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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4강 인간의 범죄와 하나님의 사랑(창3: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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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정베드로
댓글 0건 조회 189회 작성일 13-04-27 11:35

본문

2013년 창세기 제 4 강
말씀 | 창세기 3:1-24
요절 | 창세기 3:15
인간의 범죄와 하나님의 사랑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여러분 세계명작 동화인 ‘미녀와 야수’라는 책이 있는데 아시나요? 이 동화의 줄거리는 세 딸을 둔 어느 상인이 숲 속에서 야수에게 붙잡히면서 막내딸인 벨이 야수의 인질이 되고, 벨과 야수가 사랑에 빠진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알고보니 야수는 마법에 걸린 왕자였고, 벨과의 사랑으로 저주를 풀게 된다는 행복한 결말을 갖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에서 야수가 미녀를 사랑하게 된 것은 이해하는데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그런데 아무래도 이해가 잘 안되는 부분은 미녀가 어떻게 야수를 사랑하게 될 수 있을까? 라는 것입니다. 미녀의 사랑은 야수가 왕자로 변화되면서 보상을 받습니다. 그런데 과연 미녀는 이런 보상이 없이도 끝까지 야수를 사랑할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듭니다.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은 그만큼 미녀와 야수의 사랑이야기는 현실성이 떨어져도 너무나 떨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미녀와 야수의 사랑이야기보다도 더한 사랑이야기가 있습니다. 그것은 죄인을 사랑한 하나님의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오늘 말씀의 제목을 보십시오. 말씀의 제목이 뭐라고요? “인간의 범죄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여러분 짝으로 말하면 미녀와 야수는 정말로 어울리지 않는 짝입니다. 그런데 범죄와 사랑은 미녀와 야수보다도 더 어울리지 않은 짝입니다. 범죄에 어울리는 짝은 무엇일까요? “범죄와 형벌” 어떻습니까? 너무 잘 어울리잖아요?  그런데 범죄와 사랑이라니, 여러분 미녀와 야수의 이야기도 쉽지 않지만 사실 인간의 범죄와 하나님의 사랑 이야기는 더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제가 오늘 여러분과 이 쉽지 않은 이야기를 나누고자 합니다. 우리가 비록 하나님의 사랑을 다 이해할 수 없을지라도 오늘 말씀을 통해 여러분들이 범죄한 나를 또한 범죄한 인간을 사랑한 하나님의 사랑을 이전보다 좀 더 깊이 영접할 수 있길 기도합니다.

제 1장 인간의 범죄
여러분 우리가 얼마 전에 창세기 1장과 2장을 배웠는데요, 여러분에게 질문 하나 해 보겠습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에는 죄가 있었을까요? 없었을까요? 네 죄가 없었습니다. 왜냐면 하나님은 세상을 만드신 후에 심히 기뻐하셨기 때문입니다. 만일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에 죄가 있었다면 하나님은 세상을 그렇게 심히 기뻐하지 못하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죄가 없는 세상에 어떻게 죄가 들어오게 된 것일까요? 1절 상반절을 보십시오. “그런데 뱀은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 가장 간교하니라.” 여기서 뱀은 보통 뱀이 아니라 사탄이 역사하고 있는 뱀을 말합니다. 그냥 사탄이라고 봐도 됩니다. 사탄은 본래 하나님을 섬기던 천사였는데 교만해져서 하나님과 같이 되고자 하다가 쫓겨났습니다.(겔28:12-17) 그런데 이 사탄이 뱀을 통해 여자를 유혹하였습니다.

1절 하반절을 봅시다.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사탄의 질문은 매우 간교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마치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말라고 하신 것처럼 말했습니다. 그리고 “참으로”라는 부사를 사용하여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의심을 갖도록 하였습니다. 여러분 “참으로”라는 부사는요 참으로 묘한 마력을 갖고 있습니다. “참으로”를 긍정문에 쓰면 아주 강한 긍정이 됩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참으로 사랑하십니다.” 어떻습니까? 이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강한 확신을 주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를 부정문에 쓰면 어떨까요? “여러분 하나님이 참으로 여러분을 사랑하시나요?” 이렇게 질문을 받으면 왠지 생각이 복잡해집니다.

이 질문에 대한 여자의 대답이 무엇인가요? 2,3절을 여자들만 읽어 봅시다. “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열매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2,3) 여자의 대답은 하나님의 말씀과 얼추 비슷한 것 같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완전히 다릅니다. 여자는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마음껏 먹으라는 말씀을 빼먹었습니다. 또한 하나님은 먹지 말라고 하셨는데 그녀는 만지지도 말라고 하셨다면서 자기 마음대로 말씀을 첨가했습니다. ‘반드시 죽으리라’는 말씀은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하며 마치 설마 죽겠냐는 듯이 말했습니다. 그녀는 하나님의 말씀을 엉터리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하나님이 베푸신 은혜와 사랑에 대한 감사함이 없었습니다.

여자의 대답을 듣고 사탄은 어떻게 했습니까? 4,5절을 봅시다.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여러분 사탄의 필살기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것은 거짓말입니다. 예수님은 사탄을 거짓의 아비라고 하셨습니다. 사탄은 거짓말을 확신있게 합니다. 사탄의 거짓말은 매혹적입니다. 사탄의 말을 듣고 여자의 눈이 달라졌습니다. 그녀가 선악과를 보니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만큼 탑스럽게 보였습니다. 그녀는 선악과의 비밀을 알게 된 것 같아 흥분되었습니다. 한편으로 이 비밀을 감추어 놓으신 하나님에 대한 불평이 생겼습니다. 선악과를 따먹으면 하나님께 메이지 않고 이전보다 더 자유롭고 행복할 것 같습니다. 그녀는 이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고 그만 손을 내밀어 선악과를 따 먹었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선악과를 아담에게도 주었습니다. “아담 먹어봐, 얼마나 맛있다고, 그리고 나 선악과 먹고도 이렇게 멀쩡하잖아. 하나님이 괜히 그러신거야. 아무 일 없으니까? 먹어보라고” 아담은 하와의 성화에 못 이겨 그도 선악과를 먹고 말았습니다.

그러면 선악과를 먹은 아담과 하와는 과연 사탄의 말대로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었습니까? 7절을 봅시다.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 그들은 과연 사탄의 말대로 눈이 밝아졌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과 같이 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벌거벗은 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얼른 나뭇잎으로 엮은 치마를 만들어 입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부끄러운 이유는 벗었기 때문이 아니라 죄를 지었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그들 안에 수치심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이 벗었기 때문에 부끄러워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때 동산을 거니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두려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의 낯을 피해 동산나무 사이에 숨고자 하였습니다.

사도바울은 로마서1:21 말씀에서 죄의 뿌리는 하나님을 알되 감사치도 않고 영화롭게도 아니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해서도 이 말씀이 진리라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범죄한 근본문제는 사탄의 유혹이 아니라 이미 하나님에 대한 감사와 경외심을 잃어버린 그 마음에서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그녀의 문제가 사탄이 던진 질문을 통해 들어났습니다. 그녀는 그 때 자신의 문제를 발견하고 사탄과의 대화를 중단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사탄과 대화를 계속하다 그만 사탄의 거짓말을 진실로 받아들이게 된 것입니다. 그 결과 그녀는 하나님이 명한 말씀에 불순종하고 그녀는 자신만 죄를 지을 뿐 아니라 남편인 아담도 선악과를 주어 범죄에 동참하도록 하였습니다. 여러분 죄는 아주 작은데서부터 시작합니다. 죄는 말씀을 잃어버릴 때 시작합니다. 감사를 잊어버릴 때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고 불평할 때 시작합니다. 그때 우리는 더욱더 말씀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더욱도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해야 합니다. 그리할 때 모든 지각에 뛰어나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켜 주십니다.(빌4:6,7) 잊지 맙시다. 죄는 사탄의 유혹 이전에 하나님의 사랑을 잊어버린, 하나님에 대 잃어버린 인간의 마음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제 2 장 하나님의 사랑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했습니다. 그들은 분명 잘못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 잘못으로 인해 하나님께 나오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얼굴을 피해 동산나무 뒤로 숨어버렸습니다. 그들은 두려움 때문에 이전과 같이 하나님을 기뻐하며 하나님과 즐거이 교제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로인해 가장 마음이 아프신 분은 하나님이셨습니다. 9절을 봅시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은 아담을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그를 찾으셨습니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여러분 자식을 잃어버렸는데 자식을 찾지 않을 부모가 있을까? 만일 그런 부모가 있다면 그들은 자식을 지독히도 사랑하지 않은 분들일 것입니다. 그러나 자식을 사랑하는 부모님이라면 잃어버린 자식을 무슨 수를 써서라도 찾고자 합니다. 자식을 너무나 사랑했기에 죽을 것 같이 고통하면서 자식을 찾도록 찾습니다.

최근에 보스톤 마라톤 대회 결승지점에서 압력솥 폭탄테러가 발생했습니다. 이 사건에 대한 신문기사를 보다보니 폭탄테러현장에서 부상자들을 도왔던 카우보이 모자를 쓴 한 중년남자의 이야기가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는 두 아들이 있는데 그의 첫째 아들이 아프카니스탄 전쟁 때 적의 저격을 받아 전사했다고 합니다. 그는 이 비보를 그의 생일날 아들의 동료들에게 듣게 되었고 그로인해 너무나도 충격을 받은 나머지 살 소망을 잃어버리고 자살을 시도했습니다. 그러나 죽다가 살아난 그는 그 후에 전쟁의 고통을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고 전쟁의 피해로 고통하는 이들을 위로하는 평화 전도사가 되었다고 합니다. 저는 그의 기사를 읽으며 자식을 얼마나 사랑했으면 아들의 죽음을 받아들일 수 없어 죽고자 했을까요? 생각하며 감동을 받았습니다. 여러분, 사람도 이렇게 자기 자식을 사랑합니다. 그런데 아담과 하와는 어떤 존재입니까? 그들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최초의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그들을 창조하신 후 너무나도 기뻐하셨습니다.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 그로인한 기쁨을 스바냐 선지자는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에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습3:17)

하나님은 이토록 아담과 하와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들을 기뻐하셨습니다. 너무나 기뻐서 어쩔 줄 몰라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런 그들이 하나님을 반역했습니다. 이런 그들이 이제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숨어버렸습니다. 실상 하나님은 악과의 전쟁에서 그들을 잃어버리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마치 전쟁에서 아들을 잃어버린 아버지와 같이 그들로 인해 너무나도 마음 아프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아픈 마음으로 아담을 부르신 것입니다. “아담아, 네가 어디에 있느냐?” 한편 아담은 자기를 찾고 계신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얼마나 두려웠을까요? 그는 선악과를 먹을 때 결코 이런 비극적인 결과가 찾아오리라고는 생각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후회해도 이미 엎지러진 물이었습니다. 그는 두려움과 절망에 휩싸여 어찌할 바를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여러분 죄가 이렇게 무서운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아담이 어디에 있는지 다 알고 계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왜 그를 찾고 계신 것입니까? 소설 레미제라블을 보면 자베르 형사는 법의 심판을 받게 하고자 장발장을 끈질지게 좇아다녔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아담을 찾으신 이유는 그를 정죄하고자 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아담이 자신의 모습을 겸손히 깨닫고 돌이키길 원하셨습니다. 그가 회개하고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그를 돕고자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아담은 자신의 문제를 알지 못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벗었으므로 부끄러워서 숨었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그에게 그의 죄문제를 바로 지적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이 내게 주신 여자가 때문에 먹었다고, 여자는 뱀이 꾀어서 먹었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죄를 인정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그에 대한 책임을 떠넘기고자 하였습니다. 그들은 구제불능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을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뱀을 저주하신 말씀을 통해 그들을 구원코자 하시는 구체적인 계획을 그들에게 알려주셨습니다. 15절을 봅시다. “내가 너로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여기서 여자의 후손은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신 예수님을 의미합니다. 여자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하는 것은 예수님의 부활을, 뱀이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하는 것은 십자가의 고난을 의미합니다. 여러분 복음은 마태복음에서부터 시작된 것이 아닙니다. 복음은 창세기에서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가장 먼저 죄를 지은 것도 아담이요 가장 먼저 복음을 들은 것도 아담입니다. 하나님은 죄로 인해 잃어버린 아담과 그의 후손들을 구원하고자 하는 복음을 들고 아담을 찾아오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잃어버린 당신의 영혼들을 구원코자 복음을 들고 그들을 찾도록 찾고 계십니다.

그러나 여러분 하나님이 선악과를 따먹는 날에는 어떻게 된다고 말씀하셨습니까? 반드시 죽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구원코자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본래의 모습으로 회복코자 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반드시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죄를 범한 아담과 하와 그리고 뱀에게 벌을 주셨습니다. 아담은 땀을 흘리며 고생하는 벌을, 여자는 해산하는 고통을, 뱀을 배로 기어 다니며 흙을 먹고 사는 벌을 내리셨습니다. 그러나 가장 무서운 형벌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사람에게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지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말씀대로 그들에게 ‘죽음’을 선거하셨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죽는 것은 자연현상이 아닙니다. 이는 죄의 결과입니다. 그런데 만일 우리가 죽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요? 우리는 죄인으로 영원히 살아야 합니다. 이것은 축복이 아니라 저주입니다. 지옥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은 우리를 죽게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예수님 안에서 영광스런 부활의 몸으로 다시 살게 하십니다. 그렇기에 우리의 죽음도 사실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죽음도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는 것입니다.

죄를 범한 아담과 하와는 에덴동산에서 살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들을 에덴동산에서 내보내실 때 가죽옷을 입혀서 내보내셨습니다. 여러분 사람들이 왜 옷을 입는 줄 아십니까? 그건 자신의 허물과 부끄러움을 가리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이 가죽옷을 입히셨다는 것은 하나님의 그들의 허물과 부끄러움을 가려주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가죽옷을 입힐려면 어떤 짐승인가 죽임을 당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가죽옷은 십자가로 우리의 죄와 허물을 담당하시고 피흘려 죽으신 예수님의 예표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이처럼 범죄한 인간을 향해 당신의 사랑을 이토록 절절하게 나타내신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미녀가 야수를 사랑한 사랑보다도 더 절절한 하나님의 사랑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들고 그 절절한 사랑으로 잃어버린 당신의 영혼을 부르고 계십니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구원은 이 하나님의 사랑의 음성에 믿음으로 응답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가 이 하나님이 사랑에 의지하여 믿음으로 나아와 예수님을 영접하고 예수님 안에서 구원과 부활의 참된 소망 가운데 살아가시는 축복을 누리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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