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11강 "이 말을 하였으니(부스러기 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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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봄 마가복음 제 11 강
말씀 | 마가복음 7:24-30
요절 | 마가복음 7:29
이 말을 하였으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 말을 하였으니 돌아가라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느니라 하시매”
우리나라 속담에 한 마디 말로 천냥 빚을 갚는다고 했습니다. 믿음의 말, 겸손한 말, 지혜로운 말, 경외심을 가진 말이 인생을 바꿀수도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우리들에게 듣고 싶어하는 말이 어떤 말인지 배우고 저와 여러분이 수로보니게 여자처럼 믿음의 사람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은 두로 지방으로 가셨습니다. 가신 이유는 한 집에 들어가 아무도 모르게 하고 쉬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자신을 숨길 수 없었습니다. 그 때 더러운 귀신 들린 어린 딸을 둔 한 여자가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와서 그 발 아래에 엎드렸습니다. 그 여자는 헬라인이요 수로보니게 족속이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선민사상이라는 민족적 우월성에 도취되어 자기 민족이 아닌 이방인들에 대해서 얍잡아보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심지어 개라는 표현을 쓸정도로 심한 민족감정을 지니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 여인은 이런 민족감정을 뒤로하고 귀신들린 딸로 인해서 예수님 앞에 겸손히 엎드렸습니다. 마태복음 15:22절에 보면 그녀가 나와서 하도 간곡히 소리를 질렀기 때문에 오죽했으면 예수님의 제자들의 마음이 다 움직였습니다. 저도 어제 저녁에 망원시장에 꽃병 하나를 사러갔는데 따라온 딸님이 하도 자두와 토마도를 사달라 하도 간청하기에 결국은 엄청무겁고 큰 수박을 사서 낑낑대면서 집에까지 갖고 온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귀신들린 딸을 가진 이 여인의 간청은 어떠했겠습니까? 그런데 이상한 것은 예수님의 태도였습니다. 여인의 간곡한 도움요청에도 예수님이 한 말씀도 대답하지 않으셨습니다. 이를 듣고 있던 제자들이 오히려 답답했습니다.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그를 보내소서.” 여인이 간구했다는 말은 미완료 시제로서 거듭거듭 호소하고 있었습니다.
한참 후에 예수님이 한 마디 하신 대답이 무엇입니까?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지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27).” 여기서 자녀는 택함 받은 백성인 이스라엘을 의미합니다. 개는 택함 받지 못한 이방인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제사장 나라로 삼으시고 이스라엘을 통해서 온 세상 만민을 구원하고자 하셨습니다. 왜 이방인을 개라고 하셨을까요? 개가 토한 것을 다시 먹는 것처럼 같은 죄를 반복하는 부끄러운 인간의 모습, 개와 같이 으르렁대며 싸우기를 잘하는 인간의 모습을 잘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나쁜지를 알지만 우리는 똑 같은 죄를 매일 반복해서 짓기도 합니다. 이 모습은 개와 같은 인간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런 개와 같은 자신의 모습을 인정하기 싫어합니다. 자신 안에 있는 더러운 죄와 직면하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소감을 쓰더라도 고상한 것만 드러내고자 합니다. 자신의 더러운 부분은 숨겨두고 덮어두고 싶어 합니다. 한마디로 인간은 교만하고 자기 발견을 잘 하지 못합니다. 할 수만 있으면 자기를 포장하고자 하고, 자기 의를 내세우고, 자기를 높이고자 안간힘을 씁니다.
그러나 이 수로보니게 여인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다 같이 28절을 읽겠습니다. “여자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상 아래 개들도 아이들이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주여 옳소이다.” 놀랍게도 이 여인은 자신을 개로 인정했습니다. 음란하고 부도덕한 죄인이요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는 비천한 존재임을 인정했습니다. 이 여인의 겸손은 참으로 아름답고 감동적입니다. 어떻게 이렇게 겸손할 수 있었을까요? 딸로 인해 받았던 인생 연단들로 인해 이렇게 아름다운 겸손의 내면으로 빚어졌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각자도 여러 모양의 인생 연단들을 통해 겸손의 내면을 덧입게 하십니다. 겸손은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신자의 가장 중요한 덕목입니다. 그러나 겸손의 열매를 맺는 것은 쉽지가 않습니다. 절대 거저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를 훈련하십니다. 다양한 방법으로 우리를 빚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러 가지 하나님이 주시는 훈련과 연단들을 경외심을 가지고 잘 받아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이 여인과 같은 아름다운 겸손의 사람이 됩니다.
이 여인은 예수님을 “주여” 라고 고백했습니다. 상대방을 어떻게 부르는가 보면 그 사람의 내면이 잘 드러납니다. 예수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여인은 예수님을 ‘메시아요, 이 세상의 주인이요 인생의 주관자’로 영접했습니다. 그럴 때 이스라엘 백성을 먼저 택하시고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주권도 겸손히 받아들였습니다. 때로는 생각지도 않게 같은 급우들이나 사람들에게 모욕을 당하고 무시를 당할 때도 있습니다. 그럴 때 여러분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각자의 답은 여러분 스스로가 고민해 보아야 합니다. 단 오늘 말씀을 보면 우리가 받는 고난이 영원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믿음으로 참고 인내하면 반드시 우리를 높이시고 상 주실 때가 온다는 것입니다.
이 여인은 어떻게 이런 지혜로운 말을 할 수 있었을까요? 28절을 또 한번 읽겠습니다. “여자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상 아래 개들도 아이들이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나님은 겸손한 자에게 지혜를 주십니다. 이 여인은 지혜롭게 대답했습니다. “상 아래 개들도 아이들이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이 여인은 예수님이 당연히 자기 딸을 고쳐주셔야 한다고 주장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때로 “내가 이 만큼 교회에 잘 나왔으니 ” 하고 자기 의를 내세우며 하나님이 당연히 이것도 해 주시고, 저것도 해 주셔야 된다고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내 기도를 안 들어 주실 때 얼굴색이 변하고 기도해도 소용없다고 말 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주님앞에서 우리 의를 내세울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나를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 영생을 주시는 은혜를 망각한 교만한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이 여인처럼 겸손하게 지혜롭게 부스러기 은혜를 구해야합니다.
어떻게 구하는 것이어야 될까요?
이는 ‘저는 자격이 없는 죄인이지만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의 사랑을 의지하여 간구합니다.’라는 자세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우리는 두가지를 배울 수 있습니다. 첫째는 주님께 대한 믿음 즉 온전한 떡이 아니라 아이들이 먹던 부스러기만 주셔도 자기 딸이 나을 것이라고 믿음과 끈기입니다. 계속된 간청에도 묵묵부답하신 예수님의 태도에서도 그냥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부스러기 은혜를 구한 끈기입니다. 결과적으로 여인은 이 여인이 바라고 바랬던 기도요청이 이루어졌습니다. 귀신들린 딸이 나은것이지요. 29,30절을 다 같이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 말을 하였으니 돌아가라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느니라 하시매 여자가 집에 돌아가 본즉 아이가 침상에 누웠고 귀신이 나갔더라.” 우리가 하나님앞에서 겸손할 때 사람앞에서도 영적인 말, 감사의 말, 믿음의 말, 겸손의 말이 나옵니다. 우리가 믿음의 사람, 겸손의 사람이 되어 믿음을 말을 함으로 하나님의 축복을 체험하는 삶을 살기를 기도합니다.
말씀 | 마가복음 7:24-30
요절 | 마가복음 7:29
이 말을 하였으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 말을 하였으니 돌아가라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느니라 하시매”
우리나라 속담에 한 마디 말로 천냥 빚을 갚는다고 했습니다. 믿음의 말, 겸손한 말, 지혜로운 말, 경외심을 가진 말이 인생을 바꿀수도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우리들에게 듣고 싶어하는 말이 어떤 말인지 배우고 저와 여러분이 수로보니게 여자처럼 믿음의 사람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은 두로 지방으로 가셨습니다. 가신 이유는 한 집에 들어가 아무도 모르게 하고 쉬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자신을 숨길 수 없었습니다. 그 때 더러운 귀신 들린 어린 딸을 둔 한 여자가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와서 그 발 아래에 엎드렸습니다. 그 여자는 헬라인이요 수로보니게 족속이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선민사상이라는 민족적 우월성에 도취되어 자기 민족이 아닌 이방인들에 대해서 얍잡아보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심지어 개라는 표현을 쓸정도로 심한 민족감정을 지니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 여인은 이런 민족감정을 뒤로하고 귀신들린 딸로 인해서 예수님 앞에 겸손히 엎드렸습니다. 마태복음 15:22절에 보면 그녀가 나와서 하도 간곡히 소리를 질렀기 때문에 오죽했으면 예수님의 제자들의 마음이 다 움직였습니다. 저도 어제 저녁에 망원시장에 꽃병 하나를 사러갔는데 따라온 딸님이 하도 자두와 토마도를 사달라 하도 간청하기에 결국은 엄청무겁고 큰 수박을 사서 낑낑대면서 집에까지 갖고 온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귀신들린 딸을 가진 이 여인의 간청은 어떠했겠습니까? 그런데 이상한 것은 예수님의 태도였습니다. 여인의 간곡한 도움요청에도 예수님이 한 말씀도 대답하지 않으셨습니다. 이를 듣고 있던 제자들이 오히려 답답했습니다.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그를 보내소서.” 여인이 간구했다는 말은 미완료 시제로서 거듭거듭 호소하고 있었습니다.
한참 후에 예수님이 한 마디 하신 대답이 무엇입니까?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지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27).” 여기서 자녀는 택함 받은 백성인 이스라엘을 의미합니다. 개는 택함 받지 못한 이방인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제사장 나라로 삼으시고 이스라엘을 통해서 온 세상 만민을 구원하고자 하셨습니다. 왜 이방인을 개라고 하셨을까요? 개가 토한 것을 다시 먹는 것처럼 같은 죄를 반복하는 부끄러운 인간의 모습, 개와 같이 으르렁대며 싸우기를 잘하는 인간의 모습을 잘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나쁜지를 알지만 우리는 똑 같은 죄를 매일 반복해서 짓기도 합니다. 이 모습은 개와 같은 인간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런 개와 같은 자신의 모습을 인정하기 싫어합니다. 자신 안에 있는 더러운 죄와 직면하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소감을 쓰더라도 고상한 것만 드러내고자 합니다. 자신의 더러운 부분은 숨겨두고 덮어두고 싶어 합니다. 한마디로 인간은 교만하고 자기 발견을 잘 하지 못합니다. 할 수만 있으면 자기를 포장하고자 하고, 자기 의를 내세우고, 자기를 높이고자 안간힘을 씁니다.
그러나 이 수로보니게 여인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다 같이 28절을 읽겠습니다. “여자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상 아래 개들도 아이들이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주여 옳소이다.” 놀랍게도 이 여인은 자신을 개로 인정했습니다. 음란하고 부도덕한 죄인이요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는 비천한 존재임을 인정했습니다. 이 여인의 겸손은 참으로 아름답고 감동적입니다. 어떻게 이렇게 겸손할 수 있었을까요? 딸로 인해 받았던 인생 연단들로 인해 이렇게 아름다운 겸손의 내면으로 빚어졌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각자도 여러 모양의 인생 연단들을 통해 겸손의 내면을 덧입게 하십니다. 겸손은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신자의 가장 중요한 덕목입니다. 그러나 겸손의 열매를 맺는 것은 쉽지가 않습니다. 절대 거저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를 훈련하십니다. 다양한 방법으로 우리를 빚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러 가지 하나님이 주시는 훈련과 연단들을 경외심을 가지고 잘 받아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이 여인과 같은 아름다운 겸손의 사람이 됩니다.
이 여인은 예수님을 “주여” 라고 고백했습니다. 상대방을 어떻게 부르는가 보면 그 사람의 내면이 잘 드러납니다. 예수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여인은 예수님을 ‘메시아요, 이 세상의 주인이요 인생의 주관자’로 영접했습니다. 그럴 때 이스라엘 백성을 먼저 택하시고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주권도 겸손히 받아들였습니다. 때로는 생각지도 않게 같은 급우들이나 사람들에게 모욕을 당하고 무시를 당할 때도 있습니다. 그럴 때 여러분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각자의 답은 여러분 스스로가 고민해 보아야 합니다. 단 오늘 말씀을 보면 우리가 받는 고난이 영원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믿음으로 참고 인내하면 반드시 우리를 높이시고 상 주실 때가 온다는 것입니다.
이 여인은 어떻게 이런 지혜로운 말을 할 수 있었을까요? 28절을 또 한번 읽겠습니다. “여자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상 아래 개들도 아이들이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나님은 겸손한 자에게 지혜를 주십니다. 이 여인은 지혜롭게 대답했습니다. “상 아래 개들도 아이들이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이 여인은 예수님이 당연히 자기 딸을 고쳐주셔야 한다고 주장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때로 “내가 이 만큼 교회에 잘 나왔으니 ” 하고 자기 의를 내세우며 하나님이 당연히 이것도 해 주시고, 저것도 해 주셔야 된다고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내 기도를 안 들어 주실 때 얼굴색이 변하고 기도해도 소용없다고 말 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주님앞에서 우리 의를 내세울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나를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 영생을 주시는 은혜를 망각한 교만한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이 여인처럼 겸손하게 지혜롭게 부스러기 은혜를 구해야합니다.
어떻게 구하는 것이어야 될까요?
이는 ‘저는 자격이 없는 죄인이지만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의 사랑을 의지하여 간구합니다.’라는 자세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우리는 두가지를 배울 수 있습니다. 첫째는 주님께 대한 믿음 즉 온전한 떡이 아니라 아이들이 먹던 부스러기만 주셔도 자기 딸이 나을 것이라고 믿음과 끈기입니다. 계속된 간청에도 묵묵부답하신 예수님의 태도에서도 그냥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부스러기 은혜를 구한 끈기입니다. 결과적으로 여인은 이 여인이 바라고 바랬던 기도요청이 이루어졌습니다. 귀신들린 딸이 나은것이지요. 29,30절을 다 같이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 말을 하였으니 돌아가라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느니라 하시매 여자가 집에 돌아가 본즉 아이가 침상에 누웠고 귀신이 나갔더라.” 우리가 하나님앞에서 겸손할 때 사람앞에서도 영적인 말, 감사의 말, 믿음의 말, 겸손의 말이 나옵니다. 우리가 믿음의 사람, 겸손의 사람이 되어 믿음을 말을 함으로 하나님의 축복을 체험하는 삶을 살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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