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1) 너도 이와 같이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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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도 이와 같이 하라
본문 누가복음 10:25 - 42
요절 누가복음 10:37
“이르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
오늘 말씀은 영생에 대한 교훈입니다. 우리 JBF 학생들에게 중요한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학교에서는 성적이 아주 중요합니다. 또한 친구관계 역시 매우 중요합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영생 곧 영원한 생명에 관한 문제입니다. 우리의 이 땅에서의 삶은 지극히 짧습니다. 사실 우리의 삶은 언제 끝날지 아무도 모릅니다. 뿐만 아니라 그것이 또한 끝이 아닙니다. 그 이후에 천국과 지옥이 있습니다. 영원한 생명이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천국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고 싶습니다. 어떻게 우리가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 말씀을 통해 영생을 얻는 비밀을 배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25절을 보십시오. 어떤 율법교사가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질문했습니다.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영생은 하늘나라에서 하나님과 교제하며 영원히 죽지 않고 사는 것을 말합니다. 본래 우리 인간은 영생하는 존재로 지어졌습니다. 창세기를 보면 에덴동산 중앙에 생명나무가 있었는데 우리는 생명나무 열매를 먹으며 영원히 사는 존재였습니다. 그런데, 아담이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여 선악과를 먹으므로 죄가 세상에 들어왔고 죄로 인해 이 세상에 죽음이 들어왔습니다. 뿐만 아니라 죽음 후에는 심판이 있습니다. 히9:27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계20:12,15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큰 자나 작은 자나 그 보좌 앞에 서 있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져지리라” 우리 인생들은 죄로 말미암아 죽음과 그 이후에 영원한 심판을 받을 수 밖에 없는 비참한 운명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영원한 심판을 피하고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 영생이야 말로 죄로 인해서 심판 받을 수 밖에 없는 우리 인생들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입니다. 율법교사는 예수님께 나아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는지 질문을 했습니다.
율법교사의 질문에 예수님은 되물으셨습니다. 26절.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이에 율법교사가 대답했습니다.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이는 십계명을 함축한 것이요 구약 율법의 핵심입니다. 율법교사는 아주 정확하게 율법의 핵심을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율법교사의 대답을 인정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셨습니다. 28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하시니”
그는 율법의 핵심을 정확하게 알고 있었지만 영생을 얻기 위해서 이것으로는 불충분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우리는 내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나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나 자신과 같이 내 옆에 앉아 있는 친구를 사랑하고 있습니까? 예수님은 우리에게 영생을 얻는 비밀을 가르쳐 주십니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로마서 2장 9-13절은 말씀합니다. “악을 행하는 각 사람의 영에는 환난과 곤고가 있으리니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며 선을 행하는 각 사람에게는 영광과 존귀와 평강이 있으리니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라 이는 하나님께서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아니하심이라,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으리니” 하나님께선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습니다. 이 자리에서 이렇게 말씀을 듣고 있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인정을 하지 않으십니다.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순종할 때 비로소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인정하십니다.
그런데 우리의 현재 모습은 어떠합니까? 나는 내 마음과 목숨과 힘과 뜻을 다하여 주 나의 하나님을 사랑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내 이웃을, 내 친구를 내 몸과 같이 사랑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도리어 반대로 행할 때가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사랑하는 대신 미워하고 시기할 때가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때때로 동생 아벨을 시기하여 죽였던 가인처럼 죽이고 싶은 마음이 들 때도 있지 않습니까? 이것이 우리 인생의 실존이요 비극입니다. 율법교사처럼 무엇이 옳은지 잘 알고 있지만 그것을 행할 힘이 내 안에 없습니다. 선한 것을 잘 알지만 내 안에 깊은 죄의 세력 때문에 그 반대의 악을 행하는 것이 나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롬3:10은 말씀합니다.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롬3:20에서는 우리의 실존을 정확하게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 처럼 누구든지 율법을 행하면 영생을 얻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율법을 다 지킬 수 있는 사람이 단 한 사람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율법을 통해 우리는 스스로 죄인 됨을 발견할 뿐입니다. 결국 우리 인생들은 단 한명도 예외 없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영원히 불타는 지옥에 던져질 수 밖에 없는 운명에 처해졌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런 인생들을 너무나 불쌍히 여기셔서 율법을 지키는 것 외에 새로운 구원의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롬3: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사53:6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롬3:28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죄로 말미암아 심판 받아 영원한 지옥 형벌을 받을 수 밖에 없는 우리 인생들을 불쌍히 여기셔서 그 아들 독생자 예수님께 우리의 죄를 대신 지우시므로 값없이 죄사함과 영생을 주신 아버지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에 감사와 찬양을 드립니다.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예수님께서 말씀하시자 율법교사는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 그가 생각한 이웃은 자기 가족, 친척, 동족 등이었습니다. 하지만 사마리아인과 타국인들은 이웃에서 배제되어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을 철저하게 무시하고 멸시하였습니다. 사마리아인 역시 이런 유대인들에게 적대적이었습니다. 그들은 서로 원수와 같이 여겼습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한 비유를 들어 그의 이웃이 누구인지 말씀해 주십니다.
한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났습니다. 예루살렘은 해발 762미터, 여리고는 해면에서 250미터가 낮은 곳이라 거의 1킬로미터 높이의 차이가 있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에서 여리고가 30킬로미터인데, 내려오는 길에 수많은 굴과 계곡이 있어서 구덩이, 동굴에 강도들이 숨어 있다가 여행객들을 습격하곤 하였습니다. 강도들은 한 사람을 습격하여 옷을 벗기고 때려 거의 죽은 것을 버리고 갔습니다. 그가 가지고 있던 귀중품, 돈이 될 만한 것은 다 가지고 가버렸습니다.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갔습니다. 또 이와 같이 한 레위인도 그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갔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아마 그도 여행하는 중에 강도 만난 경험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는 강도 만난 사람의 처지를 누구보다 잘 이해했고 아무도 도와줄 수 없는 상황에 처한 사람에 대해서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솟아났습니다. 그는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맸습니다. 그리고 그는 강도 만난 자를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었습니다. 그 이튿날 그가 주막 주인에게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며 부탁을 합니다. 이 사람을 돌보아 주세요.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겠습니다. 당시 팔레스틴의 숙박비는 하루에 한 데나리온의 1/12에 해당하는 금액이었으므로 이는 24일의 숙박비에 해당이 됩니다. 그는 희생적으로 강도 만난 사람을 도와주었습니다.
예수님은 율법교사에게 묻습니다.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율법교사는 자비를 베푼 자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는 의도적으로 사마리아 인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영생을 얻는 길은 강도 만난 사람을 선한 사마리아 사람같이 돌보는 데서 옵니다. 율법 교사는 “누가 내 이웃이 되겠느냐”라고 질문을 했는데 예수님은 “누가 그의 이웃이 되겠느냐”라고 다시 물으십니다. 율법교사는 이웃이 정해지면 그를 사랑하겠다 하였는데, 예수님은 이 생각을 바꾸어 주셨습니다. 곧 도움이 필요한 모든 사람이 나의 이웃이며 나는 이웃으로서의 책임과 의무를 다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 비유에서 강도 만난 자는 바로 나 자신, 우리 각자입니다. 영혼의 강도인 사탄으로 인해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큰 상처를 입었습니다. 하나님께선 본래 우리 인생들을 지극히 아름답게 지으셨습니다. 우리 자신을 깊이 들여다 보면 그 아름다운 모습이 아직도 남아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탄의 유혹에 넘어져 하나님을 불순종하므로 이 땅에 죄가 들어 왔습니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아름다운 영혼에 먹물이 떨어졌고 그 먹물이 점점 번져갔습니다. 이와 함께 내 영혼이 치명적인 상처를 받았습니다. 사랑으로 가득했던 나의 영혼이, 점점 미움과 시기심으로, 각종 음란한 것으로, 더럽혀 졌습니다. 내 마음은 선한 것을 사랑하지만 실제 삶은 죄악된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앞에 나온 제사장과 레위인은 그 사람을 도와주어야 하는 것을 잘 알았지만, 이기심 때문에, 자신이 혹시 피해를 입지 않을까봐 두려워서 피해 갔습니다. 우리는 옳은 것을 잘 알지만 반대로 그릇된 것을 얼마나 자주 행하고 있습니까? 죄를 범할 때 마다 우리는 깊은 죄의식에 시달리며 내 영혼은 고통합니다. 영혼의 강도 사탄의 습격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일평생 죄악된 삶을 살며 죄의식 가운데 고통하다가 결국 죽어서 영원한 심판을 받을 수 밖에 없는 비참한 운명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선한 이웃이 되어 이 땅에 오심으로 우리의 상처를 감싸 주셨습니다. 이사야서 53:5,6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예수님은 우리 죄를 대신 지시고 채찍에 맞으시고 십자가를 지심으로 죄의식으로 고통하는 우리에게 평화를, 상처 입은 우리 영혼에 나음을 주셨습니다. 강도 맞아 죽어가는 나 한 사람을 살리시고자 하늘 영광을 버리시고 이 땅에 오사 나를 대신하여 고난 받으시고 십자가에 피 흘리며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놀라운 사랑과 은혜를 감사합니다. 우리가 이 예수님을 믿고 받아들일 때, 영생을 얻고 내 영혼이 치유함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예수님과 같이 선한 이웃이 될 수 있습니다.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예수님의 말씀은 결국 영생을 위한 조건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음으로 영생을 얻은 사람들의 삶의 결과입니다. 열매입니다. 내가 예수님을 믿으므로 내 안에 영생의 열매, 사랑의 열매가 맺어질 때, 이 땅에서 우리는 영생을 누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JBF 영혼들 안에 예수님의 십자가로 말미암는 구원의 은혜를 넘치게 부어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의 놀라운 사랑으로 말미암아 매일의 삶에서 선한 이웃이 되게 하시고 영생의 열매를 맺으며 영생을 누리는 삶을 살게 하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본문 누가복음 10:25 - 42
요절 누가복음 10:37
“이르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
오늘 말씀은 영생에 대한 교훈입니다. 우리 JBF 학생들에게 중요한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학교에서는 성적이 아주 중요합니다. 또한 친구관계 역시 매우 중요합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영생 곧 영원한 생명에 관한 문제입니다. 우리의 이 땅에서의 삶은 지극히 짧습니다. 사실 우리의 삶은 언제 끝날지 아무도 모릅니다. 뿐만 아니라 그것이 또한 끝이 아닙니다. 그 이후에 천국과 지옥이 있습니다. 영원한 생명이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천국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고 싶습니다. 어떻게 우리가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 말씀을 통해 영생을 얻는 비밀을 배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25절을 보십시오. 어떤 율법교사가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질문했습니다.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영생은 하늘나라에서 하나님과 교제하며 영원히 죽지 않고 사는 것을 말합니다. 본래 우리 인간은 영생하는 존재로 지어졌습니다. 창세기를 보면 에덴동산 중앙에 생명나무가 있었는데 우리는 생명나무 열매를 먹으며 영원히 사는 존재였습니다. 그런데, 아담이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여 선악과를 먹으므로 죄가 세상에 들어왔고 죄로 인해 이 세상에 죽음이 들어왔습니다. 뿐만 아니라 죽음 후에는 심판이 있습니다. 히9:27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계20:12,15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큰 자나 작은 자나 그 보좌 앞에 서 있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져지리라” 우리 인생들은 죄로 말미암아 죽음과 그 이후에 영원한 심판을 받을 수 밖에 없는 비참한 운명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영원한 심판을 피하고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 영생이야 말로 죄로 인해서 심판 받을 수 밖에 없는 우리 인생들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입니다. 율법교사는 예수님께 나아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는지 질문을 했습니다.
율법교사의 질문에 예수님은 되물으셨습니다. 26절.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이에 율법교사가 대답했습니다.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이는 십계명을 함축한 것이요 구약 율법의 핵심입니다. 율법교사는 아주 정확하게 율법의 핵심을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율법교사의 대답을 인정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셨습니다. 28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하시니”
그는 율법의 핵심을 정확하게 알고 있었지만 영생을 얻기 위해서 이것으로는 불충분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우리는 내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나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나 자신과 같이 내 옆에 앉아 있는 친구를 사랑하고 있습니까? 예수님은 우리에게 영생을 얻는 비밀을 가르쳐 주십니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로마서 2장 9-13절은 말씀합니다. “악을 행하는 각 사람의 영에는 환난과 곤고가 있으리니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며 선을 행하는 각 사람에게는 영광과 존귀와 평강이 있으리니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라 이는 하나님께서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아니하심이라,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으리니” 하나님께선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습니다. 이 자리에서 이렇게 말씀을 듣고 있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인정을 하지 않으십니다.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순종할 때 비로소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인정하십니다.
그런데 우리의 현재 모습은 어떠합니까? 나는 내 마음과 목숨과 힘과 뜻을 다하여 주 나의 하나님을 사랑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내 이웃을, 내 친구를 내 몸과 같이 사랑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도리어 반대로 행할 때가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사랑하는 대신 미워하고 시기할 때가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때때로 동생 아벨을 시기하여 죽였던 가인처럼 죽이고 싶은 마음이 들 때도 있지 않습니까? 이것이 우리 인생의 실존이요 비극입니다. 율법교사처럼 무엇이 옳은지 잘 알고 있지만 그것을 행할 힘이 내 안에 없습니다. 선한 것을 잘 알지만 내 안에 깊은 죄의 세력 때문에 그 반대의 악을 행하는 것이 나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롬3:10은 말씀합니다.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롬3:20에서는 우리의 실존을 정확하게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 처럼 누구든지 율법을 행하면 영생을 얻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율법을 다 지킬 수 있는 사람이 단 한 사람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율법을 통해 우리는 스스로 죄인 됨을 발견할 뿐입니다. 결국 우리 인생들은 단 한명도 예외 없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영원히 불타는 지옥에 던져질 수 밖에 없는 운명에 처해졌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런 인생들을 너무나 불쌍히 여기셔서 율법을 지키는 것 외에 새로운 구원의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롬3: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사53:6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롬3:28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죄로 말미암아 심판 받아 영원한 지옥 형벌을 받을 수 밖에 없는 우리 인생들을 불쌍히 여기셔서 그 아들 독생자 예수님께 우리의 죄를 대신 지우시므로 값없이 죄사함과 영생을 주신 아버지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에 감사와 찬양을 드립니다.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예수님께서 말씀하시자 율법교사는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 그가 생각한 이웃은 자기 가족, 친척, 동족 등이었습니다. 하지만 사마리아인과 타국인들은 이웃에서 배제되어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을 철저하게 무시하고 멸시하였습니다. 사마리아인 역시 이런 유대인들에게 적대적이었습니다. 그들은 서로 원수와 같이 여겼습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한 비유를 들어 그의 이웃이 누구인지 말씀해 주십니다.
한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났습니다. 예루살렘은 해발 762미터, 여리고는 해면에서 250미터가 낮은 곳이라 거의 1킬로미터 높이의 차이가 있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에서 여리고가 30킬로미터인데, 내려오는 길에 수많은 굴과 계곡이 있어서 구덩이, 동굴에 강도들이 숨어 있다가 여행객들을 습격하곤 하였습니다. 강도들은 한 사람을 습격하여 옷을 벗기고 때려 거의 죽은 것을 버리고 갔습니다. 그가 가지고 있던 귀중품, 돈이 될 만한 것은 다 가지고 가버렸습니다.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갔습니다. 또 이와 같이 한 레위인도 그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갔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아마 그도 여행하는 중에 강도 만난 경험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는 강도 만난 사람의 처지를 누구보다 잘 이해했고 아무도 도와줄 수 없는 상황에 처한 사람에 대해서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솟아났습니다. 그는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맸습니다. 그리고 그는 강도 만난 자를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었습니다. 그 이튿날 그가 주막 주인에게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며 부탁을 합니다. 이 사람을 돌보아 주세요.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겠습니다. 당시 팔레스틴의 숙박비는 하루에 한 데나리온의 1/12에 해당하는 금액이었으므로 이는 24일의 숙박비에 해당이 됩니다. 그는 희생적으로 강도 만난 사람을 도와주었습니다.
예수님은 율법교사에게 묻습니다.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율법교사는 자비를 베푼 자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는 의도적으로 사마리아 인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영생을 얻는 길은 강도 만난 사람을 선한 사마리아 사람같이 돌보는 데서 옵니다. 율법 교사는 “누가 내 이웃이 되겠느냐”라고 질문을 했는데 예수님은 “누가 그의 이웃이 되겠느냐”라고 다시 물으십니다. 율법교사는 이웃이 정해지면 그를 사랑하겠다 하였는데, 예수님은 이 생각을 바꾸어 주셨습니다. 곧 도움이 필요한 모든 사람이 나의 이웃이며 나는 이웃으로서의 책임과 의무를 다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 비유에서 강도 만난 자는 바로 나 자신, 우리 각자입니다. 영혼의 강도인 사탄으로 인해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큰 상처를 입었습니다. 하나님께선 본래 우리 인생들을 지극히 아름답게 지으셨습니다. 우리 자신을 깊이 들여다 보면 그 아름다운 모습이 아직도 남아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탄의 유혹에 넘어져 하나님을 불순종하므로 이 땅에 죄가 들어 왔습니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아름다운 영혼에 먹물이 떨어졌고 그 먹물이 점점 번져갔습니다. 이와 함께 내 영혼이 치명적인 상처를 받았습니다. 사랑으로 가득했던 나의 영혼이, 점점 미움과 시기심으로, 각종 음란한 것으로, 더럽혀 졌습니다. 내 마음은 선한 것을 사랑하지만 실제 삶은 죄악된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앞에 나온 제사장과 레위인은 그 사람을 도와주어야 하는 것을 잘 알았지만, 이기심 때문에, 자신이 혹시 피해를 입지 않을까봐 두려워서 피해 갔습니다. 우리는 옳은 것을 잘 알지만 반대로 그릇된 것을 얼마나 자주 행하고 있습니까? 죄를 범할 때 마다 우리는 깊은 죄의식에 시달리며 내 영혼은 고통합니다. 영혼의 강도 사탄의 습격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일평생 죄악된 삶을 살며 죄의식 가운데 고통하다가 결국 죽어서 영원한 심판을 받을 수 밖에 없는 비참한 운명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선한 이웃이 되어 이 땅에 오심으로 우리의 상처를 감싸 주셨습니다. 이사야서 53:5,6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예수님은 우리 죄를 대신 지시고 채찍에 맞으시고 십자가를 지심으로 죄의식으로 고통하는 우리에게 평화를, 상처 입은 우리 영혼에 나음을 주셨습니다. 강도 맞아 죽어가는 나 한 사람을 살리시고자 하늘 영광을 버리시고 이 땅에 오사 나를 대신하여 고난 받으시고 십자가에 피 흘리며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놀라운 사랑과 은혜를 감사합니다. 우리가 이 예수님을 믿고 받아들일 때, 영생을 얻고 내 영혼이 치유함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예수님과 같이 선한 이웃이 될 수 있습니다.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예수님의 말씀은 결국 영생을 위한 조건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음으로 영생을 얻은 사람들의 삶의 결과입니다. 열매입니다. 내가 예수님을 믿으므로 내 안에 영생의 열매, 사랑의 열매가 맺어질 때, 이 땅에서 우리는 영생을 누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JBF 영혼들 안에 예수님의 십자가로 말미암는 구원의 은혜를 넘치게 부어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의 놀라운 사랑으로 말미암아 매일의 삶에서 선한 이웃이 되게 하시고 영생의 열매를 맺으며 영생을 누리는 삶을 살게 하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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