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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20일]무익한 종의 자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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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백요셉
댓글 0건 조회 346회 작성일 11-11-20 12:33

본문

2011년 누가복음 제34강                                                       
본문 누가복음 17:1-19
요절 누가복음 17:10
무익한 종의 자세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

우리는 성경 말씀을 보면서 어떤 말씀은 쉽게 영접을 합니다. 그러나 어떤 말씀은 영접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오늘 말씀은 어쩌면 우리가 기쁨으로 영접하기에는 조금 부담스러운 말씀일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먹고 싶은 것만 먹는 편식을 하면 영양에 불균형이 생기는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도 듣고 싶은 것만 들으면 영적인 편식이 되어 우리의 신앙생활에 불균형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오늘 말씀을 깊이 생각해 보고 영접하여 영적으로 더욱 성숙한 사람들이 될 수 있길 기도합니다.

첫째, 용서하라(1-6). 1절부터 6절까지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죄와 용서에 대해 가르치신 내용입니다. 죄와 벌이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제목처럼 죄하면 우리는 먼저 벌을 떠올립니다. 죄를 지으면 벌을 받는 것은 당연한 결과인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나에게 잘못된 말이나 행동을 하면 그 사람은 당연히 벌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내가 직접적으로 그 사람을 벌주려하거나 하나님께서 그에게 벌을 주셔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죄 지은 사람에 대해서 어떤 태도를 취하라고 가르치십니까? 3절을 보십시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만일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경고하고 회개하거든 용서하라.”
죄 지은 사람을 볼 때 먼저는 경고하여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그것이 죄인줄 모르고 잘못을 행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또는 잘못을 안다고 해도 얼마나 심각한지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 보지 않았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죄를 범한 형제를 보고서도 모른척하거나 비난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죄를 범한 형제를 경고하라고 하십니다. 이는 잘못을 알리고 책망하는 것을 말합니다. 형제의 죄를 방치하게 되면 교회 공동체에 곰팡이가 퍼지듯이 죄가 퍼지게 됩니다. 죄에 대한 인식이 낮아지고 영적인 감각이 무디어지게 됩니다. 그러면 결국 다 망하게 됩니다. 우리는 서로에 대해서 책임의식을 가지고 돌보아 건강한 공동체를 만들어야 합니다.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고 교회를 사랑하고 형제를 사랑한다면 죄에 대해서 모른 척하지 말고 책망하고 회개하도록 도와야 합니다(히 12:8). 그 책망을 듣고 형제가 회개하면 용서해야 합니다. 어느 정도까지 용서해야 하냐면 하루에 일곱 번이라도 나에게 죄를 짓고 일곱 번 돌아와 내가 회개하노라 하거든 우리는 용서해야 합니다. 하루에 일곱 번씩 죄를 짓고 회개한다고 말하면 이 형제가 진짜 회개하는 것인가 의구심이 듭니다. 말로만 회개한다고 하는 것이 아닐까, 상습적으로 이렇게 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되어 용서하지 못하고 무시할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과는 관계를 끊는 것이 속이 편하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회개한다는 그의 말을 믿어주고 희망을 거두지 말아야 합니다.

  용서는 인간의 의지와 감정으로는 한계가 있습니다. 오직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용서를 깊이 맛본 사람만이 계속해서 상처를 극복하면서 형제를 용서할 수 있습니다. 용서는 사람을 변화시키는 위력이 있습니다. 용서에는 관계를 회복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용서를 통해서 내 마음의 상처가 치료됩니다. 용서를 받는 사람은 형제가 용서하는 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게 됩니다. 이렇게 서로가 용서할 때 공동체가 하나가 됩니다.

예수님께서 “하루에 일곱 번이라도 회개하는 형제를 용서하라”고 말씀하시자 제자들이 말했습니다.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 왜 제자들이 이런 말을 했을까요? 형제가 반복되는 죄를 용서하기 위해서 믿음을 더해 달라고 사도들이 요청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일곱 번 피해를 주고 일곱 번 와서 회개한다고 하는 사람을 용서하는 데는 큰 믿음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믿음이 없으면 용서할 수 없고 사랑할 수 없습니다. 그냥 차버리든지 관계를 끊어버리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살아계셔서 어떤 죄인도 변화시키는 능력이 있다고 믿으면 다시 그를 받아들이고 용서할 수 있습니다. 사도들은 세상에 나가서 그리스도의 용서의 사역을 대행해야 합니다. 우리중에 하루에 똑같은 잘못을 범하는 친구를 일곱 번 용서할 수 있는 사람이 있습니까? 우리도 제자들처럼 믿음을 더해달라고 기도해야겠습니다.

  둘째,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7-10). 예수님은 제자의 자세에 대해서 당시 주인과 종의 관계를 기초로 말씀하십니다. 한 종이 밭을 갈고 양을 치다가 돌아왔습니다. 주인은 그더러 밖에서 수고했으니 곧 와 앉아서 먹으라 말하지 않습니다. 도리어 기진하도록 일하고 돌아온 종더러 내 먹을 것을 준비하고 띠를 띠고 내가 먹고 마시는 동안에 수종들고 너는 그 후에 먹고 마시라고 합니다. 주인이 종에게 명령한대로 일을 잘 했다고 종에게 감사하지 않습니다. 10절을 보십시오.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 무익한 종이란 쓸모없는 종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떤 일을 하고 나면 나도 제법 쓸모가 있구나 하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듭니다. 우리가 예배를 빠지지 않고 잘 드리거나, 사회나 기도, 악기연주, 연극, 드라마, 댄싱 등을 섬기고 나면 다른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고 싶습니다. 어떤 보상을 받고 싶습니다. 그래야 당연하다고 생각하면 요구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자기 의가 마음에 자리 잡게 되면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교만한 마음을 갖게 됩니다. 수고한 자기를 인정해 주지 않으면 데모를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가 무익한 종의 자세를 가져야 한다고 가르치십니다.

우리가 가져야 할 자세는 무익한 종과 같이 주님께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는 고백이 있어야겠습니다. 그것이 은혜를 계속 감당하고 깊어지는 길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헌신하고 수고하는 것을 아십니다.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나를 버리는 대신에 자기 아들을 버리기까지 나를 사랑하사 구원하시고 사명을 주셨습니다. 이 하나님을 위해서 우리가 헌신하고 사명을 감당하는 것은 은혜의 빚을 갚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께 빚을 갚는다고 큰소리치지 말아야합니다. 어불성설입니다. 나 같은 죄인을 영광스러운 구속 역사에 불러 주시고 써 주시는 하나님께 오직 감사와 찬양을 돌립니다.

셋째, 감사하라(11-19). 오늘은 추수감사절입니다. 11-19절은 추수감사절과 잘 어울리는 말씀이라고 생각됩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에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지나가셨습니다. 한 마을에 들어가시니 나병환자 열 명이 예수님을 만나 멀리 서서 소리쳤습니다.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예수님은 나병환자들이 불쌍히 여겨 달라고 했는데 가서 제사장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고 방향을 주셨습니다. 대화가 조금은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르겠습니다. 나병환자들이 불쌍히 여겨 달라고 요청하면 예수님께서 직접 손으로 만져주시거나 치료해 주셔야 할 것같은데 예수님은 단지 제사장에게 가서 보이라고 하셨습니다. 아무튼 열 명의 나병환자들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에 순종하여 제사장에게로 갔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들은 가다가 열 사람 모두 깨끗함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순종했을 때 치료가 불가능해 보이던 나병이 깨끗이 치료가 되었습니다. 본문의 문둥병자들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바는 무엇입니까? 이는 우리가 이해가 되지 않지만 일단 믿음으로 순종하면 놀라운 일을 체험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열 명의 문둥병자 중 한 사람이 자기가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예수님께로 돌아왔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발 아래에 엎드려 감사했습니다.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를 보고 말씀하셨습니다.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예수님께서는 열 사람 중에 외 한 사람만이 감사하러 나와왔는지 물으십니다. 왜 나머지 아홉 사람은 예수님께로 오지 않았을까요? 너무 기뻐서 예수님께로 돌아와 감사하는 것을 잊어버렸을지도 모릅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놀라운 일을 간증하느라 도저히 올 수 없는 상황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어떤 사람들은 벌써 집으로 달려가 보고 싶었던 가족들을 만나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이유야 어찌되었든, 열 명중 단 한 명만이 예수님께 감사하기 위해 나아왔습니다. 개와 고양이가 주인으로부터 극진한 대접을 받았습니다. 그러자 개는 생각했습니다. “와 우리 주인은 정말 하나님과 같은 사람이구나.” 그런데 고양이는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와 내가 하나님 이구나.” 똑같은 대접을 받고 은혜를 받더라도 우리가 그 받은 은혜를 어떻게 여기느냐에 딸라 이처럼 태도가 달라집니다. 우리는 때로 어떤 은혜를 입었는데도 이를 당연하게 여긴다면 감사할 수 없습니다. 자기가 잘 나서 선물을 받는다고 생각하면 감사할 수 없습니다. 감사하는 것은 하면 좋고 안해도 그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감사는 사람과 사람, 나아가 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관계성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요소중 하나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게 된 것이 왜 입니까? 그들이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동산의 모든 과일을 다 먹을 수 있었지만 딱 한 가지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을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과일을 얼마든지 먹고 행복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탄은 그들의 마음에 하나님께 대한 감사하지 않는 마음, 원망하는 마음을 심었습니다. 한 가지 먹지 말라고 하신 그것을 꼬투리 삼은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당연하게 여기다가 한 가지 주지 않으신 것으로 불평하고 원망하는 마음을 갖다가 사탄의 유혹에 넘어가고 말았습니다. 우리도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기억하고 감사하여야 겠습니다. 나에게 없는 한 가지를 생각하면서 감사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해서는 안됩니다. 예수님은 나음을 받은 문둥병자에게 말씀하십니다. 19절을 보십시오.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 믿음이 있을 때 감사할 수 있습니다. 또 감사를 통해서 예수님과 인격적인 관계성을 맺을 수 있습니다. 그는 예수님으로부터 그의 믿음을 축복하시는 말씀, 구원의 확신을 주시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이상에서 우리는 성숙한 제자가 가져야할 태도에 대해서 배웠습니다. 성숙한 제자는 용서하는 사람입니다. 성숙한 제자는 무익한 종의 자세를 가집니다. 성숙한 제자는 감사하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은혜를 잘 잊어버립니다. 이상하게도 잊어버리려 하지 않는데도 잘 잊어버립니다. 대신 내가 받은 상처는 절대로 잊어버리지 않습니다. 그래서 용서가 어렵고 은혜에 감사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우리가 어렵다고 힘들다고 포기하지 않고 하나님께 기도하고 은혜를 덧입어서 성숙한 하나님의 사람들로 성장할 수 있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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