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송년말씀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사7: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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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송년특강
말씀 | 이사야 7:1-25
요절 | 이사야 7:14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오늘은 2017년 12월 31일, 2017년의 마지막 날입니다. 오늘만 지나면 2018년이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은 2017년이란 시간열차의 종착지이면서 동시에 2018년으로 시간열차를 갈아타야 하는 시간의 환승역이라 할 수 있습니다. 환승역은 갈아타는 역입니다. 전철을 갈아 탈려면 타고 온 전철에서 내려야 합니다. 그런데 내리지 않고 계속타고 있으면 어떻게 됩니까? 차고지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렇기에 오늘 우리는 모두 2017년이란 시간 열차에서 내려야 합니다. 그것이 흑역사이든 백역사이든 일단 내려서 과거의 차고지로 보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새로운 기대와 소망을 싣고 다가오는 2018년을 기다려야 합니다. 여러분 오늘은 시간의 환승역입니다. 한분도 빠짐없이 내리시고 2018년의 시간열차를 타시기 바랍니다. 저는 시간열차 기관사 정베드로 였습니다.
2017년 마지막 날 마지막 예배에 여러분과 함께 나눌 말씀의 제목은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입니다. 임마누엘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이 어떤 역사적인 배경 가운데 이 말씀을 주셨는지는 그리고 이 말씀이 어떻게 역사 속에서 그리고 예수님을 통해 성취되었는지 그리고 이 말씀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가 무엇인지를 배우게 될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 모두가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큰 것인지를 깨닫고 새해에는 더욱더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넘치기를 기도합니다.
오늘 말씀은 BC734년 유다왕 아하스가 통치하던 때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유다왕 아하스는 BC736년 약관 20세에 왕위에 올라는데 그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왕이 아니라 우상을 숭배하고 북이스라엘과 아람을 견제하기 위해 당시 급부상하고 있던 앗수르를 의지하던 왕이었습니다. 이런 아하스를 못마땅하게 여긴 북이스라엘 왕 베가와 아람 왕 르신이 그를 폐위시키고, 다브엘의 아들을 왕으로 세우기 위해서 연합하여 유다를 침공했습니다. 이 때 아람 왕이 심히 많은 무리를 다메섹으로 끌어 오고, 베가는 12만 명을 죽이고 왕의 아들과 총리를 죽이고 10만 명을 포로로 끌고 갔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이 산 위에 있는 요새인지라 유다왕 아하스를 폐위시키는 것을 실패했습니다. 이것이 아람과 북이스라엘의 1차 침공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다윗의 집에 알려 아람이 북이스라엘과 동맹하고 다시 2차 침공을 하려 한다는 것을 알렸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유다왕 아하스와 그의 백성들의 마음이 어떠했습니까? 2절을 봅시다. “어떤 사람이 다윗의 집에 알려 이르되 아람이 에브라임과 동맹하였다 하였으므로 왕의 마음과 그의 백성의 마음이 숲이 바람에 흔들림 같이 흔들렸더라” 유다왕 아하스의 마음과 그의 백성의 마음이 숲이 바람에 흔들림 같이 흔들렸습니다. 그들은 아람과 북이스라엘의 1차 침공 때 이미 심각한 피해와 굴욕을 당했습니다. 그런데 아람과 북이스라엘이 준비하고 있는 2차 침공은 그보다 더 무서운 결과를 각오해야만 했습니다. 전쟁의 쓰나미를 기다리고 있는 그들의 마음이 얼마나 두렵고 고통스러웠을까요?
하나님은 이때 유다왕 아하스를 돕기 위해 선지자 이사야를 그에게 보내셨습니다. 3,4절을 봅시다. “그 때에 여호와께서 이사야에게 이르시되 너와 네 아들 스알야숩은 윗못 수도 끝 세탁자의 밭 큰 길에 나가서 아하스를 만나 그에게 이르기를 너는 삼가며 조용하라 르신과 아람과 르말리야의 아들이 심히 노할지라도 이들은 연기 나는 두 부지깽이 그루터기에 불과하니 두려워하지 말며 낙심하지 말라” 하나님께서 유다왕 아하스를 돕기 위해 하신 일이 무엇입니까? 첫째로 하나님은 그를 만나주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직접 만나주신 것이 아니라 선지자 이사야를 통해 만나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이사야만 보낸 것이 아니라 그의 아들 스알야숩을 함께 보내셨습니다. 스알야숩은 이사야의 첫째아들로서 그 이름의 뜻은 “남은 자는 돌아오리라”입니다. 이를 통해 볼 때 하나님께서 이사야의 아들을 함께 보내신 이유는 유다왕 아하스와 그의 백성에게 하나님의 사랑과 소망을 전하시려 하신 것 같습니다. 하나님은 이처럼 누구가를 돕기 위해 당신의 종을 보내 주십니다. 이것이 우리는 도우시는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이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세탁자의 밭 큰 길에서 그를 만나주셨습니다. 세탁소는 더러움을 정결케 하는 장소입니다. 아하스는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 우상을 숭배하고 강대국을 의지하던 부정한 죄인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그의 죄를 씻으시고 그와 함께 하시며 그를 돕고자 하신 것입니다.
둘째로 그에게 삼가며 조용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유다왕 아하스는 전쟁을 대비하기 위해 많은 일들을 하고 있었습니다. 기혼 샘에서 물을 예루살렘 성으로 끌어들이는 수로공사를 하고 있었고 앗수르에 사신을 보내 도움을 요청해 놓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것들을 의지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평소에는 믿음이 있는 것 같은데 어려운 일이 생기면 믿음이 흔들리는 분들이 많습니다. 사업이 힘들어지고 하는 일마다 되는 일이 없고 아무리 기도해도 하나님이 침묵하시는 것 같을 때 점집을 찾는 집사님, 권사님들이 많다고 합니다. 우리도 어려운 일을 당할 때 하나님을 불신하고 눈에 보이는 것들을 의지하기 쉽습니다. 내게 도움을 줄 수 있을 것 같은 사람들을 의지하고 그들의 말에 따르기 쉽습니다. 유다왕 아하스가 그렇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하스에게 자기가 준비한 것들과 강대국 앗수르를 의지하기보다 하나님을 의지하라 하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북이스라엘과 아람은 연기나는 부지갱이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결코 아하스를 이기지 못할 것입니다. 그 뿐만 아니라 그들은 앗수르에 죽임을 당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8,9절을 봅시다. “대저 아람의 머리는 다메섹이요 다메섹의 머리는 르신이며 육십오년 내에 에브라임이 패망하여 다시는 나라를 이루지 못할 것이며 에브라임의 머리는 사마리아요 사마리아의 머리는 르말리야의 아들이니라 만일 너희가 굳게 믿지 아니하면 너희는 굳게 서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하나님은 아람과 북이스라엘의 멸망을 예언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이 말씀을 하신 날로 2년 만에 아람 왕 르신과 북이스라엘 왕 베가는 앗수르 왕 디글랏빌레셀과의 전쟁에서 폐하고 죽임을 당합니다. 그리고 북이스라엘은 BC722년 수도 사마리아가 점령을 당하고 육십오년만에 앗수르의 이주정책으로 완전히 멸망하고 맙니다. 하나님은 북이스라엘의 멸망을 거울삼아 유다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믿음에 굳게 서길 바라셨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유다의 머리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유다왕 아하스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해 말씀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영접하고 순종했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것보다 눈에 보이는 것과 현실적인 것만을 믿고자 하였습니다. 이에 하나님은 그에게 한 가지 제안을 하셨습니다. 10,11절을 봅시다. “여호와께서 또 아하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 한 징조를 구하되 깊은 데에서든지 높은 데에서든지 구하라 하시니” 하나님은 유다왕 아하스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믿기지 않는다면 한 징조를 구하라 하셨습니다. 깊은 데에서든지 높은 데에서든지 무엇이든지 구하라고 하셨습니다. 돈을 달라하면 돈을 주고 무기를 달라하면 무기를 주고 무엇이든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하스에게 믿음을 심기 위해 무슨 징조든 구하면 주기로 작정하신 것입니다. 이는 그를 향한 하나님의 일방적인 호의였습니다. 그는 이런 하나님의 호의를 받을 자격이 “1” 도 없는 자였습니다. 그는 오히려 하나님을 대적하고 수많은 죄를 지은 죄인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그에게 일방적인 호의를 베풀기로 작정하신 것입니다. 그에게 믿음을 심고자 하셨습니다. 여러분 믿음을 심는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십니까? 그것은 하나님이 그에게 자신을 주시겠다는 의미입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그돌라오멜 동맹군과 전쟁에서 큰 승리를 거둔 후에 언제 보복을 당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빠졌습니다. 그는 딸 자식하나 없이 죽을 수도 있다는 불신에 빠졌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그에게 나타나셔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아브람아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네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창15:1b) 하나님이 그의 방패가 되시고 지극히 크신 상급이 되신다는 사실을 믿을 때 그는 두려워할 필요가 없게 됩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갖게 된다는 것은 복중에 복인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주신 이토록 크신 축복을 아하스는 어떻게 했습니까? 12절을 봅시다. “아하스가 이르되 나는 구하지 아니하겠나이다 나는 여호와를 시험하지 아니하겠나이다 한지라” 그는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겠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보다 눈에 보이는 자신의 계획과 앗수르의 도움을 의지하겠다고 합니다. 그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을 나약한 것으로 여겼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 무의미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이렇게 하나님의 호의를 거절했습니다. 하나님의 크신 복을 걷어찼습니다. 그는 한마디로 구제불능이었습니다. 이 말을 듣고 이사야는 분노했습니다. 그의 불신에 대해, 하나님을 무시하는 태도에 대해 책망했습니다. 13절을 봅시다. “이사야가 이르되 다윗의 집이여 원하건대 들을지어다 너희가 사람을 괴롭히고서 그것을 작은 일로 여겨 또 나의 하나님을 괴롭히려 하느냐” 이 정도가 되면 막가자는 것입니다. 이 정도가 되면 참을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이 정도까지 갔으면 관계를 끊어야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놀라운 사실은 하나님은 그래도 아하스를 참으셨다는 것입니다. 그 뿐 아니라 그를 위해 일방적으로 한 징조를 주셨다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은 죄인을 길이 참으시며 회개하기까지 기다리시는 은혜와 자비에 풍성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유다왕 아하스와 그의 백성들에게 주신 한 징조는 무엇입니까? 14절을 봅시다.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나님이 그들에게 주신 징조는 임마누엘이었습니다. 한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인데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지을 것이라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아이가 선악을 분별할 줄 알 때가 되면 그들이 미워하는 두 왕, 즉 아람왕 르신과 북이스라엘 왕 베가가 죽임을 당할 것을 예언하셨습니다. 이 말씀이 성취되는 것을 볼 때 그들은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하실 것이요 그들에게 하신 모든 말씀이 이루어질 것을 믿을 수 있습니다.
유다왕 아하스와 그의 백성들은 아람과 북이스라엘의 2차 침공 소식에 두려워 떨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를 두려워 떨게 만드는 것은 무엇입니까? 북핵의 위협, 중국의 사드보복으로 인해 경제적 어려움, 4차 산업혁명으로 인해 없어질 직업들, 어려운 취업난, 치솟는 물가 등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우리가 두려워할 근본문제가 아닙니다. 우리가 진정 두려워하고 떨어야할 문제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우리의 죽음과 심판의 문제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다고 하셨습니다.(히9:27)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이 사실을 알지 못합니다. 이 사실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오늘 말씀에 나오는 유다왕 아하스처럼 눈에 보이는 현실과 돈과 지식과 능력을 의지하며 살고자 합니다. 하나님은 이런 것들을 의지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이런 것들이 죽음과 심판으로부터 그들을 구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구원할 완벽한 계획을 갖고 계십니다. 그것을 믿으라고 합니다. 그것이 무엇인지를 한 징조를 통해 나타내셨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처녀 마리아에게서 나실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는 우리를 구원하실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는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에 죽임을 당하셨으나 삼일만에 부활하사 우리의 주요 그리스도가 되셨습니다. 그를 믿는 자는 의롭게 됩니다. 그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습니다. 그를 믿는 자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는 우리에게 무엇입니까? 한마디로 그는 임마누엘 하나님이십니다. 그는 우리와 함께 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고 우리와 함께 하시기 위해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임마누엘 우리와 함께 하시며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 그의 놀라우신 사랑과 은혜를 높여 찬양합니다. 그를 이 땅 가운데 보내신 이유는 임마누엘입니다. 임마누엘의 은혜가 무엇보다 귀한 이유는 다른 무엇이 아닌 우리의 구원을 위해 우리에게 당신 자신을 선물로 주신 은혜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하나님이 임마누엘이심을 믿음을 때 즉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심을 믿을 때 어떤 상황 가운데서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환란 가운데서도 마음의 평강을 누릴 수 있습니다.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자신을 화목제로 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임마누엘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우리와 함께 하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우리와 함께 하시며 우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는 보혜사 성령 하나님의 은혜를 이 시간 높여 찬양합니다.
하나님은 제가 대학교 1학년 때 저를 캠퍼스 목자로 부르셨다는 확신을 갖도록 한 징조를 보여 주셨습니다. 저는 한 목자님의 권유에 순종해서 장학금 신청서를 제출했는데 아무런 자격이 되지 않았지만 학국장학회로부터 4년간 무상으로 지원받는 장학생으로 선발된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때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강하게 확신할 수 있었고 캠퍼스 목자로 결단하고 헌신할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자 한 징조를 구할 때 이를 기뻐 받으십니다. 그리고 반드시 그 징조 가운데 당신의 영광을 나타내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가장 확실한 징조는 예수 그리스도 이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주신 확실한 징조로 영접하고 나면 솔직히 다른 징조가 필요치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의 삶 가운데 이런 저런 징조들을 보여 주시고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심을 나타내시고 우리가 믿음 없는 자가 되지 않고 믿는 자가 되도록 도와 주십니다. 그렇기에 이 세상에서 가장 복된 일은 믿음을 갖는 일이요 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일은 믿음을 잃어버리는 일입니다. 모든 비극과 모든 재난의 근원은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2018년 새해에는 우리 모두가 유다왕 아하스의 길이 아니라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길로 행할 수 있길 기도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믿음의 선진들과 같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 하나님의 은혜를 새해에도 우리 가운데 풍성하게 허락해 주시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아멘
말씀 | 이사야 7:1-25
요절 | 이사야 7:14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오늘은 2017년 12월 31일, 2017년의 마지막 날입니다. 오늘만 지나면 2018년이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은 2017년이란 시간열차의 종착지이면서 동시에 2018년으로 시간열차를 갈아타야 하는 시간의 환승역이라 할 수 있습니다. 환승역은 갈아타는 역입니다. 전철을 갈아 탈려면 타고 온 전철에서 내려야 합니다. 그런데 내리지 않고 계속타고 있으면 어떻게 됩니까? 차고지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렇기에 오늘 우리는 모두 2017년이란 시간 열차에서 내려야 합니다. 그것이 흑역사이든 백역사이든 일단 내려서 과거의 차고지로 보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새로운 기대와 소망을 싣고 다가오는 2018년을 기다려야 합니다. 여러분 오늘은 시간의 환승역입니다. 한분도 빠짐없이 내리시고 2018년의 시간열차를 타시기 바랍니다. 저는 시간열차 기관사 정베드로 였습니다.
2017년 마지막 날 마지막 예배에 여러분과 함께 나눌 말씀의 제목은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입니다. 임마누엘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이 어떤 역사적인 배경 가운데 이 말씀을 주셨는지는 그리고 이 말씀이 어떻게 역사 속에서 그리고 예수님을 통해 성취되었는지 그리고 이 말씀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가 무엇인지를 배우게 될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 모두가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큰 것인지를 깨닫고 새해에는 더욱더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넘치기를 기도합니다.
오늘 말씀은 BC734년 유다왕 아하스가 통치하던 때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유다왕 아하스는 BC736년 약관 20세에 왕위에 올라는데 그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왕이 아니라 우상을 숭배하고 북이스라엘과 아람을 견제하기 위해 당시 급부상하고 있던 앗수르를 의지하던 왕이었습니다. 이런 아하스를 못마땅하게 여긴 북이스라엘 왕 베가와 아람 왕 르신이 그를 폐위시키고, 다브엘의 아들을 왕으로 세우기 위해서 연합하여 유다를 침공했습니다. 이 때 아람 왕이 심히 많은 무리를 다메섹으로 끌어 오고, 베가는 12만 명을 죽이고 왕의 아들과 총리를 죽이고 10만 명을 포로로 끌고 갔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이 산 위에 있는 요새인지라 유다왕 아하스를 폐위시키는 것을 실패했습니다. 이것이 아람과 북이스라엘의 1차 침공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다윗의 집에 알려 아람이 북이스라엘과 동맹하고 다시 2차 침공을 하려 한다는 것을 알렸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유다왕 아하스와 그의 백성들의 마음이 어떠했습니까? 2절을 봅시다. “어떤 사람이 다윗의 집에 알려 이르되 아람이 에브라임과 동맹하였다 하였으므로 왕의 마음과 그의 백성의 마음이 숲이 바람에 흔들림 같이 흔들렸더라” 유다왕 아하스의 마음과 그의 백성의 마음이 숲이 바람에 흔들림 같이 흔들렸습니다. 그들은 아람과 북이스라엘의 1차 침공 때 이미 심각한 피해와 굴욕을 당했습니다. 그런데 아람과 북이스라엘이 준비하고 있는 2차 침공은 그보다 더 무서운 결과를 각오해야만 했습니다. 전쟁의 쓰나미를 기다리고 있는 그들의 마음이 얼마나 두렵고 고통스러웠을까요?
하나님은 이때 유다왕 아하스를 돕기 위해 선지자 이사야를 그에게 보내셨습니다. 3,4절을 봅시다. “그 때에 여호와께서 이사야에게 이르시되 너와 네 아들 스알야숩은 윗못 수도 끝 세탁자의 밭 큰 길에 나가서 아하스를 만나 그에게 이르기를 너는 삼가며 조용하라 르신과 아람과 르말리야의 아들이 심히 노할지라도 이들은 연기 나는 두 부지깽이 그루터기에 불과하니 두려워하지 말며 낙심하지 말라” 하나님께서 유다왕 아하스를 돕기 위해 하신 일이 무엇입니까? 첫째로 하나님은 그를 만나주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직접 만나주신 것이 아니라 선지자 이사야를 통해 만나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이사야만 보낸 것이 아니라 그의 아들 스알야숩을 함께 보내셨습니다. 스알야숩은 이사야의 첫째아들로서 그 이름의 뜻은 “남은 자는 돌아오리라”입니다. 이를 통해 볼 때 하나님께서 이사야의 아들을 함께 보내신 이유는 유다왕 아하스와 그의 백성에게 하나님의 사랑과 소망을 전하시려 하신 것 같습니다. 하나님은 이처럼 누구가를 돕기 위해 당신의 종을 보내 주십니다. 이것이 우리는 도우시는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이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세탁자의 밭 큰 길에서 그를 만나주셨습니다. 세탁소는 더러움을 정결케 하는 장소입니다. 아하스는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 우상을 숭배하고 강대국을 의지하던 부정한 죄인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그의 죄를 씻으시고 그와 함께 하시며 그를 돕고자 하신 것입니다.
둘째로 그에게 삼가며 조용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유다왕 아하스는 전쟁을 대비하기 위해 많은 일들을 하고 있었습니다. 기혼 샘에서 물을 예루살렘 성으로 끌어들이는 수로공사를 하고 있었고 앗수르에 사신을 보내 도움을 요청해 놓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것들을 의지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평소에는 믿음이 있는 것 같은데 어려운 일이 생기면 믿음이 흔들리는 분들이 많습니다. 사업이 힘들어지고 하는 일마다 되는 일이 없고 아무리 기도해도 하나님이 침묵하시는 것 같을 때 점집을 찾는 집사님, 권사님들이 많다고 합니다. 우리도 어려운 일을 당할 때 하나님을 불신하고 눈에 보이는 것들을 의지하기 쉽습니다. 내게 도움을 줄 수 있을 것 같은 사람들을 의지하고 그들의 말에 따르기 쉽습니다. 유다왕 아하스가 그렇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하스에게 자기가 준비한 것들과 강대국 앗수르를 의지하기보다 하나님을 의지하라 하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북이스라엘과 아람은 연기나는 부지갱이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결코 아하스를 이기지 못할 것입니다. 그 뿐만 아니라 그들은 앗수르에 죽임을 당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8,9절을 봅시다. “대저 아람의 머리는 다메섹이요 다메섹의 머리는 르신이며 육십오년 내에 에브라임이 패망하여 다시는 나라를 이루지 못할 것이며 에브라임의 머리는 사마리아요 사마리아의 머리는 르말리야의 아들이니라 만일 너희가 굳게 믿지 아니하면 너희는 굳게 서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하나님은 아람과 북이스라엘의 멸망을 예언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이 말씀을 하신 날로 2년 만에 아람 왕 르신과 북이스라엘 왕 베가는 앗수르 왕 디글랏빌레셀과의 전쟁에서 폐하고 죽임을 당합니다. 그리고 북이스라엘은 BC722년 수도 사마리아가 점령을 당하고 육십오년만에 앗수르의 이주정책으로 완전히 멸망하고 맙니다. 하나님은 북이스라엘의 멸망을 거울삼아 유다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믿음에 굳게 서길 바라셨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유다의 머리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유다왕 아하스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해 말씀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영접하고 순종했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것보다 눈에 보이는 것과 현실적인 것만을 믿고자 하였습니다. 이에 하나님은 그에게 한 가지 제안을 하셨습니다. 10,11절을 봅시다. “여호와께서 또 아하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 한 징조를 구하되 깊은 데에서든지 높은 데에서든지 구하라 하시니” 하나님은 유다왕 아하스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믿기지 않는다면 한 징조를 구하라 하셨습니다. 깊은 데에서든지 높은 데에서든지 무엇이든지 구하라고 하셨습니다. 돈을 달라하면 돈을 주고 무기를 달라하면 무기를 주고 무엇이든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하스에게 믿음을 심기 위해 무슨 징조든 구하면 주기로 작정하신 것입니다. 이는 그를 향한 하나님의 일방적인 호의였습니다. 그는 이런 하나님의 호의를 받을 자격이 “1” 도 없는 자였습니다. 그는 오히려 하나님을 대적하고 수많은 죄를 지은 죄인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그에게 일방적인 호의를 베풀기로 작정하신 것입니다. 그에게 믿음을 심고자 하셨습니다. 여러분 믿음을 심는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십니까? 그것은 하나님이 그에게 자신을 주시겠다는 의미입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그돌라오멜 동맹군과 전쟁에서 큰 승리를 거둔 후에 언제 보복을 당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빠졌습니다. 그는 딸 자식하나 없이 죽을 수도 있다는 불신에 빠졌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그에게 나타나셔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아브람아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네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창15:1b) 하나님이 그의 방패가 되시고 지극히 크신 상급이 되신다는 사실을 믿을 때 그는 두려워할 필요가 없게 됩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갖게 된다는 것은 복중에 복인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주신 이토록 크신 축복을 아하스는 어떻게 했습니까? 12절을 봅시다. “아하스가 이르되 나는 구하지 아니하겠나이다 나는 여호와를 시험하지 아니하겠나이다 한지라” 그는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겠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보다 눈에 보이는 자신의 계획과 앗수르의 도움을 의지하겠다고 합니다. 그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을 나약한 것으로 여겼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 무의미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이렇게 하나님의 호의를 거절했습니다. 하나님의 크신 복을 걷어찼습니다. 그는 한마디로 구제불능이었습니다. 이 말을 듣고 이사야는 분노했습니다. 그의 불신에 대해, 하나님을 무시하는 태도에 대해 책망했습니다. 13절을 봅시다. “이사야가 이르되 다윗의 집이여 원하건대 들을지어다 너희가 사람을 괴롭히고서 그것을 작은 일로 여겨 또 나의 하나님을 괴롭히려 하느냐” 이 정도가 되면 막가자는 것입니다. 이 정도가 되면 참을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이 정도까지 갔으면 관계를 끊어야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놀라운 사실은 하나님은 그래도 아하스를 참으셨다는 것입니다. 그 뿐 아니라 그를 위해 일방적으로 한 징조를 주셨다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은 죄인을 길이 참으시며 회개하기까지 기다리시는 은혜와 자비에 풍성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유다왕 아하스와 그의 백성들에게 주신 한 징조는 무엇입니까? 14절을 봅시다.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나님이 그들에게 주신 징조는 임마누엘이었습니다. 한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인데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지을 것이라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아이가 선악을 분별할 줄 알 때가 되면 그들이 미워하는 두 왕, 즉 아람왕 르신과 북이스라엘 왕 베가가 죽임을 당할 것을 예언하셨습니다. 이 말씀이 성취되는 것을 볼 때 그들은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하실 것이요 그들에게 하신 모든 말씀이 이루어질 것을 믿을 수 있습니다.
유다왕 아하스와 그의 백성들은 아람과 북이스라엘의 2차 침공 소식에 두려워 떨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를 두려워 떨게 만드는 것은 무엇입니까? 북핵의 위협, 중국의 사드보복으로 인해 경제적 어려움, 4차 산업혁명으로 인해 없어질 직업들, 어려운 취업난, 치솟는 물가 등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우리가 두려워할 근본문제가 아닙니다. 우리가 진정 두려워하고 떨어야할 문제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우리의 죽음과 심판의 문제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다고 하셨습니다.(히9:27)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이 사실을 알지 못합니다. 이 사실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오늘 말씀에 나오는 유다왕 아하스처럼 눈에 보이는 현실과 돈과 지식과 능력을 의지하며 살고자 합니다. 하나님은 이런 것들을 의지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이런 것들이 죽음과 심판으로부터 그들을 구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구원할 완벽한 계획을 갖고 계십니다. 그것을 믿으라고 합니다. 그것이 무엇인지를 한 징조를 통해 나타내셨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처녀 마리아에게서 나실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는 우리를 구원하실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는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에 죽임을 당하셨으나 삼일만에 부활하사 우리의 주요 그리스도가 되셨습니다. 그를 믿는 자는 의롭게 됩니다. 그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습니다. 그를 믿는 자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는 우리에게 무엇입니까? 한마디로 그는 임마누엘 하나님이십니다. 그는 우리와 함께 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고 우리와 함께 하시기 위해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임마누엘 우리와 함께 하시며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 그의 놀라우신 사랑과 은혜를 높여 찬양합니다. 그를 이 땅 가운데 보내신 이유는 임마누엘입니다. 임마누엘의 은혜가 무엇보다 귀한 이유는 다른 무엇이 아닌 우리의 구원을 위해 우리에게 당신 자신을 선물로 주신 은혜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하나님이 임마누엘이심을 믿음을 때 즉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심을 믿을 때 어떤 상황 가운데서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환란 가운데서도 마음의 평강을 누릴 수 있습니다.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자신을 화목제로 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임마누엘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우리와 함께 하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우리와 함께 하시며 우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는 보혜사 성령 하나님의 은혜를 이 시간 높여 찬양합니다.
하나님은 제가 대학교 1학년 때 저를 캠퍼스 목자로 부르셨다는 확신을 갖도록 한 징조를 보여 주셨습니다. 저는 한 목자님의 권유에 순종해서 장학금 신청서를 제출했는데 아무런 자격이 되지 않았지만 학국장학회로부터 4년간 무상으로 지원받는 장학생으로 선발된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때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강하게 확신할 수 있었고 캠퍼스 목자로 결단하고 헌신할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자 한 징조를 구할 때 이를 기뻐 받으십니다. 그리고 반드시 그 징조 가운데 당신의 영광을 나타내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가장 확실한 징조는 예수 그리스도 이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주신 확실한 징조로 영접하고 나면 솔직히 다른 징조가 필요치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의 삶 가운데 이런 저런 징조들을 보여 주시고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심을 나타내시고 우리가 믿음 없는 자가 되지 않고 믿는 자가 되도록 도와 주십니다. 그렇기에 이 세상에서 가장 복된 일은 믿음을 갖는 일이요 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일은 믿음을 잃어버리는 일입니다. 모든 비극과 모든 재난의 근원은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2018년 새해에는 우리 모두가 유다왕 아하스의 길이 아니라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길로 행할 수 있길 기도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믿음의 선진들과 같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 하나님의 은혜를 새해에도 우리 가운데 풍성하게 허락해 주시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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