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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제6강 예수님의 양식(요4:3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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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정베드로
댓글 0건 조회 53회 작성일 15-07-12 17:53

본문

2015년 요한복음 제 6 강
말씀 요한복음 4:31-54
요절 요한복음 4:34
예수님의 양식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

우리는 지난 주 깊은 사랑과 영혼의 대화를 통해 사마리아 여인의 목마름을 해결해 주신 예수님을 배웠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님이 주시는 말씀의 생수를 마시고 참된 만족을 누렸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도 예수님께 나아가 영혼의 참된 만족을 주시는 말씀의 생수, 성령의 생수를 넘치도록 부어주시길 기도합니다. 오늘 말씀은 예수님의 양식과 비전에 관한 말씀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의 변화를 보신 예수님은 배고픔을 잊으셨습니다. 그리고 그녀의 변화를 통해 사마리아 땅을 영적으로 희어져 추수하게 된 밭으로 바라 보셨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도 예수님처럼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과 참된 비전이 무엇인지를 배울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제1장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31-42)
31,32절을 봅시다. 사마리아 여인이 동네에 내려간 사이 제자들이 예수님께 음식을 잡수시도록 청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양식이 있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이 말씀을 듣고 “예수님이 자기들 몰래 숨겨놓은 음식이 있는가 보다”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그 양식이 무엇인지를 말씀하셨습니다. 34절을 읽어 봅시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

예수님의 양식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음식이 아니라 그의 사명을 의미합니다. 러시아의 대문호 톨스토이의 단편집에는 사람이 무엇으로 사는가? 라는 단편이 나옵니다. 그 내용을 간략히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어느 마을에 시몬이란 가난한 구두수선공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어느 날 양가죽을 사러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한 젊은이가 벌거벗은 채 예배당 벽에 웅크리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시몬은 외투를 벗어 그에게 입히고 자신의 집으로 데리고 와 구두 만드는 법을 가르치며 같이 지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시몬은 이름이 미하일이라는 것 말고는 그에 대해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 젊은이가 온지 1년이 지난 어느 날 한 부자가 찾아와서 1년을 신어도 형태가 변하거나 바느질이 터지지 않는 장화를 만들어 달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 젊은이는 그 부자가 곧 죽을 것을 알고 장화 대신에 사람이 죽을 때 신기는 단화를 만들었고 얼마 뒤 그 부자는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 뒤 6년이 지난 어느 날, 한 부인이 쌍둥이 소녀를 데리고 왔습니다. 그 부인은 아이들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후 아이들을 맡아 키우고 있다고 했습니다. 부인이 돌아가자 그 젊은이는 하늘을 쳐다보며 미소를 지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몸에서 빛이 나기 시작했습니다. 시몬은 그에게 물었습니다. “미하일, 어찌된 일인가?” 그 때 그는 그 동안의 자초지정을 모두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그는 본래 하나님을 수종 들던 천사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하나님께서 아까 그 소녀들의 어머니를 데려오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는 아기들에게 젖먹일 힘조차 없던 여인의 영혼을 데려갈 수 없어 하나님의 명령을 어겼습니다. 그는 그 벌로 인간 세상에서 세 가지 질문에 대해 깨달으면 돌아오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게 됩니다. 그 세 가지 질문은 이것입니다. 첫째 질문은 사람 안에 있는 것이 무엇인가?, 둘째 질문은 사람에게 주어지지 않은 것이 무엇인가? 세 번째 질문은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입니다.

이런 그는 시몬 부부가 자신을 불쌍히 여겨 받아 주었을 때 사람 안에 있는 것이 사랑이라는 것을 깨달았고 부자가 장화를 주문했을 때 사람은 자신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아는 힘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고 마지막으로 하나를 깨닫지 못했는데 쌍둥이 소녀를 보살피는 부인의 모습에서 사람은 사랑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말했습니다. 그러고는 등 뒤의 날개를 퍼덕이며 하늘로 올라갔다고 합니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에 대한 톨스토이의 답은 “사랑으로 산다.” 였습니다. 소설을 통해 담에 낸 톨스토이의 삶에 대한 통찰이 대단하고 감동적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오늘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도 사실은 톨스토이가 던진 질문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사람이 무엇으로 사는가? 예수님은 사람은 음식으로만 사는 존재가 아니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음식은 우리의 배를 부르게 할 수는 있어도 우리의 영혼을 배부르게 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많이 먹고 잘 먹어도 우리의 영혼은 얼마든지 헐벗고 배고플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의 영혼이 배부르고 참된 만족을 누리는 삶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예수님의 말씀과 같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며 그이 일을 온전히 이루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뜻은 무엇입니까? 이에 대해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요6:39) 하나님의 뜻은 할 수만 있으면 모든 사람들이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이를 이루기 위해 하나님이 하신 일이 무엇입니까? 이에 대해 요한복음6:29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시니” 하나님이 하신 일은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그를 힘입어 죄인들이 죄사함을 받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의 일을 이루고자 온전히 헌신하셨습니다. 이를 위해 예수님이 하신 일은 크게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첫째로 예수님은 하나님이 보내신 자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이와 관련된 말씀으로 요한복음13:1절 말씀을 읽어 보겠습니다.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그는 그 다음 날 체포되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을 것을 아시면서도 다른 무엇이 아닌 제자들을 사랑하는 일에 집중하셨습니다. 그는 십자가에 달려 죽음의 고통을 당하는 중에도 그와 함께 달린 행악자들을 섬기시고 그들을 낙원으로 초청하셨습니다. 그리고 사도요한에게는 모친 마리아를 부탁하셨습니다. 그는 죽음의 고통 가운데서도 하나님이 보내신 자기 사람을 사랑하는 일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둘째로 그는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이와 관련된 말씀으로 요한복음 17:6-8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세상 중에서 내게 주신 사람들에게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었나이다. 그들은 아버지의 것이었는데 내게 주셨으며 그들은 아버지의 말씀을 지키었나이다. 지금 그들은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것이 다 아버지로부터 온 것인 줄 알았나이다. 나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말씀들을 그들에게 주었사오며 그들은 이것을 받고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나온 줄을 참으로 아오며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줄도 믿었사옵나이다.” 이것은 예수님이 하나님께서 드린 기도의 한 부분입니다. 그는 하나님께 드린 기도에서 이 땅에 있는 동은 그가 힘써 한 일이 내게 주신 말씀을 그들에게 가르친 것이라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받은 제자들이 이제는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나온 줄을 알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줄을 믿는다고 고백합니다. 이는 그가 하나님이 보내신 자들이 그를 하나님이 보내신 구주시요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는 일을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 그들을 구원하고 그들을 통해 세상을 구원하는 일을 하신 것입니다.

세상에는 위대한 일들이 많습니다. 페니실린과 같은 신약을 만들어 불치병을 낳게 하는 일도 위대하고, 컴퓨터와 인터넷과 같은 문명의 이기를 만드는 일도 위대한 일들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일들보다 더 위대한 일은 멸망 받을 수밖에 없는 영혼을 살리는 일입니다. 이 일을 누가 하십니까? 그것은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 이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일을 당신의 양식으로 삼으신 것입니다. 양식은 먹어도 되고 먹지 않아도 되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반드시 먹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음식을 먹지 않으면 죽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하나님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것을 자신의 목숨처럼 여기신 것입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은 모두 하나님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일을 목숨처럼 여기고 헌신합니다. 그들은 선한 목자 예수님을 배워서 양들을 사랑하되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고자 합니다. 그들은 세상 물질이나 철학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말씀과 믿음을 가르칩니다. 우리 모임을 창설하신 고 사무엘과 마더 베리 선교사님들이 바로 그런 분들입니다. 그들은 울밑에선 봉선화와도 같이 한 많은 한국 청년대학생들을 불쌍히 여기고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가난과 운명주의를 극복하고 세계를 먹이는 비전을 품고 도전하도록 도우셨습니다. 그로인해 수많은 위대한 목자, 선교사들이 탄생했고 그 결과 전 세계 수많은 캠퍼스에서 생명이 살아나고 풍성케 되는 역사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무엇을 양식으로 삼고 있습니까? 이 세상의 양식은 그것이 아무리 고상하고 위대해 보여도 다 썩을 양식입니다. 그러나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영원한 양식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목적”이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목적을 이루는 삶을 “사명”이라고 부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삶은 예수님처럼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는 삶, 곧 사명의 삶입니다.

전 권투 헤비급 세계 챔피언 조지포먼의 이야기는 목적을 위한 삶의 위대함을 가르쳐주는 좋은 사례입니다. 그는 40연승을 기록하고 있던 챔피언 시절 당시 퇴물로 여겨지던 32살의 노장 무하마드 알리에게 KO패를 당합니다. 그 충격으로 그는 권투를 그만두고 방황의 시간을 보내다 예수님을 만나 목사가 되어 고향에서 목회활동을 합니다. 그렇게 세상에서 잊혀진 챔피언으로 살아가던 그는 45세의 나이에 다시 링 위에 오르게 됩니다. 35세의 나이에도 노장이 되어 버리는 이곳에서 45세의 노장 파이터가 젊은 챔피언을 상대하겠다니,,, 사람들은 모두 비웃어 버렸습니다. 그러나 그는 비록 경기 중에 챔피언에게 밀리기는 했지만 결코 쓰러지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모든 사람의 예상을 뒤엎고 젊은 챔피언을 링에 쓰러뜨려 또한번 세상을 놀라게 했습니다. 사람들은 그가 승리할 수 있었던 비결이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그때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제게는 승리, 그 이상의 목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단순히 승리하기 위함이 아니라, 승리를 꼭 해야만 하는 이유,,, 그 목적은 바로 빈민가의 청소년들에게 힘을 줄 수 있는 청소년센터의 운영자금을 마련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이어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 이유가 더욱더 간절하고 간절한 사람은 분명히 쓰러지지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에게는 조지포먼과 같은 분명한 삶의 목적이 있습니까? 단순히 1등을 하기 위함이 아닌, 좋은 대학을 가기 위함이 아닌, 좋은 직장을 얻고자 함이 아닌, 좀 더 잘 살고 행복하기 위함이 아닌 그 이상의 목적, 반드시 그렇게 되어야만 하는 그 이유가 있습니까? 지난주 기말고사 끝난 친구들도 있고 이번주까지 시험을 보는 친구들이 있습니다. 여러분 공부하기 참 힘들죠? 공부뿐만 아니라 여러분의 삶을 힘들게 하는 많은 일들이 있을 줄 압니다. 그러나 우리의 삶이 아무리 힘들고 어떠한 고통이 있을 지라고 결코 쓰러지지 않을 수 있는 비결은 내 삶의 분명한 목적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삶의 목적이 분명하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것이었습니다. 이를 통해 하나님이 그에게 보내신 자들을 구원하며 그들의 생명을 풍성케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JBF 친구들이 나의 삶의 목적을 분명히 발견하도록 도와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제2장 가장 위대한 표적은 무엇인가?(43-54)
예수님은 사마리아에서 이틀을 유하셨습니다. 그곳에서 자기에게 나온 사람들에게 말씀을 가르치셨고 그 말씀을 들은 자들이 예수님을 믿는 놀라운 역사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정작 예수님은 많은 표적을 행한 고향 갈릴리에서 환영을 받지 못했습니다. 이는 예수님을 요셉의 아들, 마리아의 아들로 생각하는 인간적인 분위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리 가나에 계실 때 왕의 신하가 급히 찾아와 병든 아들을 고쳐달라고 간청하였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예수님은 그의 요청에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못지 아니한다.”고 말씀하시며 시쿵둥한 반응을 보이셨습니다. 그러나 왕의 신하는 그로인해 실망하지 않고 “주여, 내 아이가 죽기 전에 내려오소서.” 다시 한번 간청합니다. 그때 예수님은 “네 아이가 살아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놀랍게도 왕의 신하는 이 말씀을 믿고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는 집으로 내려가는 길에 그 집 종들을 만났는데 그들이 기뻐하며 “아이가 살아있다”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 낫기 시작한 때를 물으니 그때가 바로 예수님이 그에게 말씀하시던 바로 그 때였습니다. 이를 통해 왕의 신하는 그 자신뿐 아니라 그 집안이 모두 믿고 구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예수님께서 왜 왕의 신하의 아들을 고쳐주시지 않고 말씀하셨는지를 생각해 봐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일은 표적을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40년간 매일 같이 표적을 보면서 살았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가나안 입성을 앞두고 두려움에 빠져 하나님이 우리를 이곳으로 인도해 내서 우리를 죽게 한다고 난리를 치며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우리는 표적으로 보며 더 잘 믿을 것 같고 믿음이 견고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반드시 그렇지는 않습니다. 표적신앙은 표적이 없으면 도무지 믿으려 하지 않습니다. 표적신앙은 더 큰 표적, 더 큰 자극을 찾기 때문에 거짓 그리스도가 표적과 기사로 유혹하며 쉽게 넘어갈 수 있습니다. 수많은 이단들이 그렇게 표적을 구하다 믿음에서 실족한 것입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은 왕의 신하의 아들을 고쳐주시지 않고 다만 말씀만 하셨습니다. 이를 통해 그에게 말씀을 믿는 믿음을 가르치셨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나타난 예수님의 영광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왕의 신하의 아들이 고침을 받은 것이 아니라 표적을 구하던 왕의 신하가 예수님의 말씀을 믿었다는 것입니다. 병고침을 받고 귀신을 쫓아내는 것보다 더 큰 표적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표적을 행하신 이유도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믿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표적을 구하기보다 말씀을 구해야 하겠습니다. 표적을 보고 믿는 자가 아니라 보지 않고 믿는 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의 제자 중에 도마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다고 하는 다른 제자들의 말을 믿지 않았습니다. 아니 믿을 수 없었습니다. 그는 내가 두 눈으로 그의 손의 못자국을 보며 내 손으로 그 옆구리에 난 상처를 만져보기 전에는 절대로 믿을 수 없다고 버텼습니다. 그런데 이런 그를 부활하신 예수님이 찾아오셨습니다. 그가 원하는대로 그 손의 못자국과 옆구리에 난 창자국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네가 본 고로 믿느냐 보지 않고 믿는 자가 복되도다. 믿음이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고 격려해 주셨습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믿으십니까? 보고 만져야 믿을 수 있을까요? 보지 못했지만 만져보지 못했지만 말씀을 믿는 믿음이 복이 있습니다. 말씀을 믿는 믿음이야 말로 가장 위대한 표적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일은 그의 말씀을 믿고 영생을 얻게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JBF 친구들이 말씀을 믿는 믿음이 가장 위대한 표적임을 믿고 체험하는 가장 복된 신앙생활을 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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