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누가복음 제 12 강 죄 사함과 사랑(눅7:36-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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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누가복음 제 12 강
말씀 | 누가복음 7:36-50
요절 | 누가복음 7:47
죄 사함과 사랑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그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그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
오늘 말씀은 예수님께 향유를 부은 여인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녀는 자신의 모든 것을 다해 예수님께 자신의 사랑과 감사를 표현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녀의 마음을 다 받아주셨고 그녀에게 죄사함과 구원을 선포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바리새인 시몬은 그녀를 받아 주신 예수님을 판단하고 또 그녀를 정죄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영적으로 무지한 그에게 죄사함과 사랑의 비밀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우리도 이 비밀을 깨닫고 예수님을 이전보다 더욱 사랑할 수 있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예수님이 가버나움에 가셨을 때 한 바리새인이 예수님을 식사에 초청했습니다. 당시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안식일법을 어기고 세리와 죄인들과 친하게 지낸다고 비난하고 미워했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이 바리새인에게 식사 초청을 받은 일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비록 평소 그를 비판하고 대적하던 부류의 사람이지만 그의 초청에 흔쾌히 응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이처럼 그를 영접하는 자나 배척하는 자나 그 누구라도 친구가 되길 원하셨고 하나님 나라 복음을 나누길 기뻐하셨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을 초청한 한 바리새인은 예수님을 누구라고 생각했을까요? 그리고 예수님을 왜 식사에 초청한 것일까요? 39절 말씀을 봅시다. “예수를 청한 바리새인이 그것을 보고 마음에 이르되 이 사람이 만일 선지자라면 자기를 만지는 이 여자가 누구며 어떠한 자 곧 죄인인 줄을 알았으리라 하거늘” 우리는 그의 말을 통해 그가 예수님을 혹시 선지자가 아닐까 라고 생각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다고 그는 예수님을 선지자로 대우하지는 않았습니다. 이는 예수님이 그에 대해 하신 말씀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44절로 46절을 봅시다. “44. 그 여자를 돌아보시며 시몬에게 이르시되 이 여자를 보느냐 내가 네 집에 들어올 때 너는 내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아니하였으되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그 머리털로 닦았으며 45. 너는 내게 입맞추지 아니하였으되 그는 내가 들어올 때로부터 내 발에 입맞추기를 그치지 아니하였으며 46. 너는 내 머리에 감람유도 붓지 아니하였으되 그는 향유를 내 발에 부었느니라” 예수님이 그에 대해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44절을 보면 내가 네 집에 들어올 때 너는 내 발을 씻을 물도 주지 아니하였으되 45절을 보면 너는 내게 입맞추지지 아니하였으되 46절을 보면 너는 내 머리에 감람유도 붓지 아니하였으되 우리는 이를 통해 바리새인이 예수님을 식사에 초청하기는 했지만 예수님을 선지자는커녕 귀빈 중에 하나로도 대우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왜 그는 예수님을 식사에 초청한 것입니까? 이는 예수님이 백성들이 놀라고 칭송하는대로 과연 선지자인가 알아보고자 한 것입니다. 한마디로 그는 예수님을 만나고 그를 통해 배우고자 한 것이 아니라 그를 판단하고 시험하고자 한 것입니다. 그렇기에 비록 예수님이 식사초청을 받으시긴 했지만 그 자리가 그렇게 편히 밥을 먹을 수 있는 자리가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한 바리새인의 집에서 불편한 식사을 하고 계신 예수님께 더 불편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37절로 38절을 봅시다. “37. 그 동네에 죄를 지은 한 여자가 있어 예수께서 바리새인의 집에 앉아 계심을 알고 향유 담은 옥합을 가지고 와서 38. 예수의 뒤로 그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닦고 그 발에 입맞추고 향유를 부으니” 그때 한 여인이 예수님의 뒤로 그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셨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그친 것이 아니라 자기 머리털로 눈물을 닦고 그 발에 입을 맞추고 향유를 붓는 것이었습니다. 너무나 갑작스럽게 일어난 일이라 아무도 이 여인을 말릴 새가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녀는 지은 죄가 있어 그 동네에서 죄인으로 손가락질을 받던 여인이었습니다. 이런 일이 예수님을 초청한 한 바리새인의 집에서 일어난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상황에 대해 가장 당황스럽고 또 미안해야할 사람은 누구입니까? 당연히 예수님을 초청한 바리새인입니다. 그런데 그에게는 조금도 그런 마음이 없었습니다. 그는 도리어 이 여인이 누구인지를 알아보지 못하는 예수님을 정죄하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39절을 다시한번 읽겠습니다. “예수를 청한 바리새인이 그것을 보고 마음에 이르되 이 사람이 만일 선지자라면 자기를 만지는 이 여자가 누구며 어떠한 자 곧 죄인인 줄을 알았으리라 하거늘” 그런데 예수님은 이런 그의 마음을 다 알고 계셨습니다. 모르면 몰라도 그 마음을 통찰하시는 예수님은 이런 그의 마음에 대해 매우 불쾌하고 화가 나셔야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를 전혀 그렇게 대하지 않으십니다. 도리어 이런 바리새인을 긍휼이 여기시고 그가 향유를 부은 여인을 좀 더 잘 이해할 수 있도록 그리고 예수님이 왜 그녀의 모든 것을 받아주셨는지를 가르쳐 주기 위해 한 비유를 말씀해 주십니다.
40절로 43절을 봅시다. “40.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시몬아 내가 네게 이를 말이 있다 하시니 그가 이르되 선생님 말씀하소서 41.이르시되 빚 주는 사람에게 빚진 자가 둘이 있어 하나는 오백 데나리온을 졌고 하나는 오십 데나리온을 졌는데 42.갚을 것이 없으므로 둘 다 탕감하여 주었으니 둘 중에 누가 그를 더 사랑하겠느냐 43.시몬이 대답하여 이르되 내 생각에는 많이 탕감함을 받은 자니이다 이르시되 네 판단이 옳다 하시고” 본문에 나오는 한 바리새인의 이름이 시몬인 것 같습니다. 누가복음을 기록한 누가마저도 그의 이름을 시몬이라 언급하지 않고 한 바리새인이라 썼는데 예수님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셨습니다. 우리 같으면 시몬이 너무 얄미워서 “야, 시몬 너 나를 어떻게 그딴 식으로 생각할 수 있어”라고 화를 내고 쏘아 붙이며 말을 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시몬에게 그렇게 무례히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도리어 그의 모든 생각을 아시면서도 그를 아주 다정하게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그가 진심으로 잘못된 편견과 판단에서 벗어나길 바라시며 이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빚 주는 사람에게 빚 진자가 둘이 있는데 하나는 오백 데나리온 빚을 졌고 다른 하나는 오십 데나리온 빚을 졌습니다. 데나리온는 당시 노동자 한 사람의 하루 품삯이었습니다. 만일 노동자의 하루 품삯을 10만원이라 한다면 오백 데나리온은 오천만원, 오십 데나리온은 오백만원에 해당됩니다. 그런데 둘 다 빚을 갚고자 해도 갚을 길이 없자 이를 딱하게 여겨 빚 주는 사람이 이 둘의 빚을 모두 탕감해 주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둘 중에 누가 그를 더 사랑하게 될까요? 시몬은 이 질문에 “내 생각에는 많이 탕감함을 받은 자니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예수님은 이 대답을 듣고 그의 판단이 옳다고 해 주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시몬에게 하신 이 비유의 말씀을 통해 예수님께 향유를 부은 여인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 동네에서는 그녀를 모두 죄지은 한 여인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녀가 지은 죄가 무엇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다만 많은 학자들은 그녀가 부정한 죄를 지었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그녀는 그로인해 그 동네에서 왕따를 당하고 있었습니다. 그 동네에서는 아무도 그녀와 상종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당연히 그녀는 누구를 초청하거나 초청을 받는 일이 없었습니다. 이런 그녀의 삶이 얼마나 힘들고 외롭고 고통스러웠겠습니다. 그 동네에서 유리인간 취급을 받을 뿐 아니라 실제로 사람들의 도움을 받지 못하므로 삶이 여러모로 많이 힘들 수 밖에 없었을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녀는 예수님이 자신과 같이 사람들에게 손가락질 당하던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가 되어 주시고 그들과 식사도 하신다는 말을 들은 것입니다. 이런 분이 계신다는 것이 그녀에게는 큰 기쁨이었고 고마움이었습니다. 그녀는 이런 예수님으로 인해 말로 다 할 수 없는 위로를 얻었고 삶의 새희망을 갖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녀가 그토록 감격하고 고마워하던 예수님이 그가 살던 동네에 오셨다는 이야기를 들은 것입니다. 그녀는 어떻게든 그녀의 고마운 마음을 예수님께 표현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 마음이 너무 큰 나머지 그녀는 예수님께 그동안 자신이 소중히 모아 놓은 향유를 붓기로 결심한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식사하시는 그 자리에 큰 용기를 내서 찾아가게 되었고 마침내 예수님을 보게 되었다는 감격이 너무나 커서 하염없이 눈물을 흘립니다. 아마도 그녀는 예수님의 발 아래서 그토록 많은 눈물을 흘릴줄 알지 못했을 것 같습니다. 그녀가 이 자리에 오기까지 그녀의 살아온 삶과 그녀의 감사한 그 마음을 아무도 알지 못했습니다. 사람들은 이런 그녀의 겉모습만 보고 죄 지은 여인이 저러고 있다고 판단할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녀의 모든 것을 아시고 그녀의 마음을 보시는 예수님은 그녀의 모든 것을 이해하셨고 그녀의 모든 것을 받아주셨습니다. 그로인해 사람들에게 판단을 받을지라도 예수님은 개의치 않으셨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만난 분들의 간증을 들어 보십시오. 그들의 공통점은 그들은 예수님을 만났을 때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는 것입니다. 왜 우는지도 모르고 많은 눈물을 흘렸다고 고백합니다. 이는 잘못 살아온 자신의 삶에 대한 회개의 눈물이요 이런 자신을 크신 사랑으로 용서해 주시고 받아 주시는 고마움의 눈물이라고 고백합니다. 저도 예수님을 만났을 때 너무나 감격해서 너무나 고마워서 많은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만큼 예수님을 만난 감격과 그 고마움은 실상 눈물 없이는 불가능할 만큼 벅차고 뜨거운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도 이런 눈물을 흘려 본 적이 있나요? 만일 여러분들에게 그런 눈물이 없었다면 그런 눈물을 달라고 반드시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도 향유를 부은 여인과 같이 뜨거운 눈물과 헌신으로 신앙생활하시는 분이 있는가 하며 바리새인 시몬처럼 예수님에게 씻을 물도 주지 않고 입도 맞추지 않고 감람유도 붙지 않는 인색한 마음, 무덤덤한 마음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 차이는 어디에서 오는 것입니까? 그것은 내가 오십 데나리온 빚 진 자라는 의식에서 오는 것입니다. 오십 데나리온 빚 진자는 오백 데니라온 빚 진자에 비해 적은 빚을 졌습니다. 그러니 오백 데나리온 빚 진자보다는 낫다는 의식을 갖을 수 있습니다. 너 나아가 오백 데나리온 빚 진자에게 어찌 그렇게 많은 빚을 졌는가 판단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바리새인 시몬의 의식이었습니다. 오백 데니라온 빚 진자와 오십 데나리온 빚진 자 둘 중에 누가 그를 더 사랑하겠느냐 예수님이 물으셨을 때 더 많이 빚진 자니이다라는 시몬의 대답에 비록 예수님이 옳다고 하셨지만 실상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더 많이 감사하는 자입니다. 내가 오백 데나리온 빚을 졌건 오십 데니라온 빚을 졌건 이 빚의 본질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 빚은 모두 갚을 수 없는 빚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빚의 본질입니다. 이 사실을 깨달을 때 우리는 빚을 탕감받은 은혜가 얼마나 큰 것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이것을 깊이 깨달은 자가 많이 감사하게 됩니다. 이것을 깊이 깨달은 자가 많이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감사의 깊이와 사랑의 깊이는 빚의 많고 적음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그것이 얼마나 큰 사랑인지를 깨닫는 인식의 깊이가 깊은가 얕은가의 차이입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께 향유를 부어 그 마음을 표현한 여인은 그 인식이 우물과 같이 깊었던 것이고 바리새인 시몬은 도랑물처럼 얕았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결론적으로 바리새인 시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47절을 봅시다.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그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그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 우리가 어떻게 향유를 부은 여인과 같이 예수님을 깊이 사랑할 수 있을까요? 그 비밀은 여기에 있습니다. 내가 얼마나 많은 죄를, 얼마나 큰 죄를 사함받은 죄인인가를 깨닫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전에는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체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딤전1:13-16).” 우리도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내가 얼마나 큰 죄인인지 내가 얼마나 많은 죄를 지었는지를 깊이 깨닫고 이런 나를 용서하신 예수님, 이런 나를 사랑하신 예수님을 향유를 부은 여인처럼 아주 많이 그리고 아주 깊이 사랑하고 그 사랑을 표현할 수 있길 기도합니다.
여러분, 죄사함의 은혜가 얼마나 큰 은혜인지 생각해 볼 수 있는 한 예화를 나누길 원합니다. 1943년 어느 가을 맑은 날, 피카소가 집 주위를 산책하다가, 버려진 고장 난 자전거 한대를 발견했습니다. 그는 버려진 자전거를 자기 집으로 가지고 가서 안장과 핸들을 떼버리고 안장에 핸들을 거꾸로 붙이고 그 이름을 ‘황소머리’라고 지었습니다. 그것이 얼마 전 유명한 프랑스의 화가인 피카소의 미공개 작품으로서 런던의 경매장에서 293억 원이라는 엄청난 가격에 팔렸습니다. 누군가에 의하여 버려진 고물 자전거,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았던 중고 자전거가 산책하던 화가 피카소를 만나자, 값싼 고물이 아니라 불후의 작품으로 탈바꿈을 하게 됐습니다. 우리는 죄로 인해 버려진 삶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이런 우리를 예수님이 찾아오셔서 죄사함을 주시고 천하보다 귀한 하나님의 걸작품으로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죄인에게 베푸신 하나님에 은혜입니다. 이 은혜를 받은 자는 이 은혜로 변화된 자는 자신의 옥합을 깨뜨려 주님을 사랑하고 섬기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온 마음으로 다해 당신께 감사와 사랑을 표현한 여인에게 죄사함과 구원을 선포하셨습니다. 이는 그녀의 눈물과 향유 때문이 아니라 그녀의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녀를 평안히 보내 주셨습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죄사함과 구원이 주는 하나님의 은혜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평안입니다. 그것은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입니다. 그것은 세상이 알 수도 없는 평안입니다. 그 평안을 맞본 자는 주님을 사랑합니다. 주님을 섬기고 헌신하면서 기뻐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JBF 친구들에게도 이러한 평안을 허락해 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드립니다.
말씀 | 누가복음 7:36-50
요절 | 누가복음 7:47
죄 사함과 사랑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그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그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
오늘 말씀은 예수님께 향유를 부은 여인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녀는 자신의 모든 것을 다해 예수님께 자신의 사랑과 감사를 표현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녀의 마음을 다 받아주셨고 그녀에게 죄사함과 구원을 선포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바리새인 시몬은 그녀를 받아 주신 예수님을 판단하고 또 그녀를 정죄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영적으로 무지한 그에게 죄사함과 사랑의 비밀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우리도 이 비밀을 깨닫고 예수님을 이전보다 더욱 사랑할 수 있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예수님이 가버나움에 가셨을 때 한 바리새인이 예수님을 식사에 초청했습니다. 당시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안식일법을 어기고 세리와 죄인들과 친하게 지낸다고 비난하고 미워했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이 바리새인에게 식사 초청을 받은 일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비록 평소 그를 비판하고 대적하던 부류의 사람이지만 그의 초청에 흔쾌히 응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이처럼 그를 영접하는 자나 배척하는 자나 그 누구라도 친구가 되길 원하셨고 하나님 나라 복음을 나누길 기뻐하셨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을 초청한 한 바리새인은 예수님을 누구라고 생각했을까요? 그리고 예수님을 왜 식사에 초청한 것일까요? 39절 말씀을 봅시다. “예수를 청한 바리새인이 그것을 보고 마음에 이르되 이 사람이 만일 선지자라면 자기를 만지는 이 여자가 누구며 어떠한 자 곧 죄인인 줄을 알았으리라 하거늘” 우리는 그의 말을 통해 그가 예수님을 혹시 선지자가 아닐까 라고 생각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다고 그는 예수님을 선지자로 대우하지는 않았습니다. 이는 예수님이 그에 대해 하신 말씀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44절로 46절을 봅시다. “44. 그 여자를 돌아보시며 시몬에게 이르시되 이 여자를 보느냐 내가 네 집에 들어올 때 너는 내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아니하였으되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그 머리털로 닦았으며 45. 너는 내게 입맞추지 아니하였으되 그는 내가 들어올 때로부터 내 발에 입맞추기를 그치지 아니하였으며 46. 너는 내 머리에 감람유도 붓지 아니하였으되 그는 향유를 내 발에 부었느니라” 예수님이 그에 대해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44절을 보면 내가 네 집에 들어올 때 너는 내 발을 씻을 물도 주지 아니하였으되 45절을 보면 너는 내게 입맞추지지 아니하였으되 46절을 보면 너는 내 머리에 감람유도 붓지 아니하였으되 우리는 이를 통해 바리새인이 예수님을 식사에 초청하기는 했지만 예수님을 선지자는커녕 귀빈 중에 하나로도 대우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왜 그는 예수님을 식사에 초청한 것입니까? 이는 예수님이 백성들이 놀라고 칭송하는대로 과연 선지자인가 알아보고자 한 것입니다. 한마디로 그는 예수님을 만나고 그를 통해 배우고자 한 것이 아니라 그를 판단하고 시험하고자 한 것입니다. 그렇기에 비록 예수님이 식사초청을 받으시긴 했지만 그 자리가 그렇게 편히 밥을 먹을 수 있는 자리가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한 바리새인의 집에서 불편한 식사을 하고 계신 예수님께 더 불편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37절로 38절을 봅시다. “37. 그 동네에 죄를 지은 한 여자가 있어 예수께서 바리새인의 집에 앉아 계심을 알고 향유 담은 옥합을 가지고 와서 38. 예수의 뒤로 그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닦고 그 발에 입맞추고 향유를 부으니” 그때 한 여인이 예수님의 뒤로 그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셨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그친 것이 아니라 자기 머리털로 눈물을 닦고 그 발에 입을 맞추고 향유를 붓는 것이었습니다. 너무나 갑작스럽게 일어난 일이라 아무도 이 여인을 말릴 새가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녀는 지은 죄가 있어 그 동네에서 죄인으로 손가락질을 받던 여인이었습니다. 이런 일이 예수님을 초청한 한 바리새인의 집에서 일어난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상황에 대해 가장 당황스럽고 또 미안해야할 사람은 누구입니까? 당연히 예수님을 초청한 바리새인입니다. 그런데 그에게는 조금도 그런 마음이 없었습니다. 그는 도리어 이 여인이 누구인지를 알아보지 못하는 예수님을 정죄하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39절을 다시한번 읽겠습니다. “예수를 청한 바리새인이 그것을 보고 마음에 이르되 이 사람이 만일 선지자라면 자기를 만지는 이 여자가 누구며 어떠한 자 곧 죄인인 줄을 알았으리라 하거늘” 그런데 예수님은 이런 그의 마음을 다 알고 계셨습니다. 모르면 몰라도 그 마음을 통찰하시는 예수님은 이런 그의 마음에 대해 매우 불쾌하고 화가 나셔야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를 전혀 그렇게 대하지 않으십니다. 도리어 이런 바리새인을 긍휼이 여기시고 그가 향유를 부은 여인을 좀 더 잘 이해할 수 있도록 그리고 예수님이 왜 그녀의 모든 것을 받아주셨는지를 가르쳐 주기 위해 한 비유를 말씀해 주십니다.
40절로 43절을 봅시다. “40.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시몬아 내가 네게 이를 말이 있다 하시니 그가 이르되 선생님 말씀하소서 41.이르시되 빚 주는 사람에게 빚진 자가 둘이 있어 하나는 오백 데나리온을 졌고 하나는 오십 데나리온을 졌는데 42.갚을 것이 없으므로 둘 다 탕감하여 주었으니 둘 중에 누가 그를 더 사랑하겠느냐 43.시몬이 대답하여 이르되 내 생각에는 많이 탕감함을 받은 자니이다 이르시되 네 판단이 옳다 하시고” 본문에 나오는 한 바리새인의 이름이 시몬인 것 같습니다. 누가복음을 기록한 누가마저도 그의 이름을 시몬이라 언급하지 않고 한 바리새인이라 썼는데 예수님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셨습니다. 우리 같으면 시몬이 너무 얄미워서 “야, 시몬 너 나를 어떻게 그딴 식으로 생각할 수 있어”라고 화를 내고 쏘아 붙이며 말을 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시몬에게 그렇게 무례히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도리어 그의 모든 생각을 아시면서도 그를 아주 다정하게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그가 진심으로 잘못된 편견과 판단에서 벗어나길 바라시며 이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빚 주는 사람에게 빚 진자가 둘이 있는데 하나는 오백 데나리온 빚을 졌고 다른 하나는 오십 데나리온 빚을 졌습니다. 데나리온는 당시 노동자 한 사람의 하루 품삯이었습니다. 만일 노동자의 하루 품삯을 10만원이라 한다면 오백 데나리온은 오천만원, 오십 데나리온은 오백만원에 해당됩니다. 그런데 둘 다 빚을 갚고자 해도 갚을 길이 없자 이를 딱하게 여겨 빚 주는 사람이 이 둘의 빚을 모두 탕감해 주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둘 중에 누가 그를 더 사랑하게 될까요? 시몬은 이 질문에 “내 생각에는 많이 탕감함을 받은 자니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예수님은 이 대답을 듣고 그의 판단이 옳다고 해 주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시몬에게 하신 이 비유의 말씀을 통해 예수님께 향유를 부은 여인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 동네에서는 그녀를 모두 죄지은 한 여인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녀가 지은 죄가 무엇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다만 많은 학자들은 그녀가 부정한 죄를 지었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그녀는 그로인해 그 동네에서 왕따를 당하고 있었습니다. 그 동네에서는 아무도 그녀와 상종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당연히 그녀는 누구를 초청하거나 초청을 받는 일이 없었습니다. 이런 그녀의 삶이 얼마나 힘들고 외롭고 고통스러웠겠습니다. 그 동네에서 유리인간 취급을 받을 뿐 아니라 실제로 사람들의 도움을 받지 못하므로 삶이 여러모로 많이 힘들 수 밖에 없었을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녀는 예수님이 자신과 같이 사람들에게 손가락질 당하던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가 되어 주시고 그들과 식사도 하신다는 말을 들은 것입니다. 이런 분이 계신다는 것이 그녀에게는 큰 기쁨이었고 고마움이었습니다. 그녀는 이런 예수님으로 인해 말로 다 할 수 없는 위로를 얻었고 삶의 새희망을 갖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녀가 그토록 감격하고 고마워하던 예수님이 그가 살던 동네에 오셨다는 이야기를 들은 것입니다. 그녀는 어떻게든 그녀의 고마운 마음을 예수님께 표현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 마음이 너무 큰 나머지 그녀는 예수님께 그동안 자신이 소중히 모아 놓은 향유를 붓기로 결심한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식사하시는 그 자리에 큰 용기를 내서 찾아가게 되었고 마침내 예수님을 보게 되었다는 감격이 너무나 커서 하염없이 눈물을 흘립니다. 아마도 그녀는 예수님의 발 아래서 그토록 많은 눈물을 흘릴줄 알지 못했을 것 같습니다. 그녀가 이 자리에 오기까지 그녀의 살아온 삶과 그녀의 감사한 그 마음을 아무도 알지 못했습니다. 사람들은 이런 그녀의 겉모습만 보고 죄 지은 여인이 저러고 있다고 판단할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녀의 모든 것을 아시고 그녀의 마음을 보시는 예수님은 그녀의 모든 것을 이해하셨고 그녀의 모든 것을 받아주셨습니다. 그로인해 사람들에게 판단을 받을지라도 예수님은 개의치 않으셨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만난 분들의 간증을 들어 보십시오. 그들의 공통점은 그들은 예수님을 만났을 때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는 것입니다. 왜 우는지도 모르고 많은 눈물을 흘렸다고 고백합니다. 이는 잘못 살아온 자신의 삶에 대한 회개의 눈물이요 이런 자신을 크신 사랑으로 용서해 주시고 받아 주시는 고마움의 눈물이라고 고백합니다. 저도 예수님을 만났을 때 너무나 감격해서 너무나 고마워서 많은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만큼 예수님을 만난 감격과 그 고마움은 실상 눈물 없이는 불가능할 만큼 벅차고 뜨거운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도 이런 눈물을 흘려 본 적이 있나요? 만일 여러분들에게 그런 눈물이 없었다면 그런 눈물을 달라고 반드시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도 향유를 부은 여인과 같이 뜨거운 눈물과 헌신으로 신앙생활하시는 분이 있는가 하며 바리새인 시몬처럼 예수님에게 씻을 물도 주지 않고 입도 맞추지 않고 감람유도 붙지 않는 인색한 마음, 무덤덤한 마음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 차이는 어디에서 오는 것입니까? 그것은 내가 오십 데나리온 빚 진 자라는 의식에서 오는 것입니다. 오십 데나리온 빚 진자는 오백 데니라온 빚 진자에 비해 적은 빚을 졌습니다. 그러니 오백 데나리온 빚 진자보다는 낫다는 의식을 갖을 수 있습니다. 너 나아가 오백 데나리온 빚 진자에게 어찌 그렇게 많은 빚을 졌는가 판단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바리새인 시몬의 의식이었습니다. 오백 데니라온 빚 진자와 오십 데나리온 빚진 자 둘 중에 누가 그를 더 사랑하겠느냐 예수님이 물으셨을 때 더 많이 빚진 자니이다라는 시몬의 대답에 비록 예수님이 옳다고 하셨지만 실상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더 많이 감사하는 자입니다. 내가 오백 데나리온 빚을 졌건 오십 데니라온 빚을 졌건 이 빚의 본질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 빚은 모두 갚을 수 없는 빚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빚의 본질입니다. 이 사실을 깨달을 때 우리는 빚을 탕감받은 은혜가 얼마나 큰 것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이것을 깊이 깨달은 자가 많이 감사하게 됩니다. 이것을 깊이 깨달은 자가 많이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감사의 깊이와 사랑의 깊이는 빚의 많고 적음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그것이 얼마나 큰 사랑인지를 깨닫는 인식의 깊이가 깊은가 얕은가의 차이입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께 향유를 부어 그 마음을 표현한 여인은 그 인식이 우물과 같이 깊었던 것이고 바리새인 시몬은 도랑물처럼 얕았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결론적으로 바리새인 시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47절을 봅시다.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그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그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 우리가 어떻게 향유를 부은 여인과 같이 예수님을 깊이 사랑할 수 있을까요? 그 비밀은 여기에 있습니다. 내가 얼마나 많은 죄를, 얼마나 큰 죄를 사함받은 죄인인가를 깨닫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전에는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체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딤전1:13-16).” 우리도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내가 얼마나 큰 죄인인지 내가 얼마나 많은 죄를 지었는지를 깊이 깨닫고 이런 나를 용서하신 예수님, 이런 나를 사랑하신 예수님을 향유를 부은 여인처럼 아주 많이 그리고 아주 깊이 사랑하고 그 사랑을 표현할 수 있길 기도합니다.
여러분, 죄사함의 은혜가 얼마나 큰 은혜인지 생각해 볼 수 있는 한 예화를 나누길 원합니다. 1943년 어느 가을 맑은 날, 피카소가 집 주위를 산책하다가, 버려진 고장 난 자전거 한대를 발견했습니다. 그는 버려진 자전거를 자기 집으로 가지고 가서 안장과 핸들을 떼버리고 안장에 핸들을 거꾸로 붙이고 그 이름을 ‘황소머리’라고 지었습니다. 그것이 얼마 전 유명한 프랑스의 화가인 피카소의 미공개 작품으로서 런던의 경매장에서 293억 원이라는 엄청난 가격에 팔렸습니다. 누군가에 의하여 버려진 고물 자전거,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았던 중고 자전거가 산책하던 화가 피카소를 만나자, 값싼 고물이 아니라 불후의 작품으로 탈바꿈을 하게 됐습니다. 우리는 죄로 인해 버려진 삶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이런 우리를 예수님이 찾아오셔서 죄사함을 주시고 천하보다 귀한 하나님의 걸작품으로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죄인에게 베푸신 하나님에 은혜입니다. 이 은혜를 받은 자는 이 은혜로 변화된 자는 자신의 옥합을 깨뜨려 주님을 사랑하고 섬기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온 마음으로 다해 당신께 감사와 사랑을 표현한 여인에게 죄사함과 구원을 선포하셨습니다. 이는 그녀의 눈물과 향유 때문이 아니라 그녀의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녀를 평안히 보내 주셨습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죄사함과 구원이 주는 하나님의 은혜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평안입니다. 그것은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입니다. 그것은 세상이 알 수도 없는 평안입니다. 그 평안을 맞본 자는 주님을 사랑합니다. 주님을 섬기고 헌신하면서 기뻐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JBF 친구들에게도 이러한 평안을 허락해 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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