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누가복은 제28강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라(눅 18: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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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누가복음 제28강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라
말씀 누가복음 18:1-17
요절 누가복음 18:1
“예수께서 그들에게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할 것을 비유로 말씀하여”
우리 몸에 필요한 3대 영양소가 있습니다. 그것은 탄수화물, 지방, 단백질입니다. 몸의 건강을 위해선 3대 영양소를 골고루 섭취해야 합니다. 여기에다 꾸준히 운동을 하면 완벽한 건강관리가 될 것입니다. 이와 같이 건강한 신앙생활에도 3대 영양소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말씀, 기도, 찬양입니다. 신앙생활에 있어서 말씀은 양식이고 기도는 호흡이며 찬양은 교제에 해당됩니다. 여기에 하나를 더하라고 하면 전도가 있습니다. 전도는 운동에 해당됩니다. 전도를 하면 강건한 신앙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말씀은 건강한 신앙생활의 3대 영양소 중에 기도에 관한 말씀입니다. 그것도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직접 가르치신 내용이니 우리는 기도에 관한 오늘의 말씀을 잘 귀담아 들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바르게 기도할 때 우리의 신앙이 건강하게 되고 우리의 삶도 건강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오늘 말씀을 통해 기도에 관하여 바른 지식을 갖고 항상 기도하는 신실한 하나님의 자녀들의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저는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 기도에 관하여 크게 두 가지 주제를 다뤄 보고자 합니다. 첫째는 어떻게 기도할 것인가? 둘째는 무엇을 기도할 것인가? 입니다. 그러면 먼저 첫 번째 주제인 어떻게 기도할 것인가? 관해 함께 생각해 보도록 합시다. 1절을 읽어 봅시다.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할 것을 비유로 말씀하여” 예수님은 우리에게 기도하되 항상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서두에서 기도를 호흡이라 비유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만일 우리의 호흡이 멈추면 어떻게 될까요? 호흡이 멈추면 2분 후에는 뇌사가 진행되고 10분후에는 사망에 이르게 된다고 합니다. 그만큼 우리 몸에서 호흡은 중요합니다. 이는 잠시라도 숨을 쉬지 않고는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에 있어서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은 그렇게 느끼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만일 그것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면 아마도 우리는 이미 영적으로 뇌사가 진행되고 있던가 아니면 이미 죽어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렇기에 항상 기도하는 일은 신앙생활에 있어서 참으로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우리가 항상 기도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못하게 하는 한 가지 중대한 원인이 있다고 합니다. 그 원인은 우리가 바쁘고 시간이 없고 어떻게 기도할지 모르겠고 하는 문제가 아니라 그것은 낙심이라고 예수님은 말씀합니다. 우리가 살면서 기도할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특히 이번에 수능을 봐야 하는 고3들은 지난 주 수시원서를 접수했는데 지금 얼마나 마음이 다급합니까? 그러면 더 열심히 기도해야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기도가 잘 됩니까? 분명히 기도해야할 때인데 기도가 잘 안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낙심이 되기 때문입니다. 내가 공부한 만큼 성적이 안 나오고 내가 원하는 대학에 들어가지 못할 것 같은 마음이 들고 낙심이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보다 사람들의 말이 더 크게 들리고 근심이 되고 마음이 피곤하고 힘들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들뿐만 아니라 누구나 낙심이 되면 기도하기 힘이 듭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때에도 기도를 내려놓지 말라고 하십니다. 기도하기 힘든 데 좀 쉬면 안 될까요? 그때도 구지 기도해야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에 대해 가르치시기 위해 예수님은 불의한 재판관과 한 맺힌 과부의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누가복음18:2-5절 말씀입니다. 이 비유를 보면 가난하고 힘없는 한 과부가 억울한 일을 당했습니다. 이것을 해결해 줄 사람은 오직 재판관뿐인데 그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내가 당한 억울함을 풀어 달라고 애원하는 과부의 청을 들은 척만척 했습니다. 그러나 과부는 포기하지 않고 밤낮으로 재판관을 찾아와 내 한을 풀어달라고 부르짖어 간청을 합니다. 그렇게 했더니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4,5절을 읽어 봅시다. “그가 얼마 동안 듣지 아니하다가 후에 속으로 생각하되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나 이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니 내가 그 원한을 풀어 주리라 그렇지 않으면 늘 와서 나를 괴롭게 하리라 하였느니라” 재판관이 결국 과부의 원한을 풀어 주었습니다. 이는 그가 착해지겠다고 마음을 먹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실상은 과부가 번거롭게 하니 괴로워서 귀찮아서 그렇게 해 준 것입니다.
이 비유를 말씀하신 후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6,7절을 읽어 봅시다. “주께서 또 이르시되 불의한 재판장이 말한 것을 들으라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그들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과부가 밤낮으로 간청하니 불의한 재판관도 과부의 한을 풀어 줬습니다. 하물며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그는 그의 택하신 자들을 위해 독생자를 아끼지 아니하시고 내어주신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그의 자녀들을 긍휼히 여기시는 자비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이 하나님은 그의 자녀들이 밤낮 부르짖는 기도를 반드시 들어 주십니다. 그러니 우리가 때로 낙심이 되어 기도할 힘조차 없을 때 이 하나님을 믿음으로 더욱 간절히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기도하기보다 낙심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우리의 원수 사탄이 낙심한 우리를 공격하기 때문입니다. 사탄은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를 들어 주시지 않을 것 같은 불신을 심고 기도해도 안 될 것이라는 부정적인 생각을 심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부르짖어 기도하면 하나님은 반드시 우리의 기도를 들어 주십니다. 그러므로 기도는 억울함과의 싸움도 아니고 재판장과의 싸움도 아니고 본질적으로 내 안에 있는 낙심과의 싸움입니다. 믿음이 좋은 사람이라고 낙심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이 좋으면 좋은 대로 낙심이 있습니다. 희한하게도 믿음이 크면 낙심도 큽니다. 그렇기에 진정한 믿음은 낙심에 굴복하지 않는 것입니다. 진정한 기도는 내 마음에 자리를 잡으려고 하는 낙심의 뿌리를 그때 그때 뽑아 버리는 것입니다.
영국 속담에 평온한 바다는 결코 유능한 뱃사공을 만들 수 없다는 말이 있다고 합니다. 이 속담처럼 낙심 없는 신앙은 결코 굳센 믿음으로 자랄 수 없습니다. 오히려 낙심의 풍랑과 실망의 거친 파도와 맞서 싸우면서 기도하다 보면 어느 새 믿음이 쑥쑥 자라 갑니다. 중국 동부지역에서만 자라는 대나무가 있습니다. 그 대나무의 이름은 모소입니다. 이 대나무는 농부들이 씨를 뿌리고 온갖 정성을 다해도 첫 4년 동안 3cm 밖에 자라지 않는다고 합니다. 보통의 식물들은 정성 들여 가꾼 만큼 성장을 합니다. 그런데 4년 동안 성장하지 않는 모소 대나무를 이해하기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은 5년이 되는 날부터 시작됩니다. 4년 동안 3cm에 머물렀던 모소 대나무가 하루에 30cm씩 자라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더 놀라운 일은 그 후에 6주 만에 평균 15미터 이상의 높이로 성장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모소 대나무가 이렇게 폭발적으로 성장하게 되는 원인은 뿌리에 있습니다. 모소 대나무는 6주간 15미터를 크기 위해 4년간 보이지 않는 땅 속에서 뿌리를 키우고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의 기도가 응답되지 않는다고 낙심하지 마십시오. 이는 기도 응답보다 먼저 우리의 믿음이 하나님의 말씀에 깊이 뿌리 내리는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 때가 되면 하나님은 반드시 기도의 응답을 갖고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많은 사람들이 그 때에 기도의 자리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창고에는 응답받지 못한 기도의 보따리들이 많이 싸여 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간절히 기도할 때 그 기도를 반드시 응답해 주십니다. 그런데 그 때는 하나님만이 아십니다. 하나님이 응답을 갖고 우리를 찾아오실 때 그 때 우리는 어디에 있어야 합니까? 기도의 자리에 있어야 합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를 반드시 응답하신다는 믿음으로 항상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의 불이 꺼지지 않게 해야 합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8절을 읽어 봅시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 이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십니다. 그러면 무엇을 보신다는 말씀입니까? 그것은 그의 자녀들이 낙심하지 않고 항상 기도하는 모습을 보길 원하신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낙심에 굴복하지 말고 항상 깨어서 기도하는 사람이 됩시다. 그러한 저와 여러분들이 모두 그렇게 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그러면 이제부터는 두 번째 주제인 무엇을 기도할 것인가? 관해 함께 생각해 보도록 합시다. 우리가 항상 기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무엇을 기도할 것인가는 실상 더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삶의 열매는 결국 기도의 열매이기 때문입니다. 무엇을 기도할 것인가? 에 대한 질문에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에게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위해 기도하라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그의 제자들에게 가르치신 기도를 우리는 “주기도문”이라고 합니다. 그렇기에 주기도문은 우리가 무엇을 기도할 것인가에 대한 모범답안과도 같습니다. 예수님은 주기도문에서 먼저 무엇을 기도하라고 하십니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리이다”(마6:9,10) 예수님은 먼저 하나님의 이름과 그의 나라를 위해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또한 그의 나라를 구할 때 이 모든 것들을 우리에게 더해 주실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눅12:31)
불의한 재판관과 한 맺힌 과부의 비유에도 이에 관한 내용이 나옵니다. 3절을 보십시오. “그 도시에 한 과부가 있어 자주 그에게 가서 내 원수에 대한 나의 원한을 풀어 주소서 하되” 여기서 “나의 원한을 풀어주소서”라는 과부의 청원이 영어로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Grant me justice against my adversary.” 원한이 정의(Justice)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과부가 청원한 것이 단순히 개인적인 원한을 풀어달라고 한 것이 아니라 공의를 바르게 세워달라고 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기도를 나의 필요와 원한을 풀어주는 수단으로만 생각해선 안됩니다. 올바른 기도는 모든 일들 가운데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정의를 구하는 것입니다. 내 안에 그리고 우리 사이에, 또한 우리가 사는 사회 안에 하나님의 공의가 바로 서며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공의가 바로 설 때 과부와 같은 약자들이 억울한 일을 당하는 일들이 사라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재판관과 같은 이 세상의 리더들이 하나님의 공의를 바로 세우고자 할 때 세상이 좀 더 좋아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내 안에 또한 우리 안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도록 기도하고 이 세상이 나로 인해 좀 더 좋은 세상이 될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9-14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이 비유로 성전에 기도하러 간 두 사람의 기도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그 두 사람은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였습니다.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11-12절을 읽어 봅시다.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반면 세리는 이렇게 기도합니다. 13절을 봅시다.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그런데 예수님은 바리새인이 아니고 세리가 의롭다함을 받았다고 말씀합니다.
인간에 대해 성경이 말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롬3:10) 우리의 의는 더러운 옷과 같고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모두가 죄인이라는 말씀합니다.(사64:6)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인간의 의를 자랑합니다. 더 나아가 자신보다 못하다고 생각하는 세리들과 죄인들을 무시하고 그들을 정죄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실 때 바리새인들도 세리와 별다를 바 없는 죄인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그들은 자신이 죄인이라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가 필요한 존재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그들의 죄를 사하실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세리들은 자신들을 죄인으로 인정합니다. 가슴을 치며 자신들의 죄에 대해 회개하고 하나님께 불쌍히 여겨 달라 합니다. 하나님은 이런 그들의 죄를 용서해 주십니다. 그리고 그들을 의롭다 하십니다. 그들이 죄를 짓지 않아서 의로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죄없다 선언하셨기에 의롭게 된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우리의 죄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사도요한은 우리에게 이렇게 권면합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1:9) 하나님은 우리가 죄를 고백할 때 우리를 정죄치 않으시며 용서하여 주십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로 우리의 죄를 씻어 주시고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의의 옷을 입혀 주십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항상 기도하되 나의 의가 아닌 우리의 죄를 고백하며 예수님의 의로 살아가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15-17절을 보면 예수님은 그에게 나아오는 어린 아이들을 축복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들의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어린 아이들은 믿을 때 매우 단순하게 믿습니다. 한번 믿으면 전폭적으로 신뢰를 하고 그대로 따라 갑니다. 우리는 오늘 기도에 대해 배웠습니다. 기도하되 낙심하지 말고 항상 기도해야 하고 기도할 때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해야 함을 배웠습니다. 그리할 때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속히 들으시며 이런 것들을 더해 주실 것이라는 것을 배웠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배운 그 말씀을 어린 아이와 같이 단순하게 믿고 실천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나라는 이런 자들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JBF 친구들이 어린아이들처럼 하나님을 믿고 항상 기도로 나아가는 하나님의 신실한 자녀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드립니다.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라
말씀 누가복음 18:1-17
요절 누가복음 18:1
“예수께서 그들에게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할 것을 비유로 말씀하여”
우리 몸에 필요한 3대 영양소가 있습니다. 그것은 탄수화물, 지방, 단백질입니다. 몸의 건강을 위해선 3대 영양소를 골고루 섭취해야 합니다. 여기에다 꾸준히 운동을 하면 완벽한 건강관리가 될 것입니다. 이와 같이 건강한 신앙생활에도 3대 영양소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말씀, 기도, 찬양입니다. 신앙생활에 있어서 말씀은 양식이고 기도는 호흡이며 찬양은 교제에 해당됩니다. 여기에 하나를 더하라고 하면 전도가 있습니다. 전도는 운동에 해당됩니다. 전도를 하면 강건한 신앙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말씀은 건강한 신앙생활의 3대 영양소 중에 기도에 관한 말씀입니다. 그것도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직접 가르치신 내용이니 우리는 기도에 관한 오늘의 말씀을 잘 귀담아 들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바르게 기도할 때 우리의 신앙이 건강하게 되고 우리의 삶도 건강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오늘 말씀을 통해 기도에 관하여 바른 지식을 갖고 항상 기도하는 신실한 하나님의 자녀들의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저는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 기도에 관하여 크게 두 가지 주제를 다뤄 보고자 합니다. 첫째는 어떻게 기도할 것인가? 둘째는 무엇을 기도할 것인가? 입니다. 그러면 먼저 첫 번째 주제인 어떻게 기도할 것인가? 관해 함께 생각해 보도록 합시다. 1절을 읽어 봅시다.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할 것을 비유로 말씀하여” 예수님은 우리에게 기도하되 항상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서두에서 기도를 호흡이라 비유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만일 우리의 호흡이 멈추면 어떻게 될까요? 호흡이 멈추면 2분 후에는 뇌사가 진행되고 10분후에는 사망에 이르게 된다고 합니다. 그만큼 우리 몸에서 호흡은 중요합니다. 이는 잠시라도 숨을 쉬지 않고는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에 있어서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은 그렇게 느끼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만일 그것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면 아마도 우리는 이미 영적으로 뇌사가 진행되고 있던가 아니면 이미 죽어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렇기에 항상 기도하는 일은 신앙생활에 있어서 참으로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우리가 항상 기도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못하게 하는 한 가지 중대한 원인이 있다고 합니다. 그 원인은 우리가 바쁘고 시간이 없고 어떻게 기도할지 모르겠고 하는 문제가 아니라 그것은 낙심이라고 예수님은 말씀합니다. 우리가 살면서 기도할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특히 이번에 수능을 봐야 하는 고3들은 지난 주 수시원서를 접수했는데 지금 얼마나 마음이 다급합니까? 그러면 더 열심히 기도해야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기도가 잘 됩니까? 분명히 기도해야할 때인데 기도가 잘 안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낙심이 되기 때문입니다. 내가 공부한 만큼 성적이 안 나오고 내가 원하는 대학에 들어가지 못할 것 같은 마음이 들고 낙심이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보다 사람들의 말이 더 크게 들리고 근심이 되고 마음이 피곤하고 힘들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들뿐만 아니라 누구나 낙심이 되면 기도하기 힘이 듭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때에도 기도를 내려놓지 말라고 하십니다. 기도하기 힘든 데 좀 쉬면 안 될까요? 그때도 구지 기도해야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에 대해 가르치시기 위해 예수님은 불의한 재판관과 한 맺힌 과부의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누가복음18:2-5절 말씀입니다. 이 비유를 보면 가난하고 힘없는 한 과부가 억울한 일을 당했습니다. 이것을 해결해 줄 사람은 오직 재판관뿐인데 그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내가 당한 억울함을 풀어 달라고 애원하는 과부의 청을 들은 척만척 했습니다. 그러나 과부는 포기하지 않고 밤낮으로 재판관을 찾아와 내 한을 풀어달라고 부르짖어 간청을 합니다. 그렇게 했더니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4,5절을 읽어 봅시다. “그가 얼마 동안 듣지 아니하다가 후에 속으로 생각하되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나 이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니 내가 그 원한을 풀어 주리라 그렇지 않으면 늘 와서 나를 괴롭게 하리라 하였느니라” 재판관이 결국 과부의 원한을 풀어 주었습니다. 이는 그가 착해지겠다고 마음을 먹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실상은 과부가 번거롭게 하니 괴로워서 귀찮아서 그렇게 해 준 것입니다.
이 비유를 말씀하신 후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6,7절을 읽어 봅시다. “주께서 또 이르시되 불의한 재판장이 말한 것을 들으라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그들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과부가 밤낮으로 간청하니 불의한 재판관도 과부의 한을 풀어 줬습니다. 하물며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그는 그의 택하신 자들을 위해 독생자를 아끼지 아니하시고 내어주신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그의 자녀들을 긍휼히 여기시는 자비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이 하나님은 그의 자녀들이 밤낮 부르짖는 기도를 반드시 들어 주십니다. 그러니 우리가 때로 낙심이 되어 기도할 힘조차 없을 때 이 하나님을 믿음으로 더욱 간절히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기도하기보다 낙심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우리의 원수 사탄이 낙심한 우리를 공격하기 때문입니다. 사탄은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를 들어 주시지 않을 것 같은 불신을 심고 기도해도 안 될 것이라는 부정적인 생각을 심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부르짖어 기도하면 하나님은 반드시 우리의 기도를 들어 주십니다. 그러므로 기도는 억울함과의 싸움도 아니고 재판장과의 싸움도 아니고 본질적으로 내 안에 있는 낙심과의 싸움입니다. 믿음이 좋은 사람이라고 낙심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이 좋으면 좋은 대로 낙심이 있습니다. 희한하게도 믿음이 크면 낙심도 큽니다. 그렇기에 진정한 믿음은 낙심에 굴복하지 않는 것입니다. 진정한 기도는 내 마음에 자리를 잡으려고 하는 낙심의 뿌리를 그때 그때 뽑아 버리는 것입니다.
영국 속담에 평온한 바다는 결코 유능한 뱃사공을 만들 수 없다는 말이 있다고 합니다. 이 속담처럼 낙심 없는 신앙은 결코 굳센 믿음으로 자랄 수 없습니다. 오히려 낙심의 풍랑과 실망의 거친 파도와 맞서 싸우면서 기도하다 보면 어느 새 믿음이 쑥쑥 자라 갑니다. 중국 동부지역에서만 자라는 대나무가 있습니다. 그 대나무의 이름은 모소입니다. 이 대나무는 농부들이 씨를 뿌리고 온갖 정성을 다해도 첫 4년 동안 3cm 밖에 자라지 않는다고 합니다. 보통의 식물들은 정성 들여 가꾼 만큼 성장을 합니다. 그런데 4년 동안 성장하지 않는 모소 대나무를 이해하기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은 5년이 되는 날부터 시작됩니다. 4년 동안 3cm에 머물렀던 모소 대나무가 하루에 30cm씩 자라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더 놀라운 일은 그 후에 6주 만에 평균 15미터 이상의 높이로 성장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모소 대나무가 이렇게 폭발적으로 성장하게 되는 원인은 뿌리에 있습니다. 모소 대나무는 6주간 15미터를 크기 위해 4년간 보이지 않는 땅 속에서 뿌리를 키우고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의 기도가 응답되지 않는다고 낙심하지 마십시오. 이는 기도 응답보다 먼저 우리의 믿음이 하나님의 말씀에 깊이 뿌리 내리는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 때가 되면 하나님은 반드시 기도의 응답을 갖고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많은 사람들이 그 때에 기도의 자리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창고에는 응답받지 못한 기도의 보따리들이 많이 싸여 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간절히 기도할 때 그 기도를 반드시 응답해 주십니다. 그런데 그 때는 하나님만이 아십니다. 하나님이 응답을 갖고 우리를 찾아오실 때 그 때 우리는 어디에 있어야 합니까? 기도의 자리에 있어야 합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를 반드시 응답하신다는 믿음으로 항상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의 불이 꺼지지 않게 해야 합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8절을 읽어 봅시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 이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십니다. 그러면 무엇을 보신다는 말씀입니까? 그것은 그의 자녀들이 낙심하지 않고 항상 기도하는 모습을 보길 원하신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낙심에 굴복하지 말고 항상 깨어서 기도하는 사람이 됩시다. 그러한 저와 여러분들이 모두 그렇게 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그러면 이제부터는 두 번째 주제인 무엇을 기도할 것인가? 관해 함께 생각해 보도록 합시다. 우리가 항상 기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무엇을 기도할 것인가는 실상 더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삶의 열매는 결국 기도의 열매이기 때문입니다. 무엇을 기도할 것인가? 에 대한 질문에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에게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위해 기도하라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그의 제자들에게 가르치신 기도를 우리는 “주기도문”이라고 합니다. 그렇기에 주기도문은 우리가 무엇을 기도할 것인가에 대한 모범답안과도 같습니다. 예수님은 주기도문에서 먼저 무엇을 기도하라고 하십니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리이다”(마6:9,10) 예수님은 먼저 하나님의 이름과 그의 나라를 위해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또한 그의 나라를 구할 때 이 모든 것들을 우리에게 더해 주실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눅12:31)
불의한 재판관과 한 맺힌 과부의 비유에도 이에 관한 내용이 나옵니다. 3절을 보십시오. “그 도시에 한 과부가 있어 자주 그에게 가서 내 원수에 대한 나의 원한을 풀어 주소서 하되” 여기서 “나의 원한을 풀어주소서”라는 과부의 청원이 영어로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Grant me justice against my adversary.” 원한이 정의(Justice)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과부가 청원한 것이 단순히 개인적인 원한을 풀어달라고 한 것이 아니라 공의를 바르게 세워달라고 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기도를 나의 필요와 원한을 풀어주는 수단으로만 생각해선 안됩니다. 올바른 기도는 모든 일들 가운데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정의를 구하는 것입니다. 내 안에 그리고 우리 사이에, 또한 우리가 사는 사회 안에 하나님의 공의가 바로 서며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공의가 바로 설 때 과부와 같은 약자들이 억울한 일을 당하는 일들이 사라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재판관과 같은 이 세상의 리더들이 하나님의 공의를 바로 세우고자 할 때 세상이 좀 더 좋아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내 안에 또한 우리 안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도록 기도하고 이 세상이 나로 인해 좀 더 좋은 세상이 될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9-14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이 비유로 성전에 기도하러 간 두 사람의 기도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그 두 사람은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였습니다.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11-12절을 읽어 봅시다.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반면 세리는 이렇게 기도합니다. 13절을 봅시다.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그런데 예수님은 바리새인이 아니고 세리가 의롭다함을 받았다고 말씀합니다.
인간에 대해 성경이 말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롬3:10) 우리의 의는 더러운 옷과 같고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모두가 죄인이라는 말씀합니다.(사64:6)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인간의 의를 자랑합니다. 더 나아가 자신보다 못하다고 생각하는 세리들과 죄인들을 무시하고 그들을 정죄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실 때 바리새인들도 세리와 별다를 바 없는 죄인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그들은 자신이 죄인이라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가 필요한 존재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그들의 죄를 사하실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세리들은 자신들을 죄인으로 인정합니다. 가슴을 치며 자신들의 죄에 대해 회개하고 하나님께 불쌍히 여겨 달라 합니다. 하나님은 이런 그들의 죄를 용서해 주십니다. 그리고 그들을 의롭다 하십니다. 그들이 죄를 짓지 않아서 의로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죄없다 선언하셨기에 의롭게 된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우리의 죄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사도요한은 우리에게 이렇게 권면합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1:9) 하나님은 우리가 죄를 고백할 때 우리를 정죄치 않으시며 용서하여 주십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로 우리의 죄를 씻어 주시고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의의 옷을 입혀 주십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항상 기도하되 나의 의가 아닌 우리의 죄를 고백하며 예수님의 의로 살아가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15-17절을 보면 예수님은 그에게 나아오는 어린 아이들을 축복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들의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어린 아이들은 믿을 때 매우 단순하게 믿습니다. 한번 믿으면 전폭적으로 신뢰를 하고 그대로 따라 갑니다. 우리는 오늘 기도에 대해 배웠습니다. 기도하되 낙심하지 말고 항상 기도해야 하고 기도할 때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해야 함을 배웠습니다. 그리할 때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속히 들으시며 이런 것들을 더해 주실 것이라는 것을 배웠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배운 그 말씀을 어린 아이와 같이 단순하게 믿고 실천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나라는 이런 자들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JBF 친구들이 어린아이들처럼 하나님을 믿고 항상 기도로 나아가는 하나님의 신실한 자녀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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