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누가복음 제 16 강 하나님의 그리스도 (누가복음 9:1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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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누가복음 제 16 강
말씀 | 누가복음 9:18-36
요절 | 누가복음 9:20
하나님의 그리스도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하나님의 그리스도시니이다 하니”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메시야로서 3년 반 동안 공생애의 삶을 사셨습니다. 여기서 공생애란 예수님이 메시야로서 활동하시기를 시작해서 십자가에 죽으시기 전까지의 기간을 의미합니다. 공생애 기간 동안 예수님이 하신 일이 많으시지만 세 가지만 이야기하라고 하면 그것은 첫째로 말씀을 가르치시는 일이요 둘째로 병든 자들을 고치시는 일이요 셋째로 제자양성하신 일입니다. 예수님의 공생애 전반부는 말씀을 가르치시는 일과 병든 자들을 고치시는 일을 많이 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공생애의 후반부로 가시면서는 제자양성하시는 일에 집중하십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공생애를 전반부와 후반부로 나누는 분수령은 어디입니까? 그 분수령이 되었던 사건이 무엇입니까? 그것이 바로 본문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하느냐 물으셨고 그 질문에 베드로는 “하나님의 그리스도시니이다”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하신 후에 비로소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하는 예수님의 질문에 대한 베드로의 신앙고백, 이것은 예수님 공생애의 분수령이기도 하지만 이는 우리 인생의 분수령이기도 합니다. 오늘 저는 예수님의 이 질문이 왜 우리 인생의 분수령이 되는지 그리고 이 질문에 대해 베드로와 같이 신앙고백하는 것이 왜 그토록 중요한 일인지에 대해 배우기를 원합니다. 오늘 말씀을 듣는 가운데 우리 JBF 친구들이 예수님을 나의 하나님, 나의 그리스도로 만나고 진심으로 신앙고백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제1장 하나님의 그리스도 (18-20)
18-20절을 봅시다. 예수님은 따로 기도하실 때에 제자들에게 두 가지 질문을 하셨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첫째는 무리들이 나를 누구라 하느냐? 둘째는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하는 질문입니다. 첫번째 질문에, 즉 무리들이 나를 누구라 하느냐 하는 질문에 제자들이 무엇이라 답합니까? 19절을 함께 읽어 봅시다. “대답하여 이르되 세례 요한이라 하고 더러는 엘리야라, 더러는 옛 선지자 중의 한 사람이 살아났다 하나이다” 첫 번째 질문에 대한 답은 그리 어렵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저 사람들이 하는 말을 전달하기만 하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하는 두 번째 질문은 어떻습니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쉽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왜냐하면 이 질문은 예수님에 대한 인격적인 관계를 묻고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 여러분의 아버지가 이런 질문을 하신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얘야, 나는 너에게 무엇이지?” 아마도 여러분은 주저함 없이 “아빠요”라고 답을 할 것입니다. 여기에 이런 수식어가 붙으면 우리 아버지들은 너무 행복해 하실 겁니다. “내가 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내 아빠요” 그렇겠죠? 그런데 이 질문에 여러분들이 이렇게 대답한다고 생각해 봅시다. “아저씨요” “이사님이요” “잠만 자시는 분이요” 혹은 “잘 모르겠는데요” 아마도 이런 대답을 들은 아버지들은 큰 충격을 받고 응급실에 가실지도 모릅니다.
“얘야, 나는 너에게 무엇이지?”라는 아버지의 질문에 “아빠요”라는 고백과 “아저씨요” “이사님이요” 하는 고백은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아빠요”라는 고백은 인격적인 관계성이 있지만 “아저씨요” “이사님이요”하는 고백은 인격적인 관계성이 없다는 것이 가장 큰 차이점입니다. 아버지가 옆집 아이에게 아저씨일지 모르지만, 아버지가 회사 직원들에게 이사님일지 모르지만 여러분들에게는 아저씨도, 이사님도 아닙니다. 여러분들에게는 아빠입니다. 이것이 여러분과 아버지와의 인격적인 관계성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물으신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세례요한이라 하고 엘리야라고도 하고 더러는 옛 선지자 중에 하나라고 하는데 나는 너에게 무엇이냐? 물으시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인격적인 관계를 물으신 것입니다. 이 질문에 베드로가 무엇이라고 고백합니까? 20절을 함께 읽어 봅시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하나님의 그리스도시니이다 하니”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하는 질문에 베드로는 “하나님의 그리스도이시니다”라고 대답을 합니다. 이는 마치 “나는 너에게 무엇이지?” 라고 물으신 아버지의 질문에 “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내 아버지요”라고 대답한 것과도 같습니다. 아버지를 아버지로 알고 고백하는 것이 뭐 그리 대단한 일일까요?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아버지를 아버지로 알지 못하고 그렇게 고백하지 못하는 수많은 아들, 딸들이 존재합니다. 여러분들이 그들 중에 하나일 수도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이 세상에서 예수님을 하나님의 그리스도로 알지 못하고 또한 그렇게 고백하지 못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하나님의 그리스도로 아는 것은 그리고 하나님의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것은 우리 인생에 있어가 그 무엇보다도 중요한 일입니다. 왜 이것이 그토록 중요한 일인지에 관한 하나님의 말씀을 찾아보겠습니다. 요한복음 17:3절입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예수님을 아시는 것이 왜 중요합니까? 그를 아는 것이 곧 영생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아는 것이 영생입니다. 예수님을 알지 않고는 영생을 얻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10:10절입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우리가 예수님을 입으로 고백하는 것이 왜 중요합니까? 입으로 시인할 때 구원에 이른다고 하셨습니다. 믿음은 마음으로 믿는 것이지만 신앙고백은 입으로 시인하는 것입니다.
최근에 은둔형 크리스찬들이 많아지고 있다고 합니다. 이는 교회에 나올 때만, 예배드릴 때만 크리스찬이고 세상에 나가서는 크리스찬임을 밝히지 않고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사는 사람들을 일컫는 말입니다. 어떤 목사님이 대학을 졸업하는 교회 청년을 축하하기 위해 졸업식에 참석을 했는데 그의 친한 친구가 누구시냐고 물었습니다. 그런데 교회 청년이 멋쩍어 하면서 “우리 교회 목사님이셔”라고 했더니 그의 친구가 “너 교회 다녔었니?”라고 하더라는 것입니다. 그 교회 청년은 자신이 교회에 다닌다는 사실을 그 친구에게 한 번도 이야기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은 예수님을 알고 그를 고백하는 삶이 얼마나 중요한지 다시한번 강조하기 위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9:26절을 함께 읽어 봅시다.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자기와 아버지와 거룩한 천사들의 영광으로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 방금 이야기한 교회 청년이 왜 교회 다닌다는 말을 친구에게 조차 말하지 못했을까요? 그것은 예수님과 그의 말씀대로 사는 것을 부끄러워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고 그의 말씀대로 살면 친구들에게 따돌림 당하고 부끄러움을 당할 것이라 생각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런 그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네가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한다면 나도 너를 부끄러워할 수 밖에 없다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은 참으로 무서운 말씀입니다. 이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들이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도 않고 아버지를 부끄러워한다면 그래도 여러분들은 아버지의 집에서 아버지의 사랑을 받으며 아버지의 것을 누리며 평안하게 살 수 있을까요? 오히려 아버지를 그렇게 대우하면서 아버지의 집에서 누리게 될 사랑과 평안을 기대한다면 그것이야 말로 비정상 중에 비정상일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도 베드로처럼 예수님을 하나님의 그리스도로 알고 그렇게 고백하는 삶을 사는 것이 그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에게 묻겠습니다. 예수님은 여러분들에게 누구이십니까? 예수님은 나의 하나님이시요 하나님의 그리스도 이십니다. 여러분들은 예수님을 그렇게 알고 고백하셨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들은 이미 영생을 얻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여러분의 것입니다. 그러니 두려워 말고 담대히 여러분이 예수님의 자녀이심을 고백하시고 담대한 크리스찬으로 승리하는 삶을 살게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드립니다.
제2장 너희는 저희 말을 들으라 (21-36)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들으신 예수님이 비로소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제가 비로소라 한 이유는 예수님은 이전에 제자들에게 이 말씀을 한번도 하신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 말씀이 무엇입니까? 22절을 함께 읽어 봅시다. “이르시되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하리라 하시고” 예수님은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들으신 후에 비로소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가르치셨습니다.
우리는 흔히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받은 후에야 비로소 신앙고백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받기 전에 신앙고백을 했습니다. 우리가 이를 통해 중요한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은 신앙고백을 한 후에야 비로소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베드로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도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알기 전에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그가 만난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후에 말씀을 연구하고 기도하는 중에 복음의 비밀을 깊이 깨닫게 됩니다. 이를 통해 알아야할 것은 무엇입니까? 신앙고백은 신앙의 완성이 아니라 실상 신앙고백은 신앙의 출발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신앙고백을 했다고 다 된 줄로 생각할 것이 아닙니다. 그때부터가 진짜 예수님을 배우고 알아가는 신앙의 출발일 뿐입니다.
예수님은 신앙고백을 한 베드로에게 그리고 제자들에게 비로소 복음을 말씀하셨을 뿐 아니라 비로소 제자의 길을 가르치셨습니다. 23절을 봅시다.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신앙고백은 예수님을 알아가는 삶의 출발점입니다. 예수님을 어떻게 알아갈 수 있습니까? 그것은 예수님을 따를 때 예수님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려면 어떻게 해야 힙니까? 예수님은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하셨습니다. 수박 겉핡기식으로 안다는 말이 있습니다. 수박은 겉과 속이 완전히 다릅니다. 그런데 수박의 겉만 보고 수박을 알았다하는 것은 수박을 피상적으로 겉으로만 알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아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 부인과 자기 십자가 없이는 예수님을 알아도 피상적으로 알게 됩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은 신앙고백을 한 그의 제자들을 자기 부인과 자기 십자가의 길 곧 제자의 길로 초청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자기 부인과 자기 십자가는 무엇입니까? 자기부인이란 구체적으로 말씀에 순종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말씀에 순종하려면 이기적이고 감정적이고 게으르고 악한 자기를 부인해야 합니다. 자기중심적이고 자기영광과 자기자랑을 추구하는 자기를 부인해야 합니다. 자기부인은 궁극적으로 자기 십자가를 지기 위함입니다. 자기를 부인하지 않고는 자기 십자가를 질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왜 자기 십자가라고 할까요? 십자가는 자기가 아닌 다른 사람이 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에게 자기 십자가는 인류의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 죽는 것이었습니다. 이 십자가는 다른 사람이 질 수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이 져야하는 자기 십자가였습니다. 여러분들과 같은 학생들에게는 어떤 십자가가 있습니까? 공부의 십자가가 있습니다. 그런데 내가 해야할 공부를 누가 대신해 줄 수 있으면 좋겠는데, 누가 대신 시험을 봐주면 좋겠는데 그렇게 할 수 있나요?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해야 할 공부고 내가 치러야할 시험입니다. 그것을 누가 대신해 주는 것을 세상에서는 부정행위라고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고 특혜로 대학에 입학하게 되면 부정입학이라고 합니다. 여러분의 인생을 누가 대신 살아줄 수 없습니다. 내게 주신 삶을 스스로 개척하며 살아내야 하는 것이 바로 자기 십자가입니다. 그런데 자기 십자가 중에서도 우리가 반드시 깨달아야 하고 그리고 반드시 짊어져야할 십자가가 있습니다. 그것은 사명의 십자가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소명이라고 부릅니다. 그것이 중요한 이유는 그것은 하나님이 내게 주신 특별한 자기 십자가이기 때문입니다. 이 십자가를 발견하고 이 십자가를 질 때 진정한 나의 존재의미, 내 존재의 가치와 정체성을 발견할 수 있고 그때에만 우리는 참된 행복을 맛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은 자기 십자가를 발견하셨나요? 자기 십자가를 발견한 사람은, 자기 십자가를 지기로 결심한 사람은 자연스럽게 자기를 부인하게 됩니다. 그렇기에 자기 부인은 자기 십자가를 향합니다. 우리 JBF 친구들이 자기 십자가를 발견하고 자기 십자가를 짊어지기 위해 지금부터 자기를 부인하고 준비하는 축복이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드립니다.
28-36절은 변화산 사건을 다루고 있습니다.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님이 기도하실 때에 예수님의 용모가 변화되고 그 옷이 희어져 광채가 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 예수님이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에 대해 하시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황홀경에 빠져 그들이 하시는 말씀을 듣지 않고 여기가 좋사오니 여기에 초막을 짓고 살고 싶다고 말합니다. 이렇듯 베드로를 포함해서 예수님의 제자들은 여전히 예수님을 따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이런 그들에게 하나님은 구름 가운데 나타나셔서 “너희는 저희 말을 들으라”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다시한번 신앙고백의 핵심이 무엇인지를 배울 수 있습니다. 신앙고백은 입술의 고백이 아니라 삶의 고백이라는 것입니다. 삶의 고백이 되기 위해서 가장 먼저 해야할 일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말씀을 듣는다는 것은 곧 이 말씀을 하신 예수님을 믿는 것이요 그의 말씀을 순종하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는 신앙고백이 얼마나 중요한지 그리고 왜 중요한지를 배웠습니다. 또한 신앙고백이 신앙의 완성이 아니라 신앙의 출발에 불과하며 자기부인과 자기 십자가를 지며 예수님을 따르는 가운데 우리의 신앙고백이 완성됨을 배웠습니다.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들으신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마16:17) 예수님을 하나님의 그리스도로 알고 고백할 수 있는 것, 그것은 복중에 복입니다. 그것은 은혜 위에 은혜입니다. 그러나 이 복은 베드로가 잘 나서 똑똑해서 받은 복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이것조차도 다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고 예수님을 따를 수 있는 모든 일들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가능합니다. 우리가 구할 때 꾸짖지 아니하시고 후히 주시는 이 하나님께서, 하늘에게 계신 우리 아버지께서 예수님을 바르게 알고 신앙고백할 수 있는 복을 우리 모두에게 허락해 주시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말씀 | 누가복음 9:18-36
요절 | 누가복음 9:20
하나님의 그리스도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하나님의 그리스도시니이다 하니”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메시야로서 3년 반 동안 공생애의 삶을 사셨습니다. 여기서 공생애란 예수님이 메시야로서 활동하시기를 시작해서 십자가에 죽으시기 전까지의 기간을 의미합니다. 공생애 기간 동안 예수님이 하신 일이 많으시지만 세 가지만 이야기하라고 하면 그것은 첫째로 말씀을 가르치시는 일이요 둘째로 병든 자들을 고치시는 일이요 셋째로 제자양성하신 일입니다. 예수님의 공생애 전반부는 말씀을 가르치시는 일과 병든 자들을 고치시는 일을 많이 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공생애의 후반부로 가시면서는 제자양성하시는 일에 집중하십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공생애를 전반부와 후반부로 나누는 분수령은 어디입니까? 그 분수령이 되었던 사건이 무엇입니까? 그것이 바로 본문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하느냐 물으셨고 그 질문에 베드로는 “하나님의 그리스도시니이다”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하신 후에 비로소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하는 예수님의 질문에 대한 베드로의 신앙고백, 이것은 예수님 공생애의 분수령이기도 하지만 이는 우리 인생의 분수령이기도 합니다. 오늘 저는 예수님의 이 질문이 왜 우리 인생의 분수령이 되는지 그리고 이 질문에 대해 베드로와 같이 신앙고백하는 것이 왜 그토록 중요한 일인지에 대해 배우기를 원합니다. 오늘 말씀을 듣는 가운데 우리 JBF 친구들이 예수님을 나의 하나님, 나의 그리스도로 만나고 진심으로 신앙고백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제1장 하나님의 그리스도 (18-20)
18-20절을 봅시다. 예수님은 따로 기도하실 때에 제자들에게 두 가지 질문을 하셨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첫째는 무리들이 나를 누구라 하느냐? 둘째는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하는 질문입니다. 첫번째 질문에, 즉 무리들이 나를 누구라 하느냐 하는 질문에 제자들이 무엇이라 답합니까? 19절을 함께 읽어 봅시다. “대답하여 이르되 세례 요한이라 하고 더러는 엘리야라, 더러는 옛 선지자 중의 한 사람이 살아났다 하나이다” 첫 번째 질문에 대한 답은 그리 어렵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저 사람들이 하는 말을 전달하기만 하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하는 두 번째 질문은 어떻습니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쉽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왜냐하면 이 질문은 예수님에 대한 인격적인 관계를 묻고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 여러분의 아버지가 이런 질문을 하신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얘야, 나는 너에게 무엇이지?” 아마도 여러분은 주저함 없이 “아빠요”라고 답을 할 것입니다. 여기에 이런 수식어가 붙으면 우리 아버지들은 너무 행복해 하실 겁니다. “내가 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내 아빠요” 그렇겠죠? 그런데 이 질문에 여러분들이 이렇게 대답한다고 생각해 봅시다. “아저씨요” “이사님이요” “잠만 자시는 분이요” 혹은 “잘 모르겠는데요” 아마도 이런 대답을 들은 아버지들은 큰 충격을 받고 응급실에 가실지도 모릅니다.
“얘야, 나는 너에게 무엇이지?”라는 아버지의 질문에 “아빠요”라는 고백과 “아저씨요” “이사님이요” 하는 고백은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아빠요”라는 고백은 인격적인 관계성이 있지만 “아저씨요” “이사님이요”하는 고백은 인격적인 관계성이 없다는 것이 가장 큰 차이점입니다. 아버지가 옆집 아이에게 아저씨일지 모르지만, 아버지가 회사 직원들에게 이사님일지 모르지만 여러분들에게는 아저씨도, 이사님도 아닙니다. 여러분들에게는 아빠입니다. 이것이 여러분과 아버지와의 인격적인 관계성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물으신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세례요한이라 하고 엘리야라고도 하고 더러는 옛 선지자 중에 하나라고 하는데 나는 너에게 무엇이냐? 물으시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인격적인 관계를 물으신 것입니다. 이 질문에 베드로가 무엇이라고 고백합니까? 20절을 함께 읽어 봅시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하나님의 그리스도시니이다 하니”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하는 질문에 베드로는 “하나님의 그리스도이시니다”라고 대답을 합니다. 이는 마치 “나는 너에게 무엇이지?” 라고 물으신 아버지의 질문에 “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내 아버지요”라고 대답한 것과도 같습니다. 아버지를 아버지로 알고 고백하는 것이 뭐 그리 대단한 일일까요?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아버지를 아버지로 알지 못하고 그렇게 고백하지 못하는 수많은 아들, 딸들이 존재합니다. 여러분들이 그들 중에 하나일 수도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이 세상에서 예수님을 하나님의 그리스도로 알지 못하고 또한 그렇게 고백하지 못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하나님의 그리스도로 아는 것은 그리고 하나님의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것은 우리 인생에 있어가 그 무엇보다도 중요한 일입니다. 왜 이것이 그토록 중요한 일인지에 관한 하나님의 말씀을 찾아보겠습니다. 요한복음 17:3절입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예수님을 아시는 것이 왜 중요합니까? 그를 아는 것이 곧 영생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아는 것이 영생입니다. 예수님을 알지 않고는 영생을 얻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10:10절입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우리가 예수님을 입으로 고백하는 것이 왜 중요합니까? 입으로 시인할 때 구원에 이른다고 하셨습니다. 믿음은 마음으로 믿는 것이지만 신앙고백은 입으로 시인하는 것입니다.
최근에 은둔형 크리스찬들이 많아지고 있다고 합니다. 이는 교회에 나올 때만, 예배드릴 때만 크리스찬이고 세상에 나가서는 크리스찬임을 밝히지 않고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사는 사람들을 일컫는 말입니다. 어떤 목사님이 대학을 졸업하는 교회 청년을 축하하기 위해 졸업식에 참석을 했는데 그의 친한 친구가 누구시냐고 물었습니다. 그런데 교회 청년이 멋쩍어 하면서 “우리 교회 목사님이셔”라고 했더니 그의 친구가 “너 교회 다녔었니?”라고 하더라는 것입니다. 그 교회 청년은 자신이 교회에 다닌다는 사실을 그 친구에게 한 번도 이야기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은 예수님을 알고 그를 고백하는 삶이 얼마나 중요한지 다시한번 강조하기 위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9:26절을 함께 읽어 봅시다.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자기와 아버지와 거룩한 천사들의 영광으로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 방금 이야기한 교회 청년이 왜 교회 다닌다는 말을 친구에게 조차 말하지 못했을까요? 그것은 예수님과 그의 말씀대로 사는 것을 부끄러워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고 그의 말씀대로 살면 친구들에게 따돌림 당하고 부끄러움을 당할 것이라 생각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런 그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네가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한다면 나도 너를 부끄러워할 수 밖에 없다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은 참으로 무서운 말씀입니다. 이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들이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도 않고 아버지를 부끄러워한다면 그래도 여러분들은 아버지의 집에서 아버지의 사랑을 받으며 아버지의 것을 누리며 평안하게 살 수 있을까요? 오히려 아버지를 그렇게 대우하면서 아버지의 집에서 누리게 될 사랑과 평안을 기대한다면 그것이야 말로 비정상 중에 비정상일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도 베드로처럼 예수님을 하나님의 그리스도로 알고 그렇게 고백하는 삶을 사는 것이 그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에게 묻겠습니다. 예수님은 여러분들에게 누구이십니까? 예수님은 나의 하나님이시요 하나님의 그리스도 이십니다. 여러분들은 예수님을 그렇게 알고 고백하셨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들은 이미 영생을 얻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여러분의 것입니다. 그러니 두려워 말고 담대히 여러분이 예수님의 자녀이심을 고백하시고 담대한 크리스찬으로 승리하는 삶을 살게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드립니다.
제2장 너희는 저희 말을 들으라 (21-36)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들으신 예수님이 비로소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제가 비로소라 한 이유는 예수님은 이전에 제자들에게 이 말씀을 한번도 하신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 말씀이 무엇입니까? 22절을 함께 읽어 봅시다. “이르시되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하리라 하시고” 예수님은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들으신 후에 비로소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가르치셨습니다.
우리는 흔히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받은 후에야 비로소 신앙고백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받기 전에 신앙고백을 했습니다. 우리가 이를 통해 중요한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은 신앙고백을 한 후에야 비로소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베드로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도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알기 전에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그가 만난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후에 말씀을 연구하고 기도하는 중에 복음의 비밀을 깊이 깨닫게 됩니다. 이를 통해 알아야할 것은 무엇입니까? 신앙고백은 신앙의 완성이 아니라 실상 신앙고백은 신앙의 출발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신앙고백을 했다고 다 된 줄로 생각할 것이 아닙니다. 그때부터가 진짜 예수님을 배우고 알아가는 신앙의 출발일 뿐입니다.
예수님은 신앙고백을 한 베드로에게 그리고 제자들에게 비로소 복음을 말씀하셨을 뿐 아니라 비로소 제자의 길을 가르치셨습니다. 23절을 봅시다.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신앙고백은 예수님을 알아가는 삶의 출발점입니다. 예수님을 어떻게 알아갈 수 있습니까? 그것은 예수님을 따를 때 예수님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려면 어떻게 해야 힙니까? 예수님은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하셨습니다. 수박 겉핡기식으로 안다는 말이 있습니다. 수박은 겉과 속이 완전히 다릅니다. 그런데 수박의 겉만 보고 수박을 알았다하는 것은 수박을 피상적으로 겉으로만 알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아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 부인과 자기 십자가 없이는 예수님을 알아도 피상적으로 알게 됩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은 신앙고백을 한 그의 제자들을 자기 부인과 자기 십자가의 길 곧 제자의 길로 초청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자기 부인과 자기 십자가는 무엇입니까? 자기부인이란 구체적으로 말씀에 순종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말씀에 순종하려면 이기적이고 감정적이고 게으르고 악한 자기를 부인해야 합니다. 자기중심적이고 자기영광과 자기자랑을 추구하는 자기를 부인해야 합니다. 자기부인은 궁극적으로 자기 십자가를 지기 위함입니다. 자기를 부인하지 않고는 자기 십자가를 질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왜 자기 십자가라고 할까요? 십자가는 자기가 아닌 다른 사람이 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에게 자기 십자가는 인류의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 죽는 것이었습니다. 이 십자가는 다른 사람이 질 수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이 져야하는 자기 십자가였습니다. 여러분들과 같은 학생들에게는 어떤 십자가가 있습니까? 공부의 십자가가 있습니다. 그런데 내가 해야할 공부를 누가 대신해 줄 수 있으면 좋겠는데, 누가 대신 시험을 봐주면 좋겠는데 그렇게 할 수 있나요?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해야 할 공부고 내가 치러야할 시험입니다. 그것을 누가 대신해 주는 것을 세상에서는 부정행위라고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고 특혜로 대학에 입학하게 되면 부정입학이라고 합니다. 여러분의 인생을 누가 대신 살아줄 수 없습니다. 내게 주신 삶을 스스로 개척하며 살아내야 하는 것이 바로 자기 십자가입니다. 그런데 자기 십자가 중에서도 우리가 반드시 깨달아야 하고 그리고 반드시 짊어져야할 십자가가 있습니다. 그것은 사명의 십자가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소명이라고 부릅니다. 그것이 중요한 이유는 그것은 하나님이 내게 주신 특별한 자기 십자가이기 때문입니다. 이 십자가를 발견하고 이 십자가를 질 때 진정한 나의 존재의미, 내 존재의 가치와 정체성을 발견할 수 있고 그때에만 우리는 참된 행복을 맛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은 자기 십자가를 발견하셨나요? 자기 십자가를 발견한 사람은, 자기 십자가를 지기로 결심한 사람은 자연스럽게 자기를 부인하게 됩니다. 그렇기에 자기 부인은 자기 십자가를 향합니다. 우리 JBF 친구들이 자기 십자가를 발견하고 자기 십자가를 짊어지기 위해 지금부터 자기를 부인하고 준비하는 축복이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드립니다.
28-36절은 변화산 사건을 다루고 있습니다.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님이 기도하실 때에 예수님의 용모가 변화되고 그 옷이 희어져 광채가 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 예수님이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에 대해 하시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황홀경에 빠져 그들이 하시는 말씀을 듣지 않고 여기가 좋사오니 여기에 초막을 짓고 살고 싶다고 말합니다. 이렇듯 베드로를 포함해서 예수님의 제자들은 여전히 예수님을 따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이런 그들에게 하나님은 구름 가운데 나타나셔서 “너희는 저희 말을 들으라”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다시한번 신앙고백의 핵심이 무엇인지를 배울 수 있습니다. 신앙고백은 입술의 고백이 아니라 삶의 고백이라는 것입니다. 삶의 고백이 되기 위해서 가장 먼저 해야할 일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말씀을 듣는다는 것은 곧 이 말씀을 하신 예수님을 믿는 것이요 그의 말씀을 순종하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는 신앙고백이 얼마나 중요한지 그리고 왜 중요한지를 배웠습니다. 또한 신앙고백이 신앙의 완성이 아니라 신앙의 출발에 불과하며 자기부인과 자기 십자가를 지며 예수님을 따르는 가운데 우리의 신앙고백이 완성됨을 배웠습니다.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들으신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마16:17) 예수님을 하나님의 그리스도로 알고 고백할 수 있는 것, 그것은 복중에 복입니다. 그것은 은혜 위에 은혜입니다. 그러나 이 복은 베드로가 잘 나서 똑똑해서 받은 복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이것조차도 다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고 예수님을 따를 수 있는 모든 일들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가능합니다. 우리가 구할 때 꾸짖지 아니하시고 후히 주시는 이 하나님께서, 하늘에게 계신 우리 아버지께서 예수님을 바르게 알고 신앙고백할 수 있는 복을 우리 모두에게 허락해 주시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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