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9강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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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가을 로마서 제 9 강
말씀 | 로마서 7:1-25
요절 | 로마서 7:24,25a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여러분 로마서를 통해 지금까지 우리가 무엇을 배웠나요? 우리는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믿음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예수님께서 우리 죄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셨다는 것과 우리는 예수님과 연합하여 죽었고 또한 새 삶을 얻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로 말미암아 우리는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게 되었고 우리의 몸을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릴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게 되면 절대로 죄를 짓지 않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데도 여전히 죄를 짓습니다. 우리는 그로인해 괴롭습니다. 우리는 아직도 죄와 율법의 종인 것 같은 생각을 하기도 합니다.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일까요? 그렇다면 믿는 것과 믿지 않는 것과는 무엇이 다른 건가요?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 아무 생각이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게 되면 자연스럽게 이런 고민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런 고민을 우리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보다 먼저 우리보다 훨씬 더 깊이 고민하신 분이 계십니다. 그 분이 바로 우리가 공부하고 있는 로마서를 쓰신 사도바울입니다. 그는 이 고민을 얼마나 많이 했는지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라고 탄식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나는 참으로 고민스럽고 불쌍한 사람이구나” 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만일 고민은 깊은데 그 답을 찾지 못하면 얼마나 괴롭겠습니까? 그러나 감사하게도 사도바울은 하나님의 은혜로 그의 고민에 대한 답을 찾았고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말씀을 통해 사도바울이 깨달은 바를 두 가지로 여러분들과 나누고자 합니다. 첫째는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다시한번 이해하고, 두 번째는 우리가 죄와 율법에서 벗어나 어떻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 수 있게 되었는지를 나누고자 합니다.
첫째 은혜 아래 사는 새로운 삶 (1-6) 1절을 봅시다. “형제들아 내가 법 아는 자들에게 말하노니 너희는 그 법이 사람이 살 동안만 그를 주관하는 줄 알지 못하느냐” 여러분 세상의 법은 살아 있는 사람에게만 효력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이 아무리 죄를 많이 지었어도 그 사람이 죽으며 그 사람에 대한 법집행은 정지됩니다. 법은 죽은 사람을 주관하지 못합니다. 사도바울은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 혼인법을 예로들고 있습니다. 만일 어떤 여자가 남편이 있는데 다른 남자와 결혼하면 “음녀”라고 합니다. 그런데 남편이 죽으면 다른 남자와 결혼해도 “음녀”라고 하지 않습니다. 이는 그녀가 남편의 법으로부터 자유롭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법의 원리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을 이 법의 원리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과거 죄와 율법아래 살았습니다. 죄와 율법이 우리를 정죄하고 하라는대로 시키는대로 살 수 밖에 없습니다. 죄와 율법은 우리로 사망의 열매를 맺게 했고 결코 우리의 죄를 용서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게 되면 우리는 죄와 율법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롭게 됩니다. 왜냐면 우리는 예수님의 죽음과 연합하여 죄와 율법에 대ㅐ하여 죽은 자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비록 우리가 죄를 지어도 죄가 우리를 주관치 못합니다. 율법이 우리를 정죄하지 못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죄와 율법에서 벗어나 어디서 살게 된 것입니까? 우리는 죄와 율법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은혜의 법아래 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가 죄를 지어도 정죄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고 우리가 죄를 이길 수 있도록 거룩한 소원을 주시고 이길 힘을 주십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죄을 지었을지라도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어 두려움이 없이 하나님의 보좌로 담대해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은혜 아래에서는 어떤 죄를 지었던지 용서를 받으니 마음껏 죄를 지어도 되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6절을 읽어 봅시다.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율법 조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지니라.” 우리가 은혜 아래 있다고 해서 죄를 짓고 마음껏 살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제 율법 조문의 묵은 것 곧 문자적으로 하나님의 법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영의 새로운 것 곧 하나님의 성령께서 우리 안에 불어 넣어주시는 거룩한 소원을 따라 하나님의 법을 지킬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신앙생활하면서 혼란스러운 것은 이것입니다. 우리는 죄와 율법의 법에 대해서는 잘 아는데 하나님의 은혜의 법에 대해서는 잘 모르고 익숙치 않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북한주민이 북한을 탈출하여 남한에서 살게 된 것을 생각해 보면 좀더 이해하는데 도움이 됩니다. 그가 북한에 살 때는 북한의 법아래 있습니다. 그래서 김일성 장군을 욕하면 당장 잡혀 갑니다. 그로인해 아오지 탄광이나 집단농장에 끌려가 평생을 고생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는 남한에 있으면서도 김일성 장군을 욕하면 큰 벌을 받는다는 두려움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왜냐면 그는 남한에 그런 법이 없다는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아니 그런 법이 없다는 것을 알고서도 두려워합니다. 왜냐면 그는 비록 남한에 있지만 그의 마음과 생각은 여전히 북한의 법에서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런 분들을 위해 하나원과 같은 곳에서 한국의 법을 가르치고 민주주의가 무엇인지, 시장경제가 무엇인지, 한국의 사회와 문화와 규범과 살아가는 법에 대해서 교육을 시켜주고 있습니다. 그래야 남한 사회를 이해하고 빨리 적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도 죄와 율법 아래서 살다보니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것이 무엇인지 잘 모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것이 잘 적응이 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 아래 사는 것이 무엇인지를 배워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으면 우리는 죄와 율법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은혜의 법아래로 들어가게 됩니다. 그러나 그 아래 있다고 저절로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며 사는 것이 아닙니다. 북한주민이 한국의 법을 배우고 적응을 하는 것이 필요하듯 우리도 하나님의 은혜가 무엇인지 그리고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기는 것이 무엇인지를 배우고 적응해야 합니다. 그러기까지 우리는 잠시 혼란스러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가운데 분명히 붙들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했다면 우리는 죄와 율법아래 있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아래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은 후에 죄를 짓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는 이런 우리를 정죄하고 심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용서하시고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십니다.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하나님을 섬길 수 있도록 우리의 삶을 변화시켜 주십니다. 우리가 이를 이해하고 하나님의 은혜 아래 살아가는 새로운 삶을 힘써 배우고 섬길 수 있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둘째 내 마음에 있는 두 가지 법(7-24) 우리는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습니다. 이는 우리가 죄와 율법으로부터 자유롭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여전히 죄를 짓고 있고 또 율법으로부터 정죄를 받는 것입니까? 우리는 이에 대해 이렇게 설명할 수 있습니다.
첫째로 우리가 율법으로부터 벗어났다고 해도 율법이 폐하여 진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은 후에 더 이상 율법아래 있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이 율법을 폐하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율법을 우리 옆에 두셨습니다. 왜냐면 율법이 없이는 죄를 깨달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만일 율법이 탐내지 말라고 하지 않았으면 우리는 탐심이 죄인줄 알지 못합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게 된 후에도 율법은 여전히 우리 옆에서 자신의 역할을 충실히 다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둘째로 우리가 율법의 정죄를 받는 것은 죄가 우리를 속이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11절을 읽어 봅시다.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나를 속이고 그것으로 나를 죽였는지라.” 우리는 법이 없이 살 때는 죄가 죄인줄 알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율법을 알고 난후에 죄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마치 그 전에는 죄를 짓지 않았는데 율법을 알고 난 후에 더 죄를 많이 짓는 것 같은 착각을 하곤 합니다. 그래서 마치 율법이 나로 하여금 죄를 짓게 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혼란이 드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에 대해 사도바울은 분명히 말씀합니다. 이는 율법이 우리로 하여금 죄를 짓게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있는 죄라는 것입니다. 죄는 기회를 타서 우리로 하여금 죄를 짓게 하고는 마치 율법 때문에 죄를 짓게 된 것처럼 우리를 속인 후에 자신의 정체를 감춘다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죄가 이렇게 우리를 기만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속지 말아야 합니다.
12절을 보십시오. “이로 보건대 율법은 거룩하고 계명도 거룩하고 의로우며 선하도다.” 하나님의 법은 거룩하고 의로우며 선합니다. 이것이 우리로 하여금 죄를 짓게 하고 이것이 우리로 하여금 사망의 열매를 맺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로 하여금 죄를 짓게 하는 것은 우리 안에 있는 죄성 ("sinful nature" 혹은 “sinful passion")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죄에게 속아 율법을 범하지 않도록 죄에게 기회를 주지 말아야 합니다.
셋째로 우리 안에는 두 마음의 법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죄를 짓지 않으려면 죄에게 속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죄의 유혹을 받고 또 죄에게 잘 속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친구의 것을 탐내면 안되는 줄 알지만 탐이 나서 부모님들을 조릅니다. 나에게 잘못한 친구를 용서해야하는 줄 알지만 한편으로는 복수를 하고 싶고 그 친구를 욕하고 저주합니다. 이렇게 우리 마음에는 두 마음이 법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이 두 마음의 법이 서로 싸우는 것입니다.
21-23절을 보십시오. “21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22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23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사도바울은 한 법을 깨달았습니다. 이는 우리 안에는 하나님을 법을 즐거워하는 마음과 우리 안에 죄를 짓고 싶은 두 가지 마음이 법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자신 안에 있는 두 가지 마음으로 법으로 인해 행복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24절을 보십시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그는 그로인해 마음이 힘들고 괴로웠음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로인해 그는 절망하며 하나님의 구원을 간절히 찾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두 가지 마음의 법을 품고 살아가는 참으로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도바울의 고백은 탄식과 절망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25절 전반절을 보십시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는 자신 안에 있는 죄악된 본성을 바라볼 때 탄식하며 절망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곧바로 예수님을 생각하며 감사하고 있습니다. 우리 안에 죄성이 없다면 우리는 예수님을 믿지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 안에 죄성이 없다면 우리는 교만해져 자기 의로 구원을 이루려 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은 후에도 여전히 내 안에 있는 죄성으로 인해 예수님을 바라봐야 합니다. 예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았지만 우리 안에는 여전히 선한 것이 없습니다. 우리는 그로인해 절망하지만 도리어 이런 우리에게 하나님의 의가 되어주신 예수님을 바라볼 때 우리는 도리어 예수님 안에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발견하고 감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신앙이란 우리 자신에 대해서는 철저히 절망하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온전한 소망을 갖는 것입니다. 우리가 죄와 율법에서 벗어나 영의 새로운 것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내 안에 있는 선한 의지만으로는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은 이후에도 여전히 예수님이 필요합니다. 우리 죄를 위해 죽으시고 사흘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예수님만이 우리를 죄와 율법에서 벗어나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게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해서는 철저히 절망하고 오직 예수님만을 붙잡아야 되겠습니다. 왜냐면 예수님만이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며 우리를 죄에서 이기게 하시는 구원자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게 된 이후에 죄와 율법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되어 하나님의 은혜의 법아래서 살게 되었음을 배웠습니다. 그러나 우리 안에는 두 마음의 법이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는 마음이요 하나는 죄를 짓고자 하는 마음입니다. 이 두 마음의 법이 싸울 때 우리는 괴롭고 또 그로인해 탄식하며 절망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변함없이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십니다. 우리로 하여금 죄를 이기게 하십니다. 우리를 죄와 율법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은혜 아래 살아가게 하십니다. 우리가 어떠한 혼란과 어려움 가운데서도 오직 예수님만을 바라보므로 끝내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말씀 | 로마서 7:1-25
요절 | 로마서 7:24,25a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여러분 로마서를 통해 지금까지 우리가 무엇을 배웠나요? 우리는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믿음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예수님께서 우리 죄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셨다는 것과 우리는 예수님과 연합하여 죽었고 또한 새 삶을 얻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로 말미암아 우리는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게 되었고 우리의 몸을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릴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게 되면 절대로 죄를 짓지 않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데도 여전히 죄를 짓습니다. 우리는 그로인해 괴롭습니다. 우리는 아직도 죄와 율법의 종인 것 같은 생각을 하기도 합니다.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일까요? 그렇다면 믿는 것과 믿지 않는 것과는 무엇이 다른 건가요?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 아무 생각이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게 되면 자연스럽게 이런 고민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런 고민을 우리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보다 먼저 우리보다 훨씬 더 깊이 고민하신 분이 계십니다. 그 분이 바로 우리가 공부하고 있는 로마서를 쓰신 사도바울입니다. 그는 이 고민을 얼마나 많이 했는지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라고 탄식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나는 참으로 고민스럽고 불쌍한 사람이구나” 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만일 고민은 깊은데 그 답을 찾지 못하면 얼마나 괴롭겠습니까? 그러나 감사하게도 사도바울은 하나님의 은혜로 그의 고민에 대한 답을 찾았고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말씀을 통해 사도바울이 깨달은 바를 두 가지로 여러분들과 나누고자 합니다. 첫째는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다시한번 이해하고, 두 번째는 우리가 죄와 율법에서 벗어나 어떻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 수 있게 되었는지를 나누고자 합니다.
첫째 은혜 아래 사는 새로운 삶 (1-6) 1절을 봅시다. “형제들아 내가 법 아는 자들에게 말하노니 너희는 그 법이 사람이 살 동안만 그를 주관하는 줄 알지 못하느냐” 여러분 세상의 법은 살아 있는 사람에게만 효력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이 아무리 죄를 많이 지었어도 그 사람이 죽으며 그 사람에 대한 법집행은 정지됩니다. 법은 죽은 사람을 주관하지 못합니다. 사도바울은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 혼인법을 예로들고 있습니다. 만일 어떤 여자가 남편이 있는데 다른 남자와 결혼하면 “음녀”라고 합니다. 그런데 남편이 죽으면 다른 남자와 결혼해도 “음녀”라고 하지 않습니다. 이는 그녀가 남편의 법으로부터 자유롭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법의 원리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을 이 법의 원리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과거 죄와 율법아래 살았습니다. 죄와 율법이 우리를 정죄하고 하라는대로 시키는대로 살 수 밖에 없습니다. 죄와 율법은 우리로 사망의 열매를 맺게 했고 결코 우리의 죄를 용서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게 되면 우리는 죄와 율법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롭게 됩니다. 왜냐면 우리는 예수님의 죽음과 연합하여 죄와 율법에 대ㅐ하여 죽은 자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비록 우리가 죄를 지어도 죄가 우리를 주관치 못합니다. 율법이 우리를 정죄하지 못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죄와 율법에서 벗어나 어디서 살게 된 것입니까? 우리는 죄와 율법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은혜의 법아래 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가 죄를 지어도 정죄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고 우리가 죄를 이길 수 있도록 거룩한 소원을 주시고 이길 힘을 주십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죄을 지었을지라도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어 두려움이 없이 하나님의 보좌로 담대해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은혜 아래에서는 어떤 죄를 지었던지 용서를 받으니 마음껏 죄를 지어도 되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6절을 읽어 봅시다.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율법 조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지니라.” 우리가 은혜 아래 있다고 해서 죄를 짓고 마음껏 살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제 율법 조문의 묵은 것 곧 문자적으로 하나님의 법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영의 새로운 것 곧 하나님의 성령께서 우리 안에 불어 넣어주시는 거룩한 소원을 따라 하나님의 법을 지킬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신앙생활하면서 혼란스러운 것은 이것입니다. 우리는 죄와 율법의 법에 대해서는 잘 아는데 하나님의 은혜의 법에 대해서는 잘 모르고 익숙치 않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북한주민이 북한을 탈출하여 남한에서 살게 된 것을 생각해 보면 좀더 이해하는데 도움이 됩니다. 그가 북한에 살 때는 북한의 법아래 있습니다. 그래서 김일성 장군을 욕하면 당장 잡혀 갑니다. 그로인해 아오지 탄광이나 집단농장에 끌려가 평생을 고생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는 남한에 있으면서도 김일성 장군을 욕하면 큰 벌을 받는다는 두려움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왜냐면 그는 남한에 그런 법이 없다는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아니 그런 법이 없다는 것을 알고서도 두려워합니다. 왜냐면 그는 비록 남한에 있지만 그의 마음과 생각은 여전히 북한의 법에서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런 분들을 위해 하나원과 같은 곳에서 한국의 법을 가르치고 민주주의가 무엇인지, 시장경제가 무엇인지, 한국의 사회와 문화와 규범과 살아가는 법에 대해서 교육을 시켜주고 있습니다. 그래야 남한 사회를 이해하고 빨리 적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도 죄와 율법 아래서 살다보니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것이 무엇인지 잘 모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것이 잘 적응이 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 아래 사는 것이 무엇인지를 배워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으면 우리는 죄와 율법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은혜의 법아래로 들어가게 됩니다. 그러나 그 아래 있다고 저절로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며 사는 것이 아닙니다. 북한주민이 한국의 법을 배우고 적응을 하는 것이 필요하듯 우리도 하나님의 은혜가 무엇인지 그리고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기는 것이 무엇인지를 배우고 적응해야 합니다. 그러기까지 우리는 잠시 혼란스러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가운데 분명히 붙들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했다면 우리는 죄와 율법아래 있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아래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은 후에 죄를 짓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는 이런 우리를 정죄하고 심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용서하시고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십니다.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하나님을 섬길 수 있도록 우리의 삶을 변화시켜 주십니다. 우리가 이를 이해하고 하나님의 은혜 아래 살아가는 새로운 삶을 힘써 배우고 섬길 수 있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둘째 내 마음에 있는 두 가지 법(7-24) 우리는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습니다. 이는 우리가 죄와 율법으로부터 자유롭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여전히 죄를 짓고 있고 또 율법으로부터 정죄를 받는 것입니까? 우리는 이에 대해 이렇게 설명할 수 있습니다.
첫째로 우리가 율법으로부터 벗어났다고 해도 율법이 폐하여 진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은 후에 더 이상 율법아래 있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이 율법을 폐하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율법을 우리 옆에 두셨습니다. 왜냐면 율법이 없이는 죄를 깨달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만일 율법이 탐내지 말라고 하지 않았으면 우리는 탐심이 죄인줄 알지 못합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게 된 후에도 율법은 여전히 우리 옆에서 자신의 역할을 충실히 다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둘째로 우리가 율법의 정죄를 받는 것은 죄가 우리를 속이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11절을 읽어 봅시다.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나를 속이고 그것으로 나를 죽였는지라.” 우리는 법이 없이 살 때는 죄가 죄인줄 알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율법을 알고 난후에 죄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마치 그 전에는 죄를 짓지 않았는데 율법을 알고 난 후에 더 죄를 많이 짓는 것 같은 착각을 하곤 합니다. 그래서 마치 율법이 나로 하여금 죄를 짓게 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혼란이 드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에 대해 사도바울은 분명히 말씀합니다. 이는 율법이 우리로 하여금 죄를 짓게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있는 죄라는 것입니다. 죄는 기회를 타서 우리로 하여금 죄를 짓게 하고는 마치 율법 때문에 죄를 짓게 된 것처럼 우리를 속인 후에 자신의 정체를 감춘다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죄가 이렇게 우리를 기만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속지 말아야 합니다.
12절을 보십시오. “이로 보건대 율법은 거룩하고 계명도 거룩하고 의로우며 선하도다.” 하나님의 법은 거룩하고 의로우며 선합니다. 이것이 우리로 하여금 죄를 짓게 하고 이것이 우리로 하여금 사망의 열매를 맺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로 하여금 죄를 짓게 하는 것은 우리 안에 있는 죄성 ("sinful nature" 혹은 “sinful passion")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죄에게 속아 율법을 범하지 않도록 죄에게 기회를 주지 말아야 합니다.
셋째로 우리 안에는 두 마음의 법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죄를 짓지 않으려면 죄에게 속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죄의 유혹을 받고 또 죄에게 잘 속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친구의 것을 탐내면 안되는 줄 알지만 탐이 나서 부모님들을 조릅니다. 나에게 잘못한 친구를 용서해야하는 줄 알지만 한편으로는 복수를 하고 싶고 그 친구를 욕하고 저주합니다. 이렇게 우리 마음에는 두 마음이 법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이 두 마음의 법이 서로 싸우는 것입니다.
21-23절을 보십시오. “21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22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23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사도바울은 한 법을 깨달았습니다. 이는 우리 안에는 하나님을 법을 즐거워하는 마음과 우리 안에 죄를 짓고 싶은 두 가지 마음이 법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자신 안에 있는 두 가지 마음으로 법으로 인해 행복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24절을 보십시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그는 그로인해 마음이 힘들고 괴로웠음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로인해 그는 절망하며 하나님의 구원을 간절히 찾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두 가지 마음의 법을 품고 살아가는 참으로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도바울의 고백은 탄식과 절망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25절 전반절을 보십시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는 자신 안에 있는 죄악된 본성을 바라볼 때 탄식하며 절망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곧바로 예수님을 생각하며 감사하고 있습니다. 우리 안에 죄성이 없다면 우리는 예수님을 믿지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 안에 죄성이 없다면 우리는 교만해져 자기 의로 구원을 이루려 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은 후에도 여전히 내 안에 있는 죄성으로 인해 예수님을 바라봐야 합니다. 예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았지만 우리 안에는 여전히 선한 것이 없습니다. 우리는 그로인해 절망하지만 도리어 이런 우리에게 하나님의 의가 되어주신 예수님을 바라볼 때 우리는 도리어 예수님 안에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발견하고 감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신앙이란 우리 자신에 대해서는 철저히 절망하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온전한 소망을 갖는 것입니다. 우리가 죄와 율법에서 벗어나 영의 새로운 것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내 안에 있는 선한 의지만으로는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은 이후에도 여전히 예수님이 필요합니다. 우리 죄를 위해 죽으시고 사흘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예수님만이 우리를 죄와 율법에서 벗어나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게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해서는 철저히 절망하고 오직 예수님만을 붙잡아야 되겠습니다. 왜냐면 예수님만이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며 우리를 죄에서 이기게 하시는 구원자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게 된 이후에 죄와 율법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되어 하나님의 은혜의 법아래서 살게 되었음을 배웠습니다. 그러나 우리 안에는 두 마음의 법이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는 마음이요 하나는 죄를 짓고자 하는 마음입니다. 이 두 마음의 법이 싸울 때 우리는 괴롭고 또 그로인해 탄식하며 절망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변함없이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십니다. 우리로 하여금 죄를 이기게 하십니다. 우리를 죄와 율법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은혜 아래 살아가게 하십니다. 우리가 어떠한 혼란과 어려움 가운데서도 오직 예수님만을 바라보므로 끝내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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