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대귀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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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봄 마가복음 제 7 강
말씀 | 마가복음 5:1-20
요절 | 마가복음 5:8
군대귀신을 쫓아내신 예수님
“이는 예수께서 이미 그에게 이르시기를 더러운 귀신아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셨음이라.”
어떤 사람은 “내가 예수님을 믿는데 악령이 내게 무슨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지?” 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오늘은 그 두 번째 이적인 군대귀신에 사로잡힌 한 거라사 청년을 온전하게 하신 사건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말에 있지 않고 능력에 있다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유쾌한 쉼을 주기 위해서 호수 저편으로 가자고 했습니다. 그들이 상륙하고자 했던 곳은 거라사인의 지방입니다. 이곳은 그리스인들이 열 개의 도시 공동체를 이루며 살고 있는 곳입니다. 그들은 그리스 신들을 믿고 그 문화 속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또한 이곳은 로마군이 주둔하고 있었습니다. 군 부대가 있어서 그 문화의 영향력 속에 있었습니다. 이 지방 사람들은 양돈 산업을 하면서 생계를 유지했습니다. 또한 이 해안에는 바위를 파내고 만든 무덤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제자들이 해안에 발을 내 디디며 마음이 들떠 있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더러운 귀신들린 사람이 섬뜩하고 기괴한 소리를 지르면서 무덤 사이에서 나와 예수님을 맞이하였습니다. 제자들은 소름이 끼치고 온 몸에 힘이 쭉 빠지는 것 같았습니다. 3절을 보십시오. “그 사람은 무덤 사이에 거처하는데 이제는 아무도 그를 쇠사슬로도 맬 수 없게 되었으니”
무엇이 이 젊은이를 이렇게 만들었을까요? 8절을 볼 때 더러운 귀신 수천 마리가 그를 사로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육체와 함께 영혼을 가진 존재입니다. 영혼의 존재를 믿지 않는 사람들은 모든 영적인 현상을 뇌의 화학작용으로 설명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인 마음을 가지고 있고 그 마음이 뇌를 지배하고 뇌가 육체를 지배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영적인 존재로서 성령의 다스림을 받던지 악령의 다스림을 받습니다. 악령의 다스림을 받을 때 짐승과 같고 마귀와 같이 파괴적인 삶을 살게 됩니다. 보통 사람들은 무덤 사이에 가면 어딘가 모르게 무섭고 빨리 떠나고 싶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시체가 누워있는 무덤에서 편안함을 느꼈습니다. 죽음의 세력이 친근하게 느껴졌습니다. 그는 사회에서 살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사회의 골칫거리였기 때문에 사람들이 쇠사슬로 매어 놓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강한 약물로도, 가죽 끈으로도, 쇠사슬로도 맬 수 없었습니다. 악령이 그 강한 힘으로 쇠사슬을 끊어버렸기 때문입니다.
4,5절을 보십시오. “이는 여러 번 고랑과 쇠사슬에 매였어도 쇠사슬을 끊고 고랑을 깨뜨렸음이러라 그리하여 아무도 그를 제어할 힘이 없는지라. 밤낮 무덤 사이에서나 산에서나 늘 소리 지르며 돌로 자기의 몸을 해치고 있었더라.” 이 사람이 오늘날 중학생이라면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나고 아무 때나 먹었을 것입니다. 록뮤직을 큰 소리로 들으며 소리를 지르고, 담배는 기본으로 피고 침은 뱉고술을 먹고 취하여 까페의 창문도 부수고 사람들과 싸움질도 많이 하고 경찰에 체포되고 소년범으로 감옥에도 들락날락 거렸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감옥에서 만난 악인들과 친구가 되고 그가 다시 감옥에서 나왔을 때 아무도 그와 함께 하기를 원치 않아 외로워서 PC 방에 하루 종일 쳐 박혀 게임을 하고 음란한 동영상과 폭력적인 게임을 즐기며 살았을 것입니다. 또 그가 자기를 기분나쁘게 쳐다본다고 막 폭행하고 충동적으로 죄를 짓고 사람들과 싸우다가 경찰서에 끌려가서 재판을 받고 나서는 독방에 쳐 넣어졌고 감옥의 쇠사슬에 매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쇠사슬을 끊어버리고 경찰들을 구타하고 탈옥을 하고 경찰들은 또 잡으러 다니고 이런 일을 반복하자 경찰들도 그를 두려워하게 되었고 그는 도시의 골칫거리가 되었습니다. 그는 혼자 있는 것을 더 편하게 여겼습니다. 그는 아무의 간섭도 받지 않기 위해서 집을 나가 무덤 사이에 거처하면서 살게 되었습니다. 6000마리의 귀신들이 그에게 들어가 그를 지배하였습니다. 이는 로마 한 군단의 숫자입니다. 그의 힘은 쇠사슬과 고랑을 깨뜨리는 힘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는 그의 힘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군대 귀신의 힘이었습니다. 그는 이 산에서 저 산으로, 이 강에서 저 강으로 뛰어다녔습니다. 그는 거의 벌거벗은 몸으로 돌아다니며 큰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는 혼자 있을 때 자기 몸을 날카로운 돌로 짓이기며 자학했습니다. 또 최근에는 신촌에서 악령을 숭배하는 사이트에 가입해서 활동하던 학생들이 대학생을 살인하는 일까지 벌어졌습니다. 이렇듯 사탄이 청년들을 사로잡아 멸망에 이르도록 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런 학생들을 누가 도울 수 있습니까? 6~7절을 보십시오.
그는 멀리서 예수님을 보고 달려와 그 앞에 절하였습니다. 그리고 큰 소리로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나와 당신이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원하건대 하나님 앞에 맹세하고 나를 괴롭히지 마옵소서.”라고 부르짖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잘 알아보지 못했지만 귀신은 대번에 예수님을 알아보고 그 앞에 절하였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가지고 계신 권세로 자신들을 지옥에 던져넣을까봐 두려했기 때문입니다. 귀신의 대변자가 나를 괴롭히지 마옵소서라고 말했지만 9절과 12절에서는 우리라고 말했습니다. 귀신은 예수님의 권세에 굴복할 수밖에 없습니다. 귀신은 예수님 앞에 두려워 떨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경배하고 그와 교제하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이미 그 귀신에게 “더러운 귀신아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러나 귀신은 당장에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귀신의 정체를 어떻게 드러내셨습니까? 9절을 보십시오. “이에 물으시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이르되 내 이름은 군대니 우리가 많음이니이다 하고” 네 이름이 무엇이냐는 예수님의 질문에 귀신은 군대라고 하였습니다. 군대는 로마의 한 군단을 말합니다. 그 만큼 강하고 많다는 것입니다. 왜 예수님은 네 이름이 무엇이냐고 물으셨을까요? 귀신의 정체를 드러내기 위해서입니다. 또 그 사람이 자기를 주관하는 귀신의 정체를 알아야 싸울 수 있습니다. 귀신은 자기를 위장하기를 잘합니다. 속이는 자입니다. 귀신의 존재 목적은 사람을 죽이고 멸망시키는 것입니다. 귀신은 어두움을 좋아합니다. 그러나 귀신은 자기정체가 드러나면 힘을 쓰지 못합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는 물음은 그 사람에게 자기 정체성을 찾도록 도와주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는 귀신으로 인해서 자아를 잃어버렸습니다. 예수님이 그의 이름을 물으심으로 그는 자신을 찾고 평범한 사람으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더러운 귀신이 우리가 많다고 하였습니다. 즉 한 두 마리가 아니고 6000마리나 되기에 ‘군대’ 즉 많다고 대답한 것입니다. 마귀는 우리에게도 수시로 다가와 우리의 영혼을 사로잡고자 합니다. 오랫동안 우리를 괴롭히는 악령의 이름이 무엇입니까? “내 이름은 실패감입니다. 내 이름은 안목의 정욕입니다. 내 이름은 불신입니다. 내 이름은 시기심입니다. 내 이름은 이기심입니다. 내 이름은 미움입니다. 내 이름은 우울입니다. 내 이름은 거짓입니다. 내 이름은 음란입니다. 내 이름은 탐욕입니다. 내 이름은 교만입니다.”
10절을 보십시오. “자기를 그 지방에서 내보내지 마시기를 간구하더니” 귀신은 그 지방에서 떠나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아마도 활동하기가 편했던 것 같습니다. 거기 돼지의 큰 떼가 산 곁에서 먹고 있는 것을 보고 “우리를 돼지에게로 들어가게 하소서”부탁을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허락하시자 더러운 귀신들이 나와서 돼지에게로 들어가매 거의 이천 마리 되는 떼가 바다를 향하여 비탈로 내리달아 바다에서 몰사했습니다. 더러운 귀신은 사람과 짐승의 몸 속에 들어가서 살 수 있습니다. 인간의 몸은 영혼의 집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몸에 내주하시기 때문에 신자를 성전이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인간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은 자연스럽습니다. 그러나 더러운 귀신이 사람 안에 거할 때는 그의 자아를 분열시키고 자학하게 하고 파괴하였습니다. 마찬가지로 더러운 귀신이 돼지에게로 들어가자 돼지들이 자아분열을 일으켰습니다. 본래 돼지들은 먹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런데 귀신이 들어가자 먹는 데서 의미를 찾지 못했습니다. 삶의 의미를 잃어버리고 바다로 돌진해서 죽어버렸습니다.
예수님은 왜 돼지 이천 마리가 희생될 것을 아시면서 더러운 귀신에게 들어가도록 허용했을까요? 예수님은 그곳 사람들의 물질주의에 경종을 울리고자 하셨습니다. 한 영혼이 천하보다 귀하다는 것을 깨우쳐 주고자 하셨습니다.
「산다는 것이 황홀하다」는 책을 쓴 일본 여성 ‘다하라 요네꼬’가 있습니다. 그녀는 없는 것에 대한 집착이 강했습니다. 어머니가 죽자 사는 것이 힘들어 18세에 달리는 기차에 자신을 던졌습니다. 두 발이 짤리고 한 손도 잃었습니다. 죽고 싶어도 죽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있는 병원에 외국인 선교사와 통역으로 한 전도가가 찾아와 복음을 전했습니다. 여러 번 찾아와 복음을 전하는 그 사랑에 감동하여 예수님을 영접하였습니다. 그녀가 변화되어 그 전도사와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았습니다. 그녀는 사는 것이 황홀하다는 내용의 책을 썼습니다. 문제학생이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의 권세가 얼마나 강한가를 보았습니다. 우리가 귀신들의 세력에서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이름 권세를 의지해야 합니다. 그리고 세상의 빛 되신 예수님을 영접하고 그 말씀 안에 거할 때 더러운 귀신들이 함께 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말씀과 성령의 능력으로 믿는 자들을 거룩한 하나님의 사람들로, 사랑이 많은 사람들로 변화시킵니다. 우리가 나로 하여금 힘을 쓰지 못하게 하는 악령의 세력을 인식하고 회개에 힘을 써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믿고 그의 권능과 말씀에 의지해서 변화된 삶을 체험하기를 기도합니다.
말씀 | 마가복음 5:1-20
요절 | 마가복음 5:8
군대귀신을 쫓아내신 예수님
“이는 예수께서 이미 그에게 이르시기를 더러운 귀신아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셨음이라.”
어떤 사람은 “내가 예수님을 믿는데 악령이 내게 무슨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지?” 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오늘은 그 두 번째 이적인 군대귀신에 사로잡힌 한 거라사 청년을 온전하게 하신 사건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말에 있지 않고 능력에 있다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유쾌한 쉼을 주기 위해서 호수 저편으로 가자고 했습니다. 그들이 상륙하고자 했던 곳은 거라사인의 지방입니다. 이곳은 그리스인들이 열 개의 도시 공동체를 이루며 살고 있는 곳입니다. 그들은 그리스 신들을 믿고 그 문화 속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또한 이곳은 로마군이 주둔하고 있었습니다. 군 부대가 있어서 그 문화의 영향력 속에 있었습니다. 이 지방 사람들은 양돈 산업을 하면서 생계를 유지했습니다. 또한 이 해안에는 바위를 파내고 만든 무덤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제자들이 해안에 발을 내 디디며 마음이 들떠 있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더러운 귀신들린 사람이 섬뜩하고 기괴한 소리를 지르면서 무덤 사이에서 나와 예수님을 맞이하였습니다. 제자들은 소름이 끼치고 온 몸에 힘이 쭉 빠지는 것 같았습니다. 3절을 보십시오. “그 사람은 무덤 사이에 거처하는데 이제는 아무도 그를 쇠사슬로도 맬 수 없게 되었으니”
무엇이 이 젊은이를 이렇게 만들었을까요? 8절을 볼 때 더러운 귀신 수천 마리가 그를 사로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육체와 함께 영혼을 가진 존재입니다. 영혼의 존재를 믿지 않는 사람들은 모든 영적인 현상을 뇌의 화학작용으로 설명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인 마음을 가지고 있고 그 마음이 뇌를 지배하고 뇌가 육체를 지배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영적인 존재로서 성령의 다스림을 받던지 악령의 다스림을 받습니다. 악령의 다스림을 받을 때 짐승과 같고 마귀와 같이 파괴적인 삶을 살게 됩니다. 보통 사람들은 무덤 사이에 가면 어딘가 모르게 무섭고 빨리 떠나고 싶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시체가 누워있는 무덤에서 편안함을 느꼈습니다. 죽음의 세력이 친근하게 느껴졌습니다. 그는 사회에서 살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사회의 골칫거리였기 때문에 사람들이 쇠사슬로 매어 놓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강한 약물로도, 가죽 끈으로도, 쇠사슬로도 맬 수 없었습니다. 악령이 그 강한 힘으로 쇠사슬을 끊어버렸기 때문입니다.
4,5절을 보십시오. “이는 여러 번 고랑과 쇠사슬에 매였어도 쇠사슬을 끊고 고랑을 깨뜨렸음이러라 그리하여 아무도 그를 제어할 힘이 없는지라. 밤낮 무덤 사이에서나 산에서나 늘 소리 지르며 돌로 자기의 몸을 해치고 있었더라.” 이 사람이 오늘날 중학생이라면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나고 아무 때나 먹었을 것입니다. 록뮤직을 큰 소리로 들으며 소리를 지르고, 담배는 기본으로 피고 침은 뱉고술을 먹고 취하여 까페의 창문도 부수고 사람들과 싸움질도 많이 하고 경찰에 체포되고 소년범으로 감옥에도 들락날락 거렸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감옥에서 만난 악인들과 친구가 되고 그가 다시 감옥에서 나왔을 때 아무도 그와 함께 하기를 원치 않아 외로워서 PC 방에 하루 종일 쳐 박혀 게임을 하고 음란한 동영상과 폭력적인 게임을 즐기며 살았을 것입니다. 또 그가 자기를 기분나쁘게 쳐다본다고 막 폭행하고 충동적으로 죄를 짓고 사람들과 싸우다가 경찰서에 끌려가서 재판을 받고 나서는 독방에 쳐 넣어졌고 감옥의 쇠사슬에 매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쇠사슬을 끊어버리고 경찰들을 구타하고 탈옥을 하고 경찰들은 또 잡으러 다니고 이런 일을 반복하자 경찰들도 그를 두려워하게 되었고 그는 도시의 골칫거리가 되었습니다. 그는 혼자 있는 것을 더 편하게 여겼습니다. 그는 아무의 간섭도 받지 않기 위해서 집을 나가 무덤 사이에 거처하면서 살게 되었습니다. 6000마리의 귀신들이 그에게 들어가 그를 지배하였습니다. 이는 로마 한 군단의 숫자입니다. 그의 힘은 쇠사슬과 고랑을 깨뜨리는 힘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는 그의 힘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군대 귀신의 힘이었습니다. 그는 이 산에서 저 산으로, 이 강에서 저 강으로 뛰어다녔습니다. 그는 거의 벌거벗은 몸으로 돌아다니며 큰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는 혼자 있을 때 자기 몸을 날카로운 돌로 짓이기며 자학했습니다. 또 최근에는 신촌에서 악령을 숭배하는 사이트에 가입해서 활동하던 학생들이 대학생을 살인하는 일까지 벌어졌습니다. 이렇듯 사탄이 청년들을 사로잡아 멸망에 이르도록 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런 학생들을 누가 도울 수 있습니까? 6~7절을 보십시오.
그는 멀리서 예수님을 보고 달려와 그 앞에 절하였습니다. 그리고 큰 소리로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나와 당신이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원하건대 하나님 앞에 맹세하고 나를 괴롭히지 마옵소서.”라고 부르짖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잘 알아보지 못했지만 귀신은 대번에 예수님을 알아보고 그 앞에 절하였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가지고 계신 권세로 자신들을 지옥에 던져넣을까봐 두려했기 때문입니다. 귀신의 대변자가 나를 괴롭히지 마옵소서라고 말했지만 9절과 12절에서는 우리라고 말했습니다. 귀신은 예수님의 권세에 굴복할 수밖에 없습니다. 귀신은 예수님 앞에 두려워 떨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경배하고 그와 교제하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이미 그 귀신에게 “더러운 귀신아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러나 귀신은 당장에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귀신의 정체를 어떻게 드러내셨습니까? 9절을 보십시오. “이에 물으시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이르되 내 이름은 군대니 우리가 많음이니이다 하고” 네 이름이 무엇이냐는 예수님의 질문에 귀신은 군대라고 하였습니다. 군대는 로마의 한 군단을 말합니다. 그 만큼 강하고 많다는 것입니다. 왜 예수님은 네 이름이 무엇이냐고 물으셨을까요? 귀신의 정체를 드러내기 위해서입니다. 또 그 사람이 자기를 주관하는 귀신의 정체를 알아야 싸울 수 있습니다. 귀신은 자기를 위장하기를 잘합니다. 속이는 자입니다. 귀신의 존재 목적은 사람을 죽이고 멸망시키는 것입니다. 귀신은 어두움을 좋아합니다. 그러나 귀신은 자기정체가 드러나면 힘을 쓰지 못합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는 물음은 그 사람에게 자기 정체성을 찾도록 도와주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는 귀신으로 인해서 자아를 잃어버렸습니다. 예수님이 그의 이름을 물으심으로 그는 자신을 찾고 평범한 사람으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더러운 귀신이 우리가 많다고 하였습니다. 즉 한 두 마리가 아니고 6000마리나 되기에 ‘군대’ 즉 많다고 대답한 것입니다. 마귀는 우리에게도 수시로 다가와 우리의 영혼을 사로잡고자 합니다. 오랫동안 우리를 괴롭히는 악령의 이름이 무엇입니까? “내 이름은 실패감입니다. 내 이름은 안목의 정욕입니다. 내 이름은 불신입니다. 내 이름은 시기심입니다. 내 이름은 이기심입니다. 내 이름은 미움입니다. 내 이름은 우울입니다. 내 이름은 거짓입니다. 내 이름은 음란입니다. 내 이름은 탐욕입니다. 내 이름은 교만입니다.”
10절을 보십시오. “자기를 그 지방에서 내보내지 마시기를 간구하더니” 귀신은 그 지방에서 떠나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아마도 활동하기가 편했던 것 같습니다. 거기 돼지의 큰 떼가 산 곁에서 먹고 있는 것을 보고 “우리를 돼지에게로 들어가게 하소서”부탁을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허락하시자 더러운 귀신들이 나와서 돼지에게로 들어가매 거의 이천 마리 되는 떼가 바다를 향하여 비탈로 내리달아 바다에서 몰사했습니다. 더러운 귀신은 사람과 짐승의 몸 속에 들어가서 살 수 있습니다. 인간의 몸은 영혼의 집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몸에 내주하시기 때문에 신자를 성전이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인간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은 자연스럽습니다. 그러나 더러운 귀신이 사람 안에 거할 때는 그의 자아를 분열시키고 자학하게 하고 파괴하였습니다. 마찬가지로 더러운 귀신이 돼지에게로 들어가자 돼지들이 자아분열을 일으켰습니다. 본래 돼지들은 먹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런데 귀신이 들어가자 먹는 데서 의미를 찾지 못했습니다. 삶의 의미를 잃어버리고 바다로 돌진해서 죽어버렸습니다.
예수님은 왜 돼지 이천 마리가 희생될 것을 아시면서 더러운 귀신에게 들어가도록 허용했을까요? 예수님은 그곳 사람들의 물질주의에 경종을 울리고자 하셨습니다. 한 영혼이 천하보다 귀하다는 것을 깨우쳐 주고자 하셨습니다.
「산다는 것이 황홀하다」는 책을 쓴 일본 여성 ‘다하라 요네꼬’가 있습니다. 그녀는 없는 것에 대한 집착이 강했습니다. 어머니가 죽자 사는 것이 힘들어 18세에 달리는 기차에 자신을 던졌습니다. 두 발이 짤리고 한 손도 잃었습니다. 죽고 싶어도 죽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있는 병원에 외국인 선교사와 통역으로 한 전도가가 찾아와 복음을 전했습니다. 여러 번 찾아와 복음을 전하는 그 사랑에 감동하여 예수님을 영접하였습니다. 그녀가 변화되어 그 전도사와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았습니다. 그녀는 사는 것이 황홀하다는 내용의 책을 썼습니다. 문제학생이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의 권세가 얼마나 강한가를 보았습니다. 우리가 귀신들의 세력에서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이름 권세를 의지해야 합니다. 그리고 세상의 빛 되신 예수님을 영접하고 그 말씀 안에 거할 때 더러운 귀신들이 함께 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말씀과 성령의 능력으로 믿는 자들을 거룩한 하나님의 사람들로, 사랑이 많은 사람들로 변화시킵니다. 우리가 나로 하여금 힘을 쓰지 못하게 하는 악령의 세력을 인식하고 회개에 힘을 써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믿고 그의 권능과 말씀에 의지해서 변화된 삶을 체험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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