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사기 특강 : 내가 왕이니라 (삿17: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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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사사기 특강
말씀 사사기 17:1-13
요절 사사기 17:6
내가 왕이니라
“그 때에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으므로 사람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오늘 설교는 사사기 17장 말씀을 기초로 한 특강입니다. 오늘 말씀은 사사시대의 초반에 있었던 일로서 에브라임 산지에 살던 단 지파 소속 미가의 집안에 일어난 일을 배경으로 이스라엘의 영적인 혼돈과 배교의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그때 그들의 삶에 대해 성경은 한마디로 그 때에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으므로 사람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왕으로 삼지 않고 자신을 왕으로 삼았을 때 하나님의 구원과 놀라운 기적을 체험한 그들의 신앙생활은 기복적이고 형식적이 되었습니다. 더 나아가 그들은 하나님을 반역하며 죄짓는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이러한 문제가 그때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오늘날에도 있습니다. 또한 미가의 집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우리 교회 안에도 있고 또한 우리 안에도 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성탄절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다가오는 성탄절을 바라보면 이번 성탄축하의 밤에는 뭘 할까 혹은 어떻게 하면 기쁜 성탄을 맞이할까를 고민합니다. 그러나 우리 JBF 친구들은 이런 것을 생각하기에 전에 먼저 오늘 말씀에 기초해서 과연 나는 예수님을 진정 내 삶의 왕으로 삼고 있는지, 아니면 여전히 나 자신을 혹은 다른 무엇을 내 삶의 왕으로 삼고 있는지를 진지하게 생각해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왜냐하면 2천년 전에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우리의 왕으로 오셨기 때문입니다.
제1장. 이스라엘의 기복적인 신앙생활(1-4)
1,2절을 봅시다. 에브라임 산지에 사는 미가라고 하는 사람이 살고 있었습니다. 에브라임은 팔레스틴 중부의 구릉지대로서 이스라엘의 정치와 종교의 중심지인 실로와 벧엘이 위치한 곳이었습니다. 미가라는 이름은 ‘누가 여호와와 같으리요’라는 뜻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의 이름은 매우 신앙적이고 멋진 이름이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삶을 그렇지 못했습니다. 그는 그의 어머니의 돈 은 일천일백개를 훔쳤습니다. 당시 은 한 개가 노동자의 4일 품삯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니 노동자의 하루 품삯을 5만원만 쳐도 2억2천만원이나 되는 엄청나게 큰 돈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돈을 아들이 훔친지도 전혀 모르시는 그의 어머니는 너무나 속이 상해서 그 돈을 훔쳐간 사람을 향해 매일같이 무서운 저주의 말을 퍼부었습니다. “내 은 훔쳐 간 놈 손모가지 부러져라. 길 가다가 벽돌 날아와 머리에 맞아죽어라. 쓰레기차 피할려다 똥차에 치어 죽어라” 이렇게 이를 갈며 매일같이 퍼붓는 저주의 말을 들은 미가는 덜컥 겁이 났습니다. 어머니의 저주의 말을 계속 듣다보니 그 저주가 자기에게 미칠 것 같은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마지못해 어머니에게 훔친 돈을 내놓으며 고백했습니다. “어머니, 무서워요. 저주 그만 하세요. 은은 제가 훔쳤습니다.”(2a)
자식이 이렇게 죄를 지었으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당연히 회개하고 다시는 죄를 짓지 않도록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해서 따끔하게 책망을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미가의 어머니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미가의 죄에 대해선 한마디도 하지 않습니다. 대신에 그녀는 자기의 저주대로 아들이 저주를 받을까봐 두려워서 얼른 “내 아들이 여호와께 복 받기를 원하노라”며 축복의 기도를 합니다. 그리고 그녀는 미가가 훔쳐간 은의 일부를 은장색 곧 우상 만드는 사람에게 주어 신상을 만들게 합니다. 그녀는 그 신상을 하나님께 바침으로 아들에 대한 저주를 풀고자 한 것입니다. 이런 그녀에게 하나님은 경배와 순종이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그녀에게 하나님은 그녀의 복을 위해, 아들의 복을 위해 저주를 막아주시고 일마다 잘 되게 해달라고 비는 장승이나 성황당과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그녀가 하나님을 찾는 이유는 복을 받기 위한 것일 뿐 그녀의 삶에는 하나님의 정의나 진리가 없었습니다. 그렇기에 그녀는 아들의 죄에 대해 문제를 삼지 않았고 아들이 복 받기만을 기도한 것입니다. 기복신앙의 신은 하나님이 아니라 복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은 기복신앙을 싫어하시고 철저히 배격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기복신앙이 그때에만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이러한 기복신앙이 이스라엘 역사상 내내 있었고 교회사에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현대 한국교회의 심각한 문제이기도 합니다. 우리나라는 학력사회, 인맥사회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SKY, SKY 하는 말들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너도 나도 대학입시에 목을 맵니다. 얼마 전에 수능이 끝났는데 수험생을 둔 엄마들이 수능을 볼 때마다 교회나 사찰에 나가 간절히 기도하는 모습을 봅니다. 그 어머니들은 과연 무엇을 위해 기도할까요? 그들은 모두 자녀들이 잘 되기를 진심으로 간절히 기도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기도하는 어머니 중에 아들이 잘 되게 해 달라고 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게 해 달라, 죄짓지 말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분들이 얼마나 있을까요? 내 자녀가 SKY에 들어가는 것보다 하나님께 헌신하고 목자가 되고 선교사가 되는 것을 기뻐하시는 부모님들이 얼마나 될까요? 실상 믿음이 있다고 하는 부모님들도 내 자녀가 목자가 되고 선교사가 되는 것보다 SKY에 들어가고 석박사가 되고 유명인이 되고 돈을 많이 벌고 이렇게 세상의 복 받고 잘 되는 것을 더 기뻐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우리의 자화상은 본문에 나오는 미가의 어머니와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이 복과 무관한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을 잘 믿을 때 복을 받습니다. 그러나 참된 신앙은 복을 목적으로 삼지 않습니다. 참된 신앙은 비록 좋은 대학에 못 들어가도 돈을 못 벌어도 유명인이 되지 못해도 하나님을 내 삶의 왕으로 삼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을 가장 큰 가치로 여기며 죄짓는 것을 가장 무서워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UBF 정신이기도 합니다. 이 세상은 갈수록 영적인 것보다는 돈과 쾌락을 더 사랑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복을 받고자 교회에 나오는 분들도 많습니다. 이런 세상의 영향력 때문에 우리의 신앙도 기복적이 되기 쉽습니다. 그러나 우리 JBF 친구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목숨같이 여기고 사랑한 우리 목자님들과 선교사님들의 귀한 신앙의 유산을 겸손히 배우고 이를 더욱더 아름답게 계승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제2장. 이스라엘의 형식적인 신앙생활(5-13)
5절을 봅시다. “그 사람 미가에게 신당이 있으므로 그가 에봇과 드라빔을 만들고 한 아들을 세워 그의 제사장으로 삼았더라” 에브라임에는 종교의 중심지인 실로와 벧엘에서 제사를 드릴 수 있는 산당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가는 에봇과 드라빔을 만들고 아들 중에 하나를 제사장으로 세워 가정 신당에서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7절을 보면 한 레위인 청년이 나옵니다. 레위인은 본래 이스라엘 열두 족속 중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일만 하도록 정해진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이스라엘 전국에 걸쳐 자기의 사명을 감당할 지역이 정해졌습니다. 그런데 9절을 보면 이 청년이 자신의 사명지인 유다 베들레헴을 떠나 이곳 저곳을 떠돌다 에브라임 산지에 갔고 미가의 집에 이르렀습니다. 그때 미가가 물었습니다. “어디서 왔는가?” 레위인 청년이 말했습니다. “저는 유다 베들레헴에 속한 레위인인데 거처할 곳을 찾으러 다니는 길입니다.” 미가는 사명지를 떠난 이 청년을 책망해야 했습니다. “이 사람아, 레위인의 사명이 얼마나 중요한가 말일세. 그런데 사명의 땅을 버리고 어디로 돌아다니는가?”
그러나 미가는 이 청년을 책망하기는커녕 이 청년을 자기 집 신당의 제사장으로 고용하였습니다. 제사장과 레위인은 하나님을 섬기는 일을 하도록 공적으로 하나님이 구별한 사람들입니다. 그렇기에 그들은 개인 신당을 섬기는 일과 같은 사적인 일을 해서는 안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지게 된 것입니까? 이는 당시 이스라엘 공동체가 자기 분깃을 받지 못한 레위인들을 부양해야 하는 의무를 행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 때문에 생계문제가 절박해진 레위인들은 사명지를 떠나 거처할 곳을 찾아야만 했습니다. 그러다보니 공적인 제사와 백성들에 대한 신앙교육이 무너져있었던 것입니다. 그 결과 그들 중에 레위인 청년과 같이 개인 신당에 취업해서 개인의 복을 빌어주는 신앙적인 일탈이 벌어지게 된 것입니다. 레위인을 개인 제사장으로 고용하게 된 미가는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13절을 봅시다. “레위인이 내 제사장이 되었으니 이제 여호와께서 내게 복 주실 줄을 아노라.” 그는 신당과 신상을 만들고 또 라이선스를 가진 레위인을 제사장으로 고용했으니 구색은 다 갖췄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하나님께서 그의 제사를 받으시고 그에게 복 주실 것을 믿는다고 고백합니다.
우리는 이런 미가의 모습을 통해 공적인 예배가 무너질 때 개인신앙도 세속적이고 형식적이 됨을 볼 수 있습니다. 당시 종교의 중심지인 실로와 벧엘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제사를 드릴 수 있는 산당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제사장과 레위인들의 일탈로 공적인 예배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습니다. 그 결과 백성들은 미가와 같이 가정에 신당을 만들고 자기의 소견에 좋은 대로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 결과 레위인 제사장을 고용하여 종교를 사유화하고 개인의 복을 비는 도구로 전락시켜 버리는 미가와 같은 사람들이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그렇기에 비록 교회가 많은 문제를 갖고 있지만 교회가 바로 서야 합니다. 그곳에서 공적인 예배와 말씀공부와 훈련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때 개인신앙이 견고히 설 수 있는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교회에 나가면 섬겨야 할 일도 많고 사람들과 부딪히기 때문에 혼자서 신앙생활하겠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부르시되 한 몸으로 부르셨습니다. 한 몸을 이루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렇게 할려면 나와 다른 사람을 이해해야 하고 자신을 낮춰야 하고 많이 섬겨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서 우리의 믿음과 인격이 성장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싫다고 혹은 힘들다고 공동체를 떠나게 되면 오늘 본문에 나오는 미가와 같이 기복적이고 형식적인 신앙생활을 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형식이 아닙니다. 구색이 아닙니다. 우리는 매일 기도하고 일용할 양식을 먹고 십일조를 하고 매주 주일예배를 드리니 신앙생활을 잘 하고 있는 것 아닌가?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게 보면 신앙생활을 가장 잘 하는 사람들이 바리새인일 것입니다. 그들은 매일 기도하고 일주일에 이틀을 금식하며 기도했고 시금치의 십일조까지 철저히 드렸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런 그들을 책망하셨습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마23:23) 예수님은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을 들을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5:23) 이것이 참된 예배입니다. 하나님은 마음이 없는 예배, 열매가 없는 우리의 삶을 받으실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받으시는 것은 형식이 아니라 하나님의 정의와 긍휼과 믿음이 담긴우리의 마음입니다. 우리의 삶의 열매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부어 주시길 기도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는 마음을 부어 주시길 기도합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하나님을 영과 진리로서 참된 예배를 드리게 하시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제3장. 자기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는 이스라엘(6)
그러면 왜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이 기복적이고 형식적이 되었을까요? 그 원인에 대해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6절을 봅시다. “그 때에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으므로 사람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6) 가나안 정복전쟁을 할때만해도 여호수아와 같은 강력한 지도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백성들을 철저하게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도한 영적인 지도자였습니다. 그는 아이성 전투에서 패했을 때 전리품을 훔친 아간의 죄를 적발하고 이스라엘 중에 악을 제거했습니다. 그 결과 아이성 전투에서 승리한 후에 하나님의 율법을 돌에 새겼고 축복의 말씀이든 저주의 말씀이든 빼놓지 않고 다 읽었습니다.(수 8:34,35). 그는 전쟁 중임에도 불구하고 전투훈련보다 죄를 적발하고 회개하고 말씀을 낭독하고 그 말씀에 따라 살도록 다짐하는 영적인 훈련을 더 철저히 시켰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이 그들의 왕이 되실 수 있었고, 그런 이스라엘은 거룩하고 강한 백성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사시대에는 그런 지도자 곧 왕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감독하는 지도자가 없으니 백성들은 점차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율법도 자기 나름대로 해석하고 부담스러운 말씀은 빼버리거나 시대에 맞지 않는다고 배척했습니다. 대신에 가나안에 미신적이고 기복적인 사고방식과 생활에 받아들였습니다. 그 결과 그들의 신앙은 여호와 신앙도 아닌 우상숭배도 아닌 혼합신앙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주변 블레셋 백성들에게 시달리는 오합지졸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뿐만 아니라 사람은 그의 영혼을 감독할 목자가 없을 때 누구나 이렇게 됩니다. 어떤 사람은 교회에서 성경을 공부하면 시간도 많이 들고, 사람들과의 갈등도 생기니까, 혼자 집에서 성경을 공부하겠다 말합니다. 물론 글을 읽을 줄 알고 생각할 줄 알면 혼자 성경을 공부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 감독자가 없고, 하나님을 왕 삼고 그의 말씀에 순종하고자 하는 마음이 없이 성경을 공부하면, 그는 곧 해괴하고 독선적인 신앙에 빠지기 쉽습니다. 또 성경이나 신앙생활은 사람들 속에서 배워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런 죄인들 가운데 계십니다. 그들과 미워하고 싸우고, 또는 회개하고 사랑하고, 이런 가운데서 하나님을 체험할 수 있으며, 그럴 때라야 인격이 생기고, 성숙하고 내용 있는 신앙을 가질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말했습니다.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벧전 2:25) 우리가 구원을 얻었다는 게 무엇입니까? 전에는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살았는데, 이제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고 그의 감독을 받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다스리심 받기를 싫어하고 그에게 순종하기를 싫어한다면, 그가 설령 구원 받았다고 주장해도 구원의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사람에게는 본능뿐 아니라 자기 생각이 있고, 자기 의지가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짐승보다 차원 높은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사람에게는 짐승에게 없는 욕심과 죄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만 생각하고, 자기 나름대로 행하면 죄와 욕심 때문에 반드시 파멸에 이릅니다. 그래서 사람에게는 왕이 필요하고 목자가 필요합니다. 이사야는 인간을 구원하러 오실 그리스도를 예언하면서 그 분은 인간들의 왕이 되실 것이라 말합니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사 9:6) 그 왕이 그리스도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을 재판하던 로마 총독 빌라도가 예수님에게 “그러면 네가 왕이 아니냐?” 하고 물었을 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 내가 이를 위하여 태어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언하려 함이로라.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소리를 듣느니라.”(요한 18:37)
예수님은 우리의 왕이십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왕이 되실 때 우리는 죄와 욕심의 지배에서 벗어나 진리에 속할 수 있으며, 진리에 속한 자는 자연히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입니다. 이런 사람들이야 말로 참된 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왕 삼는다? 이것은 인간적으로 불가능한 일입니다. “너희가 하나님과 같이 되리라.”는 사탄의 말에 미혹되어 자신이 하나님이 되고자 하고, 자신이 왕이 되고자 안달하는 인간이 어떻게 예수님을 왕 삼을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을 왕으로 삼고 예수님의 다스리심을 받고자 하는 마음을 가졌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요 성령의 역사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우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살도록 버려두지 마시고, 우리의 왕이 되셔서 우리를 다스리고 감독해 주시기를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아멘!
말씀 사사기 17:1-13
요절 사사기 17:6
내가 왕이니라
“그 때에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으므로 사람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오늘 설교는 사사기 17장 말씀을 기초로 한 특강입니다. 오늘 말씀은 사사시대의 초반에 있었던 일로서 에브라임 산지에 살던 단 지파 소속 미가의 집안에 일어난 일을 배경으로 이스라엘의 영적인 혼돈과 배교의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그때 그들의 삶에 대해 성경은 한마디로 그 때에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으므로 사람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왕으로 삼지 않고 자신을 왕으로 삼았을 때 하나님의 구원과 놀라운 기적을 체험한 그들의 신앙생활은 기복적이고 형식적이 되었습니다. 더 나아가 그들은 하나님을 반역하며 죄짓는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이러한 문제가 그때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오늘날에도 있습니다. 또한 미가의 집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우리 교회 안에도 있고 또한 우리 안에도 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성탄절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다가오는 성탄절을 바라보면 이번 성탄축하의 밤에는 뭘 할까 혹은 어떻게 하면 기쁜 성탄을 맞이할까를 고민합니다. 그러나 우리 JBF 친구들은 이런 것을 생각하기에 전에 먼저 오늘 말씀에 기초해서 과연 나는 예수님을 진정 내 삶의 왕으로 삼고 있는지, 아니면 여전히 나 자신을 혹은 다른 무엇을 내 삶의 왕으로 삼고 있는지를 진지하게 생각해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왜냐하면 2천년 전에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우리의 왕으로 오셨기 때문입니다.
제1장. 이스라엘의 기복적인 신앙생활(1-4)
1,2절을 봅시다. 에브라임 산지에 사는 미가라고 하는 사람이 살고 있었습니다. 에브라임은 팔레스틴 중부의 구릉지대로서 이스라엘의 정치와 종교의 중심지인 실로와 벧엘이 위치한 곳이었습니다. 미가라는 이름은 ‘누가 여호와와 같으리요’라는 뜻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의 이름은 매우 신앙적이고 멋진 이름이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삶을 그렇지 못했습니다. 그는 그의 어머니의 돈 은 일천일백개를 훔쳤습니다. 당시 은 한 개가 노동자의 4일 품삯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니 노동자의 하루 품삯을 5만원만 쳐도 2억2천만원이나 되는 엄청나게 큰 돈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돈을 아들이 훔친지도 전혀 모르시는 그의 어머니는 너무나 속이 상해서 그 돈을 훔쳐간 사람을 향해 매일같이 무서운 저주의 말을 퍼부었습니다. “내 은 훔쳐 간 놈 손모가지 부러져라. 길 가다가 벽돌 날아와 머리에 맞아죽어라. 쓰레기차 피할려다 똥차에 치어 죽어라” 이렇게 이를 갈며 매일같이 퍼붓는 저주의 말을 들은 미가는 덜컥 겁이 났습니다. 어머니의 저주의 말을 계속 듣다보니 그 저주가 자기에게 미칠 것 같은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마지못해 어머니에게 훔친 돈을 내놓으며 고백했습니다. “어머니, 무서워요. 저주 그만 하세요. 은은 제가 훔쳤습니다.”(2a)
자식이 이렇게 죄를 지었으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당연히 회개하고 다시는 죄를 짓지 않도록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해서 따끔하게 책망을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미가의 어머니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미가의 죄에 대해선 한마디도 하지 않습니다. 대신에 그녀는 자기의 저주대로 아들이 저주를 받을까봐 두려워서 얼른 “내 아들이 여호와께 복 받기를 원하노라”며 축복의 기도를 합니다. 그리고 그녀는 미가가 훔쳐간 은의 일부를 은장색 곧 우상 만드는 사람에게 주어 신상을 만들게 합니다. 그녀는 그 신상을 하나님께 바침으로 아들에 대한 저주를 풀고자 한 것입니다. 이런 그녀에게 하나님은 경배와 순종이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그녀에게 하나님은 그녀의 복을 위해, 아들의 복을 위해 저주를 막아주시고 일마다 잘 되게 해달라고 비는 장승이나 성황당과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그녀가 하나님을 찾는 이유는 복을 받기 위한 것일 뿐 그녀의 삶에는 하나님의 정의나 진리가 없었습니다. 그렇기에 그녀는 아들의 죄에 대해 문제를 삼지 않았고 아들이 복 받기만을 기도한 것입니다. 기복신앙의 신은 하나님이 아니라 복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은 기복신앙을 싫어하시고 철저히 배격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기복신앙이 그때에만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이러한 기복신앙이 이스라엘 역사상 내내 있었고 교회사에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현대 한국교회의 심각한 문제이기도 합니다. 우리나라는 학력사회, 인맥사회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SKY, SKY 하는 말들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너도 나도 대학입시에 목을 맵니다. 얼마 전에 수능이 끝났는데 수험생을 둔 엄마들이 수능을 볼 때마다 교회나 사찰에 나가 간절히 기도하는 모습을 봅니다. 그 어머니들은 과연 무엇을 위해 기도할까요? 그들은 모두 자녀들이 잘 되기를 진심으로 간절히 기도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기도하는 어머니 중에 아들이 잘 되게 해 달라고 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게 해 달라, 죄짓지 말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분들이 얼마나 있을까요? 내 자녀가 SKY에 들어가는 것보다 하나님께 헌신하고 목자가 되고 선교사가 되는 것을 기뻐하시는 부모님들이 얼마나 될까요? 실상 믿음이 있다고 하는 부모님들도 내 자녀가 목자가 되고 선교사가 되는 것보다 SKY에 들어가고 석박사가 되고 유명인이 되고 돈을 많이 벌고 이렇게 세상의 복 받고 잘 되는 것을 더 기뻐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우리의 자화상은 본문에 나오는 미가의 어머니와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이 복과 무관한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을 잘 믿을 때 복을 받습니다. 그러나 참된 신앙은 복을 목적으로 삼지 않습니다. 참된 신앙은 비록 좋은 대학에 못 들어가도 돈을 못 벌어도 유명인이 되지 못해도 하나님을 내 삶의 왕으로 삼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을 가장 큰 가치로 여기며 죄짓는 것을 가장 무서워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UBF 정신이기도 합니다. 이 세상은 갈수록 영적인 것보다는 돈과 쾌락을 더 사랑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복을 받고자 교회에 나오는 분들도 많습니다. 이런 세상의 영향력 때문에 우리의 신앙도 기복적이 되기 쉽습니다. 그러나 우리 JBF 친구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목숨같이 여기고 사랑한 우리 목자님들과 선교사님들의 귀한 신앙의 유산을 겸손히 배우고 이를 더욱더 아름답게 계승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제2장. 이스라엘의 형식적인 신앙생활(5-13)
5절을 봅시다. “그 사람 미가에게 신당이 있으므로 그가 에봇과 드라빔을 만들고 한 아들을 세워 그의 제사장으로 삼았더라” 에브라임에는 종교의 중심지인 실로와 벧엘에서 제사를 드릴 수 있는 산당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가는 에봇과 드라빔을 만들고 아들 중에 하나를 제사장으로 세워 가정 신당에서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7절을 보면 한 레위인 청년이 나옵니다. 레위인은 본래 이스라엘 열두 족속 중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일만 하도록 정해진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이스라엘 전국에 걸쳐 자기의 사명을 감당할 지역이 정해졌습니다. 그런데 9절을 보면 이 청년이 자신의 사명지인 유다 베들레헴을 떠나 이곳 저곳을 떠돌다 에브라임 산지에 갔고 미가의 집에 이르렀습니다. 그때 미가가 물었습니다. “어디서 왔는가?” 레위인 청년이 말했습니다. “저는 유다 베들레헴에 속한 레위인인데 거처할 곳을 찾으러 다니는 길입니다.” 미가는 사명지를 떠난 이 청년을 책망해야 했습니다. “이 사람아, 레위인의 사명이 얼마나 중요한가 말일세. 그런데 사명의 땅을 버리고 어디로 돌아다니는가?”
그러나 미가는 이 청년을 책망하기는커녕 이 청년을 자기 집 신당의 제사장으로 고용하였습니다. 제사장과 레위인은 하나님을 섬기는 일을 하도록 공적으로 하나님이 구별한 사람들입니다. 그렇기에 그들은 개인 신당을 섬기는 일과 같은 사적인 일을 해서는 안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지게 된 것입니까? 이는 당시 이스라엘 공동체가 자기 분깃을 받지 못한 레위인들을 부양해야 하는 의무를 행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 때문에 생계문제가 절박해진 레위인들은 사명지를 떠나 거처할 곳을 찾아야만 했습니다. 그러다보니 공적인 제사와 백성들에 대한 신앙교육이 무너져있었던 것입니다. 그 결과 그들 중에 레위인 청년과 같이 개인 신당에 취업해서 개인의 복을 빌어주는 신앙적인 일탈이 벌어지게 된 것입니다. 레위인을 개인 제사장으로 고용하게 된 미가는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13절을 봅시다. “레위인이 내 제사장이 되었으니 이제 여호와께서 내게 복 주실 줄을 아노라.” 그는 신당과 신상을 만들고 또 라이선스를 가진 레위인을 제사장으로 고용했으니 구색은 다 갖췄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하나님께서 그의 제사를 받으시고 그에게 복 주실 것을 믿는다고 고백합니다.
우리는 이런 미가의 모습을 통해 공적인 예배가 무너질 때 개인신앙도 세속적이고 형식적이 됨을 볼 수 있습니다. 당시 종교의 중심지인 실로와 벧엘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제사를 드릴 수 있는 산당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제사장과 레위인들의 일탈로 공적인 예배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습니다. 그 결과 백성들은 미가와 같이 가정에 신당을 만들고 자기의 소견에 좋은 대로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 결과 레위인 제사장을 고용하여 종교를 사유화하고 개인의 복을 비는 도구로 전락시켜 버리는 미가와 같은 사람들이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그렇기에 비록 교회가 많은 문제를 갖고 있지만 교회가 바로 서야 합니다. 그곳에서 공적인 예배와 말씀공부와 훈련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때 개인신앙이 견고히 설 수 있는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교회에 나가면 섬겨야 할 일도 많고 사람들과 부딪히기 때문에 혼자서 신앙생활하겠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부르시되 한 몸으로 부르셨습니다. 한 몸을 이루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렇게 할려면 나와 다른 사람을 이해해야 하고 자신을 낮춰야 하고 많이 섬겨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서 우리의 믿음과 인격이 성장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싫다고 혹은 힘들다고 공동체를 떠나게 되면 오늘 본문에 나오는 미가와 같이 기복적이고 형식적인 신앙생활을 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형식이 아닙니다. 구색이 아닙니다. 우리는 매일 기도하고 일용할 양식을 먹고 십일조를 하고 매주 주일예배를 드리니 신앙생활을 잘 하고 있는 것 아닌가?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게 보면 신앙생활을 가장 잘 하는 사람들이 바리새인일 것입니다. 그들은 매일 기도하고 일주일에 이틀을 금식하며 기도했고 시금치의 십일조까지 철저히 드렸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런 그들을 책망하셨습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마23:23) 예수님은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을 들을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5:23) 이것이 참된 예배입니다. 하나님은 마음이 없는 예배, 열매가 없는 우리의 삶을 받으실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받으시는 것은 형식이 아니라 하나님의 정의와 긍휼과 믿음이 담긴우리의 마음입니다. 우리의 삶의 열매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부어 주시길 기도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는 마음을 부어 주시길 기도합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하나님을 영과 진리로서 참된 예배를 드리게 하시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제3장. 자기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는 이스라엘(6)
그러면 왜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이 기복적이고 형식적이 되었을까요? 그 원인에 대해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6절을 봅시다. “그 때에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으므로 사람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6) 가나안 정복전쟁을 할때만해도 여호수아와 같은 강력한 지도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백성들을 철저하게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도한 영적인 지도자였습니다. 그는 아이성 전투에서 패했을 때 전리품을 훔친 아간의 죄를 적발하고 이스라엘 중에 악을 제거했습니다. 그 결과 아이성 전투에서 승리한 후에 하나님의 율법을 돌에 새겼고 축복의 말씀이든 저주의 말씀이든 빼놓지 않고 다 읽었습니다.(수 8:34,35). 그는 전쟁 중임에도 불구하고 전투훈련보다 죄를 적발하고 회개하고 말씀을 낭독하고 그 말씀에 따라 살도록 다짐하는 영적인 훈련을 더 철저히 시켰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이 그들의 왕이 되실 수 있었고, 그런 이스라엘은 거룩하고 강한 백성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사시대에는 그런 지도자 곧 왕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감독하는 지도자가 없으니 백성들은 점차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율법도 자기 나름대로 해석하고 부담스러운 말씀은 빼버리거나 시대에 맞지 않는다고 배척했습니다. 대신에 가나안에 미신적이고 기복적인 사고방식과 생활에 받아들였습니다. 그 결과 그들의 신앙은 여호와 신앙도 아닌 우상숭배도 아닌 혼합신앙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주변 블레셋 백성들에게 시달리는 오합지졸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뿐만 아니라 사람은 그의 영혼을 감독할 목자가 없을 때 누구나 이렇게 됩니다. 어떤 사람은 교회에서 성경을 공부하면 시간도 많이 들고, 사람들과의 갈등도 생기니까, 혼자 집에서 성경을 공부하겠다 말합니다. 물론 글을 읽을 줄 알고 생각할 줄 알면 혼자 성경을 공부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 감독자가 없고, 하나님을 왕 삼고 그의 말씀에 순종하고자 하는 마음이 없이 성경을 공부하면, 그는 곧 해괴하고 독선적인 신앙에 빠지기 쉽습니다. 또 성경이나 신앙생활은 사람들 속에서 배워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런 죄인들 가운데 계십니다. 그들과 미워하고 싸우고, 또는 회개하고 사랑하고, 이런 가운데서 하나님을 체험할 수 있으며, 그럴 때라야 인격이 생기고, 성숙하고 내용 있는 신앙을 가질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말했습니다.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벧전 2:25) 우리가 구원을 얻었다는 게 무엇입니까? 전에는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살았는데, 이제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고 그의 감독을 받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다스리심 받기를 싫어하고 그에게 순종하기를 싫어한다면, 그가 설령 구원 받았다고 주장해도 구원의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사람에게는 본능뿐 아니라 자기 생각이 있고, 자기 의지가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짐승보다 차원 높은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사람에게는 짐승에게 없는 욕심과 죄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만 생각하고, 자기 나름대로 행하면 죄와 욕심 때문에 반드시 파멸에 이릅니다. 그래서 사람에게는 왕이 필요하고 목자가 필요합니다. 이사야는 인간을 구원하러 오실 그리스도를 예언하면서 그 분은 인간들의 왕이 되실 것이라 말합니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사 9:6) 그 왕이 그리스도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을 재판하던 로마 총독 빌라도가 예수님에게 “그러면 네가 왕이 아니냐?” 하고 물었을 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 내가 이를 위하여 태어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언하려 함이로라.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소리를 듣느니라.”(요한 18:37)
예수님은 우리의 왕이십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왕이 되실 때 우리는 죄와 욕심의 지배에서 벗어나 진리에 속할 수 있으며, 진리에 속한 자는 자연히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입니다. 이런 사람들이야 말로 참된 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왕 삼는다? 이것은 인간적으로 불가능한 일입니다. “너희가 하나님과 같이 되리라.”는 사탄의 말에 미혹되어 자신이 하나님이 되고자 하고, 자신이 왕이 되고자 안달하는 인간이 어떻게 예수님을 왕 삼을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을 왕으로 삼고 예수님의 다스리심을 받고자 하는 마음을 가졌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요 성령의 역사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우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살도록 버려두지 마시고, 우리의 왕이 되셔서 우리를 다스리고 감독해 주시기를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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