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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12강 하나님의 주권과 긍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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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정베드로
댓글 0건 조회 277회 작성일 13-02-02 2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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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로마서 제 12 강
말씀 | 로마서 9:1-33
요절 | 로마서 9:16
하나님의 주권과 긍휼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이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여러분 개그콘서트를 보시나요? 개그콘서트에 갑을컴퍼니라는 코너가 있습니다. 거기서 선배사원이 신입사원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사회생활은 말이야 갑과 을만 잘 알면 되요~ 자네 말야 우리 회사가 자동차 회사잖아, 우리 회사 자동차를 산 고객에게 3년 간 무상서비스를 해줘 그럼 고객이랑 우리랑 누가 갑일까?” “당연히 3년간 무상서비스를 받는 고객이 갑이죠?” “아니지 우리가 갑이야. 야! 새 차가 3년 안에 고장날일이 뭐가 있냐? 3년 이후부터 고장 나는데 그 때는 돈 내고 해야 되니까? 우리가 갑이지~”

사회생활을 잘 하려면 갑과 을을 잘 알아야 되는데 신앙생활을 잘 하려면 알아야 될 건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주권과 긍휼입니다. 그런데 제 생각에는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주권과 긍휼을 이해하는 건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주권과 긍휼이란 말 자체도 어렵지만 사실 이것이 어려운 이유는 이것은 우리에게 속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속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겁니다. 여러분의 부모님이 고생해서 돈을 버시죠? 그 돈을 어떻게 쓸 것인지는 결정할 권리가 누구한테 있나요?  부모님들에게 있습니다. 우리가 이것을 전문용어로 돈에 대한 주권이 부모님께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부모님들이 내 돈이라고 마음대로 쓰시나요? 그렇지 않죠? 여러분들 학교 보내고 옷 사주고 밥 사주고 용돈도 주고 합니다. 이렇게 여러분들을 위해 쓰시지 않지 않습니까? 심지어는 당신들은 못 입고 못 먹을망정 여러분들에게는 최고로 해주고 싶어 하십니다. 부모님들 왜 그렇게 하시죠? 여러분들에게 무슨 죄를 지어서 그런 건가요? 여러분들에게 무슨 빚을 져서 그런 건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왜 그러냐면 그건 부모님들이 여러분들을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긍휼”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이것을 조금이나마 이해하게 된다면 여러분들은 다 효자 효녀가 됐을 텐데, 안타깝게도 여러분들은 아직 부모님의 주권과 긍휼을 잘 알지 못합니다. 왜냐면 여러분들은 아직 부모가 되어 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주권과 긍휼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이것을 이해하는데 한계가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우리가 이것을 조금라도 이해하게 된다면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믿음, 우리의 사랑, 우리의 헌신은 분명 이전과는 많이 달라질 것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래서 오늘 말씀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우리에게 이해하기 쉽지 않은 부분이 있습니다. 그래서 저도 최대한 여러분들이 이해하기 쉽도록 말씀을 준비할려고 노력을 했습니다. 여러분들도 오늘 말씀을 잘 들어보시고 좀 더 하나님을 이해하고 좀 더 하나님과 가까워지는 여러분들 모두가 되시기를 바라겠습니다. 먼저 잠깐 기도하고 시작하겠습니다.

9:1-5를 봅시다. 이 말씀을 보니 사도바울에게 큰 근심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의 근심과 고통은 무엇이었나요? 그의 근심과 고통은 그의 동족인 이스라엘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많은 이방인들이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고 있었는데 정작 그의 동족들은 예수님을 부인하고 교회를 핍박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얼마나 많은 축복을 받은 백성인지 모릅니다. 4~5절을 읽어 봅시다. “그들은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들에게는 양자됨과 영광과 언약들과 율법을 세우신 것과 예배와 약속들이 있고 조상들도 그들의 것이요 육신으로 하면 그리스도가 그들에게서 나셨으니 그는 만물 위에 계셔서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시니라. 아멘” 그런데 이렇게 축복을 많이 받은 이스라엘이 지금은 하나님을 대적하고 있고 하나님께 버림받은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로인해 사도바울은 근심하며 고통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고민을 풀기 위해 그는 구약을 깊이 연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결과 그가 찾아낸 답이 바로 하나님의 주권과 긍휼이었습니다.

6절을 봅시다. 6절에서 사도바울이 무엇라고 하나요?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폐하여 진 것 같지 않도다.” 비록 사도바울은 대학자이고 위대한 사도였지만 그도 하나님의 주권에 대해서는 어려워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구약성경을 깊이 연구하는 가운데 그의 고민에 대한 실마리를 하나하나 풀어가고 있습니다. 7-9절을 봅시다. 여러분 아브라함이 누구죠? 네 그는 믿음의 조상입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에게 난 자녀들은 모두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겠군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육신의 자녀가 아니라 오직 약속의 자녀가 씨로 여김을 받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약속을 받은 자녀는 오직 이삭 한 사람뿐이었습니다. 10~13절을 봅시다. 이삭의 아내 리브가는 쌍둥이를 임신했습니다. 그들이 누구죠? 에서와 야곱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태어나기도 전에 하나님은 리브가에게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길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두 이야기를 통해 하나님의 주권에 대해 배울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첫째, 하나님은 약속을 따라 주권을 행하십니다. 아브라함은 86세에 아내 사라의 몸종인 하갈에게서 이스마엘을 낳았습니다. 그런데 그가 99세 되던 해 하나님께서 그의 아내 사래가 그에게 아들을 낳아 주게 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때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서 살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이제 100세나 되었고 그의 몸에서 난 아들이 있으니 더 이상 아들이 필요치 않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내 언약은 내년 이 시기에 사라가 네게 낳을 이삭과 세우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왜 그렇게 하신 것일까요? 왜냐면 아브라함의 몸에서 난 자들이 다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 오직 약속이 씨라야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만민을 구원코자 하신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목자가정, 믿는 가정에서 태어났다고 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부모님의 믿음일 뿐입니다. 이삭이 하나님의 약속을 계승할 자가 된 것은 그의 아버지가 아브라함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여러분들도 내가 목자가정이든 아니든 여러분 자신이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자녀들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주권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은 육신의 이스라엘이 아닌 약속을 받은 영적인 이스라엘을 세워가는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의 주권은 우리의 행위와 관계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삭의 아내 리브가가 쌍둥이를 임신했을 때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구약의 말라기서에는 ‘하나님이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라고 쓰여 있습니다. 이것은 잘못 해석하며 하나님에 대해 엄청 오해할 수 있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애초부터 누군 사랑하고 누군 미워한다면 하나님은 불공평하신 분이 아닌가 생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은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신 이유를 하나님의 주권 편에서 해석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하신 이유는 하나님의 주권이 인간의 행위에 있지 않고 부르신 이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선택하시고 구원하시는 일에 우리의 행위를 보지 않겠다고 작정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왜 그렇게 작정하셨을까요? 로마서 3:10-12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그 이유는 말이 하나님이 행위를 보신다면 아무도 구원을 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당신의 주권을 행하실 때 결코 사람의 행위를 보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볼 때 그래도 의인이 있지 않을까 생각할 수 있지만 로마서 3:23절에서는 무엇이라고 합니까?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아무도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했다고 합니다. 행위로는 아무도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은 우리의 행위를 보고 구원하시지 않습니다. 사실 행위로 보며 에서보다는 야곱이 훨씬 더 나쁜 짓을 많이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야곱을 택함을 받았습니까? 그것은 우리가 세 번째 이야기할려는 내용입니다.

셋째, 하나님은 당신의 긍휼을 따라 주권을 행하십니다. 행위로 말하면 야곱에 에서보더 더 나쁜 놈인데 왜 그는 택함을 받고 하나님의 언약과 축복을 계승할 자가 되었을까요?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긍휼 때문입니다. 여러분 사실 하나님이 세상에서 하고 많은 사람 중에 아브라함을 택하시고 아직 나지도 않은 야곱을 택하신 것은 모두 하나님의 긍휼 때문입니다. 15~16절을 읽어 봅시다.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이 여길 자를 긍휼이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였으니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 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이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여러분 아브라함과 야곱이 하나님의 축복과 언약을 받은 것은 그들이 간절히 원하거나 또 그것을 얻기 위해서 힘써 달렸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들은 모두 하나님의 축복과 언약을 받기에 한없이 부족한 죄인들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그들을 오래 참으시고 기다려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하나님의 축복과 언약을 받을만한 자들로 성장하도록 끊임없이 그들을 감당해 주셨습니다. 왜 그렇게 하신 것입니까?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들은 결코 하나님의 축복과 언약을 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긍휼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왜 우리의 행위를 보시지 않을까요? 하나님은 왜 우리 죄를 위해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게 하셨을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긍휼 때문입니다. 이 방법이 아니고는 우리를 구원하실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주권자이시지만 그 주권을 오직 당신의 긍휼을 따라 행하십니다. 죄인들을 긍휼이 여기시는 하나님은 할 수 있으면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지금도 우리를 당신의 긍휼의 빛으로 인도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포도원 농부의 비유를 통해 하나님의 주권과 긍휼에 대해 가르쳐 주셨습니다. 마16:1-16절입니다. 이 비유에 보면 한 포도원 주인이 품꾼들과 한 데나리온 씩 주기로 하고 포도원에 들여보냈습니다. 집주인은 오전 9시, 오전 11시, 오후 3시, 오후 5시에 나가 품꾼들을 포도원에 들여보냈습니다. 그리고 오후6시에 일을 마친 후 주인은 나중 온자부터 품삯을 주는데 모두 동일하게 한 데나리온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먼저 온자들이 주인을 원망하며 말합니다. “나중 온 이 사람들은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아니하였거늘 그들을 종일 수고하며 더위를 견딘 우리와 같게 하였나이다.” 그때 주인의 대답이 무엇입니까? 13-16절입니다. “친구여 내가 네게 잘못한 것이 없노라 네가 나와 한 데나리온의 약속을 하지 아니하였느냐 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 나중 온 이 사람에게 너와 같이 주는 것이 내 뜻이니라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 주인은 왜 한 데나리온을 주었다고 합니까? 그것은 품꾼들과 약속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왜 먼저 온자나 나중 온자 모두에게 동일한 대우를 한 것입니까? 이는 하나님의 긍휼은 먼저 온 자나 나중 온 자나 동일하다는 것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먼저 와서 많이 일했다고 많이 사랑하시고 나중 와서 적게 일했다고 적게 사랑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주권과 긍휼은 먼저 온 자나 나중 온자나 모두에게 동일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먼저 온 사람들과 같이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받고 원망하고 마음을 완악하게 합니다. 왜 그런 것입니까? 정말로 하나님이 그들을 차별대우했기 때문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동일한 긍휼로 대우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긍휼을 마치 해와 같습니다. 여러분 햇빛이 얼음에 비추면 어떻게 됩니까? 녹습니다. 그러면 진흙이 비추면 어떻게 됩니까? 딱딱해집니다. 왜 하나는 녹고 하나는 딱딱해지는 것입니까? 얼음에 비춘 빛은 부드러운 빛이고 진흙에 비춘 빛은 강한 빛이기 때문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얼음에 비친 빛이나 진흙에 비춘 빛은 모두 동일한 빛입니다. 그러나 동일한 빛을 받았음에도 얼음과 진흙은 그 자신이 가진 고유한 특성 때문에 녹기도 하고 딱딱해지기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에게 동일하게 당신의 긍휼의 빛을 비춰주십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감동하며 받고 어떤 사람들을 마음을 완악하게 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것에 대한 책임이 하나님께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자신에게 있는 것입니다.

19-29절을 봅시다. 여러분 토기장이 아시나요? 네, 흙을 가지고 그릇도 만들고 도자기로 만드는 장인입니다. 토기장이는 진흙 한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들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이조백자 같은 귀한 그릇을 만들기도 하고 요강과 같이 오물을 담는 그릇을 만들기도 합니다. 그런데 요강이 토기장이한데 왜 나를 요강으로 만드느냐고 따질 수 있습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왜냐면 진흙 한덩이로 무엇을 만들지 결정하는 것은 토기장이의 주권이기 때문입니다. 요강이 왜 나를 요강으로 만들었냐고 토기장이에게 반발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토기장이는 요강을 깨뜨려 버릴 것입니다. 왜냐면 그것도 토기장이의 주권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주권과 긍휼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은 나의 창조주시요 나는 그의 피조물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나는 한 덩어리 진흙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런 나를 진노의 그릇이 아닌 긍휼의 그릇으로 빚기를 원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주권과 긍휼에 대한 결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긍휼하심을 따라 당신의 주권을 행하십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의 주권은 어떤 상황에서도 선하십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긍휼하심으로 지금도 우리를 오래참고 기다리십니다. 우리 JBF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주권과 긍휼하심을 의지하여 더욱더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실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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