러나 빌립은 차가왔습니다. 무리들이야 어떻게 되든 말든 게의치 않고자 했습니다. 그는 지성은 살아있었으나 가슴이 차가왔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목자의 심정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가 목자의 심정이 있었다면 그는 배고픈 무리를 어떻게라도 먹여 볼려고 노력했을 것입니다.
둘째 믿음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는 계산을 잘 했습니다. 상황파악도 잘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계산할 때 예수님을 자기 계산에 넣지는 않았습니다. 모든 계산에 예수님을 넣는 것이 믿음입니다. 반면에 예수님을 빼먹는 것은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셋째 그는 부정적이었고 냉소적이었습니다. 그는 돈이 없고 빵을 살 곳이 없기 때문에 무리들을 먹일 수 없다고 결론을 내었습니다. 부정적인 사람들은 뭐가 없고 뭐가 없기 때문에 결론적으로 주님의 명령에, 주님의 뜻에 순종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역사에 대해서 냉소적이고 그 어떤 시도도 하지 않습니다.
빌립이 예수님을 실망시켰을 때 누가 무슨 제안을 했습니까?
8,9절을 보십시오. “ 제자중 하나 곧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가 예수께 여짜오되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졌나이다 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삽나이까 ” 안드레의 이미지는 뭔가 좀 부족해 보이는 사람입니다. 전에 그는 그의 형 시몬 베드로를 예수님께 인도했었습니다.(요1:42) 그 때에도 예수님은 훌륭한 안드레에게 “ 너는 장차 게바가 되리라” 하셔야 했는 데 그 말을 베드로에게 하셨습니다. 여기 8절에서도 저자는 안드레를 시몬 베드로의 형제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안드레는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다른 사람들이 자신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든지 관계없이 믿음으로 행동했습니다.
그는 예수님과 빌립사이의 대화를 어깨너머로 들었습니다. 그 때 그는 조용히 사라졌습니다. 그는 어떤 먹을 것이 있는 가를 찾았습니다. 그는 사람들 사이를 돌아다니다가 마침내 한 소년을 발견했습니다. 그 소년은 자신의 점심도시락을 포기하길 원치 않았음에 틀림없습니다. 그래서 안드레는 그 아이를 설득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 소년을 예수님께 데리고 나왔습니다. 그리고 안드레는 흥분해서 말했습니다. “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졌나이다 그러나 이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삽나이까? ” 그는 그 큰 무리를 먹이기위해서 그렇게 적은 음식을 가져왔다는 점에서 거의 바보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는 완전히 바보는 아니었습니다. 그는 그 음식이 그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적은 것인가를 알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이런 안드레를 통해서 무엇을 배울 수 있습니까?
첫째로, 그의 심정을 배울 수 있습니다. 그는 무리들을 먹이고자 하는 예수님의 마음을 공유했습니다. 목자의 심정으로 그는 무언가를 찾기 시작했습니다. 빌립의 머리는 냉철했으나 가슴은 차가웠습니다. 반면 안드레는 머리는 좀 부족해도 심정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단순하게 예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고 싶었습니다. 또한 무리를 먹이고자 하시는 예수님의 마음에 동참했습니다. 배고픈 무리들의 심정을 이해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필요로 하시는 떡을 찾고자 했습니다.
둘째로, 그의 믿음을 배울 수 있습니다. 그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찾은 그 오병이어를 들고 예수님께 나왔습니다. 믿음이란 뭔가를 예수님께 들고 나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무엇인가를 하실 수 있다고 기대하는 것입니다. 그는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셋째로, 그의 기도를 배울 수 있습니다. 그는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너무나 적다는 것을 잘 알았습니다. 그것으로 오천 명을 먹인다는 것은 택도 없다는 것을 잘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말했습니다. “ 그러나 이것이 이 많은 사람들에게 얼마나 되겠삽니이까? ” 그러나 이것은 그의 절망이나 한탄이나 아니라 그의 기도였습니다. 그는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넷째로 그의 긍정적인 사고방식을 배울 수 있습니다. 자신이 가지지 못한 것만 생각하는 사람들은 항상 부정적이고 냉소적이고 운명적이 됩니다. 그러나 가진 것에 대해서 생각하는 사람들은 긍정적입니다. 안드레는 그가 가진 것을 통해서 가능성을 찾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말했습니다. “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졌습니다. ” 빌립은 자신이 ‘가지지 않은 것’들에 대해서 말했습니다. 그러나 안드레는 ‘여기 있는 것’에 대해서 말했습니다. ‘가지고 있는’ 아이에 대해서 말했습니다. ‘작은’ 이라는 말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그 소년이 가진 떡은 질이 낮았고 양도 매우 적었습니다. 안드레가 예수님께 가져온 것은 정말 말 그대로 보잘 것 없는 것이었습니다. 게다가 그것은 안드레의 것도 아니요 소년의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오늘 말씀에서 어서 배워야 할 것중에 하나도 긍정적인 사고방식입니다. 우리가 자꾸 없는 것을 생각할 때 부정적인 결론을 내릴 수 밖에 없습니다.
안드레의 오병이어를 받으신 예수님은 무엇을 하셨습니까? 10절을 보십시오. “ 예수께서 사람들로 앉게 하라 하시니 그 곳에 잔디가 있는 지라 사람들이 앉으매 약 오천 쯤 되었더라 ” 예수님은 제자들로 하여금 사람들이 앉게 하도록 했습니다. 그들은 약 5000 쯤 되었습니다. 11절을 보십시오. “ 예수께서 떡을 가져 축사하사 앉은 자들에게 나눠 주시고 고기도 그렇게 저희의 원대로 주시다. ” 축사란 감사기도를 뜻합니다. 와! 예수님은 안드레의 오병이어를 놓고 감사기도를 하셨습니다.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놓고 예수님은 감사하셨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이 200 데나리온이 아니라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인 것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 적은 양의 음식을 가지고 백성들에게 나눠주시기 시작하셨습니다. 각 사람에게 조금이 아니라 그들이 원하는 만큼 나누어 풍성하게 주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법을 배우게 됩니다. 하나님은 200데나리온이 아니라 오병이어를 통하여 역사하십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것을 주님께 드리면 됩니다. 우리는 오병이어를 하찮게 여길 수 있습니다. “ 그 까짓 것 드리나, 안 드리나 마찬가지야 ”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오병이어를 드리는 것과 드리지 않는 것은 지금 당장은 아무런 차이도 없는 것 같습니다.
결론적으로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법은 200 데나리온을 통해서가 아니라 적고 보잘것없는 오병이어를 통해서입니다. 우리는 200 데나리온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오병이어를 가지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우리는 우리가 가진 최선의 것을 예수님께 들고 나가면 됩니다. 그러면 주님께서는 그것이 얼마나 적든지 상관하지 않으시고 그것을 수천의 무리들을 먹이시는 데 사용하실 것입니다. 우리를 냉소적인 사람들에서 하나님의 마음을 가진 사람들로 자라길 원하시는 예수님을 찬양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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