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추수감사절특강(시103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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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추수감사절 특강
말씀 | 베드로전서 103:1-22
요절 | 베드로전서 103:2
그의 모든 은택을 잊지 말지어다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며 그의 모든 은택을 잊지 말지어다”
지난주 주일이 교회절기로 추수감사절이었습니다. 그러나 JBF는 이번주에 추수감사절 예배로 드리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삶을 살고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아시나요? 그 사람은 바로 범사에 감사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면 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하게 사는 사람은 누구일까요? 그 사람은 바로 범사에 불평하는 사람입니다. 여러분 감사하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무엇을 감사해야 하는지 어떻게 감사해야 하는지를 배우는 것이 그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이런 우리에게 시편 103편은 우리에게 감사가 무엇인지를 아주 잘 가르쳐주는 교과서와도 같은 말씀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 추수감사예배를 맞아 오늘 시편말씀을 통해 우리 모두가 감사하는 삶의 축복을 깨닫게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1절을 읽어봅시다.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내 속에 있는 것들아 다 그의 거룩한 이름을 송축하라” 본 시편의 1행은 시인이 자신에게 명령을 하듯이 대화를 하듯이 하나님을 송축하라고 합니다. 그가 이렇게 명령하고 선포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진정한 감사는 입술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영혼으로, 내 속에 있는 모든 것으로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렇지 못합니다. 우리는 분열되어 있습니다. 말씀을 들으면서도 내 마음으로 근심을 합니다. 입술로는 찬양하면서 마음으로는 불평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 안에 있는 죄 때문입니다. 죄는 분열시킵니다. 우리의 몸과 마음을, 우리의 마음과 영혼을 분열시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온전히 송축하지 못하게 합니다. 그렇기에 시인은 그의 영혼에게 명령하는 것입니다.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내 속에 있는 것들아 다 그의 거룩한 이름을 송축하라” 여러분, 죄성을 가진 우리는 하나님을 온전한 마음으로 송축하지 못합니다. 온전히 감사하지 못합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시인과 같이 우리의 영혼에게, 내 속에 있는 것들에게 명령해야 합니다. “내 영혼아 근심하지 말지어다. 낙망하지 말지어다. 두려워하지 말지어다." 본 시평으로 만들어진 찬양이 있는데 우리 한번 불러 볼까요? 찬양하라 내 영혼아 찬양하라 내 영혼아 내 속에 있는 것들아 다 찬양하라 (감사하라, 기도하라)
내 영혼에 근심이 찾아오고 낙망이 찾아오고 두려움이 찾아올 때 다윗과 같이 내 영혼에게 명령하며 선포하시기 바랍니다.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내 속에 있는 것들아 다 그의 거룩한 이름을 송축할지어다.” 아멘 이렇게 선포한 다음에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2절을 봅시다.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며 그의 모든 은택을 잊지 말지어다” 그리고 그 다음에 할 일은 하나님의 은택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은택은 은혜 은(恩)자에 연못 택(澤)자로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를 의미합니다. 여러분 평안한 상태가 어떤 상태인 줄 아십니까? 내 몸과 마음이 같은 곳에 있는 것이라고 합니다. 내 몸은 여기 있는데 내 마음이 예배 끝나면 공부해야 하는데 공부에 가 있으면 어떻게 됩니까? 평안하지 않은 겁니다. 내 입술로는 찬양하고 있는데 내 안에 지난 주 수능에서 틀린 문제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것만 더 맞았으면 좋았을 텐데 그러고 있습니다. 그러면 마음이 평안하지 않은 겁니다. 내 몸이 예배 가운데 와 있다면 내 마음도 예배 가운데 나아가야 마음에 평안이 있는 것입니다. 예배 가운데 나아간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우리가 방금 읽은 2절의 고백처럼 그의 모든 은택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은택을 기억하며 나와 있는 예배가 참된 예배이고 그 예배 가운데 하나님의 평안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 JBF 친구들이 매주 분열된 예배가 아니라 평안이 있는 예배를 드리실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그러면 시인은 구체적으로 어떤 은택을 기억하고 있습니까? 이에 대해 저는 전체 내용을 크게 두 가지로 구분하여 살펴보고자 합니다. 첫째 모든 죄악을 사하신 하나님, 둘째 내 소원을 만족케 하신 하나님입니다.
첫째, 모든 죄악을 사하신 하나님. 3절을 읽어 봅시다. “그가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네 모든 병을 고치시며” 우리에게 여러 병들이 있습니다. 비교적 가벼운 병인 감기나 비염, 피부병인 무좀부터 암이나 치매같은 심각한 병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세상에 모든 질병들 중에 가장 절망적인 질병이 있습니다. 그것은 죄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육체의 병은 죽으면 끝이 납니다. 그러나 죄는 죽는다고 끝나지 않습니다. 죄를 용서받지 못하면 영원한 심판을 받을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내 모든 죄악을 사하셨습니다. 그로인한 모든 병들을 고치셨습니다. 최근에 의학이 발달하면서 밝혀낸 사실은 모든 병의 원인은 근심, 두려움, 미움, 절망에서 비롯된다고 합니다. 이 원인들을 한마디로 말하면 무엇입니까? 죄입니다. 모든 질병은 죄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 원인인 죄를 사함 받으니 질병도 낫는 것입니다. 바로 하나님이 주신 최고의 은택은 죄사함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사하시며 죄로 인해 분열되고 병든 우리의 삶을 치유하십니다. 어그러지고 무너진 우리의 관계를 회복시키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죄사함의 은택입니다.
하나님은 죄사함의 은택을 어떻게 주셨습니까? 4절을 읽어봅시다. “네 생명을 파멸에서 속량하시고 인자와 긍휼로 관을 씌우시며” 하나님은 우리에게 죄사함의 은택을 주시기 위해 속량하셨습니다. 속량이란 속전을 주고 노예를 사서 해방시켜 줄 때 사용하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죄사함의 은택을 주시기 위해 그의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 주셨습니다. 그의 아들의 피값을 치르시고 죄의 종된 우리를 사셨습니다. 그리고 그를 믿는 자를 값없이 의롭다하셨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죄사함을 받은 후에는 죄를 짓지 않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죄사함을 받은 후에도 여전히 죄를 짓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를 인자와 긍휼로 관을 씌워 주십니다. 이는 변함없이 우리를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어떻게 용서하십니까? 8,9절을 봅시다. “여호와는 긍휼이 많으시고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고 인자하심이 풍부하시도다 자주 경책하지 아니하시며 노를 영원히 품지 아니하시리로다” 여러분 만일 우리가 죄를 지을 때마다 하나님이 노하시고 경책하신다면 어떻게 될까? 우리가 눈으로 죄를 지을 때 눈을 뽑아버리고 손으로 죄를 지을 때 손을 잘라 내시면 우리 중에 살아남을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긍휼이 많으시고 은혜로우신 우리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여전히 죄를 짓지만 하나님은 노하기를 더디 하시고 자주 경책하지 않으십니다. 우리의 죄를 따라 우리를 처벌하지 않으시며 우리의 죄악을 따라 그대로 갚지 않으십니다.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우리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시고 아버지가 자식을 긍휼이 여김같이 우리를 긍휼이 여기십니다. 하나님이 왜 우리를 이렇게 대우하시는 것입니까? 14절을 봅시다. “이는 그가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우리가 단지 먼지뿐임을 기억하심이로다” 이는 하나님이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우리가 단지 먼지뿐임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은 우리를 인자와 긍휼로 관을 씌워주시고 일방적으로 사랑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내 죄를 기억하지 않으시고 내 연약함을 기억하신다는 것이 얼마나 큰 은혜인지 모릅니다. 사람은 은혜는 물에 새기고 원한은 바위에 새긴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지옥같은 세상을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분은 지옥을 죄에 대한 기억이라고 말씀하기도 하셨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우리가 서로의 죄를 기억하지 않고 연약함만을 기억한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그때 우리도 나에게 죄짓고 상처를 준 사람들을 긍휼히 용서할 수 있게 됩니다. 우리의 삶에 사랑과 긍휼이 넘치게 됩니다. 그렇게 될 때 우리 마음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게 되고 천국의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요 선물입니다.
15,16절을 봅시다. “인생은 그 날이 풀과 같으며 그 영화가 들의 꽃과 같도다 그것은 바람이 지나가면 없어지나니 그 있던 자리도 다시 알지 못하거니와” 운동 경기 중에 철인삼종 경기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철인은 철로 된 사람 그만큼 강한 사람이란 뜻입니다. 그런데 실상 인생은 철인이 아닙니다. 토인입니다. 흙이요 먼지일 뿐입니다. 사막에 뜨거운 바람이 불면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들듯이 우리 인생의 세월의 바람, 고생의 바람을 맞으면 마르고 시들고 맙니다. 저도 한때는 한 인물하던 사람이었습니다. 제게 첫직장인 대우자동차에 입사해서 신입사원 현장실습을 받을 때 현장직에 있는 분이 영화배우를 하시지 왜 여기 계시냐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저 그런 사람입니다. 그러나 지금 저를 보고 저의 젊을 때를 기억하는 분은 아무도 없습니다. 인생은 진토요 덧없이 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호와의 인자하심은 자기를 경외하는 자에게 영원부터 영원까지 이르며 그의 자손의 자손에게까지 이른다고 하셨습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의 은택을 기억하며 그를 경외하는 자가 참으로 행복한 사람입니다. 여러분들이 이번주 하나님이 베푸신 모든 은택 그 가운데서도 죄사함의 은택을 깊이 묵상하는 가운데 이러한 행복이 넘쳐나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둘째, 내 소원을 만족케 하신 하나님. 여러분 사람들에게는 누구나 원함이 있습니다. 여러분들에게도 원함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원함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어떻게 됩니까? 원함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그것은 우리에게 “한(恨)”이 된다고 합니다. 마음에 한이 있는 사람은 마음이 어떨까요? 마음에 한이 있는 사람은 남들이 볼 때 부러워할만한 자리에 있는데도 자신의 삶에 만족하지 못합니다. 항상 마음 한 구석에 슬픔을 갖고 살아갑니다. 밝지가 않습니다. 삶이 어둡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하나님은 우리의 소원을 아시며 우리의 소원을 만족케 하시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저는 저의 삶에서 그런 경험을 많이 했는데 최근에 받은 은혜를 하나만 나누고자 합니다. 저는 나이 마흔이 되면서 삶이 진토 같고 먼지 같다는 생각이 들어와 허무하고 마음이 많이 힘들었습니다. 그때 제 마음에 찾아온 것이 바로 시를 쓰고 싶다는 마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소원이 처음부터 강렬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작년부터 시를 쓰고 싶다는 소원이 제 안에 강하게 일어났습니다. 시를 써서 무엇이 되겠다는 것이 아니라 나의 삶이 시들이 않도록 내 영혼이 시들지 않도록 시를 쓰고 싶다는 열망이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제 카톳에 “시를 찾습니다”라는 글자를 새겨놓았습니다. 그런데 그 시가 올해 제게 찾아왔습니다. 최근에는 매일매일 찾아왔습니다. 어느 날은 4,5개가 찾아왔습니다. 그 중에 내가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시 하나를 소개하고자 합니다.
<별똥별>
운명을 다한 별이 / 마지막 힘을 다해 / 가여운 이의 소원 / 가슴에 품고 날아 / 자신의 몸을 태워 / 한줄기 빛이 되어 / 하늘을 가른 유성 / 오늘은 무슨 소원 / 누구의 기도 담아 / 저리도 쏜살 같이 / 나아라 가고 있나
이 시를 받아보신 한 분이 별똥별은 마치 우리를 위해 이 땅에 오신 주님의 사랑과도 같이 아름답고 따뜻하게 흐르고 있다는 시평을 보내주셨습니다. 저는 시를 통해서 소통할 수 있다는 것과 예수님의 아름다운 사랑을 전할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를 통해 저의 작은 소원이지만 하나님은 결코 작다 외면하지 않으시고 내 소원으로 만족케 하시는 하나님이시요 참 나의 좋으신 아버지시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여러분들도 마음 안에도 바라고 바라는 소원들이 있는 줄 압니다. 하나님은 여러분들의 소원, 여러분들의 꿈을 소중히 여기시는 분입니다. 그 소원을 따라 우리의 삶을 축복해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어떤 꿈도 꿀 수 있는 참으로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그것이 반드시 거창하고 위대한 것일 필요는 없습니다. 저처럼 시를 쓰는 소소한 것일지라도 하나님께 내 소원을 아뢰어 보시기 바랍니다. 저처럼 카톳에다 그 소원을 글로 적어 보시는 것도 좋습니다. 그리고 이런 나의 작은 소원도 만족케 하시는 하나님, 그 하나님은 얼마나 인자와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신가를 발견하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여러분들의 삶이 하나님에 대한 발견으로, 그 놀라움으로 넘쳐나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최근에 밝혀진 대통령의 비리 때문에 온 나라가 소란합니다. 많은 국민들이 상처를 받고 분노하고 있습니다. 이 나라가 어떻게 될지 걱정입니다. 여러분의 삶은 어떻습니까? 원하는 대학에 들어갈 수 있을지, 꿈을 이룰 수 있을지, 험난한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야할지 걱정이 많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하나님을 송축하며 감사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19절을 봅시다. “여호와께서 그의 보좌를 하늘에 세우시고 그의 왕권으로 만유를 다스리시도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의 왕권으로 만유를 다스리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나라를 다스리시기 때문에 대통령의 비리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호는 결코 침몰하지 않고 계속 달려갈 것입니다. 하나님이 내 삶을 다스리시기 때문에 나의 죄악과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내 삶은 하나님의 길을 가게 될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모든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도록 주님이 다시리시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시며 우리의 소원을 만족케 하시는 하나님에 대해서 배웠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또한 우리의 소원도 아십니다. 우리를 일생 인자와 긍휼로 관 씌우시고 우리의 삶에 왕이 되셔서 다스려 주십니다. 매일매일의 삶에서 우리가 이 하나님을 송축하는 삶을 살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삶이 매일매일 하나님의 은택으로 감사와 기쁨이 넘치는 삶이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말씀 | 베드로전서 103:1-22
요절 | 베드로전서 103:2
그의 모든 은택을 잊지 말지어다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며 그의 모든 은택을 잊지 말지어다”
지난주 주일이 교회절기로 추수감사절이었습니다. 그러나 JBF는 이번주에 추수감사절 예배로 드리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삶을 살고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아시나요? 그 사람은 바로 범사에 감사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면 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하게 사는 사람은 누구일까요? 그 사람은 바로 범사에 불평하는 사람입니다. 여러분 감사하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무엇을 감사해야 하는지 어떻게 감사해야 하는지를 배우는 것이 그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이런 우리에게 시편 103편은 우리에게 감사가 무엇인지를 아주 잘 가르쳐주는 교과서와도 같은 말씀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 추수감사예배를 맞아 오늘 시편말씀을 통해 우리 모두가 감사하는 삶의 축복을 깨닫게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1절을 읽어봅시다.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내 속에 있는 것들아 다 그의 거룩한 이름을 송축하라” 본 시편의 1행은 시인이 자신에게 명령을 하듯이 대화를 하듯이 하나님을 송축하라고 합니다. 그가 이렇게 명령하고 선포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진정한 감사는 입술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영혼으로, 내 속에 있는 모든 것으로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렇지 못합니다. 우리는 분열되어 있습니다. 말씀을 들으면서도 내 마음으로 근심을 합니다. 입술로는 찬양하면서 마음으로는 불평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 안에 있는 죄 때문입니다. 죄는 분열시킵니다. 우리의 몸과 마음을, 우리의 마음과 영혼을 분열시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온전히 송축하지 못하게 합니다. 그렇기에 시인은 그의 영혼에게 명령하는 것입니다.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내 속에 있는 것들아 다 그의 거룩한 이름을 송축하라” 여러분, 죄성을 가진 우리는 하나님을 온전한 마음으로 송축하지 못합니다. 온전히 감사하지 못합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시인과 같이 우리의 영혼에게, 내 속에 있는 것들에게 명령해야 합니다. “내 영혼아 근심하지 말지어다. 낙망하지 말지어다. 두려워하지 말지어다." 본 시평으로 만들어진 찬양이 있는데 우리 한번 불러 볼까요? 찬양하라 내 영혼아 찬양하라 내 영혼아 내 속에 있는 것들아 다 찬양하라 (감사하라, 기도하라)
내 영혼에 근심이 찾아오고 낙망이 찾아오고 두려움이 찾아올 때 다윗과 같이 내 영혼에게 명령하며 선포하시기 바랍니다.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내 속에 있는 것들아 다 그의 거룩한 이름을 송축할지어다.” 아멘 이렇게 선포한 다음에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2절을 봅시다.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며 그의 모든 은택을 잊지 말지어다” 그리고 그 다음에 할 일은 하나님의 은택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은택은 은혜 은(恩)자에 연못 택(澤)자로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를 의미합니다. 여러분 평안한 상태가 어떤 상태인 줄 아십니까? 내 몸과 마음이 같은 곳에 있는 것이라고 합니다. 내 몸은 여기 있는데 내 마음이 예배 끝나면 공부해야 하는데 공부에 가 있으면 어떻게 됩니까? 평안하지 않은 겁니다. 내 입술로는 찬양하고 있는데 내 안에 지난 주 수능에서 틀린 문제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것만 더 맞았으면 좋았을 텐데 그러고 있습니다. 그러면 마음이 평안하지 않은 겁니다. 내 몸이 예배 가운데 와 있다면 내 마음도 예배 가운데 나아가야 마음에 평안이 있는 것입니다. 예배 가운데 나아간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우리가 방금 읽은 2절의 고백처럼 그의 모든 은택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은택을 기억하며 나와 있는 예배가 참된 예배이고 그 예배 가운데 하나님의 평안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 JBF 친구들이 매주 분열된 예배가 아니라 평안이 있는 예배를 드리실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그러면 시인은 구체적으로 어떤 은택을 기억하고 있습니까? 이에 대해 저는 전체 내용을 크게 두 가지로 구분하여 살펴보고자 합니다. 첫째 모든 죄악을 사하신 하나님, 둘째 내 소원을 만족케 하신 하나님입니다.
첫째, 모든 죄악을 사하신 하나님. 3절을 읽어 봅시다. “그가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네 모든 병을 고치시며” 우리에게 여러 병들이 있습니다. 비교적 가벼운 병인 감기나 비염, 피부병인 무좀부터 암이나 치매같은 심각한 병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세상에 모든 질병들 중에 가장 절망적인 질병이 있습니다. 그것은 죄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육체의 병은 죽으면 끝이 납니다. 그러나 죄는 죽는다고 끝나지 않습니다. 죄를 용서받지 못하면 영원한 심판을 받을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내 모든 죄악을 사하셨습니다. 그로인한 모든 병들을 고치셨습니다. 최근에 의학이 발달하면서 밝혀낸 사실은 모든 병의 원인은 근심, 두려움, 미움, 절망에서 비롯된다고 합니다. 이 원인들을 한마디로 말하면 무엇입니까? 죄입니다. 모든 질병은 죄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 원인인 죄를 사함 받으니 질병도 낫는 것입니다. 바로 하나님이 주신 최고의 은택은 죄사함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사하시며 죄로 인해 분열되고 병든 우리의 삶을 치유하십니다. 어그러지고 무너진 우리의 관계를 회복시키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죄사함의 은택입니다.
하나님은 죄사함의 은택을 어떻게 주셨습니까? 4절을 읽어봅시다. “네 생명을 파멸에서 속량하시고 인자와 긍휼로 관을 씌우시며” 하나님은 우리에게 죄사함의 은택을 주시기 위해 속량하셨습니다. 속량이란 속전을 주고 노예를 사서 해방시켜 줄 때 사용하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죄사함의 은택을 주시기 위해 그의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 주셨습니다. 그의 아들의 피값을 치르시고 죄의 종된 우리를 사셨습니다. 그리고 그를 믿는 자를 값없이 의롭다하셨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죄사함을 받은 후에는 죄를 짓지 않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죄사함을 받은 후에도 여전히 죄를 짓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를 인자와 긍휼로 관을 씌워 주십니다. 이는 변함없이 우리를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어떻게 용서하십니까? 8,9절을 봅시다. “여호와는 긍휼이 많으시고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고 인자하심이 풍부하시도다 자주 경책하지 아니하시며 노를 영원히 품지 아니하시리로다” 여러분 만일 우리가 죄를 지을 때마다 하나님이 노하시고 경책하신다면 어떻게 될까? 우리가 눈으로 죄를 지을 때 눈을 뽑아버리고 손으로 죄를 지을 때 손을 잘라 내시면 우리 중에 살아남을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긍휼이 많으시고 은혜로우신 우리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여전히 죄를 짓지만 하나님은 노하기를 더디 하시고 자주 경책하지 않으십니다. 우리의 죄를 따라 우리를 처벌하지 않으시며 우리의 죄악을 따라 그대로 갚지 않으십니다.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우리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시고 아버지가 자식을 긍휼이 여김같이 우리를 긍휼이 여기십니다. 하나님이 왜 우리를 이렇게 대우하시는 것입니까? 14절을 봅시다. “이는 그가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우리가 단지 먼지뿐임을 기억하심이로다” 이는 하나님이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우리가 단지 먼지뿐임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은 우리를 인자와 긍휼로 관을 씌워주시고 일방적으로 사랑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내 죄를 기억하지 않으시고 내 연약함을 기억하신다는 것이 얼마나 큰 은혜인지 모릅니다. 사람은 은혜는 물에 새기고 원한은 바위에 새긴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지옥같은 세상을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분은 지옥을 죄에 대한 기억이라고 말씀하기도 하셨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우리가 서로의 죄를 기억하지 않고 연약함만을 기억한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그때 우리도 나에게 죄짓고 상처를 준 사람들을 긍휼히 용서할 수 있게 됩니다. 우리의 삶에 사랑과 긍휼이 넘치게 됩니다. 그렇게 될 때 우리 마음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게 되고 천국의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요 선물입니다.
15,16절을 봅시다. “인생은 그 날이 풀과 같으며 그 영화가 들의 꽃과 같도다 그것은 바람이 지나가면 없어지나니 그 있던 자리도 다시 알지 못하거니와” 운동 경기 중에 철인삼종 경기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철인은 철로 된 사람 그만큼 강한 사람이란 뜻입니다. 그런데 실상 인생은 철인이 아닙니다. 토인입니다. 흙이요 먼지일 뿐입니다. 사막에 뜨거운 바람이 불면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들듯이 우리 인생의 세월의 바람, 고생의 바람을 맞으면 마르고 시들고 맙니다. 저도 한때는 한 인물하던 사람이었습니다. 제게 첫직장인 대우자동차에 입사해서 신입사원 현장실습을 받을 때 현장직에 있는 분이 영화배우를 하시지 왜 여기 계시냐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저 그런 사람입니다. 그러나 지금 저를 보고 저의 젊을 때를 기억하는 분은 아무도 없습니다. 인생은 진토요 덧없이 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호와의 인자하심은 자기를 경외하는 자에게 영원부터 영원까지 이르며 그의 자손의 자손에게까지 이른다고 하셨습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의 은택을 기억하며 그를 경외하는 자가 참으로 행복한 사람입니다. 여러분들이 이번주 하나님이 베푸신 모든 은택 그 가운데서도 죄사함의 은택을 깊이 묵상하는 가운데 이러한 행복이 넘쳐나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둘째, 내 소원을 만족케 하신 하나님. 여러분 사람들에게는 누구나 원함이 있습니다. 여러분들에게도 원함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원함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어떻게 됩니까? 원함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그것은 우리에게 “한(恨)”이 된다고 합니다. 마음에 한이 있는 사람은 마음이 어떨까요? 마음에 한이 있는 사람은 남들이 볼 때 부러워할만한 자리에 있는데도 자신의 삶에 만족하지 못합니다. 항상 마음 한 구석에 슬픔을 갖고 살아갑니다. 밝지가 않습니다. 삶이 어둡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하나님은 우리의 소원을 아시며 우리의 소원을 만족케 하시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저는 저의 삶에서 그런 경험을 많이 했는데 최근에 받은 은혜를 하나만 나누고자 합니다. 저는 나이 마흔이 되면서 삶이 진토 같고 먼지 같다는 생각이 들어와 허무하고 마음이 많이 힘들었습니다. 그때 제 마음에 찾아온 것이 바로 시를 쓰고 싶다는 마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소원이 처음부터 강렬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작년부터 시를 쓰고 싶다는 소원이 제 안에 강하게 일어났습니다. 시를 써서 무엇이 되겠다는 것이 아니라 나의 삶이 시들이 않도록 내 영혼이 시들지 않도록 시를 쓰고 싶다는 열망이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제 카톳에 “시를 찾습니다”라는 글자를 새겨놓았습니다. 그런데 그 시가 올해 제게 찾아왔습니다. 최근에는 매일매일 찾아왔습니다. 어느 날은 4,5개가 찾아왔습니다. 그 중에 내가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시 하나를 소개하고자 합니다.
<별똥별>
운명을 다한 별이 / 마지막 힘을 다해 / 가여운 이의 소원 / 가슴에 품고 날아 / 자신의 몸을 태워 / 한줄기 빛이 되어 / 하늘을 가른 유성 / 오늘은 무슨 소원 / 누구의 기도 담아 / 저리도 쏜살 같이 / 나아라 가고 있나
이 시를 받아보신 한 분이 별똥별은 마치 우리를 위해 이 땅에 오신 주님의 사랑과도 같이 아름답고 따뜻하게 흐르고 있다는 시평을 보내주셨습니다. 저는 시를 통해서 소통할 수 있다는 것과 예수님의 아름다운 사랑을 전할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를 통해 저의 작은 소원이지만 하나님은 결코 작다 외면하지 않으시고 내 소원으로 만족케 하시는 하나님이시요 참 나의 좋으신 아버지시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여러분들도 마음 안에도 바라고 바라는 소원들이 있는 줄 압니다. 하나님은 여러분들의 소원, 여러분들의 꿈을 소중히 여기시는 분입니다. 그 소원을 따라 우리의 삶을 축복해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어떤 꿈도 꿀 수 있는 참으로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그것이 반드시 거창하고 위대한 것일 필요는 없습니다. 저처럼 시를 쓰는 소소한 것일지라도 하나님께 내 소원을 아뢰어 보시기 바랍니다. 저처럼 카톳에다 그 소원을 글로 적어 보시는 것도 좋습니다. 그리고 이런 나의 작은 소원도 만족케 하시는 하나님, 그 하나님은 얼마나 인자와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신가를 발견하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여러분들의 삶이 하나님에 대한 발견으로, 그 놀라움으로 넘쳐나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최근에 밝혀진 대통령의 비리 때문에 온 나라가 소란합니다. 많은 국민들이 상처를 받고 분노하고 있습니다. 이 나라가 어떻게 될지 걱정입니다. 여러분의 삶은 어떻습니까? 원하는 대학에 들어갈 수 있을지, 꿈을 이룰 수 있을지, 험난한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야할지 걱정이 많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하나님을 송축하며 감사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19절을 봅시다. “여호와께서 그의 보좌를 하늘에 세우시고 그의 왕권으로 만유를 다스리시도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의 왕권으로 만유를 다스리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나라를 다스리시기 때문에 대통령의 비리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호는 결코 침몰하지 않고 계속 달려갈 것입니다. 하나님이 내 삶을 다스리시기 때문에 나의 죄악과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내 삶은 하나님의 길을 가게 될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모든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도록 주님이 다시리시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시며 우리의 소원을 만족케 하시는 하나님에 대해서 배웠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또한 우리의 소원도 아십니다. 우리를 일생 인자와 긍휼로 관 씌우시고 우리의 삶에 왕이 되셔서 다스려 주십니다. 매일매일의 삶에서 우리가 이 하나님을 송축하는 삶을 살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삶이 매일매일 하나님의 은택으로 감사와 기쁨이 넘치는 삶이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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