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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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요한복음 제 7 강
말씀 | 요한복음 5:1-29
요절 | 요한복음 5:25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38년 동안 살아 있으나 죽은 자와 같은 삶을 살았던 사람에게 임한 기적을 묵상하면서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듣고 생명이 풍성하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38년 된 병자를 고치신 예수님.
예루살렘에 있는 양문 곁에 히브리 말로 베데스다 즉 자비의 집이라는 못이 있는데 거기 행각 다섯이 있었습니다. 행각은 지붕만 있는 현관식 행랑으로서, 비를 피하는 용도였습니다.
그 안에는 많은 병자, 맹인, 다리 저는 사람, 혈기 마른 사람들이 누워 물의 움직임을 기다렸습니다.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움직이게 하는데 움직인 후에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되었습니다.
사람이 병들고 죽는 것은 슬픈 일입니다. 명절에 찾아오는 사람이 없으니 아픈 사람들은 더욱 우울합니다. 예수님은 명절에 이곳을 찾아가셨습니다.
베데스다 못은 간헐적으로 물이 솟구쳤습니다. 먼저 솟구치는 물에 들어가면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된다는 이야기는 모든 병자들에게 희망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먼저 들어가는 사람만이 낫는 것으로 인해 병자들끼리 경쟁을 해야 했습니다.
베데스다 못은 경쟁으로 인해 병든 사회의 축소판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베데스다에 오심으로 상황은 바뀌어졌습니다. 예수님은 거기서 가장 오래된 38년 된 병자가 누운 것을 보셨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나이보다 더 많은 세월을 병으로 고생하며 누워 있었습니다. 그의 누운 모습에 병으로 고생한 세월의 흔적이 남아 있었습니다.
그는 베데스다 못에 가장 먼저 뛰어들고자 수없이 많은 시도를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번번이 패배의 쓴 맛을 보아야 했습니다. 이제는 연못에 뛰어들기 위해 시도할 힘도 잃어버렸습니다. 그는 이 병을 평생 지고 가야 할 운명적인 것으로 받아들이며 누워있었을 것입니다. 그는 베데스다가 아니면 안 되는 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여기를 떠나지 못하고 지금까지 누워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병이 벌써 오래 된 줄을 아시고 물으셨습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이 질문은 자포자기한 그에게 낫고자 하는 소원을, 어떤 희망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다는 소망을 불러일으켰습니다. 무엇보다 이 말씀은 그에게 나을 수 있는 다른 길이 있다는 것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질문에 그 병자의 대답이 무엇입니까?
7절을 보십시오.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그의 대답은 자연스러운 것이었습니다. 자신이 병자로서 움직임이 느리기 때문에 경쟁에서 패할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도 나름대로 노력을 많이 했을 것입니다. 물 곁에 바로 있다가 소리가 나면 들어가기를 반복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이 있다고 그보다 한 발 앞서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는 물 만 먹고 나오기를 반복했습니다. 때로는 모두가 허탕을 칠 때도 있었습니다. 이런 가운데 그를 도와줄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진정한 베데스다 이십니다.
예수님은 그를 어떻게 일어나 걷게 하셨습니까?
8,9절을 보십시오.
“ 예수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가니라.”
예수님은 말씀으로 그를 일어나 걷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오직 말씀만으로 그를 일어나 걷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권세가 있었습니다. 창조주의 권세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물의 움직임이 아니라 말씀의 움직임이 그 사람의 속에 일어나도록 하심으로 그를 낫게 하셨습니다.
25절에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고 말씀하신 대로 죽어 있던 그 몸의 세포들이, 신경들이, 조직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듣고 살아나게 되었습니다. 38년 된 병자를 말씀만으로 고치심으로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드러내셨습니다.
둘째,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25절을 보십시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여기서 죽은 자들은 누구입니까? 유대인들, 38년 된 병자, 죽음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자들입니다. 죽은 자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만 받아들이지 않음으로 구원을 받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곧 이때 지금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지옥에서 천국으로 옮겨지는 때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바로 그 순간입니다. 우리는 죄와 허물로 죽었었습니다(엡2:5).
지금 마음 문을 열고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영접할 때 살아납니다.
38년 병자가 말씀을 듣고 살아났습니다. 지금 내가 어떤 상태에 있는가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들으면 됩니다. 들으면 살아납니다. 말씀을 듣고 믿으면 기적이 일어납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들려주는 자가 있어야 합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물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일어나 걷는 은혜가 있기를 기도합니다.
말씀을 듣고 살아난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일을 힘써 감당함으로 사람을 살리는 일에 동참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말씀 역사를 축복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말씀 | 요한복음 5:1-29
요절 | 요한복음 5:25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38년 동안 살아 있으나 죽은 자와 같은 삶을 살았던 사람에게 임한 기적을 묵상하면서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듣고 생명이 풍성하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38년 된 병자를 고치신 예수님.
예루살렘에 있는 양문 곁에 히브리 말로 베데스다 즉 자비의 집이라는 못이 있는데 거기 행각 다섯이 있었습니다. 행각은 지붕만 있는 현관식 행랑으로서, 비를 피하는 용도였습니다.
그 안에는 많은 병자, 맹인, 다리 저는 사람, 혈기 마른 사람들이 누워 물의 움직임을 기다렸습니다.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움직이게 하는데 움직인 후에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되었습니다.
사람이 병들고 죽는 것은 슬픈 일입니다. 명절에 찾아오는 사람이 없으니 아픈 사람들은 더욱 우울합니다. 예수님은 명절에 이곳을 찾아가셨습니다.
베데스다 못은 간헐적으로 물이 솟구쳤습니다. 먼저 솟구치는 물에 들어가면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된다는 이야기는 모든 병자들에게 희망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먼저 들어가는 사람만이 낫는 것으로 인해 병자들끼리 경쟁을 해야 했습니다.
베데스다 못은 경쟁으로 인해 병든 사회의 축소판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베데스다에 오심으로 상황은 바뀌어졌습니다. 예수님은 거기서 가장 오래된 38년 된 병자가 누운 것을 보셨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나이보다 더 많은 세월을 병으로 고생하며 누워 있었습니다. 그의 누운 모습에 병으로 고생한 세월의 흔적이 남아 있었습니다.
그는 베데스다 못에 가장 먼저 뛰어들고자 수없이 많은 시도를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번번이 패배의 쓴 맛을 보아야 했습니다. 이제는 연못에 뛰어들기 위해 시도할 힘도 잃어버렸습니다. 그는 이 병을 평생 지고 가야 할 운명적인 것으로 받아들이며 누워있었을 것입니다. 그는 베데스다가 아니면 안 되는 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여기를 떠나지 못하고 지금까지 누워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병이 벌써 오래 된 줄을 아시고 물으셨습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이 질문은 자포자기한 그에게 낫고자 하는 소원을, 어떤 희망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다는 소망을 불러일으켰습니다. 무엇보다 이 말씀은 그에게 나을 수 있는 다른 길이 있다는 것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질문에 그 병자의 대답이 무엇입니까?
7절을 보십시오.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그의 대답은 자연스러운 것이었습니다. 자신이 병자로서 움직임이 느리기 때문에 경쟁에서 패할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도 나름대로 노력을 많이 했을 것입니다. 물 곁에 바로 있다가 소리가 나면 들어가기를 반복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이 있다고 그보다 한 발 앞서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는 물 만 먹고 나오기를 반복했습니다. 때로는 모두가 허탕을 칠 때도 있었습니다. 이런 가운데 그를 도와줄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진정한 베데스다 이십니다.
예수님은 그를 어떻게 일어나 걷게 하셨습니까?
8,9절을 보십시오.
“ 예수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가니라.”
예수님은 말씀으로 그를 일어나 걷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오직 말씀만으로 그를 일어나 걷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권세가 있었습니다. 창조주의 권세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물의 움직임이 아니라 말씀의 움직임이 그 사람의 속에 일어나도록 하심으로 그를 낫게 하셨습니다.
25절에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고 말씀하신 대로 죽어 있던 그 몸의 세포들이, 신경들이, 조직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듣고 살아나게 되었습니다. 38년 된 병자를 말씀만으로 고치심으로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드러내셨습니다.
둘째,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25절을 보십시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여기서 죽은 자들은 누구입니까? 유대인들, 38년 된 병자, 죽음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자들입니다. 죽은 자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만 받아들이지 않음으로 구원을 받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곧 이때 지금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지옥에서 천국으로 옮겨지는 때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바로 그 순간입니다. 우리는 죄와 허물로 죽었었습니다(엡2:5).
지금 마음 문을 열고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영접할 때 살아납니다.
38년 병자가 말씀을 듣고 살아났습니다. 지금 내가 어떤 상태에 있는가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들으면 됩니다. 들으면 살아납니다. 말씀을 듣고 믿으면 기적이 일어납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들려주는 자가 있어야 합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물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일어나 걷는 은혜가 있기를 기도합니다.
말씀을 듣고 살아난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일을 힘써 감당함으로 사람을 살리는 일에 동참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말씀 역사를 축복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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