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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눅46강 내가 그라고 말하고 있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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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곽누가
댓글 0건 조회 293회 작성일 12-04-01 07:00

본문

2012년 누가복음 제46강                                             
본문 누가복음 22:47-22:71
요절 누가복음 22:70
내가 그라고 말하고 있느니라
“다 이르되 그러면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냐 대답하시되 너희들이 내가 그라고 말하고 있느니라.”

  오늘 본문 말씀은 체포당하시고 심문 받으시는 예수님에 대해서 다루고 있습니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입맞춤으로 배반했고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 모른다고 부인하였습니다. 반면 예수님은 심문 당하며 고난 당하는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정체성을 분명히 드러내셨습니다. “이제부터는 인자가 하나님의 권능의 우편에 앉아 있으리라”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냐 대답하시되 너희들이 내가 그라고 말하고 있느니라” 본문 말씀을 통해 우리도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의 자녀로서 분명한 정체성을 드러내는 삶을 살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를 마치시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실 때에 한 무리가 다가왔습니다. 열둘 중의 하나인 가룟 유다가 앞장서 와서 예수님께 입을 맞추려고 가까이 왔습니다. 유다는 안부를 나누는 입맞춤으로 예수님을 배신합니다. 예수님은 유다의 이름을 부르시면서 “유다야 네가 입맞춤으로 인자를 파느냐”고 묻습니다. 이 말씀에 사랑했던 제자에게 배신을 당하신 예수님의 쓰라린 마음이 묻어 있습니다. 그 된 일을 보며 주위에 있던 제자들이 묻습니다. “주여 우리가 칼로 치리이까?” 이에 대한 답변을 듣기도 전에 그 중의 한 사람이 대제사장의 종을 쳐 그 오른쪽 귀를 떨어뜨렸습니다. 다른 복음서에 보면 말고의 귀를 성미 급한 베드로가 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요18:10). 예수님은 그에게 이것까지 참으라 하시고 그 귀를 만져 낫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잡으러 온 대제사장들과 성전의 경비대장들과 장로들에게 “너희가 강도를 잡는 것 같이 검과 몽치를 가지고 나왔느냐 내가 날마다 너희와 함께 성전에 있을 때에 내게 손을 대지 아니하였도다 그러나 이제는 너희 때요 어둠의 권세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이 예수님께 나와서 잡을 수 있는 것은 그들의 능력 때문이 아니라 어둠의 능력이 그들과 함께 하고 있기 때문이요, 하나님께서 어둠의 권세에게 예수님을 일시적으로 허용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에 순복하여 힘없는 분, 무기력한 분으로 체포되셨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잡아 끌고 대제사장의 집으로 들어갔습니다. 다른 제자들은 도망갔는데 베드로는 멀찍이 따라갔습니다. 베드로의 예수님을 향한 충성심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예수님께 주님과 함께 옥에도, 죽는 데도 함께 가겠다고 호언장담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두려움 때문에 예수님을 멀찍이 따라가고 있습니다. 이렇게 그가 주님과 거리를 두자 여러 문제가 생깁니다. 주님과 조금씩 거리를 두면 나중에는 예수님을 부인하는 지경에 까지 가게 됩니다. 나와 예수님과의 관계는 어떠합니까? 예수님과 나 사이의 관계가 조금씩 멀어지고 있지는 않습니까? 성경은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 그리하면 그가 너희를 가까이 하시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약4:8a). 우리가 다른 무엇보다 예수님과의 교제에 힘쓰며 예수님을 가까이하기를 기도합니다. 

  사람들이 뜰 가운데 불을 피우고 함께 앉았습니다. 베드로도 그 가운데 앉았습니다. 그는 끼지 말아야 할 자리에 끼어 앉았습니다. 예수님을 반대하는 사람들 사이에 베드로도 앉았습니다. 시편 1:1절을 보면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복 있는 사람은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않습니다. 우리는 누구와 함께 앉아 있느냐에 따라서 영향을 받습니다. 베드로가 앉지 말아야 할 자리에 앉아 있을 때 자기도 모르게 변하기 시작합니다. 베드로가 세속적인 사람들 속에서 자기를 감추려고 하자 문제가 시작됩니다. 한 여종이 베드로가 불빛을 향하여 앉은 것을 주목하며 말했습니다. “이 사람도 그와 함께 있었느니라.” 베드로는 엉겁결에 이런 말을 듣자 당황하며 말했습니다. “이 여자가. 나 그를 알지 못해” 조금 후에 다른 사람이 보고 “너도 한패야”라고 말하자 “이 사람아, 나는 아니야”라고 말했습니다. 한 시간쯤 있다가 또 한 사람이 장담하며 말했습니다. “이는 갈릴리 사람이니 참으로 그와 함께 있었느니라.” 그러나 베드로가 “이 사람이, 나는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못하겠어.”하며 부인했습니다. 그러자 닭이 분을 참지 못해 꼬끼오하며 울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죽겠다고 호언장담했던 베드로가 왜 이렇게 무너져 내렸습니까? 이는 그가 시험에 들지 않도록 기도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간절히 기도하실 때, 그는 쿨쿨 잠을 잤습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시험에 들지 않도록 기도하라 말씀하셨지만, 그는 몰려오는 잠을 이길 수 없었습니다. 그가 기도에서 실패하였을 때, 예상하지 못한 여종의 질문에 여지없이 무너졌습니다. 좀 전까지만 해도 칼을 들고 설쳤던 베드로는 한 여종의 부드러운 시험 앞에서 무너졌습니다. 그녀가 이 말을 한 것은 베드로를 꼭 해하려고 한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런데도 베드로가 지레 겁을 집어먹고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해버렸습니다. 그는 사탄의 시험에 무방비 상태였습니다. 엄청난 핍박, 도저히 어떻게 해 볼 수 없는 핍박 때문에 무너진다면 그래도 괜찮은데, 이렇게 쉽게 무너질 것이라고는 자신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사탄은 이와 같이 우리가 생각하지 못했던 방향에서 공격을 합니다. 사탄은 아담을 넘어뜨리기 위해서 하와를 이용한 것처럼 베드로를 넘어뜨리기 위해서 한 여종을 이용했습니다. 사탄의 유혹과 공격은 참으로 간교하게 진행이 됨으로 깨어 기도해야 합니다.

  베드로가 닭의 울음소리를 들으면서 눈을 들었을 때 주님의 눈과 마주쳤습니다. 61,62절을 보십시오. “주께서 돌이켜 베드로를 보시니 베드로가 주의 말씀 곧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  베드로는 주님을 멀찍이 따르고 부인했지만 주님께서는 여전히 사랑의 시선을 거두지 아니하셨습니다. 주님은 그에게 주목하셨습니다. 그의 눈에는 한없는 긍휼과 연약한 제자에 대한 사랑이 가득했습니다. 이때 그는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시험에서 나오는 길은 주의 말씀을 붙잡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기억했을 때 베드로의 눈에서 닭 똥 같은 뜨거운 눈물이 흘러 내렸습니다.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생각나게 하십니다. 요14:26절은 말씀합니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성령께서는 주의 말씀을 생각나게 하셔서 우리를 돌이키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저장해 놓을 때 성령께서는 필요할 때 말씀이 생각나게 하십니다. 말씀이 생각나자 베드로에게 회복의 역사가 시작 되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매주 한 말씀을 암송하는 것은 우리에게 꼭 필요할 때 성령께서 그 말씀을 생각나게 하시고 그 말씀을 통해서 역사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JBF 학생들이 매주 한 말씀을 신실하게 암송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한편 예수님을 지키던 사람들은 그를 희롱하고 그의 눈을 가리고 때리며 누가 쳤는지 알아맞혀 보라면서 선지자 노릇하라고 놀리며 많은 말로 욕을 했습니다. 날이 새자 백성의 장로들 곧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모여서 예수님을 공회로 끌어 들여 심문을 시작했습니다. 공회는 산헤드린으로서 유대 최고 법원입니다. 대개 70명으로 구성되며 최고의장은 대제사장이 맡았습니다. 그들은 백성들이 두려워 해가 뜨기 전에 공회를 열었습니다. 이는 명백히  불법재판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네가 그리스도이거든 우리에게 말하라.”고 심문했습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은 자신이 말할지라도 그들이 믿지 아니할 것이요 물어도 그들이 대답하지 아니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인자가 하나님의 권능의 우편에 앉아 있으리라고 대답하십니다. 그들은 이 말씀을 알아듣고 “그러면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냐?”고 물었습니다. 예수님은 분명하게 대답하십니다. “너희가 내가 그라고 말하고 있느니라(70b).”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분명히 드러내셨습니다.
  우리는 내가 누구인가 분명한 자기 정체성을 가져야 합니다. 이는 자기 정체성에 대한 인식에 따라서 우리의 삶이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사탄은 우리의 정체성을 뒤흔들어 놓습니다. 우리에게 죄를 짓게 유혹하고 그럼으로써 ‘너 같이 더러운 죄인은 아무도 사랑하지 않아, 하나님도 너를 버렸어’ 속삭이므로 우리가 계속 죄 가운데서 살다가 멸망하도록 이끕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받는 고귀한 존재임을 보지 못하도록 사탄은 끊임없이 우리에게 부정적인 생각, 거짓된 생각을 심습니다. 우리는 사탄이 주는 이 생각에 속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의 분명한 정체성은 무엇입니까? 우리의 정체성은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을 받는 고귀한 존재,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입니다. 하나님께선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너무나 사랑하셔서, 그 사랑의 증거로 독생자 예수님을 주셨습니다. 내 대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므로 하나님께서 나를 얼마나 사랑하시는가 보여주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큰 사랑을 받은 그의 고귀한 자녀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정체성입니다. 우리가 사탄의 거짓말에 속지 않고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분명한 정체성이 있을 때, 우리는 함부로 죄를 짓지 않고 함부로 살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가장 사랑하며 예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을 살게 됩니다. 예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삶을 살게 되며 그 삶에 아름다운 열매를 맺는 삶을 살게 됩니다. 우리 JBF 학생들이 예수님 처럼 분명한 자신의 정체성을 가지고 그 정체성에 합당한 삶을 살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아름다운 열매를 일생 풍성히 맺는 삶을 살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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