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9) 눅30강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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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누가복은 제 30강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본문 : 누가복은 13:10-35 요절 : 누가복은 13:24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
본문에는 18년 동안 귀신의 장난에 꼬부라진 인생을 살다가 예수님의 치유로 새로운 삶을 살게 된 한 여인이 등장합니다. 예수님은 이 여인을 고치시고 하나님 나라를 ‘겨자씨 한 알’, ‘작은 누룩’ 으로 표현하시면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구원의 문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통해 구원의 문이 되시는 예수님을 따르는 삶의 비밀을 배울 수 있길 기도합니다.
어떤 한 사람이 나비가 번데기의 좁은 실구멍을 뚫고 세상에 나오려고 몸부림치는 모습을 우연히 보게 되었습니다. 그는 안타까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비가 세상에 나오는 것을 돕기 위해 실구멍을 가위로 살짝 키워 주었습니다. 그는 좋은 일을 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제 나비는 아름다운 세상을 향해 쉽게 아름다운 비상을 할 것이다.’라고 좋아했습니다. 생각대로 나비는 쉽게 번데기에서 나왔습니다. 그는 나비가 아름다운 날개 짓을 하면서 푸른 상공을 비상하는 모습을 상상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나비는 날지 못하고 몇 번의 날개 짓을 하다가 죽고 말았습니다.
이유는 좁은 실구멍을 뚫고 나오는 과정을 나비가 거치지 않았기 때문에 하늘을 날 수 있는 힘이 생기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나비는 좁은 실구멍을 빠져나오는 몸부림을 치면서 몸의 기운이 날개 끝까지 전달되어 번대기 안에서 구부리고 있던 날개를 펼 수 있는 힘을 얻을 수 있다고 합니다. 그는 나비에게 좋은 일을 했다고 생각했는데 나비를 죽이는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좁은 실구멍을 넓혀 줌으로써 나비는 쉽게 번대기에서 나왔지만, 아름다운 날개를 마음 것 한 번도 펼쳐보지 못하고 죽고 만 것입니다. 예수님은 오늘 말씀에서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고 말씀하십니다. 조금은 부담이 되고 쉽고 넓은 길이 온 천지에 깔려 있는데 굳이 좁은 문으로 들어가야 하는가 하는 반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우리에게 좁은 문으로 들어와 예수님과 같이 생명과 기쁨이 넘치는 아름다운 꿈을 이루시길 바라십니다.
그러면 이 좁은 문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전에 18년간 귀신에 의해 꼬부라진 인생을 살다가 예수님께 고침을 받은 여인의 이야기를 통해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예수님은 18년 동안이나 귀신들려 몸과 마음고생으로 인생이 꼬아진 한 여인을 안식일에 고쳐주셨습니다. 여자와 남자의 차이점 중에 하나는 아름다움에 대한 갈망입니다. 여자들은 특히 외모에 많은 관심이 있으며 신경을 많이 씁니다. 외출을 준비할 때 남자는 5분이면 됩니다. 그러나 여자는 최소한 30분에서 1시간 이상 시간이 필요합니다. 여인들의 아름다움에 대한 추구는 본능입니다. 여인들이 아름다워지려고 노력하는 것은 죄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여인은 18년 동안이나 허리가 꼬부라진 상태로 노틀담의 곱추 콰지모도(반신불구)와 같은 인생을 살 수 밖에 없었습니다. 여인은 외모상의 허리뿐만 아니라 내면에 불안과 증오와 공포로 어둡고 슬픈 인생을 살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여인을 불쌍히 여기시고 안식일이지만 여인을 안수하시고 고쳐주셨습니다, 여인은 아름다운 날개를 단 나비와 같이 하늘을 나는 기분이었을 것입니다. 여인의 허리와 얼굴, 마음이 활짝 펴졌습니다. 이와 같이 도움이 필요한 영혼을 불쌍히 여기고 고쳐주시고 섬기는 것이 진정한 사랑이라고 몸소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13절을 보면 이 여인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찬양 했습니다.
그러나 회당장은 여인이 기뻐 뛰는 모습을 보면서도 기뻐하기는 커녕 예수님이 안식일에 일을 해서 율법을 어겼다고 비난했습니다. “일한 날이 엿새가 있으니 그 동안에 와서 고침을 받을 것이요 안식일에는 하지 말 것이니라” 이에 예수님은 “주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외식하는 자들아 너희가 각각 안식일에 자기의 소나 나귀를 외양간에서 풀어내어 이끌고 가서 물을 먹이지 아니하느냐 그러면 열 여덟해 동안 사탄에게 메인 바 된 이 아브라함의 딸을 안식일에 이 매임에서 푸는 것이 합당하지 아니하냐(15, 16)”라고 일침을 놓았습니다. 예수님은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고 외롭게 고통하는 여인을 ‘아브라함의 딸’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소중한 자녀요, 아브라함의 믿음의 후손이라고 인정하셨습니다. 이는 예수님의 한 영혼에 대한 사랑이며 긍휼의 마음입니다.
여인을 고치시고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를 ‘겨자씨 한 알’, ‘작은 누룩’으로 표현 하셨습니다. 당시에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를 연상할 때 ‘헤롯이 만든 성전과 같이 웅장하고 거대하며 아름다운 건물’, ‘화려하고 고상한 제사장 복장과 모세의 십계명’을 떠 올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를 외형상의 화려함에 있지 않다고 하십니다. 외형상 화려하지 않지만 겨자씨가 심겨지고 자라면 수많은 새들이 날아와서 둥지를 틀고 쉼을 얻을 수 있습니다. 누룩은 조금만 넣어도 밀가루를 부풀게 하며 맛있는 빵을 만드는 산파의 역할을 합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수고하고 지친 영혼의 안식처가 되며 새로운 생명을 잉태하는 생명의 문이 되시기 위해 이 땅에 인간의 몸을 지니고 낮아져 오셨습니다.
우리가 하루하루를 살면서 많은 일을 하지만 겨자씨 같이 작고 누룩같이 미미하게 보이는 행동이 많이 있습니다. 학교에서 휴지를 줍고, 공부가 미진한 친구의 숙제를 도와주고, 어려움에 있는 친구의 고민을 들어주고, 길에서 도움을 청하는 사람들에게 조금의 물질을 주는 것들이 아주 작아 보일 때가 있습니다. 많은 사람의 주목을 받는 것도 아니고 뉴스나 언론 또는 인터넷에 많은 관심을 끄는 일도 아닙니다. 그러나 이 작은 행동과 아름다운 마음에 하나님 나라가 있습니다. 마음의 따스함이 있고 격려와 우정과 희망이 있습니다. 이런 소소한 것이 거대한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가 하는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아름다운 마음과 행동이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고 우리 가운데 아름답고 기쁨이 넘치는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첩경입니다.
겨자씨와 누룩의 비유를 듣던 한 사람이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주여, 구원을 받는 자가 적으니이까” 이에 예수님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24)”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합니까?
먼저 ,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힘을 써야 합니다. 좁은 문은 구원의 문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입구입니다. ‘좁은 문’은 예수님 자체를 의미합니다. 요한복음 10:9절 말씀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에서 예수님이 구원에 이르는 문이라고 직접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구원의 문을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완성하셨습니다.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의 대가를 치루시고 부활하심으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문을 활짝 열어 주셨습니다.
컴퓨터가 새로운 세상을 연 것은 창이라는 도구를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도스세대에서 원도우세대로 이어지면서 누구나 쉽게 새로운 세계로 접근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최근의 스마트폰은 이를 더욱 쉽고 편리하게 해주고 있습니다. 인터넷과 스마트폰에 빠진 아이들의 공통적인 특징은 한 가지 일에 집중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저기에 들어오라는 문들이 너무나도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들어오라는 문에 들어가도 진정으로 만족을 주는 문은 없습니다, 그래서 들어갔다 나왔다를 반복합니다. 이런 인터넷 서핑이나 게임은 우리에게 조금의 유익과 즐거움을 줄 수 있지만 구원의 문이 되며 진리와 생명의 길이 되지 않습니다.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를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자가 아무도 없느니라(요한복음 14:6-7)”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고난을 받으시고 채찍에 맞으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시기까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사랑하신 예수님만이 유일한 구원의 문이 되십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구체적으로 어떤 힘을 써야 합니까?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의 ‘힘쓰라’의 동사는 ‘아고니조마이’의 ‘Make every effort'로서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하라는 뜻입니다. 마치 육상경기를 하는 선수가 결승선을 향해 혼신의 힘을 다해 마지막 스파트를 하는 모습입니다. 어린 시절 젖 먹던 힘까지 다 쏟아내는 모습입니다. 이곳 저곳을 기웃거리면서 유유자적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도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세상이 주는 잔재미를 부인해야 합니다. IT기술이 유혹하는 순간의 쾌감을 물리쳐야 합니다. 자신의 생각과 나쁜 습관에 빠진 게으름과 자기만을 생각하는 이기심을 극복해야합니다. 좁은 문이 되시는 예수님을 향해 자신을 부인하고 세상의 유혹에 지지 않고 달려가야 합니다.
구원을 얻기 위한 믿음의 경주에 대해 사도바울은 디모데 후서 4:5,8절 “나의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 우리가 좁은 문으로 들어가길 힘써야 하는 이유는 우리를 위해 하나님이 면류관을 예비하고 기다리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또 의로우신 재판장이 우리를 재판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행하는 행적에 의해서 의의 면류관과 심판을 동시에 하시기 때문에 자신을 잘 성찰하고 좁은 문이 되시는 얘수님께 나아가도록 최선의 노력을 경주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자기 맘대로 자행자지하면 결국에 의로운 재판장 앞에 가서 수치와 심판을 피할 수 없습니다.
24, 25절에서 예수님은 구원의 문에 들어가지 못하는 자들고 많다고 말씀하십니다. 문이 한번 닫힌 후에는 아무리 통사정을 해도 닫힌 문은 열리지 않습니다. “우리가 주님과 함께 먹고 마셨습니다. 주님이 길거리에서 가르치실 때에 저도 거기 있었습니다.” 아무리 변명을 해도 통하지 않습니다. 제가 주님과 같이 식사도 하고 예배도 드리고 같이 청소도 하고 봉사도 했습니다. 그러나 의로운 재판장이 되시는 예수님이 ‘나는 너를 모른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말씀에 따르지 않고 자신의 유익과 편의에 따라서 생활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좁은 길인 예수님을 따르고 말씀에 순종하면 의의 면류관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두 번째로, 좁은 문으로 들어가셨던 예수님을 본받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31절을 보면 헤롯이 예수님을 죽이고자 하는 소문이 예수님께 전해졌습니다. 우리 같으면 얼마나 두렵고 힘들었겠습니까? 최근 조폭들이 집단으로 난투극을 벌이면서 거리를 활보할 때 경찰들도 무서워서 어떻게 하지 못했습니다. 최근에 저는 치과 치료를 받고 있는데 제일 싫은 것이 마취를 위한 주사를 맞는 경우입니다. 의사선생님이 ‘마취 주사가 조금 따끔합니다.’라고 말씀하시지만 저는 말은 못하고 오금이 저려옵니다. 치료를 위해서 입을 벌리고 전동소리와 이빨 갈리는 소리를 들으면서 2~3시간 치료를 받고나면 다시는 치과에 가지 않겠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치료를 위한 고통도 소름 끼치는데, 예수님을 죽이겠다고 하는데 예수님의 반응은 어떠합니까? “이르시되 너희는 가서 저 여우에게 이르되 오늘과 내일은 내가 귀신을 쫒아내며 병을 고치다가 제 삼일에는 완전하여 지리라 하라. 그러나 오늘과 내일과 모레는 내가 갈 길을 가야 하리니 선지자가 예루살렘 밖에서는 죽는 법이 없느니라(32.33)”
예수님은 우리에게만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독려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 스스로 십자가의 고통과 죽음을 감당하시므로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본을 보이셨습니다. 오늘과 내일은 귀신을 쫒아내는 사탄과의 영적인 전쟁과 무거운 죄악의 집으로 고통하는 영혼을 살리는 일과 제 삼일, 즉 하나님이 예비하신 날에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성경에 기록된바와 같이 제 삼일만에 부활하셔서 우리를 위한 구원역사를 완성하시겠다는 결의를 표현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죽음 앞에서도 오늘과 내일과 모레는 내가 갈 길을 가리니"(I must keep going today and tomorrow and the next day)" 죽을 때 죽더라도 자신이 하실 일을 담대히 묵묵히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이런 예수님을 본 받아 믿음생활의 소신을 가져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20:24)” 예수님은 우리에게 “넓은 문으로 들어가지 말고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마7:13,14)” 라고 말씀하시면서 우리가 좁은 문으로 들어가 영생을 얻고 의의 면류관을 받을 수 있길 간절히 바라고 계십니다.
주님의 초청에 말씀에 순종하여 좁은 문으로 들어가며, 말씀에 기초하여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음으로 좁은 문에 들어가길 힘 쓸 수 있길 기도합니다. 주님의 음성과 초청을 거절하고 끝내 넓은 길로 가는 자는 황패해지고 망하게 됩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길은 결코 쉬운 길이 아닙니다. 세상과 자신과의 싸움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과 경쟁에서 이기는 것도 어렵지만 자신과 싸워서 이기는 것은 더욱 어렵습니다. 그러나 자신과 싸워서 이기면 구원이 있고, 영생이 있고, 하나님의 영광이 있기 때문에 싸울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자신을 부인하고 예수님이 가셨던 길을 묵묵히 달려 갈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힘과 지혜와 능력을 넘치게 허락하실 것입니다. 우리 모두 좁은 문으로 들어가 천국으로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는 자가 될 수 있길 기도합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본문 : 누가복은 13:10-35 요절 : 누가복은 13:24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
본문에는 18년 동안 귀신의 장난에 꼬부라진 인생을 살다가 예수님의 치유로 새로운 삶을 살게 된 한 여인이 등장합니다. 예수님은 이 여인을 고치시고 하나님 나라를 ‘겨자씨 한 알’, ‘작은 누룩’ 으로 표현하시면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구원의 문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통해 구원의 문이 되시는 예수님을 따르는 삶의 비밀을 배울 수 있길 기도합니다.
어떤 한 사람이 나비가 번데기의 좁은 실구멍을 뚫고 세상에 나오려고 몸부림치는 모습을 우연히 보게 되었습니다. 그는 안타까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비가 세상에 나오는 것을 돕기 위해 실구멍을 가위로 살짝 키워 주었습니다. 그는 좋은 일을 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제 나비는 아름다운 세상을 향해 쉽게 아름다운 비상을 할 것이다.’라고 좋아했습니다. 생각대로 나비는 쉽게 번데기에서 나왔습니다. 그는 나비가 아름다운 날개 짓을 하면서 푸른 상공을 비상하는 모습을 상상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나비는 날지 못하고 몇 번의 날개 짓을 하다가 죽고 말았습니다.
이유는 좁은 실구멍을 뚫고 나오는 과정을 나비가 거치지 않았기 때문에 하늘을 날 수 있는 힘이 생기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나비는 좁은 실구멍을 빠져나오는 몸부림을 치면서 몸의 기운이 날개 끝까지 전달되어 번대기 안에서 구부리고 있던 날개를 펼 수 있는 힘을 얻을 수 있다고 합니다. 그는 나비에게 좋은 일을 했다고 생각했는데 나비를 죽이는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좁은 실구멍을 넓혀 줌으로써 나비는 쉽게 번대기에서 나왔지만, 아름다운 날개를 마음 것 한 번도 펼쳐보지 못하고 죽고 만 것입니다. 예수님은 오늘 말씀에서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고 말씀하십니다. 조금은 부담이 되고 쉽고 넓은 길이 온 천지에 깔려 있는데 굳이 좁은 문으로 들어가야 하는가 하는 반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우리에게 좁은 문으로 들어와 예수님과 같이 생명과 기쁨이 넘치는 아름다운 꿈을 이루시길 바라십니다.
그러면 이 좁은 문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전에 18년간 귀신에 의해 꼬부라진 인생을 살다가 예수님께 고침을 받은 여인의 이야기를 통해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예수님은 18년 동안이나 귀신들려 몸과 마음고생으로 인생이 꼬아진 한 여인을 안식일에 고쳐주셨습니다. 여자와 남자의 차이점 중에 하나는 아름다움에 대한 갈망입니다. 여자들은 특히 외모에 많은 관심이 있으며 신경을 많이 씁니다. 외출을 준비할 때 남자는 5분이면 됩니다. 그러나 여자는 최소한 30분에서 1시간 이상 시간이 필요합니다. 여인들의 아름다움에 대한 추구는 본능입니다. 여인들이 아름다워지려고 노력하는 것은 죄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여인은 18년 동안이나 허리가 꼬부라진 상태로 노틀담의 곱추 콰지모도(반신불구)와 같은 인생을 살 수 밖에 없었습니다. 여인은 외모상의 허리뿐만 아니라 내면에 불안과 증오와 공포로 어둡고 슬픈 인생을 살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여인을 불쌍히 여기시고 안식일이지만 여인을 안수하시고 고쳐주셨습니다, 여인은 아름다운 날개를 단 나비와 같이 하늘을 나는 기분이었을 것입니다. 여인의 허리와 얼굴, 마음이 활짝 펴졌습니다. 이와 같이 도움이 필요한 영혼을 불쌍히 여기고 고쳐주시고 섬기는 것이 진정한 사랑이라고 몸소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13절을 보면 이 여인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찬양 했습니다.
그러나 회당장은 여인이 기뻐 뛰는 모습을 보면서도 기뻐하기는 커녕 예수님이 안식일에 일을 해서 율법을 어겼다고 비난했습니다. “일한 날이 엿새가 있으니 그 동안에 와서 고침을 받을 것이요 안식일에는 하지 말 것이니라” 이에 예수님은 “주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외식하는 자들아 너희가 각각 안식일에 자기의 소나 나귀를 외양간에서 풀어내어 이끌고 가서 물을 먹이지 아니하느냐 그러면 열 여덟해 동안 사탄에게 메인 바 된 이 아브라함의 딸을 안식일에 이 매임에서 푸는 것이 합당하지 아니하냐(15, 16)”라고 일침을 놓았습니다. 예수님은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고 외롭게 고통하는 여인을 ‘아브라함의 딸’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소중한 자녀요, 아브라함의 믿음의 후손이라고 인정하셨습니다. 이는 예수님의 한 영혼에 대한 사랑이며 긍휼의 마음입니다.
여인을 고치시고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를 ‘겨자씨 한 알’, ‘작은 누룩’으로 표현 하셨습니다. 당시에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를 연상할 때 ‘헤롯이 만든 성전과 같이 웅장하고 거대하며 아름다운 건물’, ‘화려하고 고상한 제사장 복장과 모세의 십계명’을 떠 올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를 외형상의 화려함에 있지 않다고 하십니다. 외형상 화려하지 않지만 겨자씨가 심겨지고 자라면 수많은 새들이 날아와서 둥지를 틀고 쉼을 얻을 수 있습니다. 누룩은 조금만 넣어도 밀가루를 부풀게 하며 맛있는 빵을 만드는 산파의 역할을 합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수고하고 지친 영혼의 안식처가 되며 새로운 생명을 잉태하는 생명의 문이 되시기 위해 이 땅에 인간의 몸을 지니고 낮아져 오셨습니다.
우리가 하루하루를 살면서 많은 일을 하지만 겨자씨 같이 작고 누룩같이 미미하게 보이는 행동이 많이 있습니다. 학교에서 휴지를 줍고, 공부가 미진한 친구의 숙제를 도와주고, 어려움에 있는 친구의 고민을 들어주고, 길에서 도움을 청하는 사람들에게 조금의 물질을 주는 것들이 아주 작아 보일 때가 있습니다. 많은 사람의 주목을 받는 것도 아니고 뉴스나 언론 또는 인터넷에 많은 관심을 끄는 일도 아닙니다. 그러나 이 작은 행동과 아름다운 마음에 하나님 나라가 있습니다. 마음의 따스함이 있고 격려와 우정과 희망이 있습니다. 이런 소소한 것이 거대한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가 하는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아름다운 마음과 행동이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고 우리 가운데 아름답고 기쁨이 넘치는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첩경입니다.
겨자씨와 누룩의 비유를 듣던 한 사람이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주여, 구원을 받는 자가 적으니이까” 이에 예수님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24)”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합니까?
먼저 ,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힘을 써야 합니다. 좁은 문은 구원의 문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입구입니다. ‘좁은 문’은 예수님 자체를 의미합니다. 요한복음 10:9절 말씀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에서 예수님이 구원에 이르는 문이라고 직접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구원의 문을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완성하셨습니다.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의 대가를 치루시고 부활하심으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문을 활짝 열어 주셨습니다.
컴퓨터가 새로운 세상을 연 것은 창이라는 도구를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도스세대에서 원도우세대로 이어지면서 누구나 쉽게 새로운 세계로 접근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최근의 스마트폰은 이를 더욱 쉽고 편리하게 해주고 있습니다. 인터넷과 스마트폰에 빠진 아이들의 공통적인 특징은 한 가지 일에 집중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저기에 들어오라는 문들이 너무나도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들어오라는 문에 들어가도 진정으로 만족을 주는 문은 없습니다, 그래서 들어갔다 나왔다를 반복합니다. 이런 인터넷 서핑이나 게임은 우리에게 조금의 유익과 즐거움을 줄 수 있지만 구원의 문이 되며 진리와 생명의 길이 되지 않습니다.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를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자가 아무도 없느니라(요한복음 14:6-7)”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고난을 받으시고 채찍에 맞으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시기까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사랑하신 예수님만이 유일한 구원의 문이 되십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구체적으로 어떤 힘을 써야 합니까?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의 ‘힘쓰라’의 동사는 ‘아고니조마이’의 ‘Make every effort'로서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하라는 뜻입니다. 마치 육상경기를 하는 선수가 결승선을 향해 혼신의 힘을 다해 마지막 스파트를 하는 모습입니다. 어린 시절 젖 먹던 힘까지 다 쏟아내는 모습입니다. 이곳 저곳을 기웃거리면서 유유자적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도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세상이 주는 잔재미를 부인해야 합니다. IT기술이 유혹하는 순간의 쾌감을 물리쳐야 합니다. 자신의 생각과 나쁜 습관에 빠진 게으름과 자기만을 생각하는 이기심을 극복해야합니다. 좁은 문이 되시는 예수님을 향해 자신을 부인하고 세상의 유혹에 지지 않고 달려가야 합니다.
구원을 얻기 위한 믿음의 경주에 대해 사도바울은 디모데 후서 4:5,8절 “나의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 우리가 좁은 문으로 들어가길 힘써야 하는 이유는 우리를 위해 하나님이 면류관을 예비하고 기다리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또 의로우신 재판장이 우리를 재판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행하는 행적에 의해서 의의 면류관과 심판을 동시에 하시기 때문에 자신을 잘 성찰하고 좁은 문이 되시는 얘수님께 나아가도록 최선의 노력을 경주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자기 맘대로 자행자지하면 결국에 의로운 재판장 앞에 가서 수치와 심판을 피할 수 없습니다.
24, 25절에서 예수님은 구원의 문에 들어가지 못하는 자들고 많다고 말씀하십니다. 문이 한번 닫힌 후에는 아무리 통사정을 해도 닫힌 문은 열리지 않습니다. “우리가 주님과 함께 먹고 마셨습니다. 주님이 길거리에서 가르치실 때에 저도 거기 있었습니다.” 아무리 변명을 해도 통하지 않습니다. 제가 주님과 같이 식사도 하고 예배도 드리고 같이 청소도 하고 봉사도 했습니다. 그러나 의로운 재판장이 되시는 예수님이 ‘나는 너를 모른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말씀에 따르지 않고 자신의 유익과 편의에 따라서 생활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좁은 길인 예수님을 따르고 말씀에 순종하면 의의 면류관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두 번째로, 좁은 문으로 들어가셨던 예수님을 본받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31절을 보면 헤롯이 예수님을 죽이고자 하는 소문이 예수님께 전해졌습니다. 우리 같으면 얼마나 두렵고 힘들었겠습니까? 최근 조폭들이 집단으로 난투극을 벌이면서 거리를 활보할 때 경찰들도 무서워서 어떻게 하지 못했습니다. 최근에 저는 치과 치료를 받고 있는데 제일 싫은 것이 마취를 위한 주사를 맞는 경우입니다. 의사선생님이 ‘마취 주사가 조금 따끔합니다.’라고 말씀하시지만 저는 말은 못하고 오금이 저려옵니다. 치료를 위해서 입을 벌리고 전동소리와 이빨 갈리는 소리를 들으면서 2~3시간 치료를 받고나면 다시는 치과에 가지 않겠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치료를 위한 고통도 소름 끼치는데, 예수님을 죽이겠다고 하는데 예수님의 반응은 어떠합니까? “이르시되 너희는 가서 저 여우에게 이르되 오늘과 내일은 내가 귀신을 쫒아내며 병을 고치다가 제 삼일에는 완전하여 지리라 하라. 그러나 오늘과 내일과 모레는 내가 갈 길을 가야 하리니 선지자가 예루살렘 밖에서는 죽는 법이 없느니라(32.33)”
예수님은 우리에게만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독려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 스스로 십자가의 고통과 죽음을 감당하시므로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본을 보이셨습니다. 오늘과 내일은 귀신을 쫒아내는 사탄과의 영적인 전쟁과 무거운 죄악의 집으로 고통하는 영혼을 살리는 일과 제 삼일, 즉 하나님이 예비하신 날에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성경에 기록된바와 같이 제 삼일만에 부활하셔서 우리를 위한 구원역사를 완성하시겠다는 결의를 표현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죽음 앞에서도 오늘과 내일과 모레는 내가 갈 길을 가리니"(I must keep going today and tomorrow and the next day)" 죽을 때 죽더라도 자신이 하실 일을 담대히 묵묵히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이런 예수님을 본 받아 믿음생활의 소신을 가져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20:24)” 예수님은 우리에게 “넓은 문으로 들어가지 말고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마7:13,14)” 라고 말씀하시면서 우리가 좁은 문으로 들어가 영생을 얻고 의의 면류관을 받을 수 있길 간절히 바라고 계십니다.
주님의 초청에 말씀에 순종하여 좁은 문으로 들어가며, 말씀에 기초하여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음으로 좁은 문에 들어가길 힘 쓸 수 있길 기도합니다. 주님의 음성과 초청을 거절하고 끝내 넓은 길로 가는 자는 황패해지고 망하게 됩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길은 결코 쉬운 길이 아닙니다. 세상과 자신과의 싸움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과 경쟁에서 이기는 것도 어렵지만 자신과 싸워서 이기는 것은 더욱 어렵습니다. 그러나 자신과 싸워서 이기면 구원이 있고, 영생이 있고, 하나님의 영광이 있기 때문에 싸울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자신을 부인하고 예수님이 가셨던 길을 묵묵히 달려 갈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힘과 지혜와 능력을 넘치게 허락하실 것입니다. 우리 모두 좁은 문으로 들어가 천국으로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는 자가 될 수 있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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