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사도행전 제8강 사마리아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행8: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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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사도행전 제 8 강
말씀 | 사도행전 8:1-40
요절 | 사도행전 8:14
사마리아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이 사마리아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 함을 듣고 베드로와 요한을 보내매”
사도행전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1-7장은 이 땅에 교회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기독교가 어떻게 이 땅에 뿌리 내리게 되었는지에 관한 내용이고 8-12장은 교회가 어떤 과정을 통해 성장했는지를 13-28장은 그 열매가 어떠한가를 다루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교회가 어떤 과정을 통해 성장하게 되었는지를 다루고 있는데 그 배경에는 스테반의 순교로부터 촉발된 큰 박해가 있었습니다. 박해받는 일은 결코 달가운 일은 아닙니다. 박해받는 성도들에게는 매우 고통스럽고 힘든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방법을 통해 세상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복음이 예루살렘에만 머물러 있지 않고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퍼져 나가도록 하셨습니다. 우리는 이를 통해 세상 역사와 우리의 삶을 경영하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놀라운 섭리를 배울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역사에 부르심을 받고 자신을 드려 헌신한 분들의 빛나는 믿음의 증거를 배울 수 있습니다. 우리 JBF 친구들이 오늘 말씀을 통해 여러 어려움과 박해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자신의 모든 삶을 헌신한 귀한 분들의 신앙을 배우고 따르는 믿음의 반석들이 다 되실 수 있길 기도합니다.
첫째, 큰 박해, 큰 울음, 큰 기쁨 (1-8)
1절을 봅시다. “사울은 그가 죽임 당함을 마땅히 여기더라 그 날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박해가 있어 사도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지니라” 스테반이 순교할 때 사울은 그가 죽임 당함을 마땅히 여겼습니다. 이는 그가 단순히 스테반이 죽어 마땅하다고 생각했다는 정도가 아니라 그는 이 일에 앞장을 선 주동자였다는 뜻입니다. 사울은 스테반의 죽음에 만족하지 못하고 그날부터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를 핍박하기 시작합니다.
3절을 봅시다. “사울이 교회를 잔멸할새 각 집에 들어가 남녀를 끌어다가 옥에 넘기니라” 그는 어느 정도로 교회를 핍박하느냐 하면 그는 교회를 잔멸하고자 예수 믿는 집이라고 하면 어느 곳이든 들어가 남녀를 가리지 않고 끌어다 옥에 넘겼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잔멸이라는 말은 멧돼지가 포도원에 들어가 잘 영글은 포도를 날카로운 이빨로 짓이겨 낸다는 뜻을 갖고 있다고 합니다. 멧돼지가 포도를 다 짓이겨 놓은 포도원은 마치 핏빛으로 물들은 피의 바다와 같이 보일 것입니다. 이처럼 사울의 핍박은 맹렬하고 혹독하고 잔인했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이런 사울이 예수 믿는 자를 잡으러 가다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변화됩니다. 그러나 그 당시 그 아무도 이런 사울이 변화되어 그가 죽인 스테반이 전한 그 복음을 목숨을 걸고 전한 복음의 투사가 될 줄을 그 자신도 스테반도 그 아무도 알지 못했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사람을 외모로 판단할 수 없습니다. 이는 하나님 안에서는 어떤 악한 죄인도 변화되어 새로운 피조물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복음에 대해 무지한 사람들 그래서 예수 믿는 자들을 핍박하는 그들을 스테반과 같이 긍휼히 여기는 마음으로 용서하고 기도해주어야 합니다.
최근에 나이지리아에서 귀국하신 이디모데 선교사님은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교회 다니는 친구들에게 예수쟁이라고 욕하고 침뱉으며 “예수는 이 땅에서 꺼져버리라고해”라고 독설을 퍼붓던 분입니다. 그런데 이 분이 하나님의 은혜로 변화되어 지난 17년간 나이지리아에서 캠퍼스 영혼들을 섬기는 헌신적인 선교사의 삶을 사셨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현재 나의 모습에 낙심하고 절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변화되지 않는 부모님들이나 친구들 때문에 실망할 필요도 없습니다. 어떤 사람이든 하나님의 사랑에 붙들리면 하나님의 은혜를 맛보면 변화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해야할 일은 나 자신과 내 가족들, 내 친구들을 하나님의 사랑에 맡기는 것입니다. 그들도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변화되도록 기도하는 것입니다. 우리 JBF 친구들이 모두 하나님의 사랑에 붙들리어 변화된 새로운 삶을 살게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2절을 봅시다. “경건한 사람들이 스데반을 장사하고 크게 울더라” 경건한 사람들이 스데반을 장사하고 크게 울었습니다. 우리는 스데반의 죽음 앞에 그의 죽음을 추모하고 크게 우는 것은 너무 당연한 일이 아닌가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그 당시 스데반이 왜 돌이 맞아 죽임을 당했습니까? 그는 율법과 성전을 모독한 죄목으로 죽임을 당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그의 죽음 앞에 공객적으로 크게 울음을 울으면 그도 동범으로 취급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왜 스데반을 조용히 장사하지 않고 크게 울었을까요?
여기에는 그들의 큰 믿음의 결단이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스데반을 장사하는 공개적인 자리에서 크게 울므로 그들도 스데반과 같은 길을 가겠다. 그와 같이 생의 위기 앞에 당당히 맞서겠다는 결단을 한 것입니다. 그들의 이 결단은 스데반을 장사하는 그 자리에서 그의 죽음 앞에서 당당히 담대하게 공개적으로 선언된 것입니다. 이는 당시 목숨을 건 행위였고 결단이었습니다. 우리는 이들을 통해 우리도 결단을 해야 함을 배웁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복음을 받은 사람이라면, 예수님을 “나의 주님”이라고 고백하는 자라면 우리도 나의 삶의 자리에서 믿음으로 살겠다고 하나님의 영광을 들어내는 삶을 살겠다고 나의 삶을 드려 오직 하나님만을 섬기겠다는 결단을 해야 합니다.
한 전도사님이 섬기시던 교회 대학부에서 부회장을 하던 형제의 대학졸업을 축하할려고 졸업식에 참석하셨는데 옆에 있는 친구가 이 분 누구셔?라고 묻더랍니다. 그런데 그 형제는 우리 교회 전도사님이라고 소개하지 못하고 어, 그런 분 있어 라고 말을 하길래, 제가 이 친구 다니는 교회 전도사입니다.라고 소개하니 그 친구가 “야 임마 너 교회다녔었어.”라고 말하더라고 합니다. 교회 대학부 부회장까지 했던 그 형제는 대학을 다니는 4년동안 친구들이 교회 다니는 줄도 모르는 그런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그는 어떻게 이런 삶을 살게 되었을까요? 이는 오늘 본문에 나오는 경건한 사람들처럼 자신의 삶의 자리에서 믿음으로 살고자 결단하는 큰 울음을 울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생애 가장 중요한 결단을 할 때 크게 울어야 합니다. 자신에 대해 철저히 절망하는 울음, 오직 하나님의 뜻대로 살겠다는 결단의 울음을 울어야 합니다. 예수님도 십자가를 지시기 전 날 밤 겟세마네 동산에서 밤새도록 눈물과 통곡으로 하나님께 기도하셨습니다. 그때 그는 십자가의 길을 담대히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하는 처절한 실패를 경험하고 통곡하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때 그는 그가 예수님을 부인했던 공회 앞에서 담대히 예수의 이름을 선포하는 복음의 용사가 될 수 있었습니다. 수많은 신앙의 위인들이 이렇게 큰 울음을 울고 난 후 위대한 삶을 살았습니다.
저도 고등학교 3학년 때 이렇게 크게 운적이 있습니다. 제가 학교 다닐 때는 고등학교를 시험을 봐서 들어갔습니다. 저는 고등학교 들어갈 때는 1등으로 들어갔는데 계속 성적이 떨어졌고 대학교입시 시험에도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저는 제 생애 처음으로 가장 큰 절망을 맛보았습니다. 설상가상 그때 저는 연탄가스를 마시고 쓰러지게 됩니다. 한 겨울에 찬바닥을 뒹굴면서 저는 그때 비로서 그동안 나의 삶이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교만한 삶이었던 것을 깨닫고 눈물을 흘리며 회개하였습니다. 그때 저는 쓰러진 저를 끌어 안아주신 아버지의 품에서 눈물을 흘리며 “하나님, 이제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겠습니다.”라고 아주 조용히 기도를 올렸습니다. 비록 제가 제정신을 차리고 이 기도를 금방 잊어버렸지만 하나님은 이런 저를 홍대에 합격시켜 주시고 목자님을 보내주셔서 성경을 공부하며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날 수 있도록 인도해주셨습니다. 제가 대학4년동안 등록금 걱정하지 않도록 장학금을 받도록 축복하셨고 대학교 4년 내내 캠퍼스에서 복음을 전하고 양들을 섬기는 목자의 삶을 살게 하셨습니다. 참으로 영적으로 무지하고 교만하던 죄인을 일생 캠퍼스 목자로 부르시고 사용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인해 감사합니다. 제가 어떻게 이런 삶을 살게 되었을까요? 제가 저의 삶에 대해 절망하고 큰 울움을 울며 하나님께 기도하였기 때문입니다. 이것조차도 제가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신 것이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일 뿐입니다. 우리 JBF 친구들도 하나님 앞에서 큰 울움을 울고 나의 삶을 하나님께 드리겠다는 위대한 결단을 모두 하실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8절을 봅시다. “그 성에 큰 기쁨이 있더라” 우리는 앞에서 큰 박해와 큰 울음에 대해 배웠습니다. 그런데 8절 말씀은 큰 박해와 큰 울음의 결과 그 열매를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큰 박해와 큰 울움의 열매는 무엇입니까? 큰 기쁨입니다. 예루살렘 성도들이 큰 박해로 크게 낙심하고 슬픔에 빠져 있었다면 사마리아 성이 하나님께 돌아오는 큰 기쁨의 역사는 없었을 것입니다. 큰 박해를 받을 때 예루살렘 성도들은 크게 낙심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도 스데반의 길을 가겠다고 큰 울움을 울며 결단했습니다. 그때 그들은 흩어져 머무는 곳마다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였고 그 결과 사마리아 성 사람들이 구원을 받고 하나님께 돌아오는 큰 기쁨의 역사가 있었습니다. 이 기쁨은 단순한 기쁨이 아니라 역사적인 기쁨이었습니다. 오랜 세월동안 단절되었던 유대와 사마리아의 장벽이 허물어지고 버리진 땅, 저주받은 땅으로 여겨졌던 사마리아 성이 회복되는 역사적인 기쁨이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의 삶을 드리고자 결단할 때 하나님은 반드시 이 큰 기쁨의 역사를 이루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삶을 드려 주님께 헌신하고 주님을 섬기고자 결단하는 우리 JBF 친구들에게 큰 기쁨의 열매를 거두게 하시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둘째, 마술사 시몬의 악독을 제거한 베드로 (18-25)
하나님의 성령이 이 땅에 임하신 날이 오순절 날입니다. 그 날 성령의 강림하심으로 탄생한 열매가 바로 교회입니다. 하나님은 이 땅에 구원의 복음을 전하시기 위해 가장 먼저 행하신 것이 이 땅에 성령을 보내신 것이고 그 다음은 교회를 세우신 것이고 그 다음에는 사람을 부르시는 일이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이 세상에 가장 먼저 탄생한 교회가 바로 예루살렘 교회입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베드로가 한 번 설교하면 3천명이 회개하고 어느 날은 5천명이 회개하여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폭발적인 부흥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렇게 급성장하던 예루살렘 교회가 스데반의 순교를 기점으로 맹렬한 박해를 받게 됩니다. 이는 예상할 수 없었던 급작스러운 사건이었습니다. 그때 박해를 피해서 수많은 성도들이 인근 각처로 흩어지게 됩니다. 그렇게 흩어진 성도들은 어떤 삶을 살았습니까? 행8:4-6을 봅시다. “그 흩어진 사람들이 두루 다니며 복음의 말씀을 전할새 빌립이 사마리아 성에 내려가 그리스도를 백성에게 전파하니 무리가 빌립의 말도 듣고 행하는 표적도 보고 한마음으로 그가 하는 말을 따르더라”
큰 박해를 피해 인근각처로 흩어진 성도들은 박해를 피해 숨어 지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가는 곳마다 민들레 홀씨와 같이 복음의 말씀을 전파했습니다. 이렇게 말씀을 전하게 되면 그들이 어디 있는지 금방 들어나게 됩니다. 이렇게 행동하는 것은 “나 여기 있어요, 잡아가세요,”하는 어리석은 행동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스데반의 장례를 치르며 큰 울음으로 그들도 그의 길을 가고자 결단했습니다. 그렇기에 그들은 가능 곳마다 은둔의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복음의 말씀을 담대히 전하는 전도자의 삶을 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는 그런 분들 중에 예루살렘의 일곱 집사 중에 하나인 빌립 집사의 활동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큰 박해를 피해 그가 간 곳은 사마리아였습니다. 우리 나라와 일본 간에 오랜 역사적인 앙금이 있듯이 유대인들과 사마리아인들 사이에도 오랜 역사적인 앙금이 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을 미워했고 그들의 땅을 밟고 싶어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빌립 집사는 하나님의 복음을 들고 그 땅에서 담대히 하나님의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가 말씀을 전할 때 더러운 귀신이 크게 소리 지르며 나가고 또 많은 중풍병자와 못 걷는 사람들이 낫는 큰 표적이 함께 했습니다. 이를 통해 빌립 집사의 말씀사역은 큰 힘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교회가 하나도 없던 사마리아 땅에도 교회가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빌립이 사마리아 땅에 들어가 복음을 전하기 전에 그곳에 신통한 능력을 가진 시몬이라는 마술사가 있었는데 그 사람의 마술이 하도 신통해서 그 사람의 능력에 사람들이 놀라며 그는 그곳에서 오랫동안 큰 자라 일컬음을 받으며 절대적인 영향력을 미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빌립이 행하는 크신 하나님의 능력을 보고 이런 마술사 시몬도 세례를 받고 빌립 집사를 졸졸졸 따라다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시몬은 베드로가 사마리아 교회에 와서 사람들에게 안수할 때 성령이 임하심을 보게 됩니다. 그는 빌립 집사를 통해 일어난 큰 능력의 역사가 바로 성령의 역사임을 깨닫고 많은 돈을 갖고 와서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행8:19절을 봅시다. “이르되 이 권능을 내게도 주어 누구든지 내가 안수하는 사람은 성령을 받게 하여 주소서 하니” 우리는 이를 통해 마술사 시몬이 믿고 세례를 받았다고 하는데 그가 참으로 믿고 세례를 받은 것인지 의문을 갖게 됩니다. 시몬은 정말 예수님을 믿고 거듭난 사람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오늘 본문 말씀은 그가 세례를 받고 빌립을 따라 다닌 이유가 예수님을 필요로 해서가 아니라 더 큰 능력을 필요로 했기 떄문임을 나타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도 기독교의 옷을 입고 예언을 한다. 병을 고친다고 하면서 예수님이 아닌 능력을 전하고 성공의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하는 교회에 수만명이 모이고 그들의 설교와 능력에 수많은 사람들이 열광을 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들 가운데 예수님이 계시지 않다는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이런 마술사 시몬의 요청에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행8:20-23절을 봅시다. “베드로가 이르되 네가 하나님의 선물을 돈 주고 살 줄로 생각하였으니 네 은과 네가 함께 망할지어다 하나님 앞에서 네 마음이 바르지 못하니 이 도에는 네가 관계도 없고 분깃 될 것도 없느니라 그러므로 너의 이 악함을 회개하고 주께 기도하라 혹 마음에 품은 것을 사하여 주시리라 내가 보니 너는 악독이 가득하며 불의에 매인 바 되었도다” 시몬이란 뜻이 본래 “성직매매”라는 뜻이 있다고 합니다. 이런 마술사 시몬은 하나님의 능력을 돈벌이로 생각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을 자기 영광으로 바꾸고자 한 것입니다. 역사를 보면 교회가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챌 때 사람의 왕국이 될 때, 세월이 지나면 복음만 남고 하나님만 남아야 하는데, 사람만 남고 돈만 남을 때 하나님은 이것을 그냥 내버려 두지 않으셨습니다. 반드시 그 악독을 심판하시고 정화하셨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이것에 대해 분명히 경고한 것입니다. 마술사 시몬이 이것을 회개하도록 도운 것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시몬은 이를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초대교회 시몬주의라는 영지주의 활동을 통해 교회에 악한 영향력을 끼쳤다고 합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 이런 마술사 시몬의 악독이 우리와는 상관없는 것이라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을 자신의 것으로 가로채고 하나님을 나의 성공과 돈벌이의 수단으로만 이용하려는 마술사 시몬의 악독함이 피 속에 흐르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렇기에 마술사 시몬은 다른 누가 아닌 우리 자신의 모습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사도베드로의 말씀을 경외함으로 들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너의 이 악함을 회개하고 주께 기도하라 혹 마음에 품은 것을 사하여 주시리라” 오늘 이 말씀을 통해 저와 여러분 모두가 하나님 앞에서 나의 악함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돌이켜 온전히 회개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오늘 이 말씀 앞에서 내가 주인 삼은 모든 것을 내려놓고 오직 하나님만을, 예수님만을 사랑하겠노라고 큰 울음으로 회개하고 결단할 수 있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셋째, 성령의 인도하심에 순종한 빌립 (26-40)
우리는 악독이 가득한 시몬과는 너무나 대조적인 한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그는 바로 빌립 집사입니다. 그는 마술사 시몬조차도 놀라고 따라다닐 정도로 하나님의 큰 능력을 행하던 분입니다. 그로인해 사마리아 교회는 폭발적으로 성장을 했고 그 덕분에 그는 그곳에서 큰 자로 칭송을 받으며 많은 사역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빌립에게 성령께서 갑자기 사마리아에서 하는 모든 일을 내려놓고 그가 누리던 모든 것을 내려놓고 광야로 가라는 방향을 주셨습니다. 이제 막 탄생한 사마리아 교회는 아직 빌립이 해야할 일들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이런 그를 광야로 가라고 하시는 성령의 방향은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왜 이런 방향을 주셨을까요?
첫째로 이를 통해 사람이 아닌 오직 복음만 남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당시 사마리아는 오랜 세월동안 마술사 시몬이 행하는 신통한 능력에 놀라면 그의 영향력 아래 있었습니다. 그런데 빌립이 나타나 더 큰 능력을 행하니 이제 그들은 빌립을 따랐습니다. 마술사 시몬도 빌립을 따랐습니다. 이처럼 사마리아 사람들은 사람과 그 사람의 능력에 의지하며 따르기 쉬운 성향을 갖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기에 성령께서는 빌립을 사마리아 교회에서 빼 내심으로서 그들 안에 빌립이 아닌 오직 복음만 남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안에 주인 삼은 모든 것을 내려놓고 오직 하나님만 사랑하길 원하십니다. 이는 그때 우리의 신앙이 타락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 바로 설 수 있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이를 통해 에디오피아 내시를 돕고자 하신 것입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에 순종하여 광야로 나아간 빌립은 에디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국고를 맡은 관리인인 내시가 예배하러 예루살렘에 왔다가 돌아가는데 수레를 타고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읽고 있는 것을 봅니다. 그 순간 성령께서는 그에게 다가가 복음을 전하라는 하십니다. 무더운 광야에서 수레를 타고 가는 사람을 따라가 복음을 전하려면 달려가야 합니다. 그런데 빌립은 지체하지 않고 성령의 방향에 순종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내시는 이사야서 말씀을 읽고 있던 중 무슨 뜻인지 알지 못해 고민하고 있었고 빌립은 그 말씀을 기초로 그 말씀의 주인공이 바로 예수님이심을 가르쳤을 때 그가 믿고 세례를 받는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예수님을 믿은 그를 통해 에디오피아는 아프리카 최초 기독교 국가가 되었습니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해 큰 핍박을 통해 성도들을 흩으시고 그들을 통해 복음을 사마리아와 에디오피아 내시에 전파되게 하신 하나님의 역사를 배웠습니다. 예루살렘 교회가 큰 핍박을 당했듯이 우리도 우리의 삶에서 생각지도 못한 큰 고난과 어려움을 당할 수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큰 울음으로 스데반의 길을 따르고자 결단한 성도들과 같이, 사람들의 인정과 붙잡고 있던 일들을 내려놓고 성령께 순종한 빌립과 같이 하나님의 손이 붙들린 자로 살아가야함을 배웁니다. 우리 JBF 친구들이 이렇게 하나님 앞에 결단하고 바로서는 위대한 삶을 살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드립니다.
말씀 | 사도행전 8:1-40
요절 | 사도행전 8:14
사마리아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이 사마리아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 함을 듣고 베드로와 요한을 보내매”
사도행전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1-7장은 이 땅에 교회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기독교가 어떻게 이 땅에 뿌리 내리게 되었는지에 관한 내용이고 8-12장은 교회가 어떤 과정을 통해 성장했는지를 13-28장은 그 열매가 어떠한가를 다루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교회가 어떤 과정을 통해 성장하게 되었는지를 다루고 있는데 그 배경에는 스테반의 순교로부터 촉발된 큰 박해가 있었습니다. 박해받는 일은 결코 달가운 일은 아닙니다. 박해받는 성도들에게는 매우 고통스럽고 힘든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방법을 통해 세상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복음이 예루살렘에만 머물러 있지 않고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퍼져 나가도록 하셨습니다. 우리는 이를 통해 세상 역사와 우리의 삶을 경영하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놀라운 섭리를 배울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역사에 부르심을 받고 자신을 드려 헌신한 분들의 빛나는 믿음의 증거를 배울 수 있습니다. 우리 JBF 친구들이 오늘 말씀을 통해 여러 어려움과 박해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자신의 모든 삶을 헌신한 귀한 분들의 신앙을 배우고 따르는 믿음의 반석들이 다 되실 수 있길 기도합니다.
첫째, 큰 박해, 큰 울음, 큰 기쁨 (1-8)
1절을 봅시다. “사울은 그가 죽임 당함을 마땅히 여기더라 그 날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박해가 있어 사도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지니라” 스테반이 순교할 때 사울은 그가 죽임 당함을 마땅히 여겼습니다. 이는 그가 단순히 스테반이 죽어 마땅하다고 생각했다는 정도가 아니라 그는 이 일에 앞장을 선 주동자였다는 뜻입니다. 사울은 스테반의 죽음에 만족하지 못하고 그날부터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를 핍박하기 시작합니다.
3절을 봅시다. “사울이 교회를 잔멸할새 각 집에 들어가 남녀를 끌어다가 옥에 넘기니라” 그는 어느 정도로 교회를 핍박하느냐 하면 그는 교회를 잔멸하고자 예수 믿는 집이라고 하면 어느 곳이든 들어가 남녀를 가리지 않고 끌어다 옥에 넘겼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잔멸이라는 말은 멧돼지가 포도원에 들어가 잘 영글은 포도를 날카로운 이빨로 짓이겨 낸다는 뜻을 갖고 있다고 합니다. 멧돼지가 포도를 다 짓이겨 놓은 포도원은 마치 핏빛으로 물들은 피의 바다와 같이 보일 것입니다. 이처럼 사울의 핍박은 맹렬하고 혹독하고 잔인했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이런 사울이 예수 믿는 자를 잡으러 가다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변화됩니다. 그러나 그 당시 그 아무도 이런 사울이 변화되어 그가 죽인 스테반이 전한 그 복음을 목숨을 걸고 전한 복음의 투사가 될 줄을 그 자신도 스테반도 그 아무도 알지 못했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사람을 외모로 판단할 수 없습니다. 이는 하나님 안에서는 어떤 악한 죄인도 변화되어 새로운 피조물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복음에 대해 무지한 사람들 그래서 예수 믿는 자들을 핍박하는 그들을 스테반과 같이 긍휼히 여기는 마음으로 용서하고 기도해주어야 합니다.
최근에 나이지리아에서 귀국하신 이디모데 선교사님은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교회 다니는 친구들에게 예수쟁이라고 욕하고 침뱉으며 “예수는 이 땅에서 꺼져버리라고해”라고 독설을 퍼붓던 분입니다. 그런데 이 분이 하나님의 은혜로 변화되어 지난 17년간 나이지리아에서 캠퍼스 영혼들을 섬기는 헌신적인 선교사의 삶을 사셨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현재 나의 모습에 낙심하고 절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변화되지 않는 부모님들이나 친구들 때문에 실망할 필요도 없습니다. 어떤 사람이든 하나님의 사랑에 붙들리면 하나님의 은혜를 맛보면 변화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해야할 일은 나 자신과 내 가족들, 내 친구들을 하나님의 사랑에 맡기는 것입니다. 그들도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변화되도록 기도하는 것입니다. 우리 JBF 친구들이 모두 하나님의 사랑에 붙들리어 변화된 새로운 삶을 살게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2절을 봅시다. “경건한 사람들이 스데반을 장사하고 크게 울더라” 경건한 사람들이 스데반을 장사하고 크게 울었습니다. 우리는 스데반의 죽음 앞에 그의 죽음을 추모하고 크게 우는 것은 너무 당연한 일이 아닌가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그 당시 스데반이 왜 돌이 맞아 죽임을 당했습니까? 그는 율법과 성전을 모독한 죄목으로 죽임을 당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그의 죽음 앞에 공객적으로 크게 울음을 울으면 그도 동범으로 취급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왜 스데반을 조용히 장사하지 않고 크게 울었을까요?
여기에는 그들의 큰 믿음의 결단이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스데반을 장사하는 공개적인 자리에서 크게 울므로 그들도 스데반과 같은 길을 가겠다. 그와 같이 생의 위기 앞에 당당히 맞서겠다는 결단을 한 것입니다. 그들의 이 결단은 스데반을 장사하는 그 자리에서 그의 죽음 앞에서 당당히 담대하게 공개적으로 선언된 것입니다. 이는 당시 목숨을 건 행위였고 결단이었습니다. 우리는 이들을 통해 우리도 결단을 해야 함을 배웁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복음을 받은 사람이라면, 예수님을 “나의 주님”이라고 고백하는 자라면 우리도 나의 삶의 자리에서 믿음으로 살겠다고 하나님의 영광을 들어내는 삶을 살겠다고 나의 삶을 드려 오직 하나님만을 섬기겠다는 결단을 해야 합니다.
한 전도사님이 섬기시던 교회 대학부에서 부회장을 하던 형제의 대학졸업을 축하할려고 졸업식에 참석하셨는데 옆에 있는 친구가 이 분 누구셔?라고 묻더랍니다. 그런데 그 형제는 우리 교회 전도사님이라고 소개하지 못하고 어, 그런 분 있어 라고 말을 하길래, 제가 이 친구 다니는 교회 전도사입니다.라고 소개하니 그 친구가 “야 임마 너 교회다녔었어.”라고 말하더라고 합니다. 교회 대학부 부회장까지 했던 그 형제는 대학을 다니는 4년동안 친구들이 교회 다니는 줄도 모르는 그런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그는 어떻게 이런 삶을 살게 되었을까요? 이는 오늘 본문에 나오는 경건한 사람들처럼 자신의 삶의 자리에서 믿음으로 살고자 결단하는 큰 울음을 울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생애 가장 중요한 결단을 할 때 크게 울어야 합니다. 자신에 대해 철저히 절망하는 울음, 오직 하나님의 뜻대로 살겠다는 결단의 울음을 울어야 합니다. 예수님도 십자가를 지시기 전 날 밤 겟세마네 동산에서 밤새도록 눈물과 통곡으로 하나님께 기도하셨습니다. 그때 그는 십자가의 길을 담대히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하는 처절한 실패를 경험하고 통곡하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때 그는 그가 예수님을 부인했던 공회 앞에서 담대히 예수의 이름을 선포하는 복음의 용사가 될 수 있었습니다. 수많은 신앙의 위인들이 이렇게 큰 울음을 울고 난 후 위대한 삶을 살았습니다.
저도 고등학교 3학년 때 이렇게 크게 운적이 있습니다. 제가 학교 다닐 때는 고등학교를 시험을 봐서 들어갔습니다. 저는 고등학교 들어갈 때는 1등으로 들어갔는데 계속 성적이 떨어졌고 대학교입시 시험에도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저는 제 생애 처음으로 가장 큰 절망을 맛보았습니다. 설상가상 그때 저는 연탄가스를 마시고 쓰러지게 됩니다. 한 겨울에 찬바닥을 뒹굴면서 저는 그때 비로서 그동안 나의 삶이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교만한 삶이었던 것을 깨닫고 눈물을 흘리며 회개하였습니다. 그때 저는 쓰러진 저를 끌어 안아주신 아버지의 품에서 눈물을 흘리며 “하나님, 이제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겠습니다.”라고 아주 조용히 기도를 올렸습니다. 비록 제가 제정신을 차리고 이 기도를 금방 잊어버렸지만 하나님은 이런 저를 홍대에 합격시켜 주시고 목자님을 보내주셔서 성경을 공부하며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날 수 있도록 인도해주셨습니다. 제가 대학4년동안 등록금 걱정하지 않도록 장학금을 받도록 축복하셨고 대학교 4년 내내 캠퍼스에서 복음을 전하고 양들을 섬기는 목자의 삶을 살게 하셨습니다. 참으로 영적으로 무지하고 교만하던 죄인을 일생 캠퍼스 목자로 부르시고 사용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인해 감사합니다. 제가 어떻게 이런 삶을 살게 되었을까요? 제가 저의 삶에 대해 절망하고 큰 울움을 울며 하나님께 기도하였기 때문입니다. 이것조차도 제가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신 것이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일 뿐입니다. 우리 JBF 친구들도 하나님 앞에서 큰 울움을 울고 나의 삶을 하나님께 드리겠다는 위대한 결단을 모두 하실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8절을 봅시다. “그 성에 큰 기쁨이 있더라” 우리는 앞에서 큰 박해와 큰 울음에 대해 배웠습니다. 그런데 8절 말씀은 큰 박해와 큰 울음의 결과 그 열매를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큰 박해와 큰 울움의 열매는 무엇입니까? 큰 기쁨입니다. 예루살렘 성도들이 큰 박해로 크게 낙심하고 슬픔에 빠져 있었다면 사마리아 성이 하나님께 돌아오는 큰 기쁨의 역사는 없었을 것입니다. 큰 박해를 받을 때 예루살렘 성도들은 크게 낙심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도 스데반의 길을 가겠다고 큰 울움을 울며 결단했습니다. 그때 그들은 흩어져 머무는 곳마다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였고 그 결과 사마리아 성 사람들이 구원을 받고 하나님께 돌아오는 큰 기쁨의 역사가 있었습니다. 이 기쁨은 단순한 기쁨이 아니라 역사적인 기쁨이었습니다. 오랜 세월동안 단절되었던 유대와 사마리아의 장벽이 허물어지고 버리진 땅, 저주받은 땅으로 여겨졌던 사마리아 성이 회복되는 역사적인 기쁨이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의 삶을 드리고자 결단할 때 하나님은 반드시 이 큰 기쁨의 역사를 이루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삶을 드려 주님께 헌신하고 주님을 섬기고자 결단하는 우리 JBF 친구들에게 큰 기쁨의 열매를 거두게 하시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둘째, 마술사 시몬의 악독을 제거한 베드로 (18-25)
하나님의 성령이 이 땅에 임하신 날이 오순절 날입니다. 그 날 성령의 강림하심으로 탄생한 열매가 바로 교회입니다. 하나님은 이 땅에 구원의 복음을 전하시기 위해 가장 먼저 행하신 것이 이 땅에 성령을 보내신 것이고 그 다음은 교회를 세우신 것이고 그 다음에는 사람을 부르시는 일이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이 세상에 가장 먼저 탄생한 교회가 바로 예루살렘 교회입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베드로가 한 번 설교하면 3천명이 회개하고 어느 날은 5천명이 회개하여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폭발적인 부흥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렇게 급성장하던 예루살렘 교회가 스데반의 순교를 기점으로 맹렬한 박해를 받게 됩니다. 이는 예상할 수 없었던 급작스러운 사건이었습니다. 그때 박해를 피해서 수많은 성도들이 인근 각처로 흩어지게 됩니다. 그렇게 흩어진 성도들은 어떤 삶을 살았습니까? 행8:4-6을 봅시다. “그 흩어진 사람들이 두루 다니며 복음의 말씀을 전할새 빌립이 사마리아 성에 내려가 그리스도를 백성에게 전파하니 무리가 빌립의 말도 듣고 행하는 표적도 보고 한마음으로 그가 하는 말을 따르더라”
큰 박해를 피해 인근각처로 흩어진 성도들은 박해를 피해 숨어 지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가는 곳마다 민들레 홀씨와 같이 복음의 말씀을 전파했습니다. 이렇게 말씀을 전하게 되면 그들이 어디 있는지 금방 들어나게 됩니다. 이렇게 행동하는 것은 “나 여기 있어요, 잡아가세요,”하는 어리석은 행동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스데반의 장례를 치르며 큰 울음으로 그들도 그의 길을 가고자 결단했습니다. 그렇기에 그들은 가능 곳마다 은둔의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복음의 말씀을 담대히 전하는 전도자의 삶을 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는 그런 분들 중에 예루살렘의 일곱 집사 중에 하나인 빌립 집사의 활동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큰 박해를 피해 그가 간 곳은 사마리아였습니다. 우리 나라와 일본 간에 오랜 역사적인 앙금이 있듯이 유대인들과 사마리아인들 사이에도 오랜 역사적인 앙금이 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을 미워했고 그들의 땅을 밟고 싶어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빌립 집사는 하나님의 복음을 들고 그 땅에서 담대히 하나님의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가 말씀을 전할 때 더러운 귀신이 크게 소리 지르며 나가고 또 많은 중풍병자와 못 걷는 사람들이 낫는 큰 표적이 함께 했습니다. 이를 통해 빌립 집사의 말씀사역은 큰 힘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교회가 하나도 없던 사마리아 땅에도 교회가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빌립이 사마리아 땅에 들어가 복음을 전하기 전에 그곳에 신통한 능력을 가진 시몬이라는 마술사가 있었는데 그 사람의 마술이 하도 신통해서 그 사람의 능력에 사람들이 놀라며 그는 그곳에서 오랫동안 큰 자라 일컬음을 받으며 절대적인 영향력을 미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빌립이 행하는 크신 하나님의 능력을 보고 이런 마술사 시몬도 세례를 받고 빌립 집사를 졸졸졸 따라다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시몬은 베드로가 사마리아 교회에 와서 사람들에게 안수할 때 성령이 임하심을 보게 됩니다. 그는 빌립 집사를 통해 일어난 큰 능력의 역사가 바로 성령의 역사임을 깨닫고 많은 돈을 갖고 와서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행8:19절을 봅시다. “이르되 이 권능을 내게도 주어 누구든지 내가 안수하는 사람은 성령을 받게 하여 주소서 하니” 우리는 이를 통해 마술사 시몬이 믿고 세례를 받았다고 하는데 그가 참으로 믿고 세례를 받은 것인지 의문을 갖게 됩니다. 시몬은 정말 예수님을 믿고 거듭난 사람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오늘 본문 말씀은 그가 세례를 받고 빌립을 따라 다닌 이유가 예수님을 필요로 해서가 아니라 더 큰 능력을 필요로 했기 떄문임을 나타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도 기독교의 옷을 입고 예언을 한다. 병을 고친다고 하면서 예수님이 아닌 능력을 전하고 성공의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하는 교회에 수만명이 모이고 그들의 설교와 능력에 수많은 사람들이 열광을 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들 가운데 예수님이 계시지 않다는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이런 마술사 시몬의 요청에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행8:20-23절을 봅시다. “베드로가 이르되 네가 하나님의 선물을 돈 주고 살 줄로 생각하였으니 네 은과 네가 함께 망할지어다 하나님 앞에서 네 마음이 바르지 못하니 이 도에는 네가 관계도 없고 분깃 될 것도 없느니라 그러므로 너의 이 악함을 회개하고 주께 기도하라 혹 마음에 품은 것을 사하여 주시리라 내가 보니 너는 악독이 가득하며 불의에 매인 바 되었도다” 시몬이란 뜻이 본래 “성직매매”라는 뜻이 있다고 합니다. 이런 마술사 시몬은 하나님의 능력을 돈벌이로 생각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을 자기 영광으로 바꾸고자 한 것입니다. 역사를 보면 교회가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챌 때 사람의 왕국이 될 때, 세월이 지나면 복음만 남고 하나님만 남아야 하는데, 사람만 남고 돈만 남을 때 하나님은 이것을 그냥 내버려 두지 않으셨습니다. 반드시 그 악독을 심판하시고 정화하셨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이것에 대해 분명히 경고한 것입니다. 마술사 시몬이 이것을 회개하도록 도운 것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시몬은 이를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초대교회 시몬주의라는 영지주의 활동을 통해 교회에 악한 영향력을 끼쳤다고 합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 이런 마술사 시몬의 악독이 우리와는 상관없는 것이라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을 자신의 것으로 가로채고 하나님을 나의 성공과 돈벌이의 수단으로만 이용하려는 마술사 시몬의 악독함이 피 속에 흐르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렇기에 마술사 시몬은 다른 누가 아닌 우리 자신의 모습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사도베드로의 말씀을 경외함으로 들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너의 이 악함을 회개하고 주께 기도하라 혹 마음에 품은 것을 사하여 주시리라” 오늘 이 말씀을 통해 저와 여러분 모두가 하나님 앞에서 나의 악함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돌이켜 온전히 회개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오늘 이 말씀 앞에서 내가 주인 삼은 모든 것을 내려놓고 오직 하나님만을, 예수님만을 사랑하겠노라고 큰 울음으로 회개하고 결단할 수 있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셋째, 성령의 인도하심에 순종한 빌립 (26-40)
우리는 악독이 가득한 시몬과는 너무나 대조적인 한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그는 바로 빌립 집사입니다. 그는 마술사 시몬조차도 놀라고 따라다닐 정도로 하나님의 큰 능력을 행하던 분입니다. 그로인해 사마리아 교회는 폭발적으로 성장을 했고 그 덕분에 그는 그곳에서 큰 자로 칭송을 받으며 많은 사역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빌립에게 성령께서 갑자기 사마리아에서 하는 모든 일을 내려놓고 그가 누리던 모든 것을 내려놓고 광야로 가라는 방향을 주셨습니다. 이제 막 탄생한 사마리아 교회는 아직 빌립이 해야할 일들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이런 그를 광야로 가라고 하시는 성령의 방향은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왜 이런 방향을 주셨을까요?
첫째로 이를 통해 사람이 아닌 오직 복음만 남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당시 사마리아는 오랜 세월동안 마술사 시몬이 행하는 신통한 능력에 놀라면 그의 영향력 아래 있었습니다. 그런데 빌립이 나타나 더 큰 능력을 행하니 이제 그들은 빌립을 따랐습니다. 마술사 시몬도 빌립을 따랐습니다. 이처럼 사마리아 사람들은 사람과 그 사람의 능력에 의지하며 따르기 쉬운 성향을 갖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기에 성령께서는 빌립을 사마리아 교회에서 빼 내심으로서 그들 안에 빌립이 아닌 오직 복음만 남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안에 주인 삼은 모든 것을 내려놓고 오직 하나님만 사랑하길 원하십니다. 이는 그때 우리의 신앙이 타락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 바로 설 수 있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이를 통해 에디오피아 내시를 돕고자 하신 것입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에 순종하여 광야로 나아간 빌립은 에디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국고를 맡은 관리인인 내시가 예배하러 예루살렘에 왔다가 돌아가는데 수레를 타고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읽고 있는 것을 봅니다. 그 순간 성령께서는 그에게 다가가 복음을 전하라는 하십니다. 무더운 광야에서 수레를 타고 가는 사람을 따라가 복음을 전하려면 달려가야 합니다. 그런데 빌립은 지체하지 않고 성령의 방향에 순종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내시는 이사야서 말씀을 읽고 있던 중 무슨 뜻인지 알지 못해 고민하고 있었고 빌립은 그 말씀을 기초로 그 말씀의 주인공이 바로 예수님이심을 가르쳤을 때 그가 믿고 세례를 받는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예수님을 믿은 그를 통해 에디오피아는 아프리카 최초 기독교 국가가 되었습니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해 큰 핍박을 통해 성도들을 흩으시고 그들을 통해 복음을 사마리아와 에디오피아 내시에 전파되게 하신 하나님의 역사를 배웠습니다. 예루살렘 교회가 큰 핍박을 당했듯이 우리도 우리의 삶에서 생각지도 못한 큰 고난과 어려움을 당할 수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큰 울음으로 스데반의 길을 따르고자 결단한 성도들과 같이, 사람들의 인정과 붙잡고 있던 일들을 내려놓고 성령께 순종한 빌립과 같이 하나님의 손이 붙들린 자로 살아가야함을 배웁니다. 우리 JBF 친구들이 이렇게 하나님 앞에 결단하고 바로서는 위대한 삶을 살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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