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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사도행전 제4강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행 4: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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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정베드로
댓글 0건 조회 45회 작성일 16-06-01 08:10

본문

2016년 사도행전 제 4 강
말씀 | 사도행전 4:1-31
요절 | 사도행전 4:20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하니”

요즘에 교회에 후~탁 교인들이 늘고 있어서 목사님들이 걱정이라고 합니다. 여러분 후~탁 교인이란 말을 들어 보았나요? 주일날이 되면 일주일 내니 한번도 꺼내보지 않아서 먼지가 뿌옇게 쌓인 성경에 있는 먼지를 후~불고 ‘탁’ 털어서 교회에 나오는 분들을 후탁교인이라고 합니다. 혹시 여러분들 중에는 그런 분들이 있지 않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매일밥을 먹듯이 하나님의 말씀을 영적으로 매일의 일용할 양식입니다. 이 영적인 양식을 일주일에 주일날 한번먹어서는 승리할 수 없습니다. 우리 JBF 친구들은 매일 성경을 펴서 읽고 매일의 영적인 양식생활을 잘 할 수 있길 기도합니다. 아멘.

지난 주에 우리는 나면서부터 사도 베드로가 앉은뱅이 된 사람을 일으킨 사건과 그 사건의 의미를 해석한 베드로의 설교를 배웠습니다. 그 때 베드로는 그의 설교에서 그 이름을 믿으므로 그 이름이 너희가 보고 아는 이 사람을 성하게 하였나니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너희 모든 사람 앞에서 이 같이 완전히 낫게 하였다고 전하였습니다. 이 정도로 놀라운 기적이 일어났으면 모든 사람들이 믿고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일로 베드로와 요한은 유대의 종교지도자들에게 체포되어 옥에 갇히게 됩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지게 되었을까요?

4:1,2
사도들이 백성에게 말할 때에 제사장들과 성전 맡은 자와 사두개인들이 이르러 예수 안에 죽은 자의 부활이 있다고 백성을 가르치고 전함을 싫어하여

여기서 싫어하다는 말이 굉장히 중요한 말입니다. 이는 그들이 사도들을 체포하고 감옥에 가둔 이유가 앉은뱅이를 고쳤기 때문이 아니라 사도들이 전한 하나님의 말씀을 싫어했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만일 그들이 이 말씀을 받아들인다면 그들은 자신을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인 죄인으로 인정해야 하고 회개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어두운 방에 빛을 비추면 어둠 속에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게 됩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양심을 비추고 우리의 삶을 비추는 빛입니다. 그렇기에 그 말씀 앞에 어떤 이는 자신을 발견하고 회개하는가 하면 어떤 이는 그 말씀을 싫어하고 대적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 중에 친구들에게 혹은 가족들에게 복음을 전해 본 적이 있나요? 그 복음을 듣고 기뻐하고 감사하는 분들도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을 복음을 싫어하고 배척을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상히 여길 필요가 없습니다. 이는 영적으로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그러나 이 땅에 빛으로 오신 그 분이 나를 심판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나를 용서하시고 구원하러 오셨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때 그들도 그 빛을 영접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복음을 전하다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다가 사람들이 싫어하고 대적하고 배척을 할 때 이상히 여기지 마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이런 일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것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택하였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요15:18,19) 우리가 믿음으로 살고자 할 때 세상이 미워하고 핍박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때 도리어 기뻐하시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내가 받는 핍박은 내가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주님께 속한 자라는 증거가 되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위해 박해를 받는 자는 하늘에 상급이 크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베드로와 요한을 붙잡은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었습니까? 1절을 보면 그들은 제사장들과 성전 맡은 자와 사두개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유대의 종교지도자들이었고 산헤드린의 공회의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당시 유대를 이끌어가는 정치인들이요 기득권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무슨 이유로 사도들을 체포한 것입니까? 그들이 사도들을 체포한 이유는 겉으로 볼 때 진리 때문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실상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과 진리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러면 그들의 관심은 어디 있었습니까? 그들의 관심을 오직 그들의 기득권에 있었습니다. 사도들의 가르침이 그들이 기득권을 흔들 수 있었기 때문에 그들을 사도들이 말씀을 가르치는 것을 싫어했습니다.

이런 그들이 자신들의 기득권에 도전하는 사람들을 제거할 때 곧 잘 이용하던 방법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 사람을 하나님과 하나님의 율법을 대적하는 이단으로 정죄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를 위해 그들이 베드로와 요한을 잡아서 유대의 종교재판이 열리는 최고법정인 산헤드린에 세워놓고 이렇게 묻습니다.

4:7 사도들을 가운데 세우고 묻되 너희가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

그들을 사도들에게 두 가지 질문을 던졌습니다. 첫째는 무슨 권세로, 둘째는 누구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커다란 함정이 있었습니다. 당시 유대 사회에서는 앉은뱅이가 일어나는 것과 같은 놀라운 기적들은 선지자를 통해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이 질문에 하나님의 이름이 아니라 다른 이름이 나오는 바로 이단으로 정죄를 받고 돌에 쳐 죽임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들은 누구보다도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이는 매우 두려운 질문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이 질문에 사도 베드로는 이렇게 대답을 합니다.

4:9,10
만일 병자에게 행한 착한 일에 대하여 이 사람이 어떻게 구원을 받았느냐고 오늘 우리에게 질문한다면 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

하나님 외에 다른 이름이 나오면 이단으로 정죄받고 죽을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그 사실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데도 베드로는 그들의 질문에 나사레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천명합니다.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 그런데 이런 베드로는 예수님이 체포되시던 날 밤에 어린 여자 아이 앞에서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 부인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는 지금 목숨을 걸고 그가 예수님을 부인했던 바로 그 자리에서 예수님의 이름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무엇이 베드로를 이렇게 변화시킨 것일까요?
그가 예수님에 체포되시던 날 예수님을 부인한 이유는 두려움 때문이었습니다. 그도 예수님처럼 체포되어 심문을 받고 죽임을 당할 수도 있다는 두려움에 그는 본능적으로 살고자 예수님을 부인한 것입니다. 그런데 똑같은 상황 속에서 그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도리어 그는 담대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그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그를 변화없이 사랑하고 계셨습니다. 그에게 내가 나를 사랑하느냐 세 번이나 물으셨습니다. 그에게 자기 양떼를 맡겨주셨습니다. 그를 통해 영원한 하나님 나라 산소망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때 그는 더 이상 종교지도자들의 위협과 죽음이 두렵지 않게 된 것입니다.

요한1서 4:18 말씀합니다.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우리는 살아가면 많은 것을 두려워합니다. 이번 중간고사를 망치면 어떻게 하나? 내가 원하는 대학에 들어가지 못하며, 내가 원하는 목표를 이루지 못하면 어떻게 하나 두려워합니다. 학교에 있어도 두렵고 집에 있어도 두렵고 친구를 만나면서도 이 친구가 나를 떠나면 어떡하나 두려워합니다. 이 두려움의 근원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독생자를 이 세상에 보내셔서 나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못박아 죽일만큼 나를 그토록 사랑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 사랑을 알게 되면 그 사랑 안에 거하면 두려움이 내 안에 얼씬도 하지 못하게 됩니다.

실제로 저도 그러한 경험을 했습니다. 제가 대학에 들어올 때만해도 저는 걱정과 두려움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대학생활이 제게는 매우 낯설었고 학과 공부나 친구를 사귀는 모든 일들이 제게는 모든 것이 두려움이었습니다. 저는날마다 무엇에 쫓기는 사람처럼 학교수업만 끝나면 집에 와서 이렇게 나약한 자신에 대해 절망하며 많은 시간을 드러누워지냈습니다. 그런데 저는 1학년 가을에 창세기를 공부하면서 하나님이 사람을 만드시되 자기형상으로 만드시고 심히 기뻐하셨다는 말씀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통해 제가 하나님께 기쁨의 대상이요 사랑받는 존재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 믿음을 갖게 되자 분명한 존재의미가 생기고 살아갈 자신감이 생겼습니다. 이 말씀은 제 인생에 많은 변화를 가져다 주었습니다. 이 말씀 앞에서 절대적인 자아상을 갖게 되었고 더 이상 누군가와 비교하면 열등감에 시달리지 않게 되었습니다. 내 장래가 어떻게 될까 걱정하지 않고 하나님의 사랑을 믿으며 마음의 평강을 누렸습니다. 더 이상 사람의 사랑에 목말라하지 않고 그보다 더 크신 하나님의 사랑으로 만족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은 이 하나님의 사랑을 만나셨나요? 이 하나님의 사랑을 반드시 만나셔야 합니다. 그 사랑을 만날 때 일생 두려움이 없이 성결과 의로 하나님을 섬길 수 있습니다.  이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우리 JBF 친구들 모두 승리하는 인생을 살게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사도베드로가 죽을 각오를 하고 담대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전하자 유대의 종교지도자들의 반응이 어떠했습니까?

4:15-18
명하여 공회에서 나가라 하고 서로 의논하여 이르되 이 사람들을 어떻게 할까 그들로 말미암아 유명한 표적 나타난 것이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알려졌으니 우리도 부인할 수 없는지라 이것이 민간에 더 퍼지지 못하게 그들을 위협하여 이 후에는 이 이름으로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게 하자 하고 그들을 불러 경고하여 도무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 하니
 
그들은 병 나은 사람들이 그들과 함께 있었기 때문에 사도 베드로의 말을 반박하거나 부인할 수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그들이 베드로의 말을 인정하거나 받아들인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이것이 민간에 더 퍼지지 못하게 그들을위협하여 그들이 예수님을 전하지 못하게 하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이에 대해 베드로와 요한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4:19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이르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하니

그들의 대답은 너무나도 지극히 옳은 대답이었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과 사람의 말을 듣는 것 어느 것이 옳습니까? 당연히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옳습니다. 비록 그들이 듣기 싫어해도 그 말씀이 그들의 기득권을 위협하는 것이어도 그 말씀을 전해져야 합니다. 그런데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보다더 자신들의 기득권을 더 사랑했습니다. 그것을 하나님의 말씀 위에 두었습니다. 그렇기에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전해지는 것을 싫어했고 그 말씀을 전하는 사도들을 핍박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친구들에게 혹은 가족들에게 복음을 전하고자 할 때 어려움을 겪습니다. 여러분 왜 어려운 줄 아십니까? 그 이유는 우리가 그들을 설득할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어떻게 하면 설득할 수 있을지를 고민하고 그러다보면 절대적인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지 못하고 설명을 하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복음을 전하기 어려워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설득해야 하는 상대적인 말씀이 아닙니다. 그것은 선언되고 선포되어져야 하는 절대적인 말씀입니다. 그렇기에 사도들도 우리가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한 것입니다.

여러분 안에는 이렇게 사도들처럼 어떠한 위협가운데도 전할 수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나요? 여러분들이 보고 들은 말씀이 있나요? 그냥 보고 듣고 흘린 말씀이 아니라 내 안에 살아 있는 말씀, 내 삶을 변화시킨 그 말씀이 있나요? 그 말씀이 있는 사람을 참으로 행복한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나라가 그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내 안에 심겨진 말씀의 씨앗을 통해 자라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해 나면서부터 앉은뱅이가 일어나 걷게 된 놀라운 일을 보고도 하나님의 말씀을 싫어하고 도리어 핍박하는 이 세상의 악함과 그런 가운데서도 두려움없이 담대히 자신이 보고 들은 말씀을 전한 사도들에게 대해 배웠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사랑 안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그 사랑이 여러분들을 이미 찾아오셔고 여러분 안에 계신 줄 믿습니다. 그 분의 사랑 안에서 사도들과 같이 담대한 복음의 증인으로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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