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6강 아브라함의 믿음의 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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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JBF 로마서 제 6강
말씀 로마서 4:1-25
요절 로마서 4:13
아브라함의 믿음의 의
“아브라함이나 그 후손에게 세상의 상속자가 되리라고 하신 언약은 율법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요 오직 믿음의 의로 말미암은 것이니라.”
우리는 지난 5주간에 걸쳐서 로마서 말씀을 1장부터 3장까지를 배웠습니다. 지난 말씀을 통해 배운 것이 무엇입니까? 첫째로 이방인이나 유대인이나 모두가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둘째로 우리는 율법이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을 믿는 것입니까? 그것은 예수님께서 나의 죄를 위해 죽으셨고 나를 의롭게 하시기 위해 부활하셨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의 핵심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오직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고 하는 하나님의 복음이 신약시대에 갑자기 나타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복음을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과 예수님의 그림자라고 하는 다윗에게도 나타내셨습니다. 사도바울은 그들을 통해 믿음의 의가 신약시대에 갑자기 나타난 것이거나 혹은 자신이 공교히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구약의 선지자들과 율법을 통해 이미 나타내셨음을 증거코자 합니다. 오늘 우리도 아브라함과 다윗을 통해 그들의 믿음을 배우고 그들의 믿음의 발자취를 따라갈 수 있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제1장 모든 믿는 자들의 조상이 된 아브라함(4:1~3,9~25)
1절을 보십시오. “그런즉 육신으로 우리 조상인 아브라함이 무엇을 얻었다 하리요 ” 여러분 아브라함은 유대인들의 조상입니다. 유대인들은 아브라함이 그들의 조상이라는 것을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왜냐면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택함을 받았고 하나님은 그에게 약속하신대로 많은 후손과 땅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유대인만의 조상이 아닙니다. 그는 모든 믿는 자들의 조상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아브라함의 유대인의 조상이라 부르지 않고 믿음의 조상이라고 부릅니다. 왜 그가 믿음의 조상일까요? 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해 그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2,3절을 보십시오.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진바 되었느니라.”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라 불리게 된 것은 그의 행위에 있지 않습니다. 그는 행위로 보면 우리와 같이 많은 허물과 실수를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하나님이 지시할 땅으로 가기는 했지만 그는 그곳에서 기근을 만나자 이집트로 내려갔습니다. 그는 그곳에서 사람들이 그를 해칠까 두려워하여 그의 아내 사라를 여동생이라고 속였고 많은 돈을 받고 그의 아내를 이집트 왕국의 궁녀로 팔아 넘겼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지 십년 되던 해에는 아브라함이 살던 가나안에 전쟁이 일어났는데 마음이 다급해진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약속의 자녀를 주실 것이라는 말씀에 대한 불신이 생겨서 “하나님이 정 그러시면 제 생각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아들을 주실 때까지 기다릴 수 없으니 제 후사는 제 집에서 길리운 종 다메섹 엘리에셀로 하겠습니다.”라고 하나님께 반발하던 때도 있었습니다. 더더욱 큰 실수는 사라의 몸종 하갈을 통해 이스마엘을 낳은 것이었습니다. 그는 이스마엘을 낳은 후에 하나님의 약속을 잊고 13년 동안이나 허송세월을 하였습니다. 이처럼 행위로 말하면 그는 하나님 앞에서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그는 행위로 말하면 결코 완전한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은 왜 모든 믿는 자들의 조상이라 불리는 것입니까? 3절을 다시한번 읽어 보겠습니다.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진 바 되었느니라.” 창세기 15장을 보면 가나안에 전쟁이 일어나 두려움에 빠진 아브라함에 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때 하나님은 한밤중에 장막에 드러누워 있던 아브라함을 밖으로 불러내셨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보라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그때 너무나도 마음이 힘들었지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눈을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때 하늘에서는 금방이라도 쏟아질 것 같은 수많은 별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늘의 별들을 세기 시작했습니다. “별 하나, 별 둘, 별 셋, 별 넷” 그는 이렇게 밤하늘의 별을 세다가 이렇게 많은 별들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윤동주 시인을 아시나요? 윤동주 시인은 “나는 하늘의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기를 잎새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와했다.”로 시작되는 서시로 유명하죠. 윤동주 시인도 아브라함처럼 별을 헤던 밤이 있었습니다. 그가 쓴 “별 헤는 밤”이란 시를 소개할테니 잘 들어보세요.
별 헤는 밤
윤동주(尹東柱 1917∼1945)
계절이 지나가는 하늘에는
가을로 가득 차 있습니다.
나는 아무 걱정도 없이
가을 속의 별들을 다 헬 듯합니다.
가슴 속에 하나 둘 새겨지는 별을
이제 다 못 헤는 것은
쉬이 아침이 오는 까닭이요.
내일 밤이 남은 까닭이요.
아직 나의 청춘이 다하지 않은 까닭입니다.
별 하나에 추억과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쓸쓸함과
별 하나에 동경(憧憬)과
별 하나에 시와
별 하나에 어머니, 어머니
........(이하생략)...........
윤동주는 고향인 북간도를 떠나 서울 연희대학교 문과를 다닐 때에 요즘 같은 가을밤에 밤하늘을 수놓은 수많은 별들을 헤아리다 떠나온 고향과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 그리고 어머님이 떠올라 이 시를 지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별을 헤아리던 그날 밤, 수많은 별들을 만드신 하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이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고 하신 말씀도 믿게 되었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그의 믿음을 보시고 그의 믿음을 의로 여겨주셨습니다.
10절을 보십시오. “그런즉 그것이 어떻게 여겨졌느냐 할례시냐 무할례시냐 할례시가 아니요 무할례시니라”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은 때는 그가 할례를 받기 전이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의롭다함을 받는 것과 할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할례를 받으면 의롭게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것을 마치 천국행 티켓처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할례를 받지 않은 이방인들을 지옥의 땔감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할례를 받기 전에 그의 믿음을 의롭다 하셨습니다. 이렇게 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12절을 읽어 봅시다. “또한 할례자의 조상이 되었나니 곧 할례받을 자에게뿐 아니라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무할례시에 가졌던 믿음의 자취를 따르는 자들에게도 그러하니라.” 16절을 읽어 봅시다. “그러므로 상속자가 되는 그것이 은혜에 속하기 위하여 믿음으로 되나니 이는 그 약속을 그 모든 후손에게 굳게 하려 하심이라 율법에 속한 자에게뿐만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에 속한 자에게도 그러하니 아브라함은 우리 모든 사람의 조상이라”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세워 우리로 하여금 그의 믿음의 자취를 따르게 하려 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배우고 따라야할 아브라함의 믿음은 무엇입니까? 첫째로 그는 하나님을 창조주이시며 부활의 하나님이심을 믿었습니다. 17절을 읽어 봅시다. “기록된 바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 그가 믿은 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이시니라” 둘째로 그는 하나님을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습니다. 그는 백세가 되었는데도 하나님이 약속하신 자녀를 받지 못했습니다. 그때 그의 몸은 죽은 자와 같이 되었고 그의 아내 사라도 경수가 끊어져 아이를 가질 수 없는 상태였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약속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이런 그의 믿음을 의로 여겨주셨습니다.
그러면 이렇게 아브라함의 믿음을 의로 여겨주시고 그를 믿음의 조상으로 세우신 하나님의 뜻은 무엇일까요? 23~25절을 읽어보겠습니다. “그에게 의로 여겨졌다 기록된 것은 아브라함만을 위한 것이 아니요,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 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믿음을 의로 여겨주셨습니다. 이는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는 우리도 위함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으면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을 의로 여겨주시는 것입니다. 왜냐면 예수님은 우리 죄를 위해 죽으셨고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해서 살아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예수님을 믿을 뿐 아니라 우리에게 믿음의 자취를 남겨주신 아브라함과 같이 우리도 믿음의 자취를 남기는 살을 살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제2장 믿음으로 죄사함을 누린 다윗 (4:4~8)
여러분 다윗은 어떤 사람이죠? 다윗은 소년시절에 블레셋 장수 거인 골리앗을 물멧돌로 쓰러뜨린 이스라엘의 영웅이었습니다. 그는 그 후에도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많은 공을 세워 백성들은 이런 다윗을 칭송하여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이 죽인 자는 만만이로다.” 라는 노래를 부르곤 했습니다. 그는 싸움만 잘한 것이 아니라 오늘 윤동주 시인의 “별 헤는 밤”이라는 시를 여러분들게 짤막하게 소개해 주었는데 다윗은 윤동주 시인보다 더 훌륭한 시를 많이 쓴 탁월한 시인이었습니다. 성경에 시편은 대부분 그가 쓴 시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하프도 잘 다뤘습니다. 그가 얼마나 하프를 잘 다뤘는지 그가 연주를 하면 악귀에 시달리던 사울왕의 마음이 평안해질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그는 이러한 인간 조건뿐 아니라 영적으로도 하나님과 마음이 합한 자라고 불리울 정도로 하나님과 친밀하고 또 하나님의 말씀에 잘 순종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렇게 훌륭한 다윗도 치명적인 실수를 하였습니다. 그는 그의 부하장수 우리아의 아내를 범하고 또 우리아를 교묘하게 전쟁터에서 죽도록 만들었습니다. 그는 죄 중에서도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시는 간음과 살인죄를 저지른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왕의 권력으로 이 사실을 은폐하려 하였습니다. 그로인해 누가 가장 마음이 아팠을까요? 그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이셨습니다. 하나님은 다윗이 이렇게 흉악한 죄를 범한 것 때문에 마음이 아프셨고 그런 다윗이 하나님 앞에 나와 회개하지 않고 마음이 완악한 것을 보실 때 더 마음이 아프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당신의 종 선지자 나단을 보내셔서 다윗을 엄히 책망하셨습니다. 그때서야 다윗은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회개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죄를 지운 후에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는 것이 얼마나 큰 고통인지를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그는 “하나님 제발 저를 버리지 말아주세요. 내게서 떠나지 말아주세요.” 라고 눈물로 통곡하며 하나님 앞에 회개하며 기도했습니다. 이렇게 몇날몇일을 기도했을까요? 어느 순간 그는 하나님이 자신의 죄를 사셨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죄를 위해 아무것도 한 것이 없는데 하나님은 그의 죄를 용서해 주신 것입니다. 그는 다시금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게 되었고 하나님과 사랑의 관계를 누릴 수 있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흉악한 죄를 짓고도 하나님과의 관계가 어떻게 회복될 수 있었는지 신기해 하였고 그리고 죄사함을 받은 자의 행복을 이렇게 노래하였습니다. 7,8절을 보십시오. “불법이 사함을 받고 죄가 가리어짐을 받는 사람들은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하지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 그는 어떻게 이렇게 죄사함의 은혜를 누릴 수 있었습니까? 그는 비록 돌이킬 수 없는 큰 죄를 지었지만 하나님의 사랑을 의지하고 또한 하나님의 사랑을 간절히 바라며 하나님께 나아갔습니다. 이런 그를 용서하시고 회복하여 주실 하나님을 믿으며 나아간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그의 믿음을 의롭다고 여겨주신 것입니다. 다시말해 다윗은 믿음으로 죄사함의 은혜를 받은 것입니다.
우리도 다윗처럼 실수할 수 있습니다. 때론 큰 잘못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떤 상황속에서도 절망해선 안됩니다. 왜냐면 하나님은 가장 절망 가운데 있었던 다윗의 죄를 용서하셨고 그를 뼈가 쇠하는 고통속에서 구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도 다윗과 같이 큰 잘못이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큰 고통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때 우리는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실 하나님, 우리를 회복하여 주실 하나님을 바라고 그를 믿음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때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을 의롭다 여겨주시고 반드시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결론적으로 오늘 우리는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은 아브라함과 다윗을 배웠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유대인들뿐만 아니라 우리 믿는 모든 자들에게 믿음의 조상으로 세우셨습니다. 이는 우리로 하여금 행위가 아닌 그의 믿음의 발자취를 따르게 하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은 다윗의 죄를 용서해 주셨습니다. 이는 하나님은 믿는 자들의 죄를 용서해 주시며 어떠한 고통과 수렁에서도 구원하시는 우리를 하나님이심을 말해 줍니다. 우리도 이 하나님을 믿음으로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고 우리도 아브라함과 같이, 다윗과 같이 믿음의 자취를 남기는 삶을 사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아멘.
말씀 로마서 4:1-25
요절 로마서 4:13
아브라함의 믿음의 의
“아브라함이나 그 후손에게 세상의 상속자가 되리라고 하신 언약은 율법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요 오직 믿음의 의로 말미암은 것이니라.”
우리는 지난 5주간에 걸쳐서 로마서 말씀을 1장부터 3장까지를 배웠습니다. 지난 말씀을 통해 배운 것이 무엇입니까? 첫째로 이방인이나 유대인이나 모두가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둘째로 우리는 율법이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을 믿는 것입니까? 그것은 예수님께서 나의 죄를 위해 죽으셨고 나를 의롭게 하시기 위해 부활하셨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의 핵심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오직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고 하는 하나님의 복음이 신약시대에 갑자기 나타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복음을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과 예수님의 그림자라고 하는 다윗에게도 나타내셨습니다. 사도바울은 그들을 통해 믿음의 의가 신약시대에 갑자기 나타난 것이거나 혹은 자신이 공교히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구약의 선지자들과 율법을 통해 이미 나타내셨음을 증거코자 합니다. 오늘 우리도 아브라함과 다윗을 통해 그들의 믿음을 배우고 그들의 믿음의 발자취를 따라갈 수 있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제1장 모든 믿는 자들의 조상이 된 아브라함(4:1~3,9~25)
1절을 보십시오. “그런즉 육신으로 우리 조상인 아브라함이 무엇을 얻었다 하리요 ” 여러분 아브라함은 유대인들의 조상입니다. 유대인들은 아브라함이 그들의 조상이라는 것을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왜냐면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택함을 받았고 하나님은 그에게 약속하신대로 많은 후손과 땅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유대인만의 조상이 아닙니다. 그는 모든 믿는 자들의 조상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아브라함의 유대인의 조상이라 부르지 않고 믿음의 조상이라고 부릅니다. 왜 그가 믿음의 조상일까요? 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해 그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2,3절을 보십시오.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진바 되었느니라.”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라 불리게 된 것은 그의 행위에 있지 않습니다. 그는 행위로 보면 우리와 같이 많은 허물과 실수를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하나님이 지시할 땅으로 가기는 했지만 그는 그곳에서 기근을 만나자 이집트로 내려갔습니다. 그는 그곳에서 사람들이 그를 해칠까 두려워하여 그의 아내 사라를 여동생이라고 속였고 많은 돈을 받고 그의 아내를 이집트 왕국의 궁녀로 팔아 넘겼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지 십년 되던 해에는 아브라함이 살던 가나안에 전쟁이 일어났는데 마음이 다급해진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약속의 자녀를 주실 것이라는 말씀에 대한 불신이 생겨서 “하나님이 정 그러시면 제 생각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아들을 주실 때까지 기다릴 수 없으니 제 후사는 제 집에서 길리운 종 다메섹 엘리에셀로 하겠습니다.”라고 하나님께 반발하던 때도 있었습니다. 더더욱 큰 실수는 사라의 몸종 하갈을 통해 이스마엘을 낳은 것이었습니다. 그는 이스마엘을 낳은 후에 하나님의 약속을 잊고 13년 동안이나 허송세월을 하였습니다. 이처럼 행위로 말하면 그는 하나님 앞에서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그는 행위로 말하면 결코 완전한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은 왜 모든 믿는 자들의 조상이라 불리는 것입니까? 3절을 다시한번 읽어 보겠습니다.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진 바 되었느니라.” 창세기 15장을 보면 가나안에 전쟁이 일어나 두려움에 빠진 아브라함에 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때 하나님은 한밤중에 장막에 드러누워 있던 아브라함을 밖으로 불러내셨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보라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그때 너무나도 마음이 힘들었지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눈을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때 하늘에서는 금방이라도 쏟아질 것 같은 수많은 별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늘의 별들을 세기 시작했습니다. “별 하나, 별 둘, 별 셋, 별 넷” 그는 이렇게 밤하늘의 별을 세다가 이렇게 많은 별들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윤동주 시인을 아시나요? 윤동주 시인은 “나는 하늘의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기를 잎새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와했다.”로 시작되는 서시로 유명하죠. 윤동주 시인도 아브라함처럼 별을 헤던 밤이 있었습니다. 그가 쓴 “별 헤는 밤”이란 시를 소개할테니 잘 들어보세요.
별 헤는 밤
윤동주(尹東柱 1917∼1945)
계절이 지나가는 하늘에는
가을로 가득 차 있습니다.
나는 아무 걱정도 없이
가을 속의 별들을 다 헬 듯합니다.
가슴 속에 하나 둘 새겨지는 별을
이제 다 못 헤는 것은
쉬이 아침이 오는 까닭이요.
내일 밤이 남은 까닭이요.
아직 나의 청춘이 다하지 않은 까닭입니다.
별 하나에 추억과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쓸쓸함과
별 하나에 동경(憧憬)과
별 하나에 시와
별 하나에 어머니, 어머니
........(이하생략)...........
윤동주는 고향인 북간도를 떠나 서울 연희대학교 문과를 다닐 때에 요즘 같은 가을밤에 밤하늘을 수놓은 수많은 별들을 헤아리다 떠나온 고향과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 그리고 어머님이 떠올라 이 시를 지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별을 헤아리던 그날 밤, 수많은 별들을 만드신 하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이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고 하신 말씀도 믿게 되었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그의 믿음을 보시고 그의 믿음을 의로 여겨주셨습니다.
10절을 보십시오. “그런즉 그것이 어떻게 여겨졌느냐 할례시냐 무할례시냐 할례시가 아니요 무할례시니라”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은 때는 그가 할례를 받기 전이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의롭다함을 받는 것과 할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할례를 받으면 의롭게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것을 마치 천국행 티켓처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할례를 받지 않은 이방인들을 지옥의 땔감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할례를 받기 전에 그의 믿음을 의롭다 하셨습니다. 이렇게 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12절을 읽어 봅시다. “또한 할례자의 조상이 되었나니 곧 할례받을 자에게뿐 아니라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무할례시에 가졌던 믿음의 자취를 따르는 자들에게도 그러하니라.” 16절을 읽어 봅시다. “그러므로 상속자가 되는 그것이 은혜에 속하기 위하여 믿음으로 되나니 이는 그 약속을 그 모든 후손에게 굳게 하려 하심이라 율법에 속한 자에게뿐만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에 속한 자에게도 그러하니 아브라함은 우리 모든 사람의 조상이라”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세워 우리로 하여금 그의 믿음의 자취를 따르게 하려 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배우고 따라야할 아브라함의 믿음은 무엇입니까? 첫째로 그는 하나님을 창조주이시며 부활의 하나님이심을 믿었습니다. 17절을 읽어 봅시다. “기록된 바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 그가 믿은 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이시니라” 둘째로 그는 하나님을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습니다. 그는 백세가 되었는데도 하나님이 약속하신 자녀를 받지 못했습니다. 그때 그의 몸은 죽은 자와 같이 되었고 그의 아내 사라도 경수가 끊어져 아이를 가질 수 없는 상태였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약속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이런 그의 믿음을 의로 여겨주셨습니다.
그러면 이렇게 아브라함의 믿음을 의로 여겨주시고 그를 믿음의 조상으로 세우신 하나님의 뜻은 무엇일까요? 23~25절을 읽어보겠습니다. “그에게 의로 여겨졌다 기록된 것은 아브라함만을 위한 것이 아니요,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 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믿음을 의로 여겨주셨습니다. 이는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는 우리도 위함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으면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을 의로 여겨주시는 것입니다. 왜냐면 예수님은 우리 죄를 위해 죽으셨고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해서 살아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예수님을 믿을 뿐 아니라 우리에게 믿음의 자취를 남겨주신 아브라함과 같이 우리도 믿음의 자취를 남기는 살을 살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제2장 믿음으로 죄사함을 누린 다윗 (4:4~8)
여러분 다윗은 어떤 사람이죠? 다윗은 소년시절에 블레셋 장수 거인 골리앗을 물멧돌로 쓰러뜨린 이스라엘의 영웅이었습니다. 그는 그 후에도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많은 공을 세워 백성들은 이런 다윗을 칭송하여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이 죽인 자는 만만이로다.” 라는 노래를 부르곤 했습니다. 그는 싸움만 잘한 것이 아니라 오늘 윤동주 시인의 “별 헤는 밤”이라는 시를 여러분들게 짤막하게 소개해 주었는데 다윗은 윤동주 시인보다 더 훌륭한 시를 많이 쓴 탁월한 시인이었습니다. 성경에 시편은 대부분 그가 쓴 시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하프도 잘 다뤘습니다. 그가 얼마나 하프를 잘 다뤘는지 그가 연주를 하면 악귀에 시달리던 사울왕의 마음이 평안해질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그는 이러한 인간 조건뿐 아니라 영적으로도 하나님과 마음이 합한 자라고 불리울 정도로 하나님과 친밀하고 또 하나님의 말씀에 잘 순종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렇게 훌륭한 다윗도 치명적인 실수를 하였습니다. 그는 그의 부하장수 우리아의 아내를 범하고 또 우리아를 교묘하게 전쟁터에서 죽도록 만들었습니다. 그는 죄 중에서도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시는 간음과 살인죄를 저지른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왕의 권력으로 이 사실을 은폐하려 하였습니다. 그로인해 누가 가장 마음이 아팠을까요? 그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이셨습니다. 하나님은 다윗이 이렇게 흉악한 죄를 범한 것 때문에 마음이 아프셨고 그런 다윗이 하나님 앞에 나와 회개하지 않고 마음이 완악한 것을 보실 때 더 마음이 아프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당신의 종 선지자 나단을 보내셔서 다윗을 엄히 책망하셨습니다. 그때서야 다윗은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회개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죄를 지운 후에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는 것이 얼마나 큰 고통인지를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그는 “하나님 제발 저를 버리지 말아주세요. 내게서 떠나지 말아주세요.” 라고 눈물로 통곡하며 하나님 앞에 회개하며 기도했습니다. 이렇게 몇날몇일을 기도했을까요? 어느 순간 그는 하나님이 자신의 죄를 사셨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죄를 위해 아무것도 한 것이 없는데 하나님은 그의 죄를 용서해 주신 것입니다. 그는 다시금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게 되었고 하나님과 사랑의 관계를 누릴 수 있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흉악한 죄를 짓고도 하나님과의 관계가 어떻게 회복될 수 있었는지 신기해 하였고 그리고 죄사함을 받은 자의 행복을 이렇게 노래하였습니다. 7,8절을 보십시오. “불법이 사함을 받고 죄가 가리어짐을 받는 사람들은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하지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 그는 어떻게 이렇게 죄사함의 은혜를 누릴 수 있었습니까? 그는 비록 돌이킬 수 없는 큰 죄를 지었지만 하나님의 사랑을 의지하고 또한 하나님의 사랑을 간절히 바라며 하나님께 나아갔습니다. 이런 그를 용서하시고 회복하여 주실 하나님을 믿으며 나아간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그의 믿음을 의롭다고 여겨주신 것입니다. 다시말해 다윗은 믿음으로 죄사함의 은혜를 받은 것입니다.
우리도 다윗처럼 실수할 수 있습니다. 때론 큰 잘못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떤 상황속에서도 절망해선 안됩니다. 왜냐면 하나님은 가장 절망 가운데 있었던 다윗의 죄를 용서하셨고 그를 뼈가 쇠하는 고통속에서 구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도 다윗과 같이 큰 잘못이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큰 고통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때 우리는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실 하나님, 우리를 회복하여 주실 하나님을 바라고 그를 믿음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때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을 의롭다 여겨주시고 반드시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결론적으로 오늘 우리는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은 아브라함과 다윗을 배웠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유대인들뿐만 아니라 우리 믿는 모든 자들에게 믿음의 조상으로 세우셨습니다. 이는 우리로 하여금 행위가 아닌 그의 믿음의 발자취를 따르게 하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은 다윗의 죄를 용서해 주셨습니다. 이는 하나님은 믿는 자들의 죄를 용서해 주시며 어떠한 고통과 수렁에서도 구원하시는 우리를 하나님이심을 말해 줍니다. 우리도 이 하나님을 믿음으로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고 우리도 아브라함과 같이, 다윗과 같이 믿음의 자취를 남기는 삶을 사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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