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브리서8강 한 번의 영원한 제사 (히9:23-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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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히브리서8강
말씀 | 히브리서 9:23-10:18
요절 | 히브리서 10:14
한 번의 영원한 제사
“그가 거룩하게 된 자들을 한 번의 제사로 영원히 온전하게 하셨느니라.”
오늘 말씀은 히브리서 교리편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히브리서 말씀이 논문처럼 매우 논리적이고 조직적으로 쓰여졌기 때문에 이해하기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히브리서가 전하고자 하는 논점은 명확합니다. 그것은 예수님은 우리의 영원한 대제사장이 되셔서 한 번의 제사로 우리의 죄를 위한 영원한 속제를 이루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 우편에 앉으셔서 지금도 우리를 위해 중보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당시 히브리인 신자 중에는 예수님을 믿고도 여전히 죄가 있고 죄를 짓고 있는 자신을 보면서 예수님의 피의 능력을 의심하고 짐승의 피를 흘려 죄를 씻는 구약의 제사로 돌아갈려고 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이런 생각을 하는데는 예수님의 피로 우리를 의롭다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이해하지 못한 탓입니다. 그렇기에 히브리서 저자는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 예수님은 한 번의 제사를 통해 우리의 죄를 위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셨고 그렇기에 예수님을 통한 구원은 우리의 행위와는 관계없는 완전한 구원임을 증거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 JBF 친구들이 예수님의 피로 우리를 의롭다하신 하나님의 구원이 영원하고 완전하다는 것을 굳게 믿고 예수님 안에 깊이 뿌리 내릴 수 있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13절을 봅시다. “염소와 황소의 피와 및 암송아지의 재를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하게 하여 거룩하게 하거든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 구약의 성전은 어떤 역할을 했을까요? 성전은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곳입니다. 그곳에서는 주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거나 기도를 하고 그보다 더 중요한 일은 백성들의 죄사함을 위한 제사를 드리는 일이었습니다. 죄사함을 위해서는 양이나 염소나 황소를 잡아 피를 흘려야 했습니다. 성전은 성소와 지성소로 나뉘어져 있는데 하나님의 존전을 상징하는 지성소에는 대속제일에 대제사장만이 일 년에 한번 들어가 백성들의 죄를 위한 중보기도를 하였습니다. 그때 대제사장은 염소와 황소와 및 암송아지의 재를 자신과 백성들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하게 한 후에야 지성소에 들어갔습니다. 대제사장은 짐승의 피와 재가 그들의 죄를 정결케 하였음을 믿고 하나님 앞에 나아갈 담력을 얻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영원한 대제사장 되신 예수님은 자신을 제물로 드려 흘리신 피로 우리의 죄를 씻으셨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그리스도의 피를 믿을 때 더 큰 담력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구약시대에 짐승의 피를 흘려서 제사를 드리게 하신 것은 이유는 무엇입니까? 23-26절을 봅시다. 히브리서 저자는 구약의 제사는 하늘의 있는 것들의 모형이요 참 것의 그림자라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 이는 우리 죄를 위해 하늘 성소에서 우리 죄를 위한 제사를 드리신 그리스도의 모형이요 그가 이 땅에 오셔서 하실 일을 상징하고 있는데 마침내 예수님이 우리의 영원한 대제사장으로 이 땅에 오셔서 구약이 율법과 제사를 완전하신 것입니다. 이 제사는 짐승의 피가 아닌 영원한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신의 피를 흘리신 완전한 제사요 한 번의 제사로 영원히 죄를 깨끗이 씻는 영원한 제사입니다. 이처럼 놀라운 죄사함의 은혜는 예수님의 고난과 희생을 통해 값어진 우리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이 제사를 우리의 죄사함을 위한 하나님의 선물 곧 “은혜”라고 하는 것입니다.
27,28절을 봅시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 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 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 여러분 예수님을 믿으면 죄사함을 받고 영생을 얻는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이것이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죽지 않는다는 뜻인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방금 읽은 말씀을 보면 사림이 ㅜ한번 죽는 것은 정해진 것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 의미는 믿는 사람이나 믿지 않는 사람이나 한번 죽는 것은 하나님이 정하신 것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한번 죽는 것 곧 육체의 죽음은 죄의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인류의 조상인 아담이 죄를 지었을 때 무엇이라고 하셨습니까?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지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렇기에 구약에 나오는 에녹이나 모세나 엘리야와 같이 하나님이 바로 데려가신 분들 말고는 아담의 허리에서 난 모든 사람들이 이 말씀대로 반드시 한번은 죽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영생을 얻었다고 해서 병들지도 않고 죽지도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사람이 한번 죽는 것은 하나님이 정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죽음 이후에 어떠한 삶이 있는지 알지 못합니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죽음이후에 우리의 삶에 대해 이렇게 말씀합니다. “사람이 한번 죽는 것은 하나님이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28) 그렇습니다. 사람의 삶은 한 번의 죽음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그 후에는 심판이 있습니다. 이를 성경에서는 둘째 사망이라고 부릅니다. 성경은 그 심판의 결과 사람의 삶은 영생의 삶과 영벌의 삶이 기다리고 있다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이 심판대 앞에서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위한 변호를 하십니다. 그는 우리 죄를 위한 피를 자신이 흘리셨기 때문에 우리를 무죄라고 변호하시는 것입니다. 영원한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신을 드리신 예수님의 피는 이렇게 영원한 심판에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능력이 되십니다.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 우리가 행한 모든 죄가 들어날 것입니다. 그 죄들이 우리를 정죄하고 우리를 사망으로 몰아갈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우리에게 자신의 영원하신 피로 우리 죄를 위해 변호하시는 영원한 대제사장 되신 예수님이 계시다는 것이 얼마나 큰 은혜입니다. 우리의 영원한 구원의 능력이 되신 예수님을 높여 찬양합니다.
미국 서부에 한 성실한 청년이 살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는 카드놀이를 하다가 몹시 다투던 끝에 그만 이성을 잃고 권총으로 상대를 쏴 죽이고 말았습니다. 그 결과로 그는 교수형의 판결을 받았습니다. 사소한 시비가 죽음을 부른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 청년을 사랑하던 친척들과 이웃들은 진정서를 준비하게 되었습니다. 그 사실이 다른 마을, 다른 도시에서도 알려지자 많은 사람들이 그 진정서에 서명했습니다. 결국 그 진정서가 주지사에게까지 전달이 되었습니다. 바구니 가득 쌓인 진정서를 읽은 주지사는 그 청년을 사면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주지사는 사면장을 써서 주머니에 넣고, 성경을 들고 형무소로 찾아갔습니다. 그러나 그 청년은 사면장을 들고 온 주지사를 전도하러온 목사로 생각하고 그를 만나지 않겠다고 완강하게 거절했습니다. 그 청년은 그가 떠난 후에 간수를 통해 그가 그의 사면장을 들고온 주지사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청년의 사형 집행일이 되었습니다. 그때 사형집행관이 그에게 묻습니다. "죽기 전에 할 말은 없는가?" 그 청년은 대답합니다. "예, 있습니다. 미국의 모든 청년들에게 이 말을 전해 주십시오. 내가 죽는 것은 살인 때문이 아닙니다. 나는 살 수가 있었습니다. 내가 죽는 것은 주지사님의 용서를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 죄를 위해 흘리신 예수님의 피는 심판받고 멸망받을 우리를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사면장입니다. 그렇기에 우리 죄를 위해 자기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 주신 하나님은 더 이상 우리의 죄를 묻지 않습니다. 우리 죄를 위해 자기 아들을 내어 주신 하나님은 우리에게 당신의 사면장을 받으라고 하십니다. 그 사면장의 효력을 믿으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창조주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에 대한 책임을 져주신 사건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처럼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고 믿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 결과는 죄에 대한 책임을 내가 지는 방법밖에 없는 것입니다. 방금 예화에 나오는 청년처럼 말입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은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3:16) 우리의 구원을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오직 이 하나님의 사랑을 믿는 것입니다. 이 사랑을 믿는 믿음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이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을 일생 믿음으로 영생의 삶을 사는 저와 여러분들이 모두 되실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님을 믿고 신앙생활을 하면서 여전히 우리 가운데 죄가 있고 또 죄를 짓는 자신으로 인해 낙심합니다. 예수님을 믿어도 죄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것 같은 생각이 들고 불의감에 빠집니다. 이런 내가 구원을 받은 것인지 의심이 들때도 있습니다. 이런 고민들을 우리만의 고민이 아니라 당시 히브리 성도들의 고민이기도 하였습니다. 이에 대해 히브리서 기자는 무엇이라고 답변합니까? 12-14절을 봅시다.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 또는 한 제사를 드리고 영원히 그 후에 자기 원수들을 자기 발등상이 되게 하실 때까지 기다리시나니 그가 거룩하게 된 자들을 한 번의 제사로 영원히 온전하게 하셨느니라” 이 말씀의 요지가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영원한 제사를 드리셨고 그 제사는 완전한 제사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왜 우리의 죄 때문에 고민하는 불의감과 정죄감에 시달리는 것입니까? 이는 우리가 죄사함을 받은 것과 죄가 없는 것을 혼돈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하나님은 자기의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 주셨습니다. 그의 흘리신 피를 보고 우리를 의롭다 하셨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교리적으로 “칭의” “의롭다하심”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그러나 의롭다함을 받았다고 해서 죄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 죄가 있지만 여전히 죄를 짓고 있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보지 않으시고 우리의 죄를 대속하신 예수님의 피만 보시겠다는 것입니다. 그의 피를 보고 우리를 의롭다고 인정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죄사함을 받았다는 것은 죄가 없는 의인이 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용서받은 의인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죄사함을 받고도 여전히 죄가 우리 안에 있지만 그로인해 여전히 죄를 짓지만 분명히 그 전과 다른 점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14절을 다시한번 봅시다. “그가 거룩하게 된 자들을 한 번의 제사로 영원히 온전하게 하셨느니라” 이를 NIV 성경으로 보면 그 답을 찾는데 더 도움이 됩니다. “because by one sacrifice he has made perfect forever those who are being made holy.” 여기서 거룩하게 된 자들을 NIV를 무엇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까? “those who are being made holy" 즉 거룩하게 되어가고 있는 사람들이라고 진행형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번역이 우리 가운데 있는 죄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개념을 제공해 줍니다. 우리는 예수를 믿는 사람들, 예수로 말미암아 의롭게 된 사람들은 거룩하게 된 사람이 아니라 거룩하게 되어 가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교리적으로는 성화라고 부릅니다. 크리스찬은 거룩한 사람이 아니라 거룩하게 되어가는 사람입니다. 이는 여전히 죄가 있지만 죄와 싸우고 점점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아가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을 통해 주시는 죄사함은 우리를 의롭다하시는 칭의와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는 성화를 포함한 개념입니다. 우리는 칭의와 성화 그리고 장차 우리의 몸이 영광스런 몸으로 부활하는 영화의 개념까지를 모두 포함해서 하나님의 구원이라고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여전히 내 안에 죄가 있지만 죄를 짓지만 나를 의롭다하시는 예수님의 피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구원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점차 우리의 삶이 변화하고 성장하는 모습을 통해 하나님의 구원이 우리의 삶을 통해 성취되고 있음을 고백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바라봐야할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예수님께서 단한번의 제사로 우리 죄를 위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셨고 그 제사는 완전하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의 피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은 영원하고 완전하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바라봐야 할 것은, 우리가 믿고 의지하고 붙들어야할 것은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흘리신 예수님의 보혈의 능력입니다. “죄에서 자유를 얻게 함은 보혈의 능력, 주의 보혈 시험을 이기는 승리되니, 참 놀라운 능력이로다. 주의 보혈 능력이 있도다. 주의 피 믿으오. 주의 보혈 그 어린양의 매우 귀중한 피로다.” 아멘
그러므로 사랑하는 우리 JBF 형제 자매들이여, 여러분들의 죄를 위해 자기 몸을 영원한 산제물로 드리신 예수님의 피, 그의 보혈의 능력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 피를 믿음으로 마음의 담력을 얻어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를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죄사함을 받더라도 우리 안에는 여전히 죄가 있습니다. 그 죄가 우리를 정죄하고 우리를 불의에 빠뜨릴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피를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피는 우리를 심판과 멸망으로부터 구원할 하나님의 사면장입니다. 이 사면장을 하나님이 우리에게 선물로 주셨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죄가 나를 고소할 때 하나님의 사면장인 예수님의 피를 주장하면 됩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8:1,2)
결론적으로 예수님은 한 번의 제사로 우리 죄를 위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셨습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굳게 붙들고 헛되이 믿지 않으면 반드시 구원을 받습니다. 우리 JBF친구들이 이 믿음으로 죄를 이기고 세상을 승리하는 믿음의 용사들이 다 되실 수 있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드립니다. 아멘
말씀 | 히브리서 9:23-10:18
요절 | 히브리서 10:14
한 번의 영원한 제사
“그가 거룩하게 된 자들을 한 번의 제사로 영원히 온전하게 하셨느니라.”
오늘 말씀은 히브리서 교리편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히브리서 말씀이 논문처럼 매우 논리적이고 조직적으로 쓰여졌기 때문에 이해하기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히브리서가 전하고자 하는 논점은 명확합니다. 그것은 예수님은 우리의 영원한 대제사장이 되셔서 한 번의 제사로 우리의 죄를 위한 영원한 속제를 이루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 우편에 앉으셔서 지금도 우리를 위해 중보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당시 히브리인 신자 중에는 예수님을 믿고도 여전히 죄가 있고 죄를 짓고 있는 자신을 보면서 예수님의 피의 능력을 의심하고 짐승의 피를 흘려 죄를 씻는 구약의 제사로 돌아갈려고 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이런 생각을 하는데는 예수님의 피로 우리를 의롭다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이해하지 못한 탓입니다. 그렇기에 히브리서 저자는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 예수님은 한 번의 제사를 통해 우리의 죄를 위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셨고 그렇기에 예수님을 통한 구원은 우리의 행위와는 관계없는 완전한 구원임을 증거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 JBF 친구들이 예수님의 피로 우리를 의롭다하신 하나님의 구원이 영원하고 완전하다는 것을 굳게 믿고 예수님 안에 깊이 뿌리 내릴 수 있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13절을 봅시다. “염소와 황소의 피와 및 암송아지의 재를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하게 하여 거룩하게 하거든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 구약의 성전은 어떤 역할을 했을까요? 성전은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곳입니다. 그곳에서는 주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거나 기도를 하고 그보다 더 중요한 일은 백성들의 죄사함을 위한 제사를 드리는 일이었습니다. 죄사함을 위해서는 양이나 염소나 황소를 잡아 피를 흘려야 했습니다. 성전은 성소와 지성소로 나뉘어져 있는데 하나님의 존전을 상징하는 지성소에는 대속제일에 대제사장만이 일 년에 한번 들어가 백성들의 죄를 위한 중보기도를 하였습니다. 그때 대제사장은 염소와 황소와 및 암송아지의 재를 자신과 백성들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하게 한 후에야 지성소에 들어갔습니다. 대제사장은 짐승의 피와 재가 그들의 죄를 정결케 하였음을 믿고 하나님 앞에 나아갈 담력을 얻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영원한 대제사장 되신 예수님은 자신을 제물로 드려 흘리신 피로 우리의 죄를 씻으셨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그리스도의 피를 믿을 때 더 큰 담력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구약시대에 짐승의 피를 흘려서 제사를 드리게 하신 것은 이유는 무엇입니까? 23-26절을 봅시다. 히브리서 저자는 구약의 제사는 하늘의 있는 것들의 모형이요 참 것의 그림자라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 이는 우리 죄를 위해 하늘 성소에서 우리 죄를 위한 제사를 드리신 그리스도의 모형이요 그가 이 땅에 오셔서 하실 일을 상징하고 있는데 마침내 예수님이 우리의 영원한 대제사장으로 이 땅에 오셔서 구약이 율법과 제사를 완전하신 것입니다. 이 제사는 짐승의 피가 아닌 영원한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신의 피를 흘리신 완전한 제사요 한 번의 제사로 영원히 죄를 깨끗이 씻는 영원한 제사입니다. 이처럼 놀라운 죄사함의 은혜는 예수님의 고난과 희생을 통해 값어진 우리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이 제사를 우리의 죄사함을 위한 하나님의 선물 곧 “은혜”라고 하는 것입니다.
27,28절을 봅시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 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 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 여러분 예수님을 믿으면 죄사함을 받고 영생을 얻는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이것이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죽지 않는다는 뜻인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방금 읽은 말씀을 보면 사림이 ㅜ한번 죽는 것은 정해진 것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 의미는 믿는 사람이나 믿지 않는 사람이나 한번 죽는 것은 하나님이 정하신 것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한번 죽는 것 곧 육체의 죽음은 죄의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인류의 조상인 아담이 죄를 지었을 때 무엇이라고 하셨습니까?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지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렇기에 구약에 나오는 에녹이나 모세나 엘리야와 같이 하나님이 바로 데려가신 분들 말고는 아담의 허리에서 난 모든 사람들이 이 말씀대로 반드시 한번은 죽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영생을 얻었다고 해서 병들지도 않고 죽지도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사람이 한번 죽는 것은 하나님이 정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죽음 이후에 어떠한 삶이 있는지 알지 못합니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죽음이후에 우리의 삶에 대해 이렇게 말씀합니다. “사람이 한번 죽는 것은 하나님이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28) 그렇습니다. 사람의 삶은 한 번의 죽음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그 후에는 심판이 있습니다. 이를 성경에서는 둘째 사망이라고 부릅니다. 성경은 그 심판의 결과 사람의 삶은 영생의 삶과 영벌의 삶이 기다리고 있다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이 심판대 앞에서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위한 변호를 하십니다. 그는 우리 죄를 위한 피를 자신이 흘리셨기 때문에 우리를 무죄라고 변호하시는 것입니다. 영원한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신을 드리신 예수님의 피는 이렇게 영원한 심판에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능력이 되십니다.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 우리가 행한 모든 죄가 들어날 것입니다. 그 죄들이 우리를 정죄하고 우리를 사망으로 몰아갈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우리에게 자신의 영원하신 피로 우리 죄를 위해 변호하시는 영원한 대제사장 되신 예수님이 계시다는 것이 얼마나 큰 은혜입니다. 우리의 영원한 구원의 능력이 되신 예수님을 높여 찬양합니다.
미국 서부에 한 성실한 청년이 살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는 카드놀이를 하다가 몹시 다투던 끝에 그만 이성을 잃고 권총으로 상대를 쏴 죽이고 말았습니다. 그 결과로 그는 교수형의 판결을 받았습니다. 사소한 시비가 죽음을 부른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 청년을 사랑하던 친척들과 이웃들은 진정서를 준비하게 되었습니다. 그 사실이 다른 마을, 다른 도시에서도 알려지자 많은 사람들이 그 진정서에 서명했습니다. 결국 그 진정서가 주지사에게까지 전달이 되었습니다. 바구니 가득 쌓인 진정서를 읽은 주지사는 그 청년을 사면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주지사는 사면장을 써서 주머니에 넣고, 성경을 들고 형무소로 찾아갔습니다. 그러나 그 청년은 사면장을 들고 온 주지사를 전도하러온 목사로 생각하고 그를 만나지 않겠다고 완강하게 거절했습니다. 그 청년은 그가 떠난 후에 간수를 통해 그가 그의 사면장을 들고온 주지사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청년의 사형 집행일이 되었습니다. 그때 사형집행관이 그에게 묻습니다. "죽기 전에 할 말은 없는가?" 그 청년은 대답합니다. "예, 있습니다. 미국의 모든 청년들에게 이 말을 전해 주십시오. 내가 죽는 것은 살인 때문이 아닙니다. 나는 살 수가 있었습니다. 내가 죽는 것은 주지사님의 용서를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 죄를 위해 흘리신 예수님의 피는 심판받고 멸망받을 우리를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사면장입니다. 그렇기에 우리 죄를 위해 자기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 주신 하나님은 더 이상 우리의 죄를 묻지 않습니다. 우리 죄를 위해 자기 아들을 내어 주신 하나님은 우리에게 당신의 사면장을 받으라고 하십니다. 그 사면장의 효력을 믿으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창조주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에 대한 책임을 져주신 사건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처럼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고 믿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 결과는 죄에 대한 책임을 내가 지는 방법밖에 없는 것입니다. 방금 예화에 나오는 청년처럼 말입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은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3:16) 우리의 구원을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오직 이 하나님의 사랑을 믿는 것입니다. 이 사랑을 믿는 믿음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이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을 일생 믿음으로 영생의 삶을 사는 저와 여러분들이 모두 되실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님을 믿고 신앙생활을 하면서 여전히 우리 가운데 죄가 있고 또 죄를 짓는 자신으로 인해 낙심합니다. 예수님을 믿어도 죄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것 같은 생각이 들고 불의감에 빠집니다. 이런 내가 구원을 받은 것인지 의심이 들때도 있습니다. 이런 고민들을 우리만의 고민이 아니라 당시 히브리 성도들의 고민이기도 하였습니다. 이에 대해 히브리서 기자는 무엇이라고 답변합니까? 12-14절을 봅시다.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 또는 한 제사를 드리고 영원히 그 후에 자기 원수들을 자기 발등상이 되게 하실 때까지 기다리시나니 그가 거룩하게 된 자들을 한 번의 제사로 영원히 온전하게 하셨느니라” 이 말씀의 요지가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영원한 제사를 드리셨고 그 제사는 완전한 제사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왜 우리의 죄 때문에 고민하는 불의감과 정죄감에 시달리는 것입니까? 이는 우리가 죄사함을 받은 것과 죄가 없는 것을 혼돈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하나님은 자기의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 주셨습니다. 그의 흘리신 피를 보고 우리를 의롭다 하셨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교리적으로 “칭의” “의롭다하심”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그러나 의롭다함을 받았다고 해서 죄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 죄가 있지만 여전히 죄를 짓고 있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보지 않으시고 우리의 죄를 대속하신 예수님의 피만 보시겠다는 것입니다. 그의 피를 보고 우리를 의롭다고 인정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죄사함을 받았다는 것은 죄가 없는 의인이 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용서받은 의인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죄사함을 받고도 여전히 죄가 우리 안에 있지만 그로인해 여전히 죄를 짓지만 분명히 그 전과 다른 점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14절을 다시한번 봅시다. “그가 거룩하게 된 자들을 한 번의 제사로 영원히 온전하게 하셨느니라” 이를 NIV 성경으로 보면 그 답을 찾는데 더 도움이 됩니다. “because by one sacrifice he has made perfect forever those who are being made holy.” 여기서 거룩하게 된 자들을 NIV를 무엇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까? “those who are being made holy" 즉 거룩하게 되어가고 있는 사람들이라고 진행형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번역이 우리 가운데 있는 죄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개념을 제공해 줍니다. 우리는 예수를 믿는 사람들, 예수로 말미암아 의롭게 된 사람들은 거룩하게 된 사람이 아니라 거룩하게 되어 가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교리적으로는 성화라고 부릅니다. 크리스찬은 거룩한 사람이 아니라 거룩하게 되어가는 사람입니다. 이는 여전히 죄가 있지만 죄와 싸우고 점점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아가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을 통해 주시는 죄사함은 우리를 의롭다하시는 칭의와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는 성화를 포함한 개념입니다. 우리는 칭의와 성화 그리고 장차 우리의 몸이 영광스런 몸으로 부활하는 영화의 개념까지를 모두 포함해서 하나님의 구원이라고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여전히 내 안에 죄가 있지만 죄를 짓지만 나를 의롭다하시는 예수님의 피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구원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점차 우리의 삶이 변화하고 성장하는 모습을 통해 하나님의 구원이 우리의 삶을 통해 성취되고 있음을 고백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바라봐야할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예수님께서 단한번의 제사로 우리 죄를 위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셨고 그 제사는 완전하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의 피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은 영원하고 완전하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바라봐야 할 것은, 우리가 믿고 의지하고 붙들어야할 것은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흘리신 예수님의 보혈의 능력입니다. “죄에서 자유를 얻게 함은 보혈의 능력, 주의 보혈 시험을 이기는 승리되니, 참 놀라운 능력이로다. 주의 보혈 능력이 있도다. 주의 피 믿으오. 주의 보혈 그 어린양의 매우 귀중한 피로다.” 아멘
그러므로 사랑하는 우리 JBF 형제 자매들이여, 여러분들의 죄를 위해 자기 몸을 영원한 산제물로 드리신 예수님의 피, 그의 보혈의 능력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 피를 믿음으로 마음의 담력을 얻어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를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죄사함을 받더라도 우리 안에는 여전히 죄가 있습니다. 그 죄가 우리를 정죄하고 우리를 불의에 빠뜨릴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피를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피는 우리를 심판과 멸망으로부터 구원할 하나님의 사면장입니다. 이 사면장을 하나님이 우리에게 선물로 주셨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죄가 나를 고소할 때 하나님의 사면장인 예수님의 피를 주장하면 됩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8:1,2)
결론적으로 예수님은 한 번의 제사로 우리 죄를 위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셨습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굳게 붙들고 헛되이 믿지 않으면 반드시 구원을 받습니다. 우리 JBF친구들이 이 믿음으로 죄를 이기고 세상을 승리하는 믿음의 용사들이 다 되실 수 있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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