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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후6강.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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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곽누가
댓글 0건 조회 42회 작성일 18-02-04 1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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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고린도후서 제 6 강
말씀 | 고린도후서 6:11-7:16
요절 | 고린도후서 7:10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의 유익을 배울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세상 근심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따라 죄로 인해 근심하며 애통하며 회개하는 삶 살기를 기도합니다.
 
11-13절을 보십시오. “고린도인들이여 너희를 향하여 우리의 입이 열리고 우리의 마음이 넓어졌으니 너희가 우리 안에서 좁아진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 심정에서 좁아진 것이니라. 내가 자녀에게 말하듯 하노니 보답하는 것으로 너희도 마음을 넓히라.” 앞에서 배운 것처럼 고린도 성도들과 바울 사이에 갈등이 있었습니다. 고린도 교회에 들어온 거짓 사도들로 인해 바울의 사도권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온 정성으로 섬겼는데, 그 결과가 반대와 배척 뿐일 때, 이들에 대해 마음을 넓게 갖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들을 향해서 마음을 넓혔습니다. 마음이 열린 사람은 입이 열립니다. 마음이 닫히면 입도 닫힙니다. 바울은 아비의 마음으로 그들에게 마음을 열고 이야기를 합니다. 이에 비해 고린도 성도들 중에는 바울이 사도권에 대해서 공격을 받고 있을 때 지원 하지 않고 입을 닫고 있었습니다. 그 후 바울의 말을 듣고 회개하여 돌이킨 사람도 있고, 어떤 고린도 성도들은 섭섭한 마음을 갖고, 자존심을 상해하고, 마음이 닫혀서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이에 대해 바울은 그들에게 자신의 태도에 보답하는 양으로 마음을 넓히라고 권면합니다. 목자도 인간이기 때문에 비난하고 배반하는 양들로 인해서 마음에 상처를 받아서 마음을 닫아버리기 쉽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에 대해서 아비의 마음, 어미의 마음을 가졌습니다. 그래서 먼저 화해의 손길을 내밀고 있습니다.
 
한편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에게 떳떳했습니다. 7:2-4을 보십시오. “마음으로 우리를 영접하라 우리는 아무에게도 불의를 행하지 않고 아무에게도 해롭게 하지 않고 아무에게서도 속여 빼앗은 일이 없노라 내가 이 말을 하는 것은 너희를 정죄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이전에 말하였거니와 너희가 우리 마음에 있어 함께 죽고 함께 살게 하고자 함이라 나는 너희를 향하여 담대한 것도 많고 너희를 위하여 자랑하는 것도 많으니 내가 우리의 모든 환난 가운데서도 위로가 가득하고 기쁨이 넘치는도다.”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에게 불의를 행하지 않고 해롭게 한 것도 없고 속여 빼앗은 일도 없습니다. 대신에 바울은 그들이 생명을 얻게 했습니다. ‘살든지 죽든지’ 함께 살고자 함으로 고린도 교인들에 대한 그의 애정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는 디도에게 고린도 성도들에 대해서 자랑을 했습니다. 또한 그들로 인해서 환난 가운데서도 위로가 가득하고 기쁨이 넘쳤습니다. 사도 바울이 넓은 마음을 품고 그들과 소통을 하려고 노력했지만 끝까지 회개하지 않는 거짓 사도들과 그의 영향을 받는 자들에 대해서는 어떤 태도를 취했습니까?
6:14-16a을 보십시오.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 빛과 어둠이 어찌 사귀며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내가 그들 가운데 거하며 두루 행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되리라” ‘멍에’는 말이나 소가 달구지나 쟁기를 끌 때 목에 거는 나무로 만든 막대기입니다. 이스라엘은 밭에 자갈이 많아서 두 마리 소가 한 멍에를 메고 밭을 갈았습니다. 두 마리가 함께 일해야 좀 더 쉽게 좀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습니다. 두 마리 소를 멍에에 함께 멜 때는 암소는 암소끼리, 수소는 수소끼리 묶었습니다. 암소와 수소는 물론이고, 암소와 젖소를 한 멍에에 메지 않았습니다. 이는 순결을 소중하게 여겼기 때문이며 또한 능률도 순결에서 나온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서로 섞어놓으면 조화가 안 되어서 능률이 떨어집니다. 소와 나귀가 멍에를 함께 메면 소나 나귀 모두에게 엄청난 고통이 됩니다. 뿐만 아니라 밭을 제대로 갈 수도 없습니다. 이와 같이 믿는 자가 믿지 않는 자와 함께 멍에를 메면 서로에게 큰 고통을 줍니다. 즉 사도 바울을 대적하는 사람들과 함께 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악한 영향력을 피하도록 요구합니다. 믿지 않는 자는 공동체에 있지만 실제적으로 믿지 않는 자, 또는 고린도 교회에서 추방된 자일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이 오늘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신앙의 혼합화’ 내지는 ‘신앙의 세속화’에 대한 경고입니다.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메다 보면 신앙이 혼합화 또는 세속화 되어서 신앙이 변질됩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도 믿고 산당에서 제사를 지내는 혼합주의로 인해서 신앙의 생명력을 잃어버렸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가 이 세상에 살면서 불신자들과 일체의 관계를 끊고 살 수가 없습니다. 그러려면 산 속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예수님이 좋은 모델이 되십니다. 예수님은 죄인과 함께 하셨고 죄인들의 친구라고 조롱받기도 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죄로 오염되지 않으시고 오히려 그 거룩함으로 죄인들을 전염시키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거룩함을 덧입고 주변을 거룩하게 하는 것,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16b, 7:1 “내가 그들 가운데 거하며 두루 행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되리라 그런즉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을 가진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하게 하자.” 하나님께서는 바벨론의 우상숭배와 이방문화 속에서 살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들 중에서 나와서 따로 있으라,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고 명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성전인 우리는 세상에서 살지만 세상과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것은 마치 배가 바다에 떠다니지만, 바다 물이 배 속으로 들어와서는 안 되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 약속을 받은 자로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야 합니다. 오늘날 우상숭배, 이단적인 가르침이나 사상, 세속주의, 세상 정욕, 물질주의, 음란문화 등, ‘온갖 더러운 것’이 우리의 삶에 침투하고 있습니다. 불신자들은 말할 것도 없고 많은 신자들도 여기에 넘어지고 있습니다. 이 가운데 우리가 어떻게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며 세상에 영향력을 끼치는 삶을 살 수 있을까요? 7:8-10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내가 편지로 너희를 근심하게 한 것을 후회하였으나 지금은 후회하지 아니함은 그 편지가 너희로 잠시만 근심하게 한 줄을 앎이라. 내가 지금 기뻐함은 너희로 근심하게 한 까닭이 아니요 도리어 너희가 근심함으로 회개함에 이른 까닭이라 너희가 하나님의 뜻대로 근심하게 된 것은 우리에게서 아무 해도 받지 않게 하려 함이라.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을 사랑했기 때문에 그들의 죄 문제를 방치하지 않고 혹독한 편지를 써서 회개하도록 도왔습니다. 그랬을 때 하나님께서 그 편지를 통해서 회개에 이르는 근심을 하게 하셨습니다.
다윗은 밧새바와 간통죄를 지은 후에 나단 선지자로부터 심한 책망을 받았습니다. 그는 책망을 하나님의 뜻대로 근심하는 것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이로 인해서 회개하고 구원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반면 가인은 시기심 때문에 동생 아벨을 죽인 후에 하나님의 책망을 듣지만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도리어 핏대를 세우며 대들었습니다. 가룟 유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자기의 잘못을 자책했지만 돌이키지는 않았습니다. 사실 책망을 듣고 회개할 수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고린도 교인들이 하나님의 뜻대로 근심하게 되었을 때 놀라운 결과가 나타났습니다. 11절을 보십시오. “보라 하나님의 뜻대로 하게 된 이 근심이 너희로 얼마나 간절하게 하며 얼마나 변증하게 하며 얼마나 분하게 하며 얼마나 두렵게 하며 얼마나 사모하게 하며 얼마나 열심 있게 하며 얼마나 벌하게 하였는가 너희가 그 일에 대하여 일체 너희 자신의 깨끗함을 나타내었느니라.” 그들은 간절하게 바울을 사모하고, 바울을 변증하고, 바울을 대적한 것을 분하게 여기고, 대적하고 범죄한 자들을 징계하였습니다. 그 결과 자신들을 깨끗하게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근심할 때 회개에 이르고 깨끗함이라는 열매를 맺게 됩니다.
12절에서 바울은 자신이 편지를 썼던 목적을 밝힙니다. “그런즉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그 불의를 행한 자를 위한 것도 아니요 그 불의를 당한 자를 위한 것도 아니요 오직 우리를 위한 너희의 간절함이 하나님 앞에서 너희에게 나타나게 하려 함이로라.” 의로운 사람이 죄에 빠지지 않고 더욱 의롭고 성숙해 가는 것이 하나님 편에서는 매우 중요합니다. 또한 목자는 의로운 자들을 깨우쳐 죄에 빠지지 않도록 격려하고 사랑하기를 힘써야 합니다. 우리는 문제가 생길 때 문제에 매몰되어 부정적이 되기 쉽습니다. 오늘날도 문제에 너무 집중하다보면 훨씬 더 많은 선한 일들과 감사한 일들과 생명력이 넘치는 일들을 간과하고 힘을 빼기 쉽습니다. 우리는 선한 일들을 더욱 장려하여 악한 일들을 제압하도록 해야 합니다. 한마디로 선으로 악을 이겨야 합니다. 고린도 교인들에 대한 바울과 디도의 마음이 어떻게 바뀌었습니까? 13-16절을 보십시오. 바울은 디도에게 고린도 교인들에 대해서 자랑을 했습니다. 디도는 고린도 교인들을 직접 만나고 그들의 순종을 통해서 그들을 더욱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의 모든 일에 대해서 신뢰하게 되었고 그로 인해서 기뻐하였습니다. 고난이 크면 클수록 위로의 능력이 큰 것처럼, 마음에 큰 고통이 있었던 바울은 이제야 비로소 기쁨과 평강을 얻게 되었습니다.
말씀의 결론입니다. 우리는 살아계신 하나님이 우리 안에 계시므로 하나님의 성전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아버지가 되시고 우리는 그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하게 하자” 오늘날 이 시대는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이 넘쳐나고 우리를 삼키려 합니다. 때때로 그 더러움에 빠져 방황하는 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은 내 안에 있는 더러운 죄 문제를 안고 근심하며 회개하기를 원하십니다. 요일1:9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이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사하실 뿐 아니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사 그의 거룩함으로 나아가게 하십니다. 우리 UBF 공동체는 소감쓰기라는 좋은 전통이 있습니다. 그러나 소감을 진실하게 쓰며 죄를 고백하고 회개하는 것은 쉽지가 않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죄를 이기게 하는 비결임을 깨닫습니다. 내 안에 있는 죄의 어두움을 이길 수 있는 비결은 빛을 비추면 됩니다. 모든 숨은 일이 빛 가운데 드러날 때, 사탄과 죄의 어두움의 세력이 나를 떠나게 됩니다. 그래서 야고보서에는 “그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백하며”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 JBF 학생들이 하나님 앞에 소감을 진실하게 쓰므로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근심하며 죄를 회개하고 타락한 이 시대를 이기는 삶 살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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