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15:1-34 부활절 1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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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부활절 제 1 강
말씀 | 고린도전서 15:1-34
요절 | 고린도전서 15:20
부활의 첫 열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찬양합니다. 말씀을 통해 부활하신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영접하는 시간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예수 그리스도 부활의 증인들(1-11). 1,2절을 보십시오. 바울은 문제 많은 고린도 성도들에게 복음 신앙이 필요함을 알고 자신이 전한 복음을 다시 생각나게 합니다. 그들이 만일 바울이 전한 그 말을 굳게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그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헛되이 믿는다는 것은 무엇을 말할까요? 이것은 말로는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믿는다 하면서도 실제로는 안 믿는 것을 말합니다. 복음을 우리가 정말 믿으면 그 믿음으로 우리는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바울이 전한 복음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3,4절을 보십시오.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이는 복음 진리의 핵심입니다. 성경대로 예수님이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살아나셨습니다. 사람들의 문제가 많이 있습니다. 물질 문제, 인간 갈등 문제, 성격 문제, 빈부격차, 성차별, 폭력과 살인 등등 많은 문제가 있지만 성경은 근본 원인을 죄 문제로 보고 있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감사하지 않고 하나님을 떠나서 사는 것이 죄의 뿌리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습니다. 죄와 죽음으로 인해서 사람이 불행하고 비참한 것입니다.
그런데, 나와 우리의 죄를 해결하기 위해서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죄가 없는 분이신데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 오셔서 우리 대신 저주를 받으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물과 피를 쏟고 죽으셨고 장사지낸 바 되셨습니다. 그리고 삼일 만에 성경대로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 누구에게 보이셨습니까? 5-8절을 보십시오.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두 제자에게와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 중에 지금까지 대다수는 살아 있고 어떤 사람은 잠들었으며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와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대개 어떤 일에 대한 증인은 두 명 이상이면 증거 능력이 충분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한 증인들은 오백 명이 훨씬 넘습니다. 일시에 오백여 명이 본 것은 그의 부활이 환상이 아니라는 것을 말해줍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제자들에게 아주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지금까지는 죽음은 끝이요 패배라 여겼고 죽음에 대해서는 생각하기도 싫어했습니다. 이 땅에서의 영광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고 그 영광을 얻고자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좇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처참하게 십자가에서 죽으셨고 그들의 꿈은 산산조각 났습니다. 이제 그들은 도망자의 신세가 되었고 두려워서 숨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부활하셔서 그들 눈앞에 나타나셨고 이는 그들의 가치관과 인생관을 송두리째 뒤흔들어 버렸습니다. 이 땅의 일들이 전부라고 생각했는데 그 너머에 놀라운 세계가 있음을 인식하기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죽음이 두려워 계집종 앞에서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던 베드로가 종교지도자들의 위협에도 굴하지 않고 담대히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하는 담대한 복음전도자가 되었습니다. 그가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하다가 로마에서 십자가 형을 받았을 때, 그는 자신은 예수님과 같은 모양으로 십자가에 못 박힐 수 없다고 해서 거꾸로 십자가에 못 박혀 순교했습니다. 증인 중에 예수님의 친형제 야고보도 있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가족이었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함께 살았습니다. 가족은 모든 것을 다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속일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도 예수님의 부활을 목도하고 변화되어 예루살렘 총회의 회장이 되었습니다. 거짓을 위해서 죽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 수많은 부활의 증인들이 순교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목격한 사실을 부인할 수 없어서 목숨을 바쳐서 부활을 증거했습니다.
증인들 중에서 사도 바울의 변화는 예수님의 부활의 확실함을 말해줍니다. 그는 본래 예수님을 믿지도 않았고 신자들을 박해하는 일에 앞장 섰던 사람이었습니다. 스데반 집사를 돌로 쳐 죽이는데 앞장을 섰습니다. 자기 나라 유대에서 다른 나라 다메섹까지 가서 신자들을 잡아다가 감옥에 쳐 넣고자 하였습니다. 이런 그가 부활하신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그의 빛을 비추임 받고 쓰러졌습니다. 그 이후에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는 자신에 대해서 어떻게 고백을 하고 있습니까?
9,10절을 보십시오. “나는 사도 중에 가장 작은 자라. 나는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 받기를 감당하지 못할 자니라.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한 사도바울의 변화된 삶과 가치관에 대해 빌립보서에서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빌3:5-12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부활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이 세상이 전부입니다. 이 세상에서의 성공이 최고의 가치이며 그것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자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을 믿고 죽음 너머에 놀라운 세계가 있음을 믿는 사람들은 그 가치관이 달라집니다. 부활신앙은 머리 속에 관념적인 것이 아니라 실제적인 것이며 우리의 삶을 변화시킵니다. 예수님의 부활의 증인들을 열거하므로 부활의 확실성을 증거한 후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11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나나 그들이나 이같이 전파하매 너희도 이같이 믿었느니라.”
둘째, 죽은 자의 부활이 없다면(12-19). 고린도 성도들 중에는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헬라 철학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영은 선하고 육은 악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육체를 영혼의 무덤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죽어 자유롭게 된 영혼이 부활하여 육체를 갖게 되는 것은 더 낮은 상태가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의 말대로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을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면 우리가 전파하는 것도 헛것입니다. 또 우리의 믿음도 헛것이 됩니다. 또 우리가 하나님의 거짓 증인으로 발견될 것입니다. 15절을 보십시오.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일이 없으면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지 아니하셨을 것입니다.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일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었을 터이요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으면 우리의 믿음도 헛되고 우리는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입니다.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일 것입니다. 짐 엘리엇과 친구 네 명은 에콰도르 와다니 족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갔다가 바로 순교하였습니다. 한 기자는 “도대체 이 무슨 낭비인가!”라고 말했습니다. 그들의 삶은 헛되어 보입니다. 그러나, 2년 후 다섯 명의 아내들은 자녀들을 데리고 그곳에 가서 복음을 전했고 그 부족 전체가 복음을 영접하게 되었습니다.
만약 부활이 없다면 짐 엘리엇과 친구 네 명은 참 불쌍한 사람이 됩니다. 정말 그들의 삶이 헛되이 낭비된 듯 여겨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것 처럼 그들도 영광스러운 부활을 얻게 되며 하나님 나라에서 큰 상급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들의 희생으로 그들은 또한 많은 영혼들을 얻었기에 더욱 그 삶이 값진 삶이 됩니다. 어떤 삶이 과연 낭비하는 삶이요 어리석고 헛된 삶일까요? 하나님을 떠나 죄를 짓고 죄의 쾌락 속에 빠져 허랑방탕한 삶을 사는 탕자의 삶이 더욱 헛되고 낭비하는 삶이 아닐까요?
오늘날 부활이 없더라도 현실에 충실하게 살아가면 된다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현실에 충실하게 살더라도 모든 사람은 결국 죽음에 직면하게 되고 절망하게 됩니다. 사람들이 현실에 충실하고자 애를 쓰는 가운데 여행을 하고 먹고 싶은 것을 마음껏 먹고 놀고 싶은 것을 즐기면서 살아갑니다. 그런데, 쾌락을 추구하고 세속적인 삶을 사는 마음의 동기는 허무함을 잊고자 하는 것입니다. 잠시는 잊혀질 수 있지만 이것은 근본적인 해결책이 아닙니다. 부활 신앙만이 근본적인 해결책이 됩니다.
셋째, 만유의 회복(20-28). 20절을 보십시오. 사도바울은 일부 고린도교인들의 부활에 대한 불신앙을 정면으로 반박합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예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서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 첫 열매는 다음 열매를 보장합니다. 사망이 아담 한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같이 죽은 자의 부활도 예수 그리스도 한 사람으로 말미암습니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을 것입니다. 그러나 각각 자기 차례대로 될 것입니다. 먼저는 첫 열매인 그리스도요 다음에는 그가 강림하실 때에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입니다. 그 후에는 마지막입니다. 그가 모든 통치와 모든 권세와 능력을 멸하시고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칠 때입니다. 모든 통치와 권세와 능력은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반대하는 모든 악의 세력을 의미합니다. 맨 나중에 멸망 받을 원수는 사망입니다. 우리를 항상 두렵게 했던 죽음을 그리스도께서 멸하실 것입니다. 그래서 마지막 날에는 만유의 질서가 회복되어서 영원한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지게 됩니다. 28절을 보십시오. “만물을 그에게 복종하게 하실 때에는 아들 자신도 그 때에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신 이에게 복종하게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만유의 주로서 만유 안에 계시려 하심이라.”
넷째,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29-34). 당시에 죽은 자들을 위하여 세례를 받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이는 죽은 자들이 다시 살아난다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31,32절을 보십시오.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내가 사람의 방법으로 에베소에서 맹수와 더불어 싸웠다면 내게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지 못한다면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 하리라.” 바울은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때마다 위험을 무릅쓸 뿐만 아니라 날마다 죽노라고 단언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하므로 동족들의 많은 핍박을 받았습니다. 유대인들은 바울을 율법을 파괴하는 자요 이방인과 교제하는 자로 비난하여 죽이고자 하였습니다. 에베소에서는 아데미 우상을 섬기는 자들이 소요를 일으켜 바울을 찢을 것처럼 달려들었습니다. 바울은 루스드라에서 돌에 맞아 죽을 뻔 하였습니다. 이런 반대와 핍박 속에서도 그는 불사조와 같이 살아남아 복음을 전했습니다. 날마다 죽는다는 그의 고백은 날마다 부활의 능력을 체험하는 삶을 살았다는 고백이기도 합니다. 그는 만약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지 못한다면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며 인생을 즐기는 삶을 살았을 것이라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부활하셨을 뿐만 아니라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고 우리도 반드시 부활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부활신앙을 가진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33,34절을 보십시오. “속지 말라 악한 동무들은 선한 행실을 더럽히나니 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말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가 있기로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기 위하여 말하노라.” 악한 동무들은 죄를 즐기자고 유혹합니다. 죄 짓는 것이 재미있다고 속입니다. 그러나 이는 선한 행실을 더럽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죄 사함을 받고 깨끗하게 되었으면 하나님 앞에서 깨어 순결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생명의 부활과 심판의 부활이 있기 때문입니다. 요5:28-29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말씀의 결론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죄를 위해 죽으시고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심으로 우리를 죄와 죽음에서 구원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헛되이 믿지 아니하면 그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습니다. 이 구원은 현재적으로도 체험되는 구원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사도바울이 이 복음으로 죽음의 두려움을 능히 이기고 담대히 부활의 증인의 삶을 살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JBF 학생들 안에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에 대한 분명한 믿음을 허락하여 주셔서 주님의 구원을 현재적으로 맛보며 죄와 죽음을 능히 이기는 삶 살게 하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말씀 | 고린도전서 15:1-34
요절 | 고린도전서 15:20
부활의 첫 열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찬양합니다. 말씀을 통해 부활하신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영접하는 시간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예수 그리스도 부활의 증인들(1-11). 1,2절을 보십시오. 바울은 문제 많은 고린도 성도들에게 복음 신앙이 필요함을 알고 자신이 전한 복음을 다시 생각나게 합니다. 그들이 만일 바울이 전한 그 말을 굳게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그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헛되이 믿는다는 것은 무엇을 말할까요? 이것은 말로는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믿는다 하면서도 실제로는 안 믿는 것을 말합니다. 복음을 우리가 정말 믿으면 그 믿음으로 우리는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바울이 전한 복음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3,4절을 보십시오.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이는 복음 진리의 핵심입니다. 성경대로 예수님이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살아나셨습니다. 사람들의 문제가 많이 있습니다. 물질 문제, 인간 갈등 문제, 성격 문제, 빈부격차, 성차별, 폭력과 살인 등등 많은 문제가 있지만 성경은 근본 원인을 죄 문제로 보고 있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감사하지 않고 하나님을 떠나서 사는 것이 죄의 뿌리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습니다. 죄와 죽음으로 인해서 사람이 불행하고 비참한 것입니다.
그런데, 나와 우리의 죄를 해결하기 위해서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죄가 없는 분이신데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 오셔서 우리 대신 저주를 받으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물과 피를 쏟고 죽으셨고 장사지낸 바 되셨습니다. 그리고 삼일 만에 성경대로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 누구에게 보이셨습니까? 5-8절을 보십시오.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두 제자에게와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 중에 지금까지 대다수는 살아 있고 어떤 사람은 잠들었으며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와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대개 어떤 일에 대한 증인은 두 명 이상이면 증거 능력이 충분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한 증인들은 오백 명이 훨씬 넘습니다. 일시에 오백여 명이 본 것은 그의 부활이 환상이 아니라는 것을 말해줍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제자들에게 아주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지금까지는 죽음은 끝이요 패배라 여겼고 죽음에 대해서는 생각하기도 싫어했습니다. 이 땅에서의 영광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고 그 영광을 얻고자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좇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처참하게 십자가에서 죽으셨고 그들의 꿈은 산산조각 났습니다. 이제 그들은 도망자의 신세가 되었고 두려워서 숨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부활하셔서 그들 눈앞에 나타나셨고 이는 그들의 가치관과 인생관을 송두리째 뒤흔들어 버렸습니다. 이 땅의 일들이 전부라고 생각했는데 그 너머에 놀라운 세계가 있음을 인식하기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죽음이 두려워 계집종 앞에서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던 베드로가 종교지도자들의 위협에도 굴하지 않고 담대히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하는 담대한 복음전도자가 되었습니다. 그가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하다가 로마에서 십자가 형을 받았을 때, 그는 자신은 예수님과 같은 모양으로 십자가에 못 박힐 수 없다고 해서 거꾸로 십자가에 못 박혀 순교했습니다. 증인 중에 예수님의 친형제 야고보도 있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가족이었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함께 살았습니다. 가족은 모든 것을 다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속일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도 예수님의 부활을 목도하고 변화되어 예루살렘 총회의 회장이 되었습니다. 거짓을 위해서 죽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 수많은 부활의 증인들이 순교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목격한 사실을 부인할 수 없어서 목숨을 바쳐서 부활을 증거했습니다.
증인들 중에서 사도 바울의 변화는 예수님의 부활의 확실함을 말해줍니다. 그는 본래 예수님을 믿지도 않았고 신자들을 박해하는 일에 앞장 섰던 사람이었습니다. 스데반 집사를 돌로 쳐 죽이는데 앞장을 섰습니다. 자기 나라 유대에서 다른 나라 다메섹까지 가서 신자들을 잡아다가 감옥에 쳐 넣고자 하였습니다. 이런 그가 부활하신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그의 빛을 비추임 받고 쓰러졌습니다. 그 이후에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는 자신에 대해서 어떻게 고백을 하고 있습니까?
9,10절을 보십시오. “나는 사도 중에 가장 작은 자라. 나는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 받기를 감당하지 못할 자니라.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한 사도바울의 변화된 삶과 가치관에 대해 빌립보서에서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빌3:5-12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부활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이 세상이 전부입니다. 이 세상에서의 성공이 최고의 가치이며 그것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자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을 믿고 죽음 너머에 놀라운 세계가 있음을 믿는 사람들은 그 가치관이 달라집니다. 부활신앙은 머리 속에 관념적인 것이 아니라 실제적인 것이며 우리의 삶을 변화시킵니다. 예수님의 부활의 증인들을 열거하므로 부활의 확실성을 증거한 후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11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나나 그들이나 이같이 전파하매 너희도 이같이 믿었느니라.”
둘째, 죽은 자의 부활이 없다면(12-19). 고린도 성도들 중에는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헬라 철학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영은 선하고 육은 악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육체를 영혼의 무덤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죽어 자유롭게 된 영혼이 부활하여 육체를 갖게 되는 것은 더 낮은 상태가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의 말대로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을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면 우리가 전파하는 것도 헛것입니다. 또 우리의 믿음도 헛것이 됩니다. 또 우리가 하나님의 거짓 증인으로 발견될 것입니다. 15절을 보십시오.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일이 없으면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지 아니하셨을 것입니다.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일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었을 터이요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으면 우리의 믿음도 헛되고 우리는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입니다.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일 것입니다. 짐 엘리엇과 친구 네 명은 에콰도르 와다니 족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갔다가 바로 순교하였습니다. 한 기자는 “도대체 이 무슨 낭비인가!”라고 말했습니다. 그들의 삶은 헛되어 보입니다. 그러나, 2년 후 다섯 명의 아내들은 자녀들을 데리고 그곳에 가서 복음을 전했고 그 부족 전체가 복음을 영접하게 되었습니다.
만약 부활이 없다면 짐 엘리엇과 친구 네 명은 참 불쌍한 사람이 됩니다. 정말 그들의 삶이 헛되이 낭비된 듯 여겨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것 처럼 그들도 영광스러운 부활을 얻게 되며 하나님 나라에서 큰 상급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들의 희생으로 그들은 또한 많은 영혼들을 얻었기에 더욱 그 삶이 값진 삶이 됩니다. 어떤 삶이 과연 낭비하는 삶이요 어리석고 헛된 삶일까요? 하나님을 떠나 죄를 짓고 죄의 쾌락 속에 빠져 허랑방탕한 삶을 사는 탕자의 삶이 더욱 헛되고 낭비하는 삶이 아닐까요?
오늘날 부활이 없더라도 현실에 충실하게 살아가면 된다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현실에 충실하게 살더라도 모든 사람은 결국 죽음에 직면하게 되고 절망하게 됩니다. 사람들이 현실에 충실하고자 애를 쓰는 가운데 여행을 하고 먹고 싶은 것을 마음껏 먹고 놀고 싶은 것을 즐기면서 살아갑니다. 그런데, 쾌락을 추구하고 세속적인 삶을 사는 마음의 동기는 허무함을 잊고자 하는 것입니다. 잠시는 잊혀질 수 있지만 이것은 근본적인 해결책이 아닙니다. 부활 신앙만이 근본적인 해결책이 됩니다.
셋째, 만유의 회복(20-28). 20절을 보십시오. 사도바울은 일부 고린도교인들의 부활에 대한 불신앙을 정면으로 반박합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예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서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 첫 열매는 다음 열매를 보장합니다. 사망이 아담 한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같이 죽은 자의 부활도 예수 그리스도 한 사람으로 말미암습니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을 것입니다. 그러나 각각 자기 차례대로 될 것입니다. 먼저는 첫 열매인 그리스도요 다음에는 그가 강림하실 때에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입니다. 그 후에는 마지막입니다. 그가 모든 통치와 모든 권세와 능력을 멸하시고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칠 때입니다. 모든 통치와 권세와 능력은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반대하는 모든 악의 세력을 의미합니다. 맨 나중에 멸망 받을 원수는 사망입니다. 우리를 항상 두렵게 했던 죽음을 그리스도께서 멸하실 것입니다. 그래서 마지막 날에는 만유의 질서가 회복되어서 영원한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지게 됩니다. 28절을 보십시오. “만물을 그에게 복종하게 하실 때에는 아들 자신도 그 때에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신 이에게 복종하게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만유의 주로서 만유 안에 계시려 하심이라.”
넷째,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29-34). 당시에 죽은 자들을 위하여 세례를 받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이는 죽은 자들이 다시 살아난다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31,32절을 보십시오.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내가 사람의 방법으로 에베소에서 맹수와 더불어 싸웠다면 내게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지 못한다면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 하리라.” 바울은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때마다 위험을 무릅쓸 뿐만 아니라 날마다 죽노라고 단언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하므로 동족들의 많은 핍박을 받았습니다. 유대인들은 바울을 율법을 파괴하는 자요 이방인과 교제하는 자로 비난하여 죽이고자 하였습니다. 에베소에서는 아데미 우상을 섬기는 자들이 소요를 일으켜 바울을 찢을 것처럼 달려들었습니다. 바울은 루스드라에서 돌에 맞아 죽을 뻔 하였습니다. 이런 반대와 핍박 속에서도 그는 불사조와 같이 살아남아 복음을 전했습니다. 날마다 죽는다는 그의 고백은 날마다 부활의 능력을 체험하는 삶을 살았다는 고백이기도 합니다. 그는 만약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지 못한다면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며 인생을 즐기는 삶을 살았을 것이라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부활하셨을 뿐만 아니라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고 우리도 반드시 부활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부활신앙을 가진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33,34절을 보십시오. “속지 말라 악한 동무들은 선한 행실을 더럽히나니 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말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가 있기로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기 위하여 말하노라.” 악한 동무들은 죄를 즐기자고 유혹합니다. 죄 짓는 것이 재미있다고 속입니다. 그러나 이는 선한 행실을 더럽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죄 사함을 받고 깨끗하게 되었으면 하나님 앞에서 깨어 순결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생명의 부활과 심판의 부활이 있기 때문입니다. 요5:28-29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말씀의 결론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죄를 위해 죽으시고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심으로 우리를 죄와 죽음에서 구원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헛되이 믿지 아니하면 그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습니다. 이 구원은 현재적으로도 체험되는 구원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사도바울이 이 복음으로 죽음의 두려움을 능히 이기고 담대히 부활의 증인의 삶을 살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JBF 학생들 안에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에 대한 분명한 믿음을 허락하여 주셔서 주님의 구원을 현재적으로 맛보며 죄와 죽음을 능히 이기는 삶 살게 하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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