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알2강 요3장. 영적세계로의 인도자 예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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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예알공부 제 2 강
말씀 | 요한복음 3:1-16
요절 | 요한복음 3:3
영적세계로의 인도자 예수님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오늘 말씀은 예수님과 니고데모 사이의 진지한 대화를 통해 우리에게 "거듭남과 하나님 나라"라는 아주 중요한 주제를 가르쳐 주십니다. 니고데모는 당대 성공한 사람의 대표격입니다. 그에게는 아무 것도 부족한 것이 없어 보입니다. 그런데 그는 해결되지 않는 문제를 안고 사람들의 눈을 피해 밤에 몰래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에게 거듭남과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가르쳐 주십니다. 본문 말씀을 통해 독생자를 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영접하므로 거듭남을 체험하고 하나님 나라를 소유하기를 기도합니다.
1절을 보십시오. "그런데 바리새인 중에 니고데모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유대인의 지도자라" 1절은 니고데모의 이력서입니다. 먼저, 그는 바리새인이요 종교지도자였습니다. 유대사회는 하나님을 중심으로 한 종교 공동체였고 바리새인들은 철저히 율법을 지키며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성경선생으로서 그 사회에서 크게 존경을 받았고 큰 영향력을 행사하였습니다. 그는 또 70인으로 구성된 유대 최고 통치기구인 산헤드린 공회의 멤버이기도 하였습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국회의원 정도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요19장을 참조해보면 그는 또 큰 부자였습니다. 그의 이름의 뜻에는 '정복자'라는 의미가 있는데, 과연 그는 그 이름대로 학문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또 경제적으로도 크게 성공한 사람이었습니다. 우리들 역시 니고데모 처럼 이 사회에서 크게 성공하고 싶습니다. 학문적으로 명성을 얻고 또 큰 권력을 얻고 또 부자가 되고 싶습니다. 이것들을 다 얻으면 행복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 실상은 어떠할까요? 모든 것을 가진 그가 사람들의 눈을 피해 몰래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2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그가 밤에 예수께 와서 이르되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이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 그는 예수님께서 자신의 깊은 고민을 해결해 줄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하였습니다. 그에게는 어떤 고민이 있었을까요? 모든 것을 가진 그도 해결할 수 없는 고민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절박한 심정으로 찾아온 니고데모에게 말씀하셨습니다. 3절을 다 같이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예수님은 그의 문제가 거듭나지 못한 문제요 하나님 나라를 보지 못하는 문제라고 분명하게 지적하셨습니다. 이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거듭나서 하나님 나라를 경험하며 사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보지 못하는 사람은 이 세상의 삶이 전부이기 때문에 이 세상에 매인 삶을 살게 되며 결코 만족하지 못합니다. 그들은 이 땅의 욕심과 정욕과 명예와 권력에 끌려가는 삶을 삽니다. 이를 얻기 위해 서로 경쟁하고 시기하고 미워하며 상처를 줍니다. 그리고 자신 안에 있는 깊은 고뇌를 잊고자 술을 마시며 쾌락을 좇는 삶을 삽니다. 이 삶에는 만족도 평강도 없고 깊은 공허감만 있습니다. 반면 그 마음에 하나님 나라를 소유한 사람은 그 마음에 평강과 기쁨을 소유합니다. 이들의 기쁨은 이 땅의 일시적인 것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영원하신 하나님과 그 나라로부터 말미암는 것입니다. 이들은 모든 상황에서 하나님께 감사하며 이성을 초월하는 평강을 누리며 살아갑니다. 우리가 이렇게 하나님 나라를 누리며 살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듭나야 합니다.
그러면 거듭남이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나는 것을 말합니다. 아기들이 육신을 가지고 이 땅에 태어나는 것 처럼 거듭남은 죄로 죽은 우리의 영이 완전히 새롭게 태어나는 것입니다. 거듭남은 단순히 인간조건의 개선이 아니라 완전히 새로운 피조물로 태어나 새 생명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후5:17에서 말하였습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거듭남이 중요한 이유는 오직 거듭남을 통해서만 영원한 형벌에서 영생으로 옮겨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5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물과 성령으로 나야 한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에스겔 36:25-27 말씀을 생각나게 합니다. "맑은 물을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로 정결하게 하되 곧 너희 모든 더러운 것에서와 모든 우상 숭배에서 너희를 정결하게 할 것이며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 딛3:5은 또 말씀합니다.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가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따라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예수님의 계속되는 가르침에 대한 니고데모의 반응이 어떠합니까? 4절, 9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니고데모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전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이성적으로 생각할 때 그는 이 가르침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어찌 그런 일이' 하며 의문을 품었습니다. 니고데모처럼 우리 역시 이성의 세계에 갇혀서 살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눈으로 보이는 세계, 경험하는 세계가 전부라고 생각하며 이성으로 이해되는 것만을 믿고자 합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는 우리의 이성으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는 연어의 회귀능력을 알고 있습니다. 연어는 어떻게 자신이 태어난 강을 기억하고 돌아오는 것일까요? 철새의 이동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지구의 자전속도, 공전속도를 알고 있습니까? 시속 1000 km 이상의 자전속도와 100,000 km이상의 공전속도에서도 우리는 전혀 어지럽지도 않고 잘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것은 이해가 됩니까? 이처럼 자연계에는 우리의 이성으로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신비한 것으로 가득합니다. 그러므로 이해되는 것만 믿고자 하는 교만한 마음을 회개하고 이성을 초월하는 세계를 인정하고 겸손하게 마음문을 열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성의 세계에 갇혀 불신하는 니고데모도 포기하지 않고 바람을 예로 들어 성령의 역사를 설명해 주셨습니다. 7, 8절을 보십시오.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놀랍게 여기지 말라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 바람은 임의로 불며 순식간에 방향이 바뀝니다. 우리는 바람을 볼 수 없지만 느낄 수 있으며 바람으로 인한 결과를 볼 수 있습니다. 성령께서도 바람처럼 그 뜻대로 임의로 역사하십니다. 우리가 성령을 볼 수는 없지만 성령이 역사하신 곳에 놀라운 변화의 역사가 있습니다. 바람도 잔잔한 바람에서 부터 허리케인 같은 강한 바람이 있는 것처럼 성령께서도 잠잠히 눈에 띄지 않게 역사하시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태풍같이 강력하게 역사하기도 하십니다. 우리가 눈으로 볼 수도 없고 이성으로 분석할 수도 없고 그 과정도 알지 못하지만 변화된 사람들을 통해서 성령의 역사를 인지할 수 있습니다. 핍박자 사도바울이 도리어 예수님을 증거하는 사도로 변화된 것이 성령의 역사를 증거합니다. 무자비한 노예상인 존 뉴톤의 변화가 또한 성령의 역사를 증거합니다. 세리 마태 같은 무수히 많은 죄인들이 놀랍게 변화된 역사들이 성령님을 증거합니다. 성령께서 지금도 우리 한 사람 한 사람 안에 거듭남과 놀라운 변화의 역사를 이루십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하면 거듭나서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있을까요?
첫째, 예수님의 증언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10-13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그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이러한 것들을 알지 못하느냐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우리는 아는 것을 말하고 본 것을 증언하노라 그러나 너희가 우리의 증언을 받지 아니하는도다 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하늘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 여기서 땅의 일은 거듭남과 같은 성령의 역사를 말합니다. 예수님은 땅의 일도 받아들이지 못하니 지금 하늘 나라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 말씀하십니다. 이성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해서 마음 문을 닫고 배척하는 것이 니고데모의 문제입니다. 그리고 또 이것은 똑똑하지도 않는 머리로 이해가 되는 것만 믿고자 하는 우리들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이 시간 교만한 마음, 불신의 마음을 책망하시는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회개하고 모든 교만한 마음을 내려놓기를 기도합니다. 신앙은 이해가 되어서 믿는 것이 아닙니다. 단순히 영접하고 믿고 순종할 때 비로서 이해가 되는 것입니다.
둘째, 십자가에 높이 달리신 예수님을 바라봐야 합니다. 14, 15절을 다 같이 읽어 봅시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니고데모를 돕고자 예수님은 그가 아주 잘 알고 있는 출애굽 당시의 유명한 사건(민21:4-9)을 언급하심으로 구원의 길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스라엘은 이집트에서 해방되어 가나안으로 가는 길에서 광야를 지나야 했습니다. 그런데 여행이 길어지자 길이 험하다느니, 음식이 박하다느니 하면서 모세를 원망했고, 심지어는 그들을 이집트에서 구원해주신 하나님까지 원망했습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이스라엘 백성에게 크게 진노하사 불뱀을 보내 그들을 물게 하셨습니다. 이로 인해 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죽었습니다. 그제서야 백성들은 죄를 인정하고 모세에게 뱀을 없애주도록 기도부탁 하였습니다. 이 때 하나님이 제시한 해결책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뱀을 없애주는 대신 놋뱀을 만들어 장대에 높이 매달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뱀에 물린 자가 그 놋뱀을 쳐다 보면 살게 될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대개 사람들이 독사에 물리면 어떻게 합니까? 고무줄로 상처 부위를 묶어 독이 퍼지지 못하게 하고 입으로 물린 자리에서 독을 빼내려고 시도합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다른 뱀에 물리지 않기 위해서 주위에 있는 뱀에 모든 주의를 집중해야 합니다. 이 급박한 상황에서 이런 응급처치를 제쳐놓고 장대에 높이 달린 놋뱀을 본다는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는 하나님의 방법은 너무나 비이성적이며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죽기 살기로 하나님을 신뢰할 때만이 이 말씀에 순종할 수 있습니다. 오직 자신의 이성적인 생각보다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이들만 놋뱀을 쳐다볼 수 있었고 그들만이 구원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14,15절을 다시 봅시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예수님은 놋뱀이 당신을 상징하는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들려야 하리니"는 하나님이 주시는 구원의 유일한 방법을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불뱀은 우리의 죄를 상징합니다. 이 땅에는 많은 죄의 불뱀들이 우리를 공격합니다. 정욕의 불뱀, 탐욕의 불뱀, 미움과 분노의 불뱀, 불평의 불뱀, 불신의 불뱀 등 여러 모양의 죄의 불뱀들이 우리를 공격하고 많은 사람들이 이 뱀에 물려 신음하며 죽어가고 있습니다. 오늘날 의학이 발달했고 무수히 많은 약들이 있지만 우리를 죄의 독에서 치료할 수 있는 약은 없습니다. 우리가 그런 약을 만들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해결책을 제시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선 크신 사랑으로 독생자 예수님을 보내셨고 예수님은 우리 죄를 지시고 십자가에 높이 달리셨습니다. 그리고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다고 약속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할 일은 우리의 이성을 내려놓고 전적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며 십자가에 높이 달리신 예수님을 바라보기만 하면 됩니다. 이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죄의 독에서 치료하시고 거듭나게 하시고 하나님 나라를 보게 하시고 그 나라에 들어가게 하십니다. 우리의 구원을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다만 믿음의 눈으로 나의 죄를 지시고 십자가에 높이 달리신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 밖에 없습니다. 이 때, 하나님은 우리 안에 성령의 역사를 이루시고 우리를 당신의 자녀 삼으시며 새로운 피조물이 되게 하십니다. 이 시간 우리 각자가 믿음의 눈으로 내 죄를 지시고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바라봅시다. 하나님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 안에 거듭남의 역사를 이루어 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말씀 | 요한복음 3:1-16
요절 | 요한복음 3:3
영적세계로의 인도자 예수님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오늘 말씀은 예수님과 니고데모 사이의 진지한 대화를 통해 우리에게 "거듭남과 하나님 나라"라는 아주 중요한 주제를 가르쳐 주십니다. 니고데모는 당대 성공한 사람의 대표격입니다. 그에게는 아무 것도 부족한 것이 없어 보입니다. 그런데 그는 해결되지 않는 문제를 안고 사람들의 눈을 피해 밤에 몰래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에게 거듭남과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가르쳐 주십니다. 본문 말씀을 통해 독생자를 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영접하므로 거듭남을 체험하고 하나님 나라를 소유하기를 기도합니다.
1절을 보십시오. "그런데 바리새인 중에 니고데모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유대인의 지도자라" 1절은 니고데모의 이력서입니다. 먼저, 그는 바리새인이요 종교지도자였습니다. 유대사회는 하나님을 중심으로 한 종교 공동체였고 바리새인들은 철저히 율법을 지키며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성경선생으로서 그 사회에서 크게 존경을 받았고 큰 영향력을 행사하였습니다. 그는 또 70인으로 구성된 유대 최고 통치기구인 산헤드린 공회의 멤버이기도 하였습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국회의원 정도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요19장을 참조해보면 그는 또 큰 부자였습니다. 그의 이름의 뜻에는 '정복자'라는 의미가 있는데, 과연 그는 그 이름대로 학문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또 경제적으로도 크게 성공한 사람이었습니다. 우리들 역시 니고데모 처럼 이 사회에서 크게 성공하고 싶습니다. 학문적으로 명성을 얻고 또 큰 권력을 얻고 또 부자가 되고 싶습니다. 이것들을 다 얻으면 행복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 실상은 어떠할까요? 모든 것을 가진 그가 사람들의 눈을 피해 몰래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2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그가 밤에 예수께 와서 이르되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이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 그는 예수님께서 자신의 깊은 고민을 해결해 줄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하였습니다. 그에게는 어떤 고민이 있었을까요? 모든 것을 가진 그도 해결할 수 없는 고민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절박한 심정으로 찾아온 니고데모에게 말씀하셨습니다. 3절을 다 같이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예수님은 그의 문제가 거듭나지 못한 문제요 하나님 나라를 보지 못하는 문제라고 분명하게 지적하셨습니다. 이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거듭나서 하나님 나라를 경험하며 사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보지 못하는 사람은 이 세상의 삶이 전부이기 때문에 이 세상에 매인 삶을 살게 되며 결코 만족하지 못합니다. 그들은 이 땅의 욕심과 정욕과 명예와 권력에 끌려가는 삶을 삽니다. 이를 얻기 위해 서로 경쟁하고 시기하고 미워하며 상처를 줍니다. 그리고 자신 안에 있는 깊은 고뇌를 잊고자 술을 마시며 쾌락을 좇는 삶을 삽니다. 이 삶에는 만족도 평강도 없고 깊은 공허감만 있습니다. 반면 그 마음에 하나님 나라를 소유한 사람은 그 마음에 평강과 기쁨을 소유합니다. 이들의 기쁨은 이 땅의 일시적인 것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영원하신 하나님과 그 나라로부터 말미암는 것입니다. 이들은 모든 상황에서 하나님께 감사하며 이성을 초월하는 평강을 누리며 살아갑니다. 우리가 이렇게 하나님 나라를 누리며 살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듭나야 합니다.
그러면 거듭남이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나는 것을 말합니다. 아기들이 육신을 가지고 이 땅에 태어나는 것 처럼 거듭남은 죄로 죽은 우리의 영이 완전히 새롭게 태어나는 것입니다. 거듭남은 단순히 인간조건의 개선이 아니라 완전히 새로운 피조물로 태어나 새 생명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후5:17에서 말하였습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거듭남이 중요한 이유는 오직 거듭남을 통해서만 영원한 형벌에서 영생으로 옮겨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5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물과 성령으로 나야 한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에스겔 36:25-27 말씀을 생각나게 합니다. "맑은 물을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로 정결하게 하되 곧 너희 모든 더러운 것에서와 모든 우상 숭배에서 너희를 정결하게 할 것이며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 딛3:5은 또 말씀합니다.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가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따라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예수님의 계속되는 가르침에 대한 니고데모의 반응이 어떠합니까? 4절, 9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니고데모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전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이성적으로 생각할 때 그는 이 가르침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어찌 그런 일이' 하며 의문을 품었습니다. 니고데모처럼 우리 역시 이성의 세계에 갇혀서 살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눈으로 보이는 세계, 경험하는 세계가 전부라고 생각하며 이성으로 이해되는 것만을 믿고자 합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는 우리의 이성으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는 연어의 회귀능력을 알고 있습니다. 연어는 어떻게 자신이 태어난 강을 기억하고 돌아오는 것일까요? 철새의 이동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지구의 자전속도, 공전속도를 알고 있습니까? 시속 1000 km 이상의 자전속도와 100,000 km이상의 공전속도에서도 우리는 전혀 어지럽지도 않고 잘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것은 이해가 됩니까? 이처럼 자연계에는 우리의 이성으로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신비한 것으로 가득합니다. 그러므로 이해되는 것만 믿고자 하는 교만한 마음을 회개하고 이성을 초월하는 세계를 인정하고 겸손하게 마음문을 열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성의 세계에 갇혀 불신하는 니고데모도 포기하지 않고 바람을 예로 들어 성령의 역사를 설명해 주셨습니다. 7, 8절을 보십시오.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놀랍게 여기지 말라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 바람은 임의로 불며 순식간에 방향이 바뀝니다. 우리는 바람을 볼 수 없지만 느낄 수 있으며 바람으로 인한 결과를 볼 수 있습니다. 성령께서도 바람처럼 그 뜻대로 임의로 역사하십니다. 우리가 성령을 볼 수는 없지만 성령이 역사하신 곳에 놀라운 변화의 역사가 있습니다. 바람도 잔잔한 바람에서 부터 허리케인 같은 강한 바람이 있는 것처럼 성령께서도 잠잠히 눈에 띄지 않게 역사하시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태풍같이 강력하게 역사하기도 하십니다. 우리가 눈으로 볼 수도 없고 이성으로 분석할 수도 없고 그 과정도 알지 못하지만 변화된 사람들을 통해서 성령의 역사를 인지할 수 있습니다. 핍박자 사도바울이 도리어 예수님을 증거하는 사도로 변화된 것이 성령의 역사를 증거합니다. 무자비한 노예상인 존 뉴톤의 변화가 또한 성령의 역사를 증거합니다. 세리 마태 같은 무수히 많은 죄인들이 놀랍게 변화된 역사들이 성령님을 증거합니다. 성령께서 지금도 우리 한 사람 한 사람 안에 거듭남과 놀라운 변화의 역사를 이루십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하면 거듭나서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있을까요?
첫째, 예수님의 증언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10-13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그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이러한 것들을 알지 못하느냐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우리는 아는 것을 말하고 본 것을 증언하노라 그러나 너희가 우리의 증언을 받지 아니하는도다 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하늘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 여기서 땅의 일은 거듭남과 같은 성령의 역사를 말합니다. 예수님은 땅의 일도 받아들이지 못하니 지금 하늘 나라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 말씀하십니다. 이성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해서 마음 문을 닫고 배척하는 것이 니고데모의 문제입니다. 그리고 또 이것은 똑똑하지도 않는 머리로 이해가 되는 것만 믿고자 하는 우리들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이 시간 교만한 마음, 불신의 마음을 책망하시는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회개하고 모든 교만한 마음을 내려놓기를 기도합니다. 신앙은 이해가 되어서 믿는 것이 아닙니다. 단순히 영접하고 믿고 순종할 때 비로서 이해가 되는 것입니다.
둘째, 십자가에 높이 달리신 예수님을 바라봐야 합니다. 14, 15절을 다 같이 읽어 봅시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니고데모를 돕고자 예수님은 그가 아주 잘 알고 있는 출애굽 당시의 유명한 사건(민21:4-9)을 언급하심으로 구원의 길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스라엘은 이집트에서 해방되어 가나안으로 가는 길에서 광야를 지나야 했습니다. 그런데 여행이 길어지자 길이 험하다느니, 음식이 박하다느니 하면서 모세를 원망했고, 심지어는 그들을 이집트에서 구원해주신 하나님까지 원망했습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이스라엘 백성에게 크게 진노하사 불뱀을 보내 그들을 물게 하셨습니다. 이로 인해 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죽었습니다. 그제서야 백성들은 죄를 인정하고 모세에게 뱀을 없애주도록 기도부탁 하였습니다. 이 때 하나님이 제시한 해결책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뱀을 없애주는 대신 놋뱀을 만들어 장대에 높이 매달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뱀에 물린 자가 그 놋뱀을 쳐다 보면 살게 될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대개 사람들이 독사에 물리면 어떻게 합니까? 고무줄로 상처 부위를 묶어 독이 퍼지지 못하게 하고 입으로 물린 자리에서 독을 빼내려고 시도합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다른 뱀에 물리지 않기 위해서 주위에 있는 뱀에 모든 주의를 집중해야 합니다. 이 급박한 상황에서 이런 응급처치를 제쳐놓고 장대에 높이 달린 놋뱀을 본다는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는 하나님의 방법은 너무나 비이성적이며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죽기 살기로 하나님을 신뢰할 때만이 이 말씀에 순종할 수 있습니다. 오직 자신의 이성적인 생각보다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이들만 놋뱀을 쳐다볼 수 있었고 그들만이 구원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14,15절을 다시 봅시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예수님은 놋뱀이 당신을 상징하는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들려야 하리니"는 하나님이 주시는 구원의 유일한 방법을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불뱀은 우리의 죄를 상징합니다. 이 땅에는 많은 죄의 불뱀들이 우리를 공격합니다. 정욕의 불뱀, 탐욕의 불뱀, 미움과 분노의 불뱀, 불평의 불뱀, 불신의 불뱀 등 여러 모양의 죄의 불뱀들이 우리를 공격하고 많은 사람들이 이 뱀에 물려 신음하며 죽어가고 있습니다. 오늘날 의학이 발달했고 무수히 많은 약들이 있지만 우리를 죄의 독에서 치료할 수 있는 약은 없습니다. 우리가 그런 약을 만들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해결책을 제시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선 크신 사랑으로 독생자 예수님을 보내셨고 예수님은 우리 죄를 지시고 십자가에 높이 달리셨습니다. 그리고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다고 약속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할 일은 우리의 이성을 내려놓고 전적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며 십자가에 높이 달리신 예수님을 바라보기만 하면 됩니다. 이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죄의 독에서 치료하시고 거듭나게 하시고 하나님 나라를 보게 하시고 그 나라에 들어가게 하십니다. 우리의 구원을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다만 믿음의 눈으로 나의 죄를 지시고 십자가에 높이 달리신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 밖에 없습니다. 이 때, 하나님은 우리 안에 성령의 역사를 이루시고 우리를 당신의 자녀 삼으시며 새로운 피조물이 되게 하십니다. 이 시간 우리 각자가 믿음의 눈으로 내 죄를 지시고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바라봅시다. 하나님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 안에 거듭남의 역사를 이루어 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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