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9장. 택한 나의 그릇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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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사도행전 9 강
말씀 | 사도행전 9:1-31
요절 | 사도행전 9:15
택한 나의 그릇이라
“주께서 이르시되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오늘 말씀은 하나님께서 사울을 부르신 내용입니다. 1-8장은 복음이 사마리아에까지 전해졌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복음을 사마리아를 넘어 땅 끝까지 전하고자 하십니다.(행1:8) 이 일을 위해 하나님은 핍박자 사울을 택하셨습니다. 사울은 예수님을 나사렛 이단의 괴수로 여겼고 그의 추종자를 다 박멸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런데 알고보니 그 예수님이 바로 그들이 간절히 기다렸던 메시야요 하나님의 아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단지 사대성인 중의 한 사람, 위대한 인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 예수님이 그를 심판하시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귀한 그릇으로 삼으셔서 쓰시고자 하신다는 것입니다. 말씀을 통해 핍박자 사울도 사랑하시고 구원하시고 귀한 일꾼 삼으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배우기를 기도합니다.
1,2절을 보십시오. 사울은 주의 제자들에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였습니다. 그는 거의 미친 사람과 같았습니다. 그는 대제사장에게 가서 다메섹 여러 회당에 가져갈 공문을 청하였습니다. 당시 대제사장에게는 로마 제국 내의 외국으로 도피한 유대인들을 본국으로 송환할 것을 요구하는 권한이 있었습니다. 예루살렘부터 다메섹 까지는 약 240km였습니다. 하루 40km를 간다고 하면 도보로 6일 거리였습니다. 왜 그는 크리스천들을 이렇게까지 핍박합니까? 그들은 다윗왕과 같은 영광과 승리의 메시아를 대망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은 끔찍하고 수치스러운 십자가에서 처형을 받고 죽은 목수의 아들을 메시아라고 믿고 전하였습니다. 문제는 이 복음이 유대 사회에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퍼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는 정통 유대인의 자존심을 몹시 상하게 하는 것이요 유대교 입장에서 결코 용납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예수쟁이들을 철저히 근절해야 한다고 확신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의 도를 박멸하여 다른 도시로 확산되는 것을 막고자 원정 핍박까지 나섰습니다.
3, 4절을 보십시오. 사울이 길을 가다가 다메섹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였습니다. 홀연히 하늘로부터 빛이 그를 둘러 비추었습니다. 그가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가 있어 이르셨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사울이 대답했습니다. “주여 누구시니이까?”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십자가에서 죽은 줄로만 생각했던 예수님이 빛 가운데 나타나셨을 때 그는 엄청난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 영광의 하나님의 찬란한 빛을 보고 그는 눈이 멀어버렸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그의 이름까지 알고 계셨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예수님이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순간, 그것도 연속으로 두 번 부르실 때, 그는 큰 두려움을 느꼈을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고 말씀하셨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고 있는데 예수님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는 것이, 예수님 당신을 핍박하는 것과 동일시하셨습니다. 성도들이 핍박 받는 그곳에서 예수님께서 함께 핍박을 받으십니다.
6절을 보십시오. 부활하신 예수님은 사울에게 구체적인 방향을 주셨습니다. “너는 일어나 시내로 들어가라 네가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 같이 가던 사람들은 소리만 듣고 아무도 보지 못하여 말을 못하고 서 있었습니다. 사울이 땅에서 일어나 눈은 떴으나 아무 것도 보지 못하고 사람의 손에 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가서 사흘 동안 보지 못하고 먹지도 마시지도 아니하였습니다. 그가 부딪힌 충격적인 현실 앞에서 그는 아무 것도 먹을 수 없었습니다. 성경을 공부하며 정통 바리새파 교육을 어려서부터 받았고 하나님을 가장 잘 안다고 생각했는데, 현실은 지독한 하나님의 원수 노릇을 하고 있었습니다. 도대체, 무엇이 잘못되었는가. 암흑 속의 사흘은 그에게 육신적으로는 눈이 멀었으나 영적으로는 도리어 예수 그리스도의 빛이 비쳐오는 시간이었습니다.
이 때, 하나님께서 아나니아를 준비시키셨습니다. 11절을 보십시오. “주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직가라 하는 거리로 가서 유다의 집에서 다소 사람 사울이라 하는 사람을 찾으라 그가 기도하는 중이니라” 사울은 금식하며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무슨 기도를 드렸을까요? 다메섹 도상에서 일어난 일을 곰곰이 생각해 보면서, 빛으로 찾아오신, 부활하신 예수님이 정녕 구약에 예언된 바로 그 메시아이신지 확실히 알게 해달라고 기도하지 않았을까요? 아나니아는 주님께서 사울을 만나라는 명령을 듣고 놀랐습니다. 13, 14절. “주여 이 사람에 대하여 내가 여러 사람에게 듣사온즉 그가 예루살렘에서 주의 성도에게 적지 않은 해를 끼쳤다 하더니 여기서도 주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사람을 결박할 권한을 대제사장들에게서 받았나이다 하거늘” 당시 성도들에게 사울은 죽음의 사자였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아나니아에게 전혀 다른 말씀을 하십니다. 15,16절을 보십시오. “주께서 이르시되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고난을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 하시니” 예수님은 사울이 당신께서 택한 그릇이라고 하십니다. 그릇은 무엇을 담는 것입니다. 그 안에 예수님의 것을 담겠다고 하십니다. 바울은 그릇이 되어 예수님에 관한 모든 것, 예수님의 사상과 비전, 그의 인격을 담아야 합니다. 사울은 열두 사도들과 달리 예수님과 함께 생활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의 행적을 연구하며 그의 사상을 많이 담았습니다. 그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는 하나님의 의와 은혜에 대해서 많은 비밀을 담게 되었습니다. 그는 아라비아에서 3년, 다소로 물러가서 10년을 초야에 묻혀 말씀을 연구하면서 예수님을 통해 계시를 받게 되었습니다.
이제까지 바울은 그 안에 유대교의 율법과 바리새인의 전통을 담고 있던 유대교의 그릇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들로는 다른 사람들을 구원할 수도 없었을 뿐더러 그 자신도 죄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그릇으로 택하신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담아주십니다. 내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담길 때 나 자신이 구원을 받습니다. 더 나아가 그 그리스도의 이름을 전해줌으로써 다른 사람들까지 살릴 수 있습니다. 이러므로 하나님의 그릇으로 택함 받고 내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담을 수 있는 것은 커다란 특권입니다.
주님은 사울 뿐 아니라 우리 각자를 자신의 그릇으로 택하셨습니다. 이 그릇 안에 예수 그리스도를 담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이 그릇을 통해 예수님을 전파하고 만민구원역사를 이루시기를 원하십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우리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모든 것을 담고 있어야 합니다. 사도바울은 고후4:7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라고 하였습니다. 보잘 것 없는 질그릇과 같은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보배되신 예수님을 담아놓으셨습니다. 우리 안에 보배되신 예수님이 계실 때, 우리를 통해서 심히 큰 능력이 나타납니다. 우리 JBF 학생들 안에는 무엇이 담겨 있습니까? 세상의 여러 모양의 죄가 가득 담겨져 있습니까? 아니면 보배되신 예수님이 가득 담겨있습니까? 우리의 관심이 어디로 향해 있습니까? 우리가 사울 처럼 예수님이 아닌 다른 것을 담고 있을 때 우리는 하나님의 원수가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 안에 예수님을 담기를 원하십니다. 우리 JBF 학생들이 날마다 말씀을 가까이 하고 신실한 기도생활을 통해 하나님을 가까이 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담는 그릇이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16절을 다시 보십시오. 그런데 하나님의 이 택하심에는 고난이 따릅니다. 주님은 그가 내 이름을 위해 얼마나 많은 고난을 받아야 할 것을 보이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무지하고 악한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이름을 전하려면 많은 고난을 감수해야 합니다. 지금까지 바울은 성도들을 핍박함으로써 그리스도를 심하게 괴롭혔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심한 고난을 받게 됩니다. 그는 고난을 얼마나 많이 받았는지 살 소망이 끊어질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이런 고난을 받는 가운데 하나님의 위로를 체험했고 고난을 통하여 예수님의 부활의 능력을 체험하고 생명을 살리는 역사에 귀하게 쓰임 받았습니다.
17절을 보십시오. 아나니아는 주의 말씀에 순종하여 사울이 있는 집으로 갔습니다. 그 집에 들어가서 그에게 안수하였습니다. “형제 사울아 주 곧 네가 오는 길에서 나타나셨던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 아나니아가 “형제 사울아”하고 불렀을 때 사울은 큰 감동을 받았을 것입니다. 사울 자신은 성도들을 원수처럼 대했는데 자신을 찾아온 성도 아나니아는 자신을 형제라고 불러주는 것 아닙니까? 아나니아는 그가 앞으로 받을 고난을 생각하면서 긍휼히 여겼습니다. 아나니아가 안수하고 기도하자 즉시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그는 일어나 세례를 받고 음식을 먹고 강건해졌습니다. 사울이 다메섹에 있는 제자들과 함께 며칠을 있었습니다. 그는 다메섹 교회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사울이 즉시 각 회당에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하니 듣는 사람들이 다 놀랐습니다. 21절을 보십시오. “이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이 이름을 부르는 사람을 멸하려던 자가 아니냐 여기 온 것도 그들을 결박하여 대제사장들에게 끌어가고자 함이 아니냐?” 그럴수록 사울은 힘을 더 얻어 예수를 그리스도라 증언하여 다메섹에 사는 유대인들을 당혹하게 하였습니다. 유대인들은 여러 날이 지나자 사울을 죽이고자 공모하였습니다. 그 계교가 사울에게 알려졌습니다. 유대인들이 사울을 죽이려고 밤낮으로 성문까지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그의 제자들이 밤에 사울을 광주리에 담아 성벽에서 달아 내렸습니다.
26절을 보십시오. 사울이 예루살렘에 가서 제자들을 사귀고자 하나 다 두려워하여 그가 제자 됨을 믿지 아니하였습니다. 이 때 바나바가 데리고 사도들에게 가서 그가 길에서 어떻게 주를 보았는지와 주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일과 다메섹에서 그가 어떻게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였는지를 전하였습니다. 사울이 제자들과 함께 있어 예루살렘에 출입하며 또 주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고 헬라파 유대인들과 함께 말하며 변론하니 그 사람들이 죽이려고 힘쓰거늘 형제들이 알고 가이사랴로 데리고 내려가서 다소로 보냈습니다.
아나니아가 사울의 회심을 도와준 사람이었다면 바나바는 예루살렘 사도들과 교제하도록 도와주었습니다. 스데반의 순교 이후 사마리아에도 하나님의 말씀이 전파되고 가장 극렬하게 성도들을 핍박하던 사울마저 회심하여 복음 전파자가 되자 교회는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가고 수가 더 많아졌습니다.
말씀의 결론입니다. 원수 사울을 만나주신 예수님은 약속된 메시야요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하나님은 질그릇 같이 보잘 것 없는 우리 안에 보배되신 예수님을 담으시기를 원하십니다. 이를 통해 내 인생을 아름다운 인생이 되게 하시기를 원하십니다. 또한 나를 사용하여 세계 만민 구속역사를 이루시기를 원하십니다. 우리 JBF 학생들이 여러 모양의 죄를 비우고 대신에 보배되신 예수님을 담은 그릇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날마다 말씀을 가까이하고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삶 살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JBF 학생들을 넘치게 축복하여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말씀 | 사도행전 9:1-31
요절 | 사도행전 9:15
택한 나의 그릇이라
“주께서 이르시되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오늘 말씀은 하나님께서 사울을 부르신 내용입니다. 1-8장은 복음이 사마리아에까지 전해졌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복음을 사마리아를 넘어 땅 끝까지 전하고자 하십니다.(행1:8) 이 일을 위해 하나님은 핍박자 사울을 택하셨습니다. 사울은 예수님을 나사렛 이단의 괴수로 여겼고 그의 추종자를 다 박멸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런데 알고보니 그 예수님이 바로 그들이 간절히 기다렸던 메시야요 하나님의 아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단지 사대성인 중의 한 사람, 위대한 인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 예수님이 그를 심판하시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귀한 그릇으로 삼으셔서 쓰시고자 하신다는 것입니다. 말씀을 통해 핍박자 사울도 사랑하시고 구원하시고 귀한 일꾼 삼으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배우기를 기도합니다.
1,2절을 보십시오. 사울은 주의 제자들에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였습니다. 그는 거의 미친 사람과 같았습니다. 그는 대제사장에게 가서 다메섹 여러 회당에 가져갈 공문을 청하였습니다. 당시 대제사장에게는 로마 제국 내의 외국으로 도피한 유대인들을 본국으로 송환할 것을 요구하는 권한이 있었습니다. 예루살렘부터 다메섹 까지는 약 240km였습니다. 하루 40km를 간다고 하면 도보로 6일 거리였습니다. 왜 그는 크리스천들을 이렇게까지 핍박합니까? 그들은 다윗왕과 같은 영광과 승리의 메시아를 대망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은 끔찍하고 수치스러운 십자가에서 처형을 받고 죽은 목수의 아들을 메시아라고 믿고 전하였습니다. 문제는 이 복음이 유대 사회에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퍼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는 정통 유대인의 자존심을 몹시 상하게 하는 것이요 유대교 입장에서 결코 용납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예수쟁이들을 철저히 근절해야 한다고 확신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의 도를 박멸하여 다른 도시로 확산되는 것을 막고자 원정 핍박까지 나섰습니다.
3, 4절을 보십시오. 사울이 길을 가다가 다메섹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였습니다. 홀연히 하늘로부터 빛이 그를 둘러 비추었습니다. 그가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가 있어 이르셨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사울이 대답했습니다. “주여 누구시니이까?”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십자가에서 죽은 줄로만 생각했던 예수님이 빛 가운데 나타나셨을 때 그는 엄청난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 영광의 하나님의 찬란한 빛을 보고 그는 눈이 멀어버렸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그의 이름까지 알고 계셨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예수님이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순간, 그것도 연속으로 두 번 부르실 때, 그는 큰 두려움을 느꼈을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고 말씀하셨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고 있는데 예수님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는 것이, 예수님 당신을 핍박하는 것과 동일시하셨습니다. 성도들이 핍박 받는 그곳에서 예수님께서 함께 핍박을 받으십니다.
6절을 보십시오. 부활하신 예수님은 사울에게 구체적인 방향을 주셨습니다. “너는 일어나 시내로 들어가라 네가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 같이 가던 사람들은 소리만 듣고 아무도 보지 못하여 말을 못하고 서 있었습니다. 사울이 땅에서 일어나 눈은 떴으나 아무 것도 보지 못하고 사람의 손에 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가서 사흘 동안 보지 못하고 먹지도 마시지도 아니하였습니다. 그가 부딪힌 충격적인 현실 앞에서 그는 아무 것도 먹을 수 없었습니다. 성경을 공부하며 정통 바리새파 교육을 어려서부터 받았고 하나님을 가장 잘 안다고 생각했는데, 현실은 지독한 하나님의 원수 노릇을 하고 있었습니다. 도대체, 무엇이 잘못되었는가. 암흑 속의 사흘은 그에게 육신적으로는 눈이 멀었으나 영적으로는 도리어 예수 그리스도의 빛이 비쳐오는 시간이었습니다.
이 때, 하나님께서 아나니아를 준비시키셨습니다. 11절을 보십시오. “주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직가라 하는 거리로 가서 유다의 집에서 다소 사람 사울이라 하는 사람을 찾으라 그가 기도하는 중이니라” 사울은 금식하며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무슨 기도를 드렸을까요? 다메섹 도상에서 일어난 일을 곰곰이 생각해 보면서, 빛으로 찾아오신, 부활하신 예수님이 정녕 구약에 예언된 바로 그 메시아이신지 확실히 알게 해달라고 기도하지 않았을까요? 아나니아는 주님께서 사울을 만나라는 명령을 듣고 놀랐습니다. 13, 14절. “주여 이 사람에 대하여 내가 여러 사람에게 듣사온즉 그가 예루살렘에서 주의 성도에게 적지 않은 해를 끼쳤다 하더니 여기서도 주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사람을 결박할 권한을 대제사장들에게서 받았나이다 하거늘” 당시 성도들에게 사울은 죽음의 사자였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아나니아에게 전혀 다른 말씀을 하십니다. 15,16절을 보십시오. “주께서 이르시되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고난을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 하시니” 예수님은 사울이 당신께서 택한 그릇이라고 하십니다. 그릇은 무엇을 담는 것입니다. 그 안에 예수님의 것을 담겠다고 하십니다. 바울은 그릇이 되어 예수님에 관한 모든 것, 예수님의 사상과 비전, 그의 인격을 담아야 합니다. 사울은 열두 사도들과 달리 예수님과 함께 생활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의 행적을 연구하며 그의 사상을 많이 담았습니다. 그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는 하나님의 의와 은혜에 대해서 많은 비밀을 담게 되었습니다. 그는 아라비아에서 3년, 다소로 물러가서 10년을 초야에 묻혀 말씀을 연구하면서 예수님을 통해 계시를 받게 되었습니다.
이제까지 바울은 그 안에 유대교의 율법과 바리새인의 전통을 담고 있던 유대교의 그릇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들로는 다른 사람들을 구원할 수도 없었을 뿐더러 그 자신도 죄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그릇으로 택하신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담아주십니다. 내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담길 때 나 자신이 구원을 받습니다. 더 나아가 그 그리스도의 이름을 전해줌으로써 다른 사람들까지 살릴 수 있습니다. 이러므로 하나님의 그릇으로 택함 받고 내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담을 수 있는 것은 커다란 특권입니다.
주님은 사울 뿐 아니라 우리 각자를 자신의 그릇으로 택하셨습니다. 이 그릇 안에 예수 그리스도를 담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이 그릇을 통해 예수님을 전파하고 만민구원역사를 이루시기를 원하십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우리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모든 것을 담고 있어야 합니다. 사도바울은 고후4:7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라고 하였습니다. 보잘 것 없는 질그릇과 같은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보배되신 예수님을 담아놓으셨습니다. 우리 안에 보배되신 예수님이 계실 때, 우리를 통해서 심히 큰 능력이 나타납니다. 우리 JBF 학생들 안에는 무엇이 담겨 있습니까? 세상의 여러 모양의 죄가 가득 담겨져 있습니까? 아니면 보배되신 예수님이 가득 담겨있습니까? 우리의 관심이 어디로 향해 있습니까? 우리가 사울 처럼 예수님이 아닌 다른 것을 담고 있을 때 우리는 하나님의 원수가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 안에 예수님을 담기를 원하십니다. 우리 JBF 학생들이 날마다 말씀을 가까이 하고 신실한 기도생활을 통해 하나님을 가까이 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담는 그릇이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16절을 다시 보십시오. 그런데 하나님의 이 택하심에는 고난이 따릅니다. 주님은 그가 내 이름을 위해 얼마나 많은 고난을 받아야 할 것을 보이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무지하고 악한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이름을 전하려면 많은 고난을 감수해야 합니다. 지금까지 바울은 성도들을 핍박함으로써 그리스도를 심하게 괴롭혔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심한 고난을 받게 됩니다. 그는 고난을 얼마나 많이 받았는지 살 소망이 끊어질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이런 고난을 받는 가운데 하나님의 위로를 체험했고 고난을 통하여 예수님의 부활의 능력을 체험하고 생명을 살리는 역사에 귀하게 쓰임 받았습니다.
17절을 보십시오. 아나니아는 주의 말씀에 순종하여 사울이 있는 집으로 갔습니다. 그 집에 들어가서 그에게 안수하였습니다. “형제 사울아 주 곧 네가 오는 길에서 나타나셨던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 아나니아가 “형제 사울아”하고 불렀을 때 사울은 큰 감동을 받았을 것입니다. 사울 자신은 성도들을 원수처럼 대했는데 자신을 찾아온 성도 아나니아는 자신을 형제라고 불러주는 것 아닙니까? 아나니아는 그가 앞으로 받을 고난을 생각하면서 긍휼히 여겼습니다. 아나니아가 안수하고 기도하자 즉시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그는 일어나 세례를 받고 음식을 먹고 강건해졌습니다. 사울이 다메섹에 있는 제자들과 함께 며칠을 있었습니다. 그는 다메섹 교회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사울이 즉시 각 회당에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하니 듣는 사람들이 다 놀랐습니다. 21절을 보십시오. “이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이 이름을 부르는 사람을 멸하려던 자가 아니냐 여기 온 것도 그들을 결박하여 대제사장들에게 끌어가고자 함이 아니냐?” 그럴수록 사울은 힘을 더 얻어 예수를 그리스도라 증언하여 다메섹에 사는 유대인들을 당혹하게 하였습니다. 유대인들은 여러 날이 지나자 사울을 죽이고자 공모하였습니다. 그 계교가 사울에게 알려졌습니다. 유대인들이 사울을 죽이려고 밤낮으로 성문까지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그의 제자들이 밤에 사울을 광주리에 담아 성벽에서 달아 내렸습니다.
26절을 보십시오. 사울이 예루살렘에 가서 제자들을 사귀고자 하나 다 두려워하여 그가 제자 됨을 믿지 아니하였습니다. 이 때 바나바가 데리고 사도들에게 가서 그가 길에서 어떻게 주를 보았는지와 주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일과 다메섹에서 그가 어떻게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였는지를 전하였습니다. 사울이 제자들과 함께 있어 예루살렘에 출입하며 또 주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고 헬라파 유대인들과 함께 말하며 변론하니 그 사람들이 죽이려고 힘쓰거늘 형제들이 알고 가이사랴로 데리고 내려가서 다소로 보냈습니다.
아나니아가 사울의 회심을 도와준 사람이었다면 바나바는 예루살렘 사도들과 교제하도록 도와주었습니다. 스데반의 순교 이후 사마리아에도 하나님의 말씀이 전파되고 가장 극렬하게 성도들을 핍박하던 사울마저 회심하여 복음 전파자가 되자 교회는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가고 수가 더 많아졌습니다.
말씀의 결론입니다. 원수 사울을 만나주신 예수님은 약속된 메시야요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하나님은 질그릇 같이 보잘 것 없는 우리 안에 보배되신 예수님을 담으시기를 원하십니다. 이를 통해 내 인생을 아름다운 인생이 되게 하시기를 원하십니다. 또한 나를 사용하여 세계 만민 구속역사를 이루시기를 원하십니다. 우리 JBF 학생들이 여러 모양의 죄를 비우고 대신에 보배되신 예수님을 담은 그릇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날마다 말씀을 가까이하고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삶 살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JBF 학생들을 넘치게 축복하여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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