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누가복음 제11강 청년아 일어나라(눅7:1-17)
페이지 정보

본문
2017년 누가복음 제11강
말씀 / 누가복음 7:1-17
요절 / 누가복음 7:14
청년아 일어나라
“가까이 가서 그 관에 손을 대시니 멘 자들이 서는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시매”(14)
Happy Ester! 성경대로 우리 죄를 위해 죽으시고 장사지낸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신 부활의 주님을 높여 찬양합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심으로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고 하나님 나라를 향한 산 소망이 있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주님께서 이번 부활절에도 우리 안에 부활이요 생명으로 강하게 임하여 주시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오늘 말씀의 제목은 “청년아 일어나라”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예수님은 병들어 죽어가는 백부장의 종을 고치십니다. 죽은 나인성 과부의 외아들을 살리십니다. 이 사건들을 통해 예수님은 부활이요 생명이신 당신의 영광을 나타내셨습니다. 우리도 오늘 메시지 가운데 그의 말씀을 들을 수 있기 기도합니다. 그리하여 우리도 죽음의 자리에서 일어나 생명의 빛을 발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게 되기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제1장 백부장의 종을 살리신 예수님 (1-10)
1절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모든 말씀을 백성들에게 들려주시기를 마치신 후에 가버나움으로 들어가셨습니다. 그때 유대인의 장로 몇 사람이 예수님을 찾아와 간청했습니다. “어떤 백부장의 사랑하는 종이 있는데 오셔서 그 종을 구해 주십시오. 이 일을 하시는 것이 이 사람에게는 합당합니다. 저가 우리 민족을 사랑하고 또한 우리를 위하여 회당을 지어 주었습니다.” 이는 당시의 상황에 비추어 볼 때 매우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무엇이 그토록 놀라운 일입니까?
첫째로 백부장이 종을 사랑했다는 것이 놀라운 일입니다. 그 당시 종은 사람대접을 받지 못했습니다. 당시 세 가지 종류의 소유가 있었는데 첫째는 물건이요 둘째는 살아있는 가축이요 셋째는 말하는 물건, 즉 종이었다고 합니다. 배가 풍랑을 만나면 배를 가볍게 하기 위해서 제일 먼저 종을 버렸다고 합니다. 이렇게 종은 물건만도 못한 대접을 받았습니다. 당시 수많은 종들이 늙고 병들면 주인에게 버림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본문에 나오는 백부장은 병들어 쓸모없이 된 종을 사랑했습니다. 그를 살리기 위해 유대인의 장로들에게 부탁을 하고 그들을 예수님께 보내서 이 종을 고쳐주시도록 간청합니다. 병든 종에 대한 백부장의 이와 같은 사랑은 당시 시대상황을 고려할 때 매우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둘째로 유대인들이 이 일을 하시는 것이 이 사람에 합당하다고 말한 것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로마의 지배를 받고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로마인들은 유대인들에게는 철천지원수였습니다. 그들은 결코 부탁하고 부탁을 받을 수 있는 그런 관계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의 장로들이 철천지원수인 로마의 백부장의 부탁을 받고 예수님께 간청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무슨 대단한 일도 아니고 그의 병든 종을 고쳐달라는 부탁을 하기 위해 찾아온 것입니다. 유대인의 장로들은 그렇게 하는 것이 합당하다고 그의 편을 들어 줍니다. 이는 당시 자비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전쟁과 죽음이, 압제와 약탈이 난무하던 잔혹한 땅에 피어난 한 송이 꽃과 같이 참으로 아름다운 이야기였던 것입니다.
당시 대부분의 로마의 백부장들은 탐욕스럽고 잔인하여 유대인들에게 많은 반감을 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본문에 나오는 백부장은 병든 종을 사랑할 만큼 참으로 인간애가 넘치는 훌륭한 인격의 소유자였던 것입니다. 이런 백부장에 관해 들으신 예수님의 마음이 얼마나 기쁘셨을까요? 예수님은 가시던 길을 멈추고 지체하지 않으시고 기쁜 마음으로 백부장의 집을 향해 가셨습니다. 그런데 그의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다다랐을 때에 백부장이 벗들을 보내 그의 말을 전했습니다. 6~8절을 보십시오. “6.예수께서 함께 가실새 이에 그 집이 멀지 아니하여 백부장이 벗들을 보내어 이르되 주여 수고하시지 마옵소서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7.그러므로 내가 주께 나아가기도 감당하지 못할 줄을 알았나이다 말씀만 하사 내 하인을 낫게 하소서 8.나도 남의 수하에 든 사람이요 내 아래에도 병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
백부장은 예수님이 그의 집에 들어오심을 감당치 못하겠다고 합니다. 이는 이방인의 집에 들어가면 부정해진다고 믿는 유대인들의 어떤 종교적인 관습을 생각해서 예수님을 배려하는 차원에서 한 말이 아닙니다. 이는 그가 예수님을 황제와 같이 자신의 집에 모실 수 없을 만큼 아주 큰 분으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병들어 죽어가고 있는 그의 종은 어찌해야 한단 말입니까? 그는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는 아주 다급한 상황이 되었습니다. 아마도 그는 예수님이 그의 집에 오시는 동안 이 문제에 대해 고민하고 또 고민했던 것 같습니다. 그때 그의 안에 놀라운 생각이 떠오릅니다. 이는 예수님이 오시지 않고 말씀만 하셔도 내 종이 나을 수 있는 믿음의 생각입니다.
백부장의 믿음의 고백을 들으신 예수님의 반응은 어떠하셨습니까? 9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들으시고 그를 놀랍게 여겨 돌이키사 따르는 무리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에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노라 하시니” 그의 믿음은 말씀의 권세를 믿는 믿음이었습니다. 이는 이스라엘 중에서도 만나보지 못한 참으로 놀라운 믿음이었습니다. 10절을 보십시오. 보냈던 사람이 집으로 돌아가 보니 종이 이미 나아 있었습니다. 우리는 이를 통해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는 주님이 놀라시면 그 즉시 기적이 일어난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능력이 부족해서 우리를 돕지 못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의 믿음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 시간도 우리에게 믿음을 찾고 계십니다. 어떤 믿음을 찾고 계십니까? 백부장과 같이 말씀을 믿는 믿음입니다.
제2장 과부의 외아들을 살리신 예수님 (11-17)
예수님은 가버나움에서 백부장의 종을 고치신 후에 나인이란 성으로 가셨습니다. 그때 제자와 많은 무리가 동행했습니다. 병들어 죽어가던 백부장의 하인을 살린 후에 제자들과 무리들은 예수님 안에 있는 생명으로 충만했습니다. 나인으로 들어가는 예수님의 행렬은 충만한 생명의 행렬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성문에 가까이 이르셨을 때에 그 성에서 나오는 한 행렬을 만납니다. 그 행렬은 한 과부의 외아들을 장사하는 장례행렬이었습니다. 이는 깊은 슬픔의 행렬이요 죽음의 행렬이었습니다. 이 두 행렬이 나인성의 입구에서 만난 것입니다. 생명과 죽음이 만난 것입니다. 부모가 죽으면 무덤에 묻고 자식이 죽으면 가슴에 묻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것도 하나밖에 없는 외아들의 죽음이라니, 외아들의 죽음을 당한 과부 어머니의 슬피우는 통곡소리는 듣는 모든 사람들의 심장을 울리고 온 마을을 울리고 있었습니다. 이 안타까운 소식을 듣고 나인성에 많은 사람들이 이 장례행렬을 따르며 과부의 슬픔에 동참하고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모였지만 이 과부의 슬픔을 위로할 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 과부를 위로하실 수 있는 한 분이 계셨습니다. 그 분은 바로 예수님이셨습니다.
13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그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녀의 슬픔을 보셨고 그 슬픔에 동참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누구도 감히 과부 어머니에게 할 수 없었던 말씀을 하셨습니다. “울지 말라” 누가 이 과부에게 이런 말을 할 수 있단 말입니까? 외아들은 그녀에게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만큼 사랑하던 아들이었습니다. 그녀에게는 살아야할 이유였고 유일한 소망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외아들이 죽었습니다. 실상 아들과 함께 그녀도 죽은 것입니다. 그녀의 소망도 죽은 것입니다. 이런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우는 일 밖에 없었습니다. 만일 이렇게 울지 않으면 그녀는 미처 버릴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녀에게 “마음껏 울라. 슬픔을 다 쏟아낼 때까지 울라. 눈물이 마를 때까지 울라.”고 말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녀에게 “울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왜 “울지 말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이는 그녀를 불쌍히 여기사 죽은 아들을 살리고자 하셨기 때문입니다. 이는 죽은 아들을 살리시겠다는 예수님의 선언이요 의지였습니다. 그렇기에 “울지 말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단순히 그녀를 위로하기 위한 말씀이 아니라 아들을 살려서 그녀의 슬픔과 고통의 근원을 없애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과연 누가 이 예수님처럼 이런 말씀을 하실 수 있단 말입니까? 이는 오직 생명의 창조자이신 예수님만이 하실 수 있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 하신 후에 하신 일이 무엇입니까? 14절을 보십시오. “가까이 가서 그 관에 손을 대시니 멘 자들이 서는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시매” 예수님은 가까이 가서 그 관에 손을 대셨습니다. 그러자 장례행렬이 멈춰 섰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죽음의 행렬을 멈춰 세우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세상의 영웅호걸과 황제와 재상들이 모두 죽었습니다. 우리의 할아버지와 할머니들이 죽었습니다. 우리의 아버지와 어머니들이 죽었습니다. 혹은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도 그들이 갔던 길을 따라가야 합니다. 우리는 이렇게 죽음의 행렬에 서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어느 누가 이 죽음의 행렬을 멈출 수 있단 말입니까? 이 세상에 나를 포함해서 모든 사람들은 이 죽음의 길을 가고 있습니다. 무덤을 향해 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길을 멈추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죽은 자를 향해 말씀하셨습니다.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그러자 죽었던 자가 살아났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죽음마저도 순종한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그를 살리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첫째로 그의 삶의 회복하기 위함입니다. 청년이 왜 죽었습니까? 그가 사고로 죽었는지 혹은 병으로 죽었는지 혹은 우울증에 빠져 자살을 했는지 혹은 몹쓸 죄를 짓다 죽었는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죽음으로 그의 삶은 파괴되었고 회복이 불가능한 상태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죽음의 실존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청년을 살리시므로 그의 파괴된 삶을, 빼앗긴 삶을, 잃어버린 삶을 회복하여 주셨습니다. 우리의 삶에 가장 밑바닥은 어디입니까? 가장 최악일 때는 언제입니까? 그것은 죽음입니다. 죽음보다 더 밑바닥은 없습니다. 죽음보다 더 최악은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밑바닥에서, 그 최악에서 우리의 삶의 회복을 명하시는 분이십니다. 주님이 명하시면 우리의 삶은 살아납니다. 우리의 꿈과 미래가 회복됩니다. 이는 예수님은 내 삶의 창조자시요 생명의 부여자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내 삶의 회복을 위해 이 땅 위에 오신 생명의 주님을 높여 찬양합니다.
둘째로 그를 살려 과부 어머니에게 주시고자 하심입니다. 이는 깨어진 관계의 회복을 의미합니다. 어머니를 떠난 아들, 그것도 죽음으로 떠난 아들, 이는 더 이상 회복할 수 없는 관계, 즉 깨어진 관계를 의미합니다. 제가 24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습니다. 저는 그때 아버지를 떠나보내며 참으로 많은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 이유는 아버지와 해결하지 못한 깨어진 관계의 문제 때문이었습니다. 제가 아버지에게 미안하다 말하고 싶은데 사랑한다 말하고 싶은데 죽은 아버지는 이를 들으실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후회와 아픔을 가슴에 묻고 떠나보내야 하는 슬픔은 산자의 몫이라는 것을 그때 처음 깨달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죽은 청년을 살려 과부 어머니에게 주셨습니다. 과부 어머니와 아들의 깨어진 관계를 회복해 주셨습니다. 이와같이 예수님의 말씀으로 거듭난 자는 깨어진 관계가 회복됩니다. 어그러진 관계가 회복됩니다. 이것이 과부 어머니와 청년에게 주고자 하신 예수님의 선물이었습니다.
셋째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게 하기 위함입니다. 죽은 청년이 살아나자 이를 본 사람들의 반응이 어떠했습니까? 16절을 보십시오. “모든 사람이 두려워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이르되 큰 선지자가 우리 가운데 일어나셨다 하고 또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셨다 하더라” 이 청년이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 위해 한 일이 무엇입니까? 이를 위해 그가 성경공부를 열심히 했습니까? 일대일을 열심히 했습니까? 아니면 구제와 봉사를 열심히 했습니까? 실상 그가 한 일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가 한 일은 오직 단 하나 예수님의 말씀을 들고 일어난 것입니다. 우리는 이를 통해 하나님께 영광 돌린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것은 어떠한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가 죽었다가 살아나는 것입니다. 내가 회개하고 변화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됩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무슨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며 이는 큰 오해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은 우리가 그를 믿는 것입니다. 그를 기뻐하는 것입니다. 그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자로 우리 가 죽고 거듭나는 것입니다.
독일 교포 2세로서 세계적인 바이올리니스트들의 사사를 받으며 세계 최고의 바이올리니스트로 각광을 받고 있는 박지혜 자매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녀는 성공에 대한 집착과 완벽한 음악에 대한 중압감에 스스로 헤어나올 수 없는 우울증에 빠지며 깊은 좌절을 겪습니다. 이 우울증은 천재 바이올리니스트로서 그녀가 누리던 모든 것을 한순간에 빼앗아갔습니다. 이런 그녀를 위해 신앙심이 깊으셨던 어머니는 눈물로 기도하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그녀는 깊은 절망 중에 한 복음송을 통해 주님의 음성을 듣게 됩니다. “당신이 지쳐서 기도할 수 없고 눈물이 빗물처럼 흘러내릴 때 주님은 아시네. 우리 연약함을 아시고 사랑으로 인도하시네. 누군가 널 위하여, 누군가 기도하네. 내가 홀로 외로와서 마음이 무너질 때, 누군가 널 위해 기도하네.” 그녀는 절망의 밑바닥에서 그녀를 위해 기도하시는 예수님을 만납니다. 그리고 그녀는 그때부터 세상을 향한 연주가 아니라 주님을 향한 연주를 시작합니다. 그때부터 그녀는 깊은 우울증에서 회복의 길로 들어서게 됩니다. 그리고 다시금 세상의 주목을 받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도구로 자신의 달란트를 드려 주님께 헌신하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메시지가 끝나면 주님을 향한 뜨거운 가슴으로 연주하는 그녀의 연주를 잠깐 들어보고자 합니다.
결론적으로 죽은 청년을 일으키신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예수님은 부활이요 생명이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죽음이 굴복했습니다. 그의 생명에 죽음이 삼킨바 되었습니다.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바라본 사도바울은 죽음을 향해 이렇게 선포하며 외칩니다.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 (고전15:55) 우리가 부활하신 주님을 믿을 때 우리는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감사할 수 있습니다. 관에서 일어난 청년과 같이 일어나 주의 일에 힘쓸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백부장과 같이 말씀의 권세를 믿음으로, 청년과 같이 주님의 말씀을 들으므로 죽은 자를 살리는 역사, 죽었다 살아나는 왕성한 생명의 역사를 체험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이로써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 생명과 비전이 넘치는 청년의 삶을 살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 드립니다. 아멘
말씀 / 누가복음 7:1-17
요절 / 누가복음 7:14
청년아 일어나라
“가까이 가서 그 관에 손을 대시니 멘 자들이 서는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시매”(14)
Happy Ester! 성경대로 우리 죄를 위해 죽으시고 장사지낸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신 부활의 주님을 높여 찬양합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심으로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고 하나님 나라를 향한 산 소망이 있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주님께서 이번 부활절에도 우리 안에 부활이요 생명으로 강하게 임하여 주시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오늘 말씀의 제목은 “청년아 일어나라”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예수님은 병들어 죽어가는 백부장의 종을 고치십니다. 죽은 나인성 과부의 외아들을 살리십니다. 이 사건들을 통해 예수님은 부활이요 생명이신 당신의 영광을 나타내셨습니다. 우리도 오늘 메시지 가운데 그의 말씀을 들을 수 있기 기도합니다. 그리하여 우리도 죽음의 자리에서 일어나 생명의 빛을 발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게 되기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제1장 백부장의 종을 살리신 예수님 (1-10)
1절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모든 말씀을 백성들에게 들려주시기를 마치신 후에 가버나움으로 들어가셨습니다. 그때 유대인의 장로 몇 사람이 예수님을 찾아와 간청했습니다. “어떤 백부장의 사랑하는 종이 있는데 오셔서 그 종을 구해 주십시오. 이 일을 하시는 것이 이 사람에게는 합당합니다. 저가 우리 민족을 사랑하고 또한 우리를 위하여 회당을 지어 주었습니다.” 이는 당시의 상황에 비추어 볼 때 매우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무엇이 그토록 놀라운 일입니까?
첫째로 백부장이 종을 사랑했다는 것이 놀라운 일입니다. 그 당시 종은 사람대접을 받지 못했습니다. 당시 세 가지 종류의 소유가 있었는데 첫째는 물건이요 둘째는 살아있는 가축이요 셋째는 말하는 물건, 즉 종이었다고 합니다. 배가 풍랑을 만나면 배를 가볍게 하기 위해서 제일 먼저 종을 버렸다고 합니다. 이렇게 종은 물건만도 못한 대접을 받았습니다. 당시 수많은 종들이 늙고 병들면 주인에게 버림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본문에 나오는 백부장은 병들어 쓸모없이 된 종을 사랑했습니다. 그를 살리기 위해 유대인의 장로들에게 부탁을 하고 그들을 예수님께 보내서 이 종을 고쳐주시도록 간청합니다. 병든 종에 대한 백부장의 이와 같은 사랑은 당시 시대상황을 고려할 때 매우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둘째로 유대인들이 이 일을 하시는 것이 이 사람에 합당하다고 말한 것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로마의 지배를 받고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로마인들은 유대인들에게는 철천지원수였습니다. 그들은 결코 부탁하고 부탁을 받을 수 있는 그런 관계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의 장로들이 철천지원수인 로마의 백부장의 부탁을 받고 예수님께 간청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무슨 대단한 일도 아니고 그의 병든 종을 고쳐달라는 부탁을 하기 위해 찾아온 것입니다. 유대인의 장로들은 그렇게 하는 것이 합당하다고 그의 편을 들어 줍니다. 이는 당시 자비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전쟁과 죽음이, 압제와 약탈이 난무하던 잔혹한 땅에 피어난 한 송이 꽃과 같이 참으로 아름다운 이야기였던 것입니다.
당시 대부분의 로마의 백부장들은 탐욕스럽고 잔인하여 유대인들에게 많은 반감을 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본문에 나오는 백부장은 병든 종을 사랑할 만큼 참으로 인간애가 넘치는 훌륭한 인격의 소유자였던 것입니다. 이런 백부장에 관해 들으신 예수님의 마음이 얼마나 기쁘셨을까요? 예수님은 가시던 길을 멈추고 지체하지 않으시고 기쁜 마음으로 백부장의 집을 향해 가셨습니다. 그런데 그의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다다랐을 때에 백부장이 벗들을 보내 그의 말을 전했습니다. 6~8절을 보십시오. “6.예수께서 함께 가실새 이에 그 집이 멀지 아니하여 백부장이 벗들을 보내어 이르되 주여 수고하시지 마옵소서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7.그러므로 내가 주께 나아가기도 감당하지 못할 줄을 알았나이다 말씀만 하사 내 하인을 낫게 하소서 8.나도 남의 수하에 든 사람이요 내 아래에도 병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
백부장은 예수님이 그의 집에 들어오심을 감당치 못하겠다고 합니다. 이는 이방인의 집에 들어가면 부정해진다고 믿는 유대인들의 어떤 종교적인 관습을 생각해서 예수님을 배려하는 차원에서 한 말이 아닙니다. 이는 그가 예수님을 황제와 같이 자신의 집에 모실 수 없을 만큼 아주 큰 분으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병들어 죽어가고 있는 그의 종은 어찌해야 한단 말입니까? 그는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는 아주 다급한 상황이 되었습니다. 아마도 그는 예수님이 그의 집에 오시는 동안 이 문제에 대해 고민하고 또 고민했던 것 같습니다. 그때 그의 안에 놀라운 생각이 떠오릅니다. 이는 예수님이 오시지 않고 말씀만 하셔도 내 종이 나을 수 있는 믿음의 생각입니다.
백부장의 믿음의 고백을 들으신 예수님의 반응은 어떠하셨습니까? 9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들으시고 그를 놀랍게 여겨 돌이키사 따르는 무리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에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노라 하시니” 그의 믿음은 말씀의 권세를 믿는 믿음이었습니다. 이는 이스라엘 중에서도 만나보지 못한 참으로 놀라운 믿음이었습니다. 10절을 보십시오. 보냈던 사람이 집으로 돌아가 보니 종이 이미 나아 있었습니다. 우리는 이를 통해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는 주님이 놀라시면 그 즉시 기적이 일어난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능력이 부족해서 우리를 돕지 못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의 믿음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 시간도 우리에게 믿음을 찾고 계십니다. 어떤 믿음을 찾고 계십니까? 백부장과 같이 말씀을 믿는 믿음입니다.
제2장 과부의 외아들을 살리신 예수님 (11-17)
예수님은 가버나움에서 백부장의 종을 고치신 후에 나인이란 성으로 가셨습니다. 그때 제자와 많은 무리가 동행했습니다. 병들어 죽어가던 백부장의 하인을 살린 후에 제자들과 무리들은 예수님 안에 있는 생명으로 충만했습니다. 나인으로 들어가는 예수님의 행렬은 충만한 생명의 행렬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성문에 가까이 이르셨을 때에 그 성에서 나오는 한 행렬을 만납니다. 그 행렬은 한 과부의 외아들을 장사하는 장례행렬이었습니다. 이는 깊은 슬픔의 행렬이요 죽음의 행렬이었습니다. 이 두 행렬이 나인성의 입구에서 만난 것입니다. 생명과 죽음이 만난 것입니다. 부모가 죽으면 무덤에 묻고 자식이 죽으면 가슴에 묻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것도 하나밖에 없는 외아들의 죽음이라니, 외아들의 죽음을 당한 과부 어머니의 슬피우는 통곡소리는 듣는 모든 사람들의 심장을 울리고 온 마을을 울리고 있었습니다. 이 안타까운 소식을 듣고 나인성에 많은 사람들이 이 장례행렬을 따르며 과부의 슬픔에 동참하고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모였지만 이 과부의 슬픔을 위로할 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 과부를 위로하실 수 있는 한 분이 계셨습니다. 그 분은 바로 예수님이셨습니다.
13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그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녀의 슬픔을 보셨고 그 슬픔에 동참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누구도 감히 과부 어머니에게 할 수 없었던 말씀을 하셨습니다. “울지 말라” 누가 이 과부에게 이런 말을 할 수 있단 말입니까? 외아들은 그녀에게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만큼 사랑하던 아들이었습니다. 그녀에게는 살아야할 이유였고 유일한 소망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외아들이 죽었습니다. 실상 아들과 함께 그녀도 죽은 것입니다. 그녀의 소망도 죽은 것입니다. 이런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우는 일 밖에 없었습니다. 만일 이렇게 울지 않으면 그녀는 미처 버릴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녀에게 “마음껏 울라. 슬픔을 다 쏟아낼 때까지 울라. 눈물이 마를 때까지 울라.”고 말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녀에게 “울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왜 “울지 말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이는 그녀를 불쌍히 여기사 죽은 아들을 살리고자 하셨기 때문입니다. 이는 죽은 아들을 살리시겠다는 예수님의 선언이요 의지였습니다. 그렇기에 “울지 말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단순히 그녀를 위로하기 위한 말씀이 아니라 아들을 살려서 그녀의 슬픔과 고통의 근원을 없애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과연 누가 이 예수님처럼 이런 말씀을 하실 수 있단 말입니까? 이는 오직 생명의 창조자이신 예수님만이 하실 수 있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 하신 후에 하신 일이 무엇입니까? 14절을 보십시오. “가까이 가서 그 관에 손을 대시니 멘 자들이 서는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시매” 예수님은 가까이 가서 그 관에 손을 대셨습니다. 그러자 장례행렬이 멈춰 섰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죽음의 행렬을 멈춰 세우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세상의 영웅호걸과 황제와 재상들이 모두 죽었습니다. 우리의 할아버지와 할머니들이 죽었습니다. 우리의 아버지와 어머니들이 죽었습니다. 혹은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도 그들이 갔던 길을 따라가야 합니다. 우리는 이렇게 죽음의 행렬에 서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어느 누가 이 죽음의 행렬을 멈출 수 있단 말입니까? 이 세상에 나를 포함해서 모든 사람들은 이 죽음의 길을 가고 있습니다. 무덤을 향해 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길을 멈추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죽은 자를 향해 말씀하셨습니다.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그러자 죽었던 자가 살아났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죽음마저도 순종한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그를 살리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첫째로 그의 삶의 회복하기 위함입니다. 청년이 왜 죽었습니까? 그가 사고로 죽었는지 혹은 병으로 죽었는지 혹은 우울증에 빠져 자살을 했는지 혹은 몹쓸 죄를 짓다 죽었는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죽음으로 그의 삶은 파괴되었고 회복이 불가능한 상태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죽음의 실존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청년을 살리시므로 그의 파괴된 삶을, 빼앗긴 삶을, 잃어버린 삶을 회복하여 주셨습니다. 우리의 삶에 가장 밑바닥은 어디입니까? 가장 최악일 때는 언제입니까? 그것은 죽음입니다. 죽음보다 더 밑바닥은 없습니다. 죽음보다 더 최악은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밑바닥에서, 그 최악에서 우리의 삶의 회복을 명하시는 분이십니다. 주님이 명하시면 우리의 삶은 살아납니다. 우리의 꿈과 미래가 회복됩니다. 이는 예수님은 내 삶의 창조자시요 생명의 부여자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내 삶의 회복을 위해 이 땅 위에 오신 생명의 주님을 높여 찬양합니다.
둘째로 그를 살려 과부 어머니에게 주시고자 하심입니다. 이는 깨어진 관계의 회복을 의미합니다. 어머니를 떠난 아들, 그것도 죽음으로 떠난 아들, 이는 더 이상 회복할 수 없는 관계, 즉 깨어진 관계를 의미합니다. 제가 24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습니다. 저는 그때 아버지를 떠나보내며 참으로 많은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 이유는 아버지와 해결하지 못한 깨어진 관계의 문제 때문이었습니다. 제가 아버지에게 미안하다 말하고 싶은데 사랑한다 말하고 싶은데 죽은 아버지는 이를 들으실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후회와 아픔을 가슴에 묻고 떠나보내야 하는 슬픔은 산자의 몫이라는 것을 그때 처음 깨달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죽은 청년을 살려 과부 어머니에게 주셨습니다. 과부 어머니와 아들의 깨어진 관계를 회복해 주셨습니다. 이와같이 예수님의 말씀으로 거듭난 자는 깨어진 관계가 회복됩니다. 어그러진 관계가 회복됩니다. 이것이 과부 어머니와 청년에게 주고자 하신 예수님의 선물이었습니다.
셋째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게 하기 위함입니다. 죽은 청년이 살아나자 이를 본 사람들의 반응이 어떠했습니까? 16절을 보십시오. “모든 사람이 두려워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이르되 큰 선지자가 우리 가운데 일어나셨다 하고 또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셨다 하더라” 이 청년이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 위해 한 일이 무엇입니까? 이를 위해 그가 성경공부를 열심히 했습니까? 일대일을 열심히 했습니까? 아니면 구제와 봉사를 열심히 했습니까? 실상 그가 한 일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가 한 일은 오직 단 하나 예수님의 말씀을 들고 일어난 것입니다. 우리는 이를 통해 하나님께 영광 돌린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것은 어떠한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가 죽었다가 살아나는 것입니다. 내가 회개하고 변화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됩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무슨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며 이는 큰 오해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은 우리가 그를 믿는 것입니다. 그를 기뻐하는 것입니다. 그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자로 우리 가 죽고 거듭나는 것입니다.
독일 교포 2세로서 세계적인 바이올리니스트들의 사사를 받으며 세계 최고의 바이올리니스트로 각광을 받고 있는 박지혜 자매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녀는 성공에 대한 집착과 완벽한 음악에 대한 중압감에 스스로 헤어나올 수 없는 우울증에 빠지며 깊은 좌절을 겪습니다. 이 우울증은 천재 바이올리니스트로서 그녀가 누리던 모든 것을 한순간에 빼앗아갔습니다. 이런 그녀를 위해 신앙심이 깊으셨던 어머니는 눈물로 기도하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그녀는 깊은 절망 중에 한 복음송을 통해 주님의 음성을 듣게 됩니다. “당신이 지쳐서 기도할 수 없고 눈물이 빗물처럼 흘러내릴 때 주님은 아시네. 우리 연약함을 아시고 사랑으로 인도하시네. 누군가 널 위하여, 누군가 기도하네. 내가 홀로 외로와서 마음이 무너질 때, 누군가 널 위해 기도하네.” 그녀는 절망의 밑바닥에서 그녀를 위해 기도하시는 예수님을 만납니다. 그리고 그녀는 그때부터 세상을 향한 연주가 아니라 주님을 향한 연주를 시작합니다. 그때부터 그녀는 깊은 우울증에서 회복의 길로 들어서게 됩니다. 그리고 다시금 세상의 주목을 받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도구로 자신의 달란트를 드려 주님께 헌신하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메시지가 끝나면 주님을 향한 뜨거운 가슴으로 연주하는 그녀의 연주를 잠깐 들어보고자 합니다.
결론적으로 죽은 청년을 일으키신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예수님은 부활이요 생명이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죽음이 굴복했습니다. 그의 생명에 죽음이 삼킨바 되었습니다.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바라본 사도바울은 죽음을 향해 이렇게 선포하며 외칩니다.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 (고전15:55) 우리가 부활하신 주님을 믿을 때 우리는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감사할 수 있습니다. 관에서 일어난 청년과 같이 일어나 주의 일에 힘쓸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백부장과 같이 말씀의 권세를 믿음으로, 청년과 같이 주님의 말씀을 들으므로 죽은 자를 살리는 역사, 죽었다 살아나는 왕성한 생명의 역사를 체험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이로써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 생명과 비전이 넘치는 청년의 삶을 살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 드립니다. 아멘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