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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룻기 제3강 "기업을 무른 보아스" 4: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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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정베드로
댓글 0건 조회 51회 작성일 17-03-12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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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룻기 제3강
말씀 | 룻기 4:1-22
요절 | 룻기 4:10

기업을 무른 보아스

“또 말론의 아내 모압 여인 룻을 사서 나의 아내로 맞이하고 그 죽은 자의 기업을 그의 이름으로 세워 그의 이름이 그의 형제 중과 그 곳 성문에서 끊어지지 아니하게 함에 너희가 오늘 증인이 되었느니라 하니”

오늘 말씀은 룻기서의 결말입니다. 룻기서는 처음에는 비극으로 시작을 합니다. 그러나 룻기서의 결말은 해피엔딩으로 끝이 납니다. 룻은 그 지방에서 유력한 보아스와 계대결혼을 하여 아들을 낳았고 나오미는 노년에 얻은 그 아들의 봉양을 받으며 행복한 여생을 살게 됩니다. 그리고 그 아들의 후손 가운데 다윗과 예수 그리스도가 탄생합니다. 그들은 다윗과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를 잇는 하나님의 구속 역사 가운데 귀히 쓰임을 받은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해 그의 날개 아래 보호받고자 나온 자들을 하나님이 얼마나 귀히 여기시며 사랑하여 주시는지를 배울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룻의 기업 무를 자로 보아스를 보내셨듯이 우리의 기업 무를 자로 예수님을 보내신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를 배울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기를 그치지 아니하시는 인애가 풍성하신 하나님을 깊이 영접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흉년을 피해 안식을 얻고자 모압으로 떠났던 나오미는 남편과 두 아들을 모두 잃고 텅빈 손이 되어 며느리 룻과 함께 고향에 돌아왔습니다. 그들은 당장 먹을 양식이 없어 남의 밭에 들어가 떨어진 이삭을 주어야 했습니다. 그들의 삶은 마치 하나님께 버림받은 자의 삶과 같이 보였습니다. 그들에게는 현실적으로 아무런 소망이 없어 보였습니다. 그런데 나오미는 그 가운데 소망을 발견합니다. 그것은 보아스가 룻을 사서 계대결혼을 해 주는 것이었습니다. 계대결혼이란 가문을 이을 아들이 없이 죽은 형제나 친족을 위해 결혼을 하여 가문을 이어주는 유대의 전통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이는 많은 손해와 희생이 따르는 일이라 아무리 친족일지라도 자원하여 하도록 했습니다. 그런데 보아스는 그의 발아래 나아와 은혜를 구한 룻에게 나보다 더 가까운 친족이 이를 거절하며 자신이 기꺼이 해 주겠다고 약속을 합니다. 그리고 일어나 그는 성문으로 나아가 그 친족을 만나 사정 이야기를 합니다. 그런데 그 친족은 자신에게 큰 손해가 되는 일이라 할 수 없다고 거절합니다. 그리고 선심을 쓰듯이 너를 위해서 네가 기업을 무르라고 책임전가를 합니다. 그러나 보아스는 이를 기쁘게 영접합니다. 룻과 나오미의 삶이 회복될 수 있었던 것은 이렇게 그들의 기업을 무르기 위해 기꺼이 희생한 보아스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를 통해 우리를 위해 기꺼이 일어나 희생을 마다하지 않은 보아스들이 있었기 때문에 지금 우리의 삶이 존재함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가 갓난 아기였을 때 우리의 어머니들이 나를 위해 일어나 수유를 하고 밥을 먹여주셨습니다. 아플 때는 약을 사서 먹이기고도 하고 급할 때는 병원으로 달려가기도 하셨습니다. 우리의 아버지들은 우리를 위해 직장에서 힘든 일도 마다하지 않으시고 기꺼이 일하시고 헌신하셨습니다. 이렇게 우리를 위해 기도해 주시고 기꺼이 헌신해 주신 부모님이 계시지 않았다면 우리의 삶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우리의 삶을 위해 기꺼이 자신의 삶을 희생하신 우리의 보아스들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를 위해 기꺼이 자신의 삶을 내어주신 분들은 많이 있습니다. 우리를 돌봐주신 할머니, 할아버지, 친척들, 우리의 삶에 도움을 준 우리의 친구들, 선생님들, 목자님들 그리고 나의 삶과는 직접 관련은 없지만 우리가 살아가는데 필요한 모든 것들을 만들고 필요를 공급해 주시는 분들이 없다면 우리의 삶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삶은 누구가의 희생 가운데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중에서도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할 희생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희생입니다. 하나님은 죄로 인해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리고 심판과 멸망 가운데 있는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독생자 예수님을 십자가에 희생하셨습니다. 이는 우리가 그렇게 해달라고 요청한 것이 아닙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스스로 자원하여 행하신 것입니다. 그 이유는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셔서 우리를 구원하시고 싶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당신의 독생자를 십자가에 내어 주시는 희생이 필요하셨던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마음을 잘 알고 계셨던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기 전날 밤 겟세마네 동산에서 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 위해서 밤새도록 통곡하며 눈물로 기도하셨습니다. 그리고 일어나 기꺼이 십자가 고난의 길을 가셨습니다.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님은 마지막 피한방울까지 모두 우리를 위해 쏟으시고 죽으셨습니다. 이 예수님의 희생으로 말미암아 죄로 인해 죽어 멸망받을 수 밖에 없는 우리에게 하나님께 나아가는 새롭고 산길이 열리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지금 내 삶은 누군가 기꺼이 자신을 희생한 열매라는 것을...바로 나를 사랑하사 자기 몸을 십자가에 버리신 그 하나님의 사랑 때문이라는 것을...이것이 많은 희생을 감수하고 룻을 사서 결혼한 보아스를 통해 우리에게 전하고 싶은 하나님의 메시지입니다.

룻이 보아스와 결혼하여 아들을 낳자 이웃집 여인들이 나오미에게 나아와 축하해 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14,15절을 봅시다. “14.여인들이 나오미에게 이르되 찬송할지로다 여호와께서 오늘 네게 기업 무를 자가 없게 하지 아니하셨도다 이 아이의 이름이 이스라엘 중에 유명하게 되기를 원하노라 15.이는 네 생명의 회복자이며 네 노년의 봉양자라 곧 너를 사랑하며 일곱 아들보다 귀한 네 며느리가 낳은 자로다 하니라” 여인들은 나오미에게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합니다. 나오미에게 무엇을 찬양하라고 합니까? 오늘 너에게 기업 무를 자가 있었다는 것을 찬양하라고 합니다. 이는 오늘 그녀에게 기업 무를 자가 없었다면 오늘의 축복도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찬양해야할 제목이 많습니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가장 큰 찬양의 제목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기업 무를 자로 예수님을 보내셨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기업 무를 자인 예수님이 계시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이 예수님이 계시지 않다면 어떻게 될까요? 우리는 여전히 죄가 운데 있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믿고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것이 헛것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죄로 인해 심판받고 멸망하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예수님이 계십니다. 예수님은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그를 믿는 자는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기업으로 받습니다. 이는 그가 우리의 기업 무를 자가 되셨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우리의 삶에서 가장 큰 찬양의 제목은 바로 오늘 우리에게 예수님이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에게 가장 귀한 이름은 바로 예수님입니다.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예수 밖에 없네.”

텅빈 손으로 돌아온 나오미의 삶이 회복된 것도, 이방여인으로 과부가 되어 멸시를 받으며 살 수 밖에 없는 룻의 가련한 삶이 보아스의 아내가 되고 다윗의 조상이 되는 축복을 누리게 된 것도 모두 인애가 풍성하신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회복을 꿈꾸고 하나님 나라를 꿈꿀 수 있습니다. 이러한 믿음을 가질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놀라운 은혜요 축복입니다. 그렇기에 우리의 삶에서 감사하며 높여 찬양할 이름은 다름 아닌 우리의 기업 무를 자로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에게 예수님이 있었도다. 능력의 그 이름, 구원의 그 이름, 소망의 그 이름, 그 이름을 믿을 때 그 이름을 의지할 때 그 이름 안에 거할 때 우리의 삶은 회복됩니다. 우리의 삶은 다윗과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를 잇는 축복의 삶을 살게 됩니다. 우리 JBF 친구들이 예수님을 믿음으로 그 이름 안에 능력과 그 이름 안에 구원을 맛보고 이 땅 가운데 축복의 통로로 쓰임받는 귀한 주님의 자녀들이 되게 하시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16,17절을 봅시다. “16.나오미가 아기를 받아 품에 품고 그의 양육자가 되니 17.그의 이웃 여인들이 그에게 이름을 지어 주되 나오미에게 아들이 태어났다 하여 그의 이름을 오벳이라 하였는데 그는 다윗의 아버지인 이새의 아버지였더라”  룻이 아들을 낳자 마을 공동체가 모두 기뻐하며 축복을 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특히한 사실은 그 아들의 이름을 동네 아주머니들의 지어 주었다는 것입니다. 이웃 아주머니들이 나오미에게서 아들이 태어났다고 하면서 자기들 맘대로 오벳이라고 지었습니다. 그런데 오벳이라는 뜻이 “섬기다”,“섬기는 자”라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그들은 아마도 나오미의 노년에 봉양자로 섬기게 될 아들을 생각하며 이렇게 이름을 지은 것 같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아들을 통해 다윗의 아버지 이새가 나고 그 다음에 다윗이 태어났다는 사실을 전합니다. 이는 룻을 통해 태어난 오벳이 없이는 다윗도 없다는 뜻입니다. 유대인들이 그토록 존경하고 흠모하는 다윗이 이런 룻의 믿음과 보아스의 헌신을 통해 태어난 것입니다. 우리는 이를 통해 하나님은 반드시 우리의 믿음과 헌신의 열매를 아름답게 하신다는 것을 사실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18~22절을 봅시다. “베레스의 계보는 이러하니라 베레스는 헤스론을 낳고 19.헤스론은 람을 낳았고 람은 암미나답을 낳았고 20.암미나답은 나손을 낳았고 나손은 살몬을 낳았고 21.살몬은 보아스를 낳았고 보아스는 오벳을 낳았고
22.오벳은 이새를 낳고 이새는 다윗을 낳았더라”

이웃들은 룻이 낳은 오벳에 대해 라헬과 레아가 낳은 아들들과 같이 되고 다말이 유다에게서 낳은 베레스와 같이 되기를 원한다고 축복해 주었습니다. 이는 당시 모압출신의 이주여성에 불과한 룻에게는 최고의 찬사요 최고의 축복이었습니다. 오늘날로 우리 나라로 말하며 베트남에서 시집온 이주 여성에게 내가 신사임당과 같이 되며 네 자녀가 이황이나 이율곡과 같이 되기를 원한다고 축복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는 이방인들에 대한 차별이 심하던 당시의 상황을 고려할 때 이웃들의 축복은 그야말로 파격적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웃들이 이토록 룻을 축복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 안에 하나님의 날개 아래 보호받고자 나아온 룻의 믿음을 귀히 보아스의 영향력이 있는 것 같습니다.

당시 모압에서 이주한 이주여성 룻이라는 사람은 그 사회에서 아무것도 아닌 존재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그녀의 믿음을 귀하게 여기셨고 그녀의 믿음을 귀하게 여기는 보아스에게로 인도하셨습니다. 그 결과 룻의 인생은 가련한 이주 여성의 삶에서 다윗의 증조모가 되는 놀라운 삶으로 변화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처럼 그의 날개 아래 보호받고자 나오는 자를 사랑하시며 축복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나아온 자에게 은혜 베풀기를 그치지 아니하시는 인애가 풍성하신 하나님이십니다. 바로 그 하나님의 인애의 역사가 바로 다윗과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를 통해 전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메시지입니다.

결론적으로 하나님은 보아스를 기업 무를 자로 세우셔서 룻과 나오미의 삶을 회복하셨습니다. 이 하나님은 우리에게 기업 무를 자로 예수님을 보내셨습니다. 우리에게 이 예수님이 계시다는 것은 축복 중에 축복입니다. 이는 우리가 일생 자랑하고 찬송할 제목입니다. 우리에게 기업 무를 자로 예수님이 계십니다. 이 예수님이 우리의 삶에 오셨습니다. 우리의 삶을 구원하시며 회복하러 오셨습니다. 우리가 그 이름의 능력, 그 이름을 구원을, 그 이름의 사랑을 우리의 일상의 삶에도 깨닫고 체험하며 그의 사랑을 찬송하며 전하는 삶을 살게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할렐루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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