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사도행전 제 20 강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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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사도행전 제 20 강
말씀 | 사도행전 21:1–40
요절 | 사도행전 21:13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바울이 대답하되 여러분이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당할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하니”
사도 바울은 3차에 걸친 선교 사역을 마치고 예루살렘을 향해 갑니다. 예루살렘에는 환난과 결박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는 동족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목숨도 아까와 하지 않았습니다.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위해 적극적으로 고난 받고자 하는 사도바울의 믿음을 배우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아름다운 성도의 교제. 3, 4절을 보십시오. 바울 일행이 두로에 상륙했을 때 그곳의 제자들을 찾아 거기서 이레를 머물렀습니다. 두로는 그가 개척한 곳이 아니지만 그곳에 있는 제자들을 찾아 간 것입니다. 사귐을 가진 후 그 제자들이 성령의 감동으로 바울더러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말라 하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충성된 종 바울을 사랑하였고 그를 아꼈습니다. 5절을 보십시오. 이 여러 날을 지낸 후 바울 일행이 떠나갈 때 그들이 다 그 처자와 함께 성문 밖까지 전송하였습니다. 그들은 바닷가에서 무릎을 꿇어 기도하고 서로 작별하였습니다. 그들은 짧은 만남이었지만 깊은 사랑의 교제를 나누었습니다. 바울 일행은 두로를 떠나 돌레마이에 이르러 형제들에게 안부를 묻고 그들과 함께 하루를 있다가 이튿날 떠나 가이사랴에 이르렀습니다. 거기서는 예루살렘 교회 일곱 집사 중 하나인 전도자 빌립의 집에 들어가서 머물렀습니다. 빌립은 일찍이 예루살렘 교회 재정 담당자였고 박해로 흩어졌을 때 사마리아 선교를 했습니다. 또한 성령의 인도로 광야에서 에디오피아 내시 간다게를 만나 전도했습니다. 그 후로 가이사랴에 와서도 20년 이상 변함없이 전도인으로 살고 있었습니다. 훌륭한 복음의 증인들을 만나 교제하는 것은 고난의 길을 가는 바울에게 큰 힘이 되었을 것입니다.
둘째, 복음을 위해 고난을 받으라. 10절을 보십시오. 여러 날 머물렀는데 아가보라 하는 한 선지자가 유대로부터 와서 예언을 하였습니다. 아가보는 예루살렘의 기근을 예언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예언한 대로 기근이 왔고 바울은 구제헌금을 들고 예루살렘으로 가고 있습니다. 11절을 보십시오. 아가보가 바울의 띠를 가져다가 자기 수족을 잡아매고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이같이 이 띠 임자를 결박하여 이방인의 손에 넘겨주리라고 예언하였습니다. 그러자 바울과 함께 있던 제자들은 한 목소리로 바울에게 예루살렘에 올라가지 말라고 강권하였습니다. 그를 사랑하는 제자들은 울면서 부탁하였습니다. 그들은 바울을 잃고 싶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이런 그들에게 말했습니다. 13절을 보십시오. “바울이 대답하되 여러분이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당할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하니” 사실 고난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특히 죽음은 모든 사람이 피하고 싶은 슬프고 두려운 일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예수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당할 뿐 아니라 죽을 것도 각오하고 있었습니다. 각오만 한 것이 아니라 직접 그 길을 가고자 하였습니다. 그가 어떻게 이런 결단을 하게 되었을까요? 고후5:13-15을 보면 그의 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만일 미쳤어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요 정신이 온전하여도 너희를 위한 것이니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하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그리스도의 사랑, 은혜의 복음을 생각할 때, 그는 편안한 삶, 안정을 추구하는 삶을 살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그 은혜가, 그 사랑이 바울을 먹기 위해 사는 생활인이 아니라 진정한 사명인이 되게 하였습니다. 그의 인생목적은 분명하였습니다. “오직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자신의 인생, 목숨을 드리고자 결단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은혜를 바로 알고 예수님을 진정 사랑하는 사람만이 이런 각오를 할 수 있습니다. 한 때 바울은 랍비 가말리엘의 문하생이었고 촉망받는 바리새인이었습니다. 그는 유대 사회에서 출세가 보장되어 있었고 또 로마 시민권자이기도 하였습니다. 이런 그가 예수님을 만나고 변화되어 지금은 예수님을 위해 많은 고난을 받고 있고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 그런 불안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예수님 만나기 전의 안정된 삶, 미래가 보장된 삶을 더 그리워할까요, 아니면 예수님 만난 후 불안정한 현재의 삶을 더욱 기뻐할까요? 사도행전 26장을 보면 바울이 베스도 총독과 아그립바 왕에게 심문을 당합니다. 총독 베스도는 바울의 십자가와 부활의 도를 듣고 “바울아 네가 미쳤도다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한다” 하였습니다. 그리고 아그립바 왕은 바울에게 “네가 적은 말로 나를 권하여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려 하는도다” 말하자 바울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말이 적으나 많으나 당신뿐만 아니라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다 이렇게 결박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나이다” 그는 예수님을 통해서 진리를 발견하였습니다. 그가 발견한 진리는 예수님이 창조주 하나님이시고 그 분이 나를 너무나 사랑하셔서 나를 대신하여 나의 죄를 지시고 대신 죽으셨다는 것입니다. 이 진리를 발견하였을 때, 지금까지 세상에서 가치 있게 여겼던 것들이 더 이상 그에게 의미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의 18번 찬송가는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였습니다.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이 세상 부귀와 바꿀 수 없네 영죽은 내 대신 돌아가사닌 그 놀라운 사랑 잊지 못해 세상 즐거움 다 버리고 세상 자랑 다 버렸네 주 예수 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예수 밖에는 없네” 그리고 그는 오직 주 예수님을 위해서 사는 것이 정말 후회 없는 인생이요 가장 가치 있는 인생임을 발견하였습니다. 사도바울은 우리도 그 삶으로 초청합니다. 이 때 고난이 두려울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또 말씀합니다.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롬8:17-18).”
우리 JBF 학생들은 나를 위해 대신 죽으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놀라운 대속의 은혜를 영접하고 누리고 있습니까? 이 은혜에 사로잡힐 때만이 내 인생을 여러 모양의 죄와 세상 욕심으로 허비하지 않고 가장 가치 있는 인생, 후회 없는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JBF 학생들의 영적인 눈을 열어주시고 주 예수 그리스도의 놀라운 은혜를 밝히 깨닫게 하셔서 그 은혜 속에서 가장 의미있는 삶 살게 하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14절을 보십시오. 사도 바울이 이렇게 굳은 각오로 고난을 받고자 했을 때 그의 제자들과 주변 사람들은 더 이상 만류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라고 말하며 주님께 모든 것을 맡겼습니다.
17,18절을 보십시오. 바울은 예루살렘에 이르러 예루살렘 교회의 대표인 야고보에게로 들어갔습니다. 그곳에 장로들도 다 있었습니다. 바울이 문안하고 하나님이 자기의 사역으로 말미암아 이방 가운데서 하신 일을 낱낱이 보고하였습니다. 그들이 듣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그리고 바울에게 말하였습니다. 20, 21절 “형제여 그대도 보는 바에 유대인 중에 믿는 자 수만 명이 있으니 다 율법에 열성을 가진 자라. 네가 이방에 있는 모든 유대인을 가르치되 모세를 배반하고 아들들에게 할례를 행하지 말고 또 관습을 지키지 말라 한다 함을 그들이 들었도다.” 이는 바울의 이방인 사역에 대한 유대인들의 오해였습니다. 복음을 싫어하는 유대인들이 바울에 대한 악감을 품고 거짓 소문을 퍼뜨렸습니다. 이것을 알고 예루살렘의 장로들은 한 가지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것은 서원한 네 사람과 함께 바울이 결례를 행하고 그들을 위하여 비용을 내어 머리를 깎으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바울이 율법을 지키는 자인 줄 알 것 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바울이 이 사람들을 데리고 이튿날 그들과 함께 결례를 행하고 성전에 들어가서 각 사람을 위하여 제사 드릴 때까지의 결례 기간이 만기된 것을 신고하였습니다. 바울은 복음 안에서 자유 했지만 복음에 걸림이 되지 않도록 유대인에게 유대인과 같이 되었습니다(고전9:19,20). 바울은 율법주의자가 아니었지만 복음을 위하여 율법 아래 있는 유대인들을 얻기 위해 스스로 율법 아래에 있는 사람들 같이 행한 것입니다(26). 바울의 목표는 어찌하든지 몇 사람을 구원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를 위해 자신의 생각과 스타일을 고집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과 복음 외에는 무엇이든지 양보할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결과가 어떠했습니까? 일주일의 결례기간이 끝날 무렵 아시아에서 온 유대인들이 성전에서 바울을 보고 헬라인을 성전에 데리고 들어와 거룩한 곳을 더럽혔다며 무리를 충동해 바울을 붙잡게 했습니다. 그들은 헬라인 드로비모가 성내에 바울과 함께 있는 것을 보았을 뿐입니다. 그러나 아시아에서 바울이 전한 ‘은혜의 말씀’을 그들이 생명처럼 여긴 율법과 성전에 대한 도전으로 여겨 적대감이 가득했기 때문에 정확한 조사 없이 오해에 기초해 바울을 성전모독죄로 고발해 죽이려고 했습니다. 온 성이 소동하여 백성이 달려와 모여 바울을 잡아 성전 밖으로 끌고 나가니 문들이 곧 닫혔습니다. 그들이 바울을 죽이려 할 때에 온 예루살렘이 요란하다는 소문이 군대의 천부장에게 보고되었습니다. 그가 급히 군인들과 백부장들을 거느리고 달려 내려가니 그들이 천부장과 군인들을 보고 바울 치기를 그쳤습니다. 이에 천부장이 가까이 가서 바울을 잡아 두 쇠사슬로 결박하라 명하고 그가 누구이며 그가 무슨 일을 하였느냐 물었습니다. 무리 가운데서 어떤 이는 이런 말로, 어떤 이는 저런 말로 소리치거늘 천부장이 소동으로 말미암아 진상을 알 수 없어 그를 영내로 데려가라 명하였습니다. 바울이 층대에 이를 때에 무리의 폭행으로 말미암아 군사들에게 들려가니 이는 백성의 무리가 그를 없이하자고 외치며 따라 감이었습니다.
말씀의 결론입니다. 사도 바울은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 당할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습니다. 그는 이렇게 예수님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드리는 데 한 점의 후회도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사랑과 은혜를 생각할 때, 예수님을 위해 드리는 인생이 가장 가치가 있음을 발견하였습니다. 우리 JBF 학생들도 주님의 대속의 은혜에 사로잡혀 사도 바울과 같이 후회 없는 인생, 가장 의미 있는 인생을 살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말씀 | 사도행전 21:1–40
요절 | 사도행전 21:13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바울이 대답하되 여러분이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당할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하니”
사도 바울은 3차에 걸친 선교 사역을 마치고 예루살렘을 향해 갑니다. 예루살렘에는 환난과 결박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는 동족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목숨도 아까와 하지 않았습니다.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위해 적극적으로 고난 받고자 하는 사도바울의 믿음을 배우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아름다운 성도의 교제. 3, 4절을 보십시오. 바울 일행이 두로에 상륙했을 때 그곳의 제자들을 찾아 거기서 이레를 머물렀습니다. 두로는 그가 개척한 곳이 아니지만 그곳에 있는 제자들을 찾아 간 것입니다. 사귐을 가진 후 그 제자들이 성령의 감동으로 바울더러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말라 하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충성된 종 바울을 사랑하였고 그를 아꼈습니다. 5절을 보십시오. 이 여러 날을 지낸 후 바울 일행이 떠나갈 때 그들이 다 그 처자와 함께 성문 밖까지 전송하였습니다. 그들은 바닷가에서 무릎을 꿇어 기도하고 서로 작별하였습니다. 그들은 짧은 만남이었지만 깊은 사랑의 교제를 나누었습니다. 바울 일행은 두로를 떠나 돌레마이에 이르러 형제들에게 안부를 묻고 그들과 함께 하루를 있다가 이튿날 떠나 가이사랴에 이르렀습니다. 거기서는 예루살렘 교회 일곱 집사 중 하나인 전도자 빌립의 집에 들어가서 머물렀습니다. 빌립은 일찍이 예루살렘 교회 재정 담당자였고 박해로 흩어졌을 때 사마리아 선교를 했습니다. 또한 성령의 인도로 광야에서 에디오피아 내시 간다게를 만나 전도했습니다. 그 후로 가이사랴에 와서도 20년 이상 변함없이 전도인으로 살고 있었습니다. 훌륭한 복음의 증인들을 만나 교제하는 것은 고난의 길을 가는 바울에게 큰 힘이 되었을 것입니다.
둘째, 복음을 위해 고난을 받으라. 10절을 보십시오. 여러 날 머물렀는데 아가보라 하는 한 선지자가 유대로부터 와서 예언을 하였습니다. 아가보는 예루살렘의 기근을 예언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예언한 대로 기근이 왔고 바울은 구제헌금을 들고 예루살렘으로 가고 있습니다. 11절을 보십시오. 아가보가 바울의 띠를 가져다가 자기 수족을 잡아매고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이같이 이 띠 임자를 결박하여 이방인의 손에 넘겨주리라고 예언하였습니다. 그러자 바울과 함께 있던 제자들은 한 목소리로 바울에게 예루살렘에 올라가지 말라고 강권하였습니다. 그를 사랑하는 제자들은 울면서 부탁하였습니다. 그들은 바울을 잃고 싶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이런 그들에게 말했습니다. 13절을 보십시오. “바울이 대답하되 여러분이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당할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하니” 사실 고난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특히 죽음은 모든 사람이 피하고 싶은 슬프고 두려운 일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예수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당할 뿐 아니라 죽을 것도 각오하고 있었습니다. 각오만 한 것이 아니라 직접 그 길을 가고자 하였습니다. 그가 어떻게 이런 결단을 하게 되었을까요? 고후5:13-15을 보면 그의 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만일 미쳤어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요 정신이 온전하여도 너희를 위한 것이니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하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그리스도의 사랑, 은혜의 복음을 생각할 때, 그는 편안한 삶, 안정을 추구하는 삶을 살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그 은혜가, 그 사랑이 바울을 먹기 위해 사는 생활인이 아니라 진정한 사명인이 되게 하였습니다. 그의 인생목적은 분명하였습니다. “오직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자신의 인생, 목숨을 드리고자 결단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은혜를 바로 알고 예수님을 진정 사랑하는 사람만이 이런 각오를 할 수 있습니다. 한 때 바울은 랍비 가말리엘의 문하생이었고 촉망받는 바리새인이었습니다. 그는 유대 사회에서 출세가 보장되어 있었고 또 로마 시민권자이기도 하였습니다. 이런 그가 예수님을 만나고 변화되어 지금은 예수님을 위해 많은 고난을 받고 있고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 그런 불안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예수님 만나기 전의 안정된 삶, 미래가 보장된 삶을 더 그리워할까요, 아니면 예수님 만난 후 불안정한 현재의 삶을 더욱 기뻐할까요? 사도행전 26장을 보면 바울이 베스도 총독과 아그립바 왕에게 심문을 당합니다. 총독 베스도는 바울의 십자가와 부활의 도를 듣고 “바울아 네가 미쳤도다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한다” 하였습니다. 그리고 아그립바 왕은 바울에게 “네가 적은 말로 나를 권하여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려 하는도다” 말하자 바울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말이 적으나 많으나 당신뿐만 아니라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다 이렇게 결박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나이다” 그는 예수님을 통해서 진리를 발견하였습니다. 그가 발견한 진리는 예수님이 창조주 하나님이시고 그 분이 나를 너무나 사랑하셔서 나를 대신하여 나의 죄를 지시고 대신 죽으셨다는 것입니다. 이 진리를 발견하였을 때, 지금까지 세상에서 가치 있게 여겼던 것들이 더 이상 그에게 의미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의 18번 찬송가는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였습니다.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이 세상 부귀와 바꿀 수 없네 영죽은 내 대신 돌아가사닌 그 놀라운 사랑 잊지 못해 세상 즐거움 다 버리고 세상 자랑 다 버렸네 주 예수 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예수 밖에는 없네” 그리고 그는 오직 주 예수님을 위해서 사는 것이 정말 후회 없는 인생이요 가장 가치 있는 인생임을 발견하였습니다. 사도바울은 우리도 그 삶으로 초청합니다. 이 때 고난이 두려울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또 말씀합니다.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롬8:17-18).”
우리 JBF 학생들은 나를 위해 대신 죽으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놀라운 대속의 은혜를 영접하고 누리고 있습니까? 이 은혜에 사로잡힐 때만이 내 인생을 여러 모양의 죄와 세상 욕심으로 허비하지 않고 가장 가치 있는 인생, 후회 없는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JBF 학생들의 영적인 눈을 열어주시고 주 예수 그리스도의 놀라운 은혜를 밝히 깨닫게 하셔서 그 은혜 속에서 가장 의미있는 삶 살게 하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14절을 보십시오. 사도 바울이 이렇게 굳은 각오로 고난을 받고자 했을 때 그의 제자들과 주변 사람들은 더 이상 만류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라고 말하며 주님께 모든 것을 맡겼습니다.
17,18절을 보십시오. 바울은 예루살렘에 이르러 예루살렘 교회의 대표인 야고보에게로 들어갔습니다. 그곳에 장로들도 다 있었습니다. 바울이 문안하고 하나님이 자기의 사역으로 말미암아 이방 가운데서 하신 일을 낱낱이 보고하였습니다. 그들이 듣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그리고 바울에게 말하였습니다. 20, 21절 “형제여 그대도 보는 바에 유대인 중에 믿는 자 수만 명이 있으니 다 율법에 열성을 가진 자라. 네가 이방에 있는 모든 유대인을 가르치되 모세를 배반하고 아들들에게 할례를 행하지 말고 또 관습을 지키지 말라 한다 함을 그들이 들었도다.” 이는 바울의 이방인 사역에 대한 유대인들의 오해였습니다. 복음을 싫어하는 유대인들이 바울에 대한 악감을 품고 거짓 소문을 퍼뜨렸습니다. 이것을 알고 예루살렘의 장로들은 한 가지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것은 서원한 네 사람과 함께 바울이 결례를 행하고 그들을 위하여 비용을 내어 머리를 깎으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바울이 율법을 지키는 자인 줄 알 것 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바울이 이 사람들을 데리고 이튿날 그들과 함께 결례를 행하고 성전에 들어가서 각 사람을 위하여 제사 드릴 때까지의 결례 기간이 만기된 것을 신고하였습니다. 바울은 복음 안에서 자유 했지만 복음에 걸림이 되지 않도록 유대인에게 유대인과 같이 되었습니다(고전9:19,20). 바울은 율법주의자가 아니었지만 복음을 위하여 율법 아래 있는 유대인들을 얻기 위해 스스로 율법 아래에 있는 사람들 같이 행한 것입니다(26). 바울의 목표는 어찌하든지 몇 사람을 구원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를 위해 자신의 생각과 스타일을 고집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과 복음 외에는 무엇이든지 양보할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결과가 어떠했습니까? 일주일의 결례기간이 끝날 무렵 아시아에서 온 유대인들이 성전에서 바울을 보고 헬라인을 성전에 데리고 들어와 거룩한 곳을 더럽혔다며 무리를 충동해 바울을 붙잡게 했습니다. 그들은 헬라인 드로비모가 성내에 바울과 함께 있는 것을 보았을 뿐입니다. 그러나 아시아에서 바울이 전한 ‘은혜의 말씀’을 그들이 생명처럼 여긴 율법과 성전에 대한 도전으로 여겨 적대감이 가득했기 때문에 정확한 조사 없이 오해에 기초해 바울을 성전모독죄로 고발해 죽이려고 했습니다. 온 성이 소동하여 백성이 달려와 모여 바울을 잡아 성전 밖으로 끌고 나가니 문들이 곧 닫혔습니다. 그들이 바울을 죽이려 할 때에 온 예루살렘이 요란하다는 소문이 군대의 천부장에게 보고되었습니다. 그가 급히 군인들과 백부장들을 거느리고 달려 내려가니 그들이 천부장과 군인들을 보고 바울 치기를 그쳤습니다. 이에 천부장이 가까이 가서 바울을 잡아 두 쇠사슬로 결박하라 명하고 그가 누구이며 그가 무슨 일을 하였느냐 물었습니다. 무리 가운데서 어떤 이는 이런 말로, 어떤 이는 저런 말로 소리치거늘 천부장이 소동으로 말미암아 진상을 알 수 없어 그를 영내로 데려가라 명하였습니다. 바울이 층대에 이를 때에 무리의 폭행으로 말미암아 군사들에게 들려가니 이는 백성의 무리가 그를 없이하자고 외치며 따라 감이었습니다.
말씀의 결론입니다. 사도 바울은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 당할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습니다. 그는 이렇게 예수님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드리는 데 한 점의 후회도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사랑과 은혜를 생각할 때, 예수님을 위해 드리는 인생이 가장 가치가 있음을 발견하였습니다. 우리 JBF 학생들도 주님의 대속의 은혜에 사로잡혀 사도 바울과 같이 후회 없는 인생, 가장 의미 있는 인생을 살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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