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ntitled Document
자유|어린이|JBF|찬양부|기도요청|오케스트라|좋은글|도서부

고후 4강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 곽누가
댓글 0건 조회 25회 작성일 18-01-21 14:34

본문

018 고린도후서 제 4 강

말씀 | 고린도후서 4:7-5:10

요절 | 고린도후서 4:7

질그릇에 담긴 보배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오늘 말씀에서 사도바울은 보배되신 예수님이 질그릇 같은 우리 안에 계심을 증거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으면 예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십니다. 오늘 말씀에서 보배되신 예수님께서 내 안에 계시는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가 배울 수 있습니다. 말씀을 통해 우리 안에 계신 보배되신 예수님을 발견하고 그의 은혜로 사는 것을 배우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질 그릇에 담긴 보배로 말미암아 낙심하지 않습니다. 7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이 보배’는 예수 그리스도요 질그릇은 우리 신자들입니다. 질그릇은 깨지기 쉽고 보잘것 없고 연약합니다. 질그릇 같은 우리에게는 연약함으로 인한 여러 어두움이 있습니다. 내 죄로 말미암는 어두움이 있습니다. 죽음권세 아래 허무의 어두움이 있습니다. 현실의 여러모양의 어려움으로 인한 어두움이 있습니다. 특히 우리나라는 북한으로 인한 전쟁 위협의 어두움이 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이 어두움들을 이길 수 있습니까? 빛이 비치면 됩니다. 보배되신 예수님은 빛이십니다. 요한복음 8:12 "예수께서 또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보배되신 예수님에게는 어두움이 없고 운명이 없고 슬픔이 없고 죽음이 없습니다. 예수님 안에는 생명과 빛과 기쁨과 평화 만이 충만합니다. 이 보배되신 예수님을 영접함으로 우리 안에 빛을 소유할 때 어두움이 물러가서 우리도 보배와 같은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새해가 되면서 한 해의 방향을 잡게 되었는데 그 때 제게 두 가지 생각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못된 나무이고 다른 하나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마 7:17-19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느니라. 나는 좋은나무일까요 못된나무일까요? 저는 곰곰히 생각해보았습니다. 제가 제 본성대로 하고 싶은대로 그냥 내버려두면 어떤 삶을 살게 될까요? 아름다운 열매를 맺으며 멋있는 삶을 살까요? 아닙니다. 탕자와 같이 정욕을 좇으며 인생을 탕진하는 허랑방탕한 삶을 살 수 밖에 없습니다. 때때로 우리 학생들은 부모님이 내 삶에 간섭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제발 내 마음대로 하도록 내버려두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내버려두면 여러분들은 아주 멋진 삶을 살 수 있을까요? 아니면 죄에 끌려다니며 부끄러운 삶을 살며 인생을 허비하게 될까요?

탕자도 아버지의 간섭이 싫어서 아버지의 유산을 요구하고 아버지를 떠나 먼 나라로 떠났습니다. 그는 이제는 자유다 생각하며 그의 본성대로 살았습니다. 그러면 그 삶이 좋은 열매를 맺는 아름다운 삶이었습니까? 재산과 자신의 인생을 허비하는 허랑방탕한 삶이었습니다. 이로써 저는 저의 본성에 죄가 깊이 박혀있는 죄인이요 본질상 진노의 자식임을 다시금 깨닫게 되었습니다. 내 죄악된 본성으로 말미암아 내 안에는 어두움만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런 내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십자가의 의미에 대해서 바울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갈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내가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박혀 죽은 것. 즉 나의 죄악된 본성이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죽었습니다. 그래서 고후 5: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말씀처럼 예수님께서 내 안에 새로운 피조물로 새 창조를 이루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죄악된 본성을 좇아 어두운 생각을 하며 어두움에 갇혀 있지 않게 되었습니다. 내가 새로운 피조물로 재창조되었음을 믿고 빛의 생각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보배되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가능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보배를 질그릇에 담으셨습니다. 보배는 보배합이나 아니면 강철로 만든 금고에 담아 보관해야 합니다. 그런데 보배를 질그릇에 담은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심히 큰 능력은 고난 속에서 무너져 내리지 않고 믿음을 지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보배되신 예수님 때문에 질그릇 같은 우리가 깨지지 않고, 믿음을 버리지 않도록 보호하십니다.

바울은 자신의 사역 현장에서 심히 큰 능력이 어떻게 나타났는지 증거합니다. 8,9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바울은 무수히 많은 고난을 받았지만 눌리지 않았습니다. 어찌 해야 할지 몰라서 답답한 상황에 처하기도 하였지만 낙심하지 않았습니다. 박해를 받지만 버림을 당하지 않고, 거꾸러뜨림을 당하지만 죽지는 않았습니다. 바울은 고난이 주는 절망과 낙심과 어두움을 이겨냈습니다. 그가 어떻게 이런 고난을 극복할 수 있었을까요? 그가 두려움이 없는 용감한 전사였기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그 역시 질그릇 같이 쉽게 깨어지는 연약한 존재이나 그 안에 보배되신 예수님이 계셨기에 능히 그 어려움을 이길 수 있었습니다. 그는 어려운 상황을 보며 마음이 어두워지는 대신 그 안에 계신 보배되신 예수님, 모든 상황보다 더 크신 예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이 때그는 그 내면에 고난으로 말미암는 어두움을 이길 수 있었습니다.

제가 자기 본성 대로 마음대로 살 때 제 안에 많은 어두움이 있었습니다. 여러 문제에 부딪힐 때, 불안한 미래를 생각할 때 제 마음이 어두워졌습니다. 왜냐하면 미래와 몇몇 문제들은 제가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에서 그 해결책을 발견합니다.

그것은 내 안에 계신 보배되신 예수님을 바라보고 의지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내 죄악된 본성이 십자가에 못박혔기 때문에 저는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고 더 이상 죄악된 본성이 이끄는대로 살지 않을 수 있습니다. 죄악된 본성은 내게 여러 걱정거리들을 생각하며 염려하고 근심하라 하는데 새로운 피조물의 나는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기대하며 기도하라 합니다. 옛 자아가 죽었기 때문에 제가 더 이상 옛 자아의 소리를 들을 필요가 없습니다. 힘든 상황 앞에서 옛 자아는 불평하고 사람들과 다투며 원망하라 하는데 새 자아는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하라 합니다. 이는 보배되신 예수님께서 모든 것을 합력해서 선을 이루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옛 자아에 끌려다니면 어두움 속에 갇혀서 끊임없이 염려하며 부끄러운 열매 밖에 맺을 수 없지만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음을 깨닫고 새 자아를 좇으면 제 안에 빛으로 가득하게 됨을 깨닫습니다. 이 빛은 상황과 상관 없이 내 안에 보배되신 예수님이 계실 때 가능합니다. 보배되신 예수님을 허락하셔서 모든 상황에서 낙심하지 않고 하나님이 하실 일을 기대하며 이기게 하시는 하나님께 감사와 경배를 드립니다.



10,11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우리 살아 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바울이 고난을 이겨낼 수 있던 힘은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와 믿음으로 연합하는 것에 있었습니다. 바울은 사도직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죽는 일, 즉 대속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사도 바울이 죽을 고생을 할수록 양들 가운데서는 생명의 역사가 강하게 나타났습니다.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역사하느니라(12).”



둘째, 보배되신 예수님께서 죽음으로 말미암는 어두움을 물리치셨습니다. (4:13-5:10). 13,14절을 보십시오. “기록된 바 내가 믿었으므로 말하였다 한 것 같이 우리가 같은 믿음의 마음을 가졌으니 우리도 믿었으므로 또한 말하노라. 주 예수를 다시 살리신 이가 예수와 함께 우리도 다시 살리사 너희와 함께 그 앞에 서게 하실 줄을 아노라.” 예수님을 다시 살리신 하나님이 우리도 다시 살리십니다. 부활의 믿음이 있었을 때, 죽음의 세력들이 바울의 마음을 어둡게 하지 못하였습니다. 고린도후서 4:16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 우리의 육체는 시간이 갈수록 늙고 눈도 침침해지고 머리도 빠지고 기억력도 흐릿해지고 여기저기 아프고 몸의 기능이 저하됩니다. 모든 기능들을 하나씩 잃어버리는 것을 보며 이러다가 죽는구나 하는 생각을 할 때 우리 안에 깊은 어두움이 생깁니다. 그러나 보배되신 예수님이 그 안에 있는 사람은 속사람 즉 ‘복음을 통해 거듭난 영혼’이 날로 새로워집니다. 이들 안에는 죽음의 어두움이 아니라 부활의 영광으로 가득차게 됩니다. 17,18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 대개 예수님이 없는 사람들은 보이는 것, 잡히는 것에 최고의 가치를 두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때가 되면 그들은 자신의 삶이 신기루를 좇는 헛된 삶이었음을 깨닫습니다.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이 영원합니다. 바울은 현재 보이지 않는 영광을 바라보며 이렇게 고백하였습니다.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롬8:18).” 장차 나타날 영광을 바라볼 때 현재의 고난으로 인한 어두움은 눈녹듯이 사라집니다.

5:1절을 보십시오.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느니라." 장막 집은 유목민들이 이동을 자유롭게 해야 했기 때문에 세우거나 철수하는 것이 쉬운 임시적으로 만든 집입니다. 견고하고 안정되게 지어진 집과 대조를 이룹니다. 바울은 인간의 육체를 장막 집에 비유하였습니다.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은 언젠가는 무너집니다. 이 세상에서 무너지지 아니할 육체는 없습니다. 모든 육체가 낡아지면 죽고 맙니다. 장막집이 무너질 때 사람들은 슬퍼하고 절망하고 허무해 합니다.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을 우리에게 주실 것입니다. 썩지 않고 쇠하지 않고 신령하고 강하고 거룩한 몸을 덧입게 될 것입니다. 참으로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합니다. 이렇게 입음은 우리가 벗은 자들로 발견되지 않으려 함입니다. 참으로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진 것 같이 탄식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오히려 덧입고자 함이니 죽을 것이 생명에 삼킨 바 되게 하려 함입니다. 무엇을 벗고자 함이 아니라는 말일까요? 사실 땅에서 살면서 많은 힘들고 어려운 일을 겪으면 삶을 벗고 싶어 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삶의 짐이 너무 무겁다고 생각하는 이는 죽어서 그 짐을 벗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벗고자 함이 아니라 입고자 한다고 합니다. 무엇을 입고자 합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입고자 합니다. “오히려 덧입고자 함이니 죽을 것이 생명에 삼킨 바 되게 하려 함이라.” 짐이 무거우면 죽어서 짐을 벗고자 하는데, 바울은 오히려 더 큰 생명을 덧입어 그 짐을 가볍게 지고자 합니다. 삶의 짐이 무거울 때 짐을 벗어버리는 것도 사는 방법입니다. 그러나 그러면 삶을 놓칠 수 있습니다. 사람이 부담스러워 사람을 떠나면 짐은 가벼울 수 있지만 사람을 버려야 합니다. 그런데 지금보다 생명력이 더 커지고 힘이 더 커지면 짐이 더 이상 짐이 되지 않습니다. 어깨에 힘들게 메고 가던 짐을 차에 싣고 가면 조금도 힘이 들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짐도 버리지 않게 되고 그 짐 안에 있는 것들을 누릴 수 있습니다. 공부하는 것은 쉽지만은 않습니다. 공부하려면 짐을 많이 져야 합니다. 공부 안 하고 게임만 하면 재미가 있고 부담감이 없습니다. 그러나 게임만 하면 후에 결국 후회하게 됩니다. 공부를 해놓으면 나중에 후회하지 않습니다. 공부가 힘드니 벗으려고 할 것이 아니라 공부할 힘을 덧입고자 하면 됩니다. 공부할 힘을 덧입고 공부하면 장래가 밝습니다. 어떻게 그런 힘을 덧입을 수 있을까요?

5:7절을 보십시오. "우리는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행하지 아니함이로다" 그 비결은 질그릇 같은 내 안에 계신 보배되신 예수님을 믿고 의지하는데 있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모든 어려운 상황보다 더 크십니다. 우리가 보이는 상황만 바라보면 끊임없이 염려하며 요동할 수 밖에 없습니다. 대신에 내 안에 계신 보배되신 예수님을 믿고 의지할때 예수님이 주시는 능력을 덧입음으로 능히 이기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행하지 않는 것이 능력을 덧입는 비밀입니다.

9,10절을 보십시오. “그런즉 우리는 몸으로 있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기를 힘쓰노라.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보배되신 예수님을 모시고 사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이 능력임을 압니다. 또 그 사랑 때문에 예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삽니다. 또 그가 곧 심판주로 오실 것을 알기 때문에 그를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삽니다. 바울은 빌립보서 1:20에서 고백합니다.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롬14:8)” 그는 사나 죽으나 그리스도를 존귀하게 하기를 원했습니다.

신자는 이 땅에서 육체로 살아가며 행했던 모든 일을 근거로 하나님 앞에서 심판을 받습니다.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서는 그 사람이 그 몸으로 행한 것으로 평가를 받습니다. 예수님께서 나의 모든 것을 심판하신다 생각할 때 우리는 함부로 살 수 없습니다.

말씀의 결론입니다. 우리는 질그릇과 같이 연약하지만 보배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담고 있습니다. 심히 큰 능력이 이 예수님으로 부터 나옵니다. 예수님은 우리 내면의 모든 어두움들을 몰아내시는 빛이 되십니다. 우리 JBF 학생들이 보배되신 예수님을 영접하므로 예수님으로 말미암이 빛으로 충만한 인생 살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네이버 메일 앱에서 보냈습니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Total 295건 2 페이지

검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