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룻기 제 1 강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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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룻기 제 1 강
말씀 | 룻기 1:1-22
요절 | 룻기 1:16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룻이 이르되 내게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머무시는 곳에서 나도 머물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룻기는 사사기 시대와 열왕기 시대의 중간에 일어난 말씀입니다. 룻기의 주제는 죄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인애입니다. 룻은 이방 여인이지만 다윗의 증조할머니가 되고 예수님의 족보에도 기록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믿음과 시어머니에 대한 인애에 기초한 룻의 선택은 고난 가운데서 아름답게 꽃을 피우고 있습니다.
사사들이 치리하던 때에 그 땅에 흉년이 들었습니다. 유다 베들레헴에 한 사람이 있으니 그의 이름은 엘리멜렉입니다. 그의 아내의 이름은 나오미요 그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 말론과 기룐입니다. 엘리멜렉은 ‘나의 하나님은 왕이시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의 이름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흉년이 들었을 때 하나님께 묻지도 않고 모압 지방으로 이민을 갔습니다. 모압은 이스라엘 백성과는 원수지간입니다. 그는 모압에서 두 아들을 모압 여인과 결혼까지 시켰습니다. 이방 여인과 결혼을 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말씀도 무시하고 그곳에서 정착해 살기 위해서 이렇게 하였습니다. 그의 행동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기소견에 옳은 데로 행하던 바로 그 모습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지만 하나님의 뜻을 앞세우기보다는 자기 뜻을 앞세웠습니다. 그들의 판단 기준은 현실적인 유익 밖에는 없었습니다.
이런 그들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이 죽고 얼마 뒤에 그의 두 아들이 모압 여자 중에 아내를 맞이하였는데 하나의 이름은 오르바요 하나의 이름은 룻이었습니다. 그들이 거기에 거주한 지 십 년 쯤에 말론과 기룐 두 사람이 다 죽었습니다. 나오미는 하루 아침에 모든 것을 잃어버렸습니다. 늙은 나오미와 청상 과부가 된 두 며느리를 생각할 때 슬픈 마음을 금할 수 없습니다. 나오미는 대를 이을 손주들도 없이 늙어 버린 자신으로 인하여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는 텅 빈 마음과 손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인생입니다.
사람이 자기 앞날을 어찌 알겠습니까? 인생은 좋은 일과 나쁜 일이 뒤섞여서 일어납니다. 우리는 내 인생에 불행이 닥칠 때 하나님 앞에 자신을 깊이 돌아보는 것이 유익합니다. 나오미는 이 불행을 하나님이 치셨다고 보았습니다. 하나님은 그 백성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그들이 다른 길로 갈 때 하나님께 돌아오도록 징계를 하십니다. 최악의 상황에서도 하나님은 일하십니다.
6,7절을 보십시오. “그 여인이 모압 지방에서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시사 그들에게 양식을 주셨다 함을 듣고 이에 두 며느리와 함께 일어나 모압 지방에서 돌아오려 하여 있던 곳에서 나오고 두 며느리도 그와 함께 하여 유다 땅으로 돌아오려고 길을 가다가” 두 며느리와 함께 길을 가다가 국경 근처에 까지 왔을 때 나오미는 발걸음을 멈추었습니다. 그리고 두 며느리에게 말했습니다. “너희는 각기 너희 어머니의 집으로 돌아가라 너희가 죽은 자들과 나를 선대한 것 같이 여호와께서 너희를 선대하시기를 원하며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허락하사 각기 남편의 집에서 위로를 받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들을 선대하사 재혼을 하고 남편의 집에서 위로 받기를 바란다고 말했습니다. 두 며느리는 자신들을 더 이상 고생시키지 않으려는 시어머니의 마음을 알았습니다. 그들이 며느리들이지만 딸과 같이 대해준 늙은 시어머니를 홀로 떠나보내야 한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아팠을 것입니다. 당시 과부는 고아와 나그네와 더불어 사회의 3대 약자였습니다. 젊은 자신들이야 어떻게든 살아갈 수 있겠지만 늙으신 시어머니는 어떻게 생활을 하신단 말인가 생각할 때 그 앞날이 캄캄했습니다. 그래서 며느리들은 시어머니를 생각해서 울었습니다. 시어머니는 딸과 같이 사랑하던 두 며느리를 떠나보내야 하는 이별의 슬픔으로 인해 울었습니다.
한참을 울고 나서 두 며느리의 반응이 어떠했습니까? 10절을 보십시오. “나오미에게 이르되 아니니이다 우리는 어머니와 함께 어머니의 백성에게로 돌아가겠나이다 하는지라.” 두 며느리가 시어머니 나오미와 함께 유대 땅으로 돌아가겠다고 한 것을 볼 때 그들은 마음으로 시어머니를 사랑하고 하나가 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나오미는 이성적으로 상황을 판단했습니다. 그들이 모압으로 되돌아가야 하는 이유를 밝혔습니다. “내 딸들아 돌아가라 너희가 어찌 나와 함께 가려느냐 내 태중에 너희의 남편 될 아들들이 아직 있느냐 내 딸들아 되돌아 가라 나는 늙었으니 남편을 두지 못할지라 가령 내가 소망이 있다고 말한다든지 오늘 밤에 남편을 두어 아들들을 낳는다 하더라도 너희가 어찌 그들이 자라기를 기다리겠으며 어찌 남편 없이 지내겠다고 결심하겠느냐 내 딸들아 그렇지 아니하니라 여호와의 손이 나를 치셨으므로 나는 너희로 말미암아 더욱 마음이 아프도다(11-13).” 하나님이 나를 치시기 때문에 나를 따라오면 너희들의 삶도 나의 삶처럼 괴로워질까 두렵다는 뜻이었습니다.
그러자 그들이 소리를 높여 다시 울더니 오르바는 그의 시어머니에게 입 맞추고 작별 인사를 했습니다. 그러나 룻은 그를 따랐습니다. 그를 따랐다는 것은 마치 강력한 접착제로 붙여놓는 것처럼 굳게 붙들고 늘어졌다는 것입니다. 시어머니를 따라가 봐야 자기에게 아무 유익이 없습니다. 그런데 왜 룻은 나오미를 따랐을까요? 남편대신에 시어머니를 택한 것은 룻의 인애였습니다. 또한 모압 땅으로 돌아가지 않으려고 한 것은 모압의 신 그모스를 택하지 않고 고난이 따르지만 여호와 하나님을 택한 것입니다. 모압의 그모스 신은 자식을 불태워 바쳐야 하는 잔인한 신입니다. 룻의 선택은 여호와 하나님을 따르고자 하는 믿음의 결단이었습니다.
나오미는 다시 룻에게 권유합니다. “보라 네 동서는 그의 백성과 그의 신들에게로 돌아가나니 너도 너의 동서를 따라 돌아가라.” 오르바를 따라 간다고 해서 흠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룻의 결심이 무엇입니까? 16,17절을 보십시오. “룻이 이르되 내게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머무시는 곳에서 나도 머물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묻힐 것이라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를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 하는지라.” 우리는 룻에게서 무엇을 배울 수 있습니까?
첫째로, 룻의 인애입니다. 인애는 어진 마음으로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룻의 이름은 물댄 동산, 상쾌함, 친근히 함, 우정이란 뜻입니다. 룻은 인애와 우정으로 시어머니를 끝까지 모시며 시어머니의 삶의 동반자요 친구가 되고자 했습니다. 시어머니를 있는 모습 그대로 사랑하고 섬기고자 합니다.
둘째, 룻의 믿음의 결단입니다. 룻의 결정은 단순히 시어머니 나오미에 대한 사랑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그녀의 결정은 신앙적인 결단이었습니다. 룻은 복잡한 선택의 순간에 가장 중요한 것을 붙잡았습니다. 룻은 이스라엘의 여호와 하나님을 택하였습니다. 룻은 시어머니 나오미의 믿음을 깊이 배웠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사랑이 일편단심이었습니다. 나오미도 룻의 신앙과 진심을 분명히 알고 더 이상 설득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이런 결단의 순간에 어떤 선택을 할까요?
이에 두 사람이 베들레헴까지 갔습니다. 베들레헴에 이를 때에 온 성읍이 그들로 말미암아 떠들며 이르기를 “이 사람이 나오미냐”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녀가 나이도 늙었고, 고생을 많이 해서 얼굴이 수척해졌기 때문일 것입니다. 게다가 나오미가 남편도 없이, 두 아들도 없이, 어떤 이방 여인 한 사람만 데리고 처량하게 돌아온 것을 보고 연민의 마음으로 이렇게 말한 것입니다. “나오미”는 “기쁨, 희락, 혹은 사랑스러운 자”란 뜻입니다. 나오미가 그들에게 이르되 나를 나오미라 부르지 말고 나를 마라라 부르라 이는 전능자가 나를 심히 괴롭게 하셨음이니라. “마라”는 “쓴물”이라는 뜻입니다. 풍족하게 나갔는데 비어서 돌아온 자신을 볼 때 면목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징계를 영접하고 돌아왔습니다. 하나님께서 징계를 하셨지만 나오미가 잘 한 일은 돌아온 것입니다. 하나님의 날개 아래 돌아왔습니다. 그것만 있어도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십니다.
22절을 보십시오. “나오미가 모압 지방에서 그의 며느리 모압 여인 룻과 함께 돌아왔는데 그들이 보리 추수 시작할 때에 베들레헴에 이르렀더라.” 그들이 돌아온 시기가 보리 추수할 때라는 것은 희망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새롭게 채워지는 역사의 시작입니다.
오늘 나오미에게서 배울 점이 무엇입니까? 그녀의 말을 들어보면 “전능자가 나를 …”, “여호와께서 나를 …” 이렇게 하셨다고 말합니다. 매사에 주어가 하나님이고 자신은 목적어입니다. 그녀는 하나님께 대한 주권 신앙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징계하신 것을 깊이 영접했습니다. 자신의 불행해 보이는 삶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섭리를 읽었습니다. 그녀는 남편과 자식과 헤어지고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났습니다. 물질을 잃고 하나님을 얻었습니다. 소중한 것을 잃게 하신 것만큼 깊은 사랑으로 자신을 만나주시는 하나님 앞에 감사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리고 지난 날들을 돌아보며 하나님보다 물질을 더 의지했던 것, 하나님보다 남편을 의지했던 것, 하나님보다 자식들을 더 사랑했던 것을 깊이 회개했습니다. 나오미의 인생은 끝난 것처럼 보이지만 진짜 인생은 지금부터 시작됩니다.
결론적으로 룻은 이방여인이었지만 나오미에게서 배운 말씀을 기초로 믿음의 결단을 했습니다. 우리가 중요한 순간 믿음으로 결단하고 하나님 편에 서기를 기도합니다. 끝까지 인애를 행하기를 기도합니다. 그리할 때 하나님께서 친히 일하시고 그 영광을 나타내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을 기대하며 어두움 속에 빛나는 별처럼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말씀 | 룻기 1:1-22
요절 | 룻기 1:16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룻이 이르되 내게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머무시는 곳에서 나도 머물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룻기는 사사기 시대와 열왕기 시대의 중간에 일어난 말씀입니다. 룻기의 주제는 죄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인애입니다. 룻은 이방 여인이지만 다윗의 증조할머니가 되고 예수님의 족보에도 기록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믿음과 시어머니에 대한 인애에 기초한 룻의 선택은 고난 가운데서 아름답게 꽃을 피우고 있습니다.
사사들이 치리하던 때에 그 땅에 흉년이 들었습니다. 유다 베들레헴에 한 사람이 있으니 그의 이름은 엘리멜렉입니다. 그의 아내의 이름은 나오미요 그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 말론과 기룐입니다. 엘리멜렉은 ‘나의 하나님은 왕이시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의 이름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흉년이 들었을 때 하나님께 묻지도 않고 모압 지방으로 이민을 갔습니다. 모압은 이스라엘 백성과는 원수지간입니다. 그는 모압에서 두 아들을 모압 여인과 결혼까지 시켰습니다. 이방 여인과 결혼을 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말씀도 무시하고 그곳에서 정착해 살기 위해서 이렇게 하였습니다. 그의 행동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기소견에 옳은 데로 행하던 바로 그 모습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지만 하나님의 뜻을 앞세우기보다는 자기 뜻을 앞세웠습니다. 그들의 판단 기준은 현실적인 유익 밖에는 없었습니다.
이런 그들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이 죽고 얼마 뒤에 그의 두 아들이 모압 여자 중에 아내를 맞이하였는데 하나의 이름은 오르바요 하나의 이름은 룻이었습니다. 그들이 거기에 거주한 지 십 년 쯤에 말론과 기룐 두 사람이 다 죽었습니다. 나오미는 하루 아침에 모든 것을 잃어버렸습니다. 늙은 나오미와 청상 과부가 된 두 며느리를 생각할 때 슬픈 마음을 금할 수 없습니다. 나오미는 대를 이을 손주들도 없이 늙어 버린 자신으로 인하여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는 텅 빈 마음과 손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인생입니다.
사람이 자기 앞날을 어찌 알겠습니까? 인생은 좋은 일과 나쁜 일이 뒤섞여서 일어납니다. 우리는 내 인생에 불행이 닥칠 때 하나님 앞에 자신을 깊이 돌아보는 것이 유익합니다. 나오미는 이 불행을 하나님이 치셨다고 보았습니다. 하나님은 그 백성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그들이 다른 길로 갈 때 하나님께 돌아오도록 징계를 하십니다. 최악의 상황에서도 하나님은 일하십니다.
6,7절을 보십시오. “그 여인이 모압 지방에서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시사 그들에게 양식을 주셨다 함을 듣고 이에 두 며느리와 함께 일어나 모압 지방에서 돌아오려 하여 있던 곳에서 나오고 두 며느리도 그와 함께 하여 유다 땅으로 돌아오려고 길을 가다가” 두 며느리와 함께 길을 가다가 국경 근처에 까지 왔을 때 나오미는 발걸음을 멈추었습니다. 그리고 두 며느리에게 말했습니다. “너희는 각기 너희 어머니의 집으로 돌아가라 너희가 죽은 자들과 나를 선대한 것 같이 여호와께서 너희를 선대하시기를 원하며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허락하사 각기 남편의 집에서 위로를 받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들을 선대하사 재혼을 하고 남편의 집에서 위로 받기를 바란다고 말했습니다. 두 며느리는 자신들을 더 이상 고생시키지 않으려는 시어머니의 마음을 알았습니다. 그들이 며느리들이지만 딸과 같이 대해준 늙은 시어머니를 홀로 떠나보내야 한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아팠을 것입니다. 당시 과부는 고아와 나그네와 더불어 사회의 3대 약자였습니다. 젊은 자신들이야 어떻게든 살아갈 수 있겠지만 늙으신 시어머니는 어떻게 생활을 하신단 말인가 생각할 때 그 앞날이 캄캄했습니다. 그래서 며느리들은 시어머니를 생각해서 울었습니다. 시어머니는 딸과 같이 사랑하던 두 며느리를 떠나보내야 하는 이별의 슬픔으로 인해 울었습니다.
한참을 울고 나서 두 며느리의 반응이 어떠했습니까? 10절을 보십시오. “나오미에게 이르되 아니니이다 우리는 어머니와 함께 어머니의 백성에게로 돌아가겠나이다 하는지라.” 두 며느리가 시어머니 나오미와 함께 유대 땅으로 돌아가겠다고 한 것을 볼 때 그들은 마음으로 시어머니를 사랑하고 하나가 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나오미는 이성적으로 상황을 판단했습니다. 그들이 모압으로 되돌아가야 하는 이유를 밝혔습니다. “내 딸들아 돌아가라 너희가 어찌 나와 함께 가려느냐 내 태중에 너희의 남편 될 아들들이 아직 있느냐 내 딸들아 되돌아 가라 나는 늙었으니 남편을 두지 못할지라 가령 내가 소망이 있다고 말한다든지 오늘 밤에 남편을 두어 아들들을 낳는다 하더라도 너희가 어찌 그들이 자라기를 기다리겠으며 어찌 남편 없이 지내겠다고 결심하겠느냐 내 딸들아 그렇지 아니하니라 여호와의 손이 나를 치셨으므로 나는 너희로 말미암아 더욱 마음이 아프도다(11-13).” 하나님이 나를 치시기 때문에 나를 따라오면 너희들의 삶도 나의 삶처럼 괴로워질까 두렵다는 뜻이었습니다.
그러자 그들이 소리를 높여 다시 울더니 오르바는 그의 시어머니에게 입 맞추고 작별 인사를 했습니다. 그러나 룻은 그를 따랐습니다. 그를 따랐다는 것은 마치 강력한 접착제로 붙여놓는 것처럼 굳게 붙들고 늘어졌다는 것입니다. 시어머니를 따라가 봐야 자기에게 아무 유익이 없습니다. 그런데 왜 룻은 나오미를 따랐을까요? 남편대신에 시어머니를 택한 것은 룻의 인애였습니다. 또한 모압 땅으로 돌아가지 않으려고 한 것은 모압의 신 그모스를 택하지 않고 고난이 따르지만 여호와 하나님을 택한 것입니다. 모압의 그모스 신은 자식을 불태워 바쳐야 하는 잔인한 신입니다. 룻의 선택은 여호와 하나님을 따르고자 하는 믿음의 결단이었습니다.
나오미는 다시 룻에게 권유합니다. “보라 네 동서는 그의 백성과 그의 신들에게로 돌아가나니 너도 너의 동서를 따라 돌아가라.” 오르바를 따라 간다고 해서 흠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룻의 결심이 무엇입니까? 16,17절을 보십시오. “룻이 이르되 내게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머무시는 곳에서 나도 머물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묻힐 것이라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를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 하는지라.” 우리는 룻에게서 무엇을 배울 수 있습니까?
첫째로, 룻의 인애입니다. 인애는 어진 마음으로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룻의 이름은 물댄 동산, 상쾌함, 친근히 함, 우정이란 뜻입니다. 룻은 인애와 우정으로 시어머니를 끝까지 모시며 시어머니의 삶의 동반자요 친구가 되고자 했습니다. 시어머니를 있는 모습 그대로 사랑하고 섬기고자 합니다.
둘째, 룻의 믿음의 결단입니다. 룻의 결정은 단순히 시어머니 나오미에 대한 사랑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그녀의 결정은 신앙적인 결단이었습니다. 룻은 복잡한 선택의 순간에 가장 중요한 것을 붙잡았습니다. 룻은 이스라엘의 여호와 하나님을 택하였습니다. 룻은 시어머니 나오미의 믿음을 깊이 배웠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사랑이 일편단심이었습니다. 나오미도 룻의 신앙과 진심을 분명히 알고 더 이상 설득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이런 결단의 순간에 어떤 선택을 할까요?
이에 두 사람이 베들레헴까지 갔습니다. 베들레헴에 이를 때에 온 성읍이 그들로 말미암아 떠들며 이르기를 “이 사람이 나오미냐”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녀가 나이도 늙었고, 고생을 많이 해서 얼굴이 수척해졌기 때문일 것입니다. 게다가 나오미가 남편도 없이, 두 아들도 없이, 어떤 이방 여인 한 사람만 데리고 처량하게 돌아온 것을 보고 연민의 마음으로 이렇게 말한 것입니다. “나오미”는 “기쁨, 희락, 혹은 사랑스러운 자”란 뜻입니다. 나오미가 그들에게 이르되 나를 나오미라 부르지 말고 나를 마라라 부르라 이는 전능자가 나를 심히 괴롭게 하셨음이니라. “마라”는 “쓴물”이라는 뜻입니다. 풍족하게 나갔는데 비어서 돌아온 자신을 볼 때 면목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징계를 영접하고 돌아왔습니다. 하나님께서 징계를 하셨지만 나오미가 잘 한 일은 돌아온 것입니다. 하나님의 날개 아래 돌아왔습니다. 그것만 있어도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십니다.
22절을 보십시오. “나오미가 모압 지방에서 그의 며느리 모압 여인 룻과 함께 돌아왔는데 그들이 보리 추수 시작할 때에 베들레헴에 이르렀더라.” 그들이 돌아온 시기가 보리 추수할 때라는 것은 희망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새롭게 채워지는 역사의 시작입니다.
오늘 나오미에게서 배울 점이 무엇입니까? 그녀의 말을 들어보면 “전능자가 나를 …”, “여호와께서 나를 …” 이렇게 하셨다고 말합니다. 매사에 주어가 하나님이고 자신은 목적어입니다. 그녀는 하나님께 대한 주권 신앙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징계하신 것을 깊이 영접했습니다. 자신의 불행해 보이는 삶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섭리를 읽었습니다. 그녀는 남편과 자식과 헤어지고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났습니다. 물질을 잃고 하나님을 얻었습니다. 소중한 것을 잃게 하신 것만큼 깊은 사랑으로 자신을 만나주시는 하나님 앞에 감사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리고 지난 날들을 돌아보며 하나님보다 물질을 더 의지했던 것, 하나님보다 남편을 의지했던 것, 하나님보다 자식들을 더 사랑했던 것을 깊이 회개했습니다. 나오미의 인생은 끝난 것처럼 보이지만 진짜 인생은 지금부터 시작됩니다.
결론적으로 룻은 이방여인이었지만 나오미에게서 배운 말씀을 기초로 믿음의 결단을 했습니다. 우리가 중요한 순간 믿음으로 결단하고 하나님 편에 서기를 기도합니다. 끝까지 인애를 행하기를 기도합니다. 그리할 때 하나님께서 친히 일하시고 그 영광을 나타내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을 기대하며 어두움 속에 빛나는 별처럼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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