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17강 말씀이 열매를 맺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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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마태복음17강
말씀 | 마태복음 13:1-23
요절 | 마태복음 13:23
말씀이 열매를 맺는 사람
“좋은 땅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니 결실하여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육십 배, 어떤 것은 삼십 배가 되느니라 하시더라.”
봄이 되면 농부들이 열심히 하는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씨를 뿌리는 일입니다. 그들이 열심히 씨를 뿌리는 이유는 무엇인가? 농부가 씨를 뿌리는 것은 시간이 남아서, 혹은 할 일이 없어서 그냥 하는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열매를 얻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이후에 열심히 하시는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말씀의 씨를 뿌리는 일입니다. 이는 우리로 그 말씀을 듣고 열매 맺도록 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참으로 신기한 일은 똑같은 말씀을 받고도 어떤 사람은 열매를 맺고 어떤 사람은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몹시 궁금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늘 말씀은 이러한 우리의 궁금증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입니다. 예수님은 이 답변을 비유로 말씀해 주셨습니다. 이 비유는 일명 “좋은 밭의 비유”라고도 불립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 말씀이 열매맺게 하는 사람에 대해 배울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는 복이 있습니다. 왜냐면 천국은 우리 마음에 떨어진 하나님의 말씀에서부터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그는 백 배와 육십 배와 삼십 배의 열매를 맺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을 우리 모두 잘 듣고 받아서 열매맺을 수 있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첫째, 귀 있는 자는 들으라. 예수님은 어느 곳을 가시든 열심히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가버나움과 같이 갈릴리 바다가 있는 동네에 가셨을 때는 주로 해변가에서 말씀을 가르치셨는데 그때 많이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시원한 바닷바람을 타고 전해지는 예수님의 말씀은 삶에 지친 사람들에게 큰 위로와 감동을 주었습니다. 그런데 뒤에 있는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좀 더 잘 듣고자 밀치는 바람에 예수님은 바다에 빠질 지경이 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해변에 배를 띄워 놓으시고 그곳에 앉아서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그 때 예수님이 가르치신 말씀 중에 하나가 바로 오늘 우리가 배울 “좋은 밭의 비유”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이 비유말씀을 하실 때 참으로 희한한 말씀을 하나 하셨습니다. 우리 함께 9절 말씀을 읽어 봅시다. “귀 있는 자는 들으라 하시니라” 여러분 세상에는 귀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듣지 못하는 사람도 귀는 다 있습니다. 그런데 왜 이 말씀을 하신 것입니까? 왜냐면 말씀을 듣는 것이 참으로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11~17절 말씀이 이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집에서 엄마 말씀을 좀 못 알아 들어도 큰 일 나지 않습니다. 엄마한테 한소리 들으면 끝입니다. 학교에서 수업 시간에 선생님 말씀을 못 알아 들었다고 큰일 나지 않습니다. 시험 볼 때 한 두 문제 틀리면 그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면 어떻게 될까요? 그것은 재앙입니다. 왜냐면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며 죄사함을 받을 수 없고 심판받을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무릇 들을 귀가 있는 자는 넉넉하게 되나 들을 귀가 없는 자는 있는 것 마저 빼앗기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모여서 예배를 드리고 또 말씀을 듣는 것이 별 것 아닌 것처럼 보일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보고 있는 성경이, 또 우리가 듣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얼마나 귀한 것인가를 말씀하셨습니다. 16,17절을 읽어 봅시다. “그러나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많은 선지자와 의인이 너희가 보는 것들을 보고자 하여도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듣는 것들을 듣고자 하여도 듣지 못하였느니라” 우리는 지금 예수님을 볼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경을 통해 예수님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 목자님들과 일대일로 말씀을 공부하면서, 또한 이렇게 예배시간 설교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이 말씀이 얼마나 귀한 말씀입니까? 우리가 잘 아는 구약의 선지자와 의인들이 보고자 해도 보지 못했고 듣고자 해도 듣지 못한 것입니다. 우리가 받은 천국복음의 비밀은 하늘의 천사들도 살펴보기를 원하던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오늘 말씀을 통해서 무엇을 깨달아야하겠습니까? 이처럼 귀한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가 어떻게 듣고 있는지 깨달아야 합니다. 즉 우리 자신을 발견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떻게 하면 말씀을 잘 들을 수 있는지를 깨달아야 합니다. 이를 깨닫는 자는 복이 있습니다. 왜냐면 이를 깨닫는 순간 그 때부터 여러분의 삶에 하나님의 나라가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이를 깨달으면 우리의 삶과 마음이 고침을 받고 열매를 맺고 넉넉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말씀을 듣는 여러분들의 귀가 모두 새로워지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둘째, 길가, 악한 자를 대적하며 들어야 합니다. 19절을 봅시다. “아무나 천국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할 때는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려진 것을 빼앗나니 이는 곧 길 가에 뿌려진 자요” 여러분 길가에 떨어진 씨는 열매는 커녕 땅에 뿌리도 내리지 못했습니다. 왜 뿌리를 내리지 못한 것입니까? 물론 땅이 딱딱해서 그럴 수도 있습니다. 씨가 부드러운 땅보다는 딱딱한 길가에 뿌리 내리는 것이 어려운 것 사실입니다. 그러나 더 근본적인 이유는 씨가 뿌리를 내리기 전에 새에게 먹혔기 때문입니다. 비록 어렵지만 씨는 충분한 시간이 주어지면 길가일지라도 뿌리를 내렸을 것입니다. 왜냐면 씨는 그만큼 생명력이 강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아스파트를 뚫고 올라오는 잡초나 바위를 뚫고 뿌리를 내리는 나무들을 통해 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길가에 떨어진 씨가 뿌리를 내리지 못한 것은 새가 그 씨를 쪼아 먹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도 깨닫지 못하는 사람이 이와 같습니다. 이런 사람들의 마음은 교만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선입견이나 편견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더 근본적인 이유는 이런 사람들이 말씀을 받으면 그 말씀을 즉시 악한 자가 빼앗아 간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에 마음에 뿌리를 내리고 자랄 수 있는 절대적인 시간이 부족한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말씀을 받고도 금방 잊어버린다면 그런 사람은 길가와 같은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말씀을 빼앗기지 않도록 하나님의 말씀을 겸손한 마음으로 관심을 갖고 들어야 합니다. 이런 사람은 말씀을 빼앗기지 않도록 말씀을 암송하고 배운 말씀을 가지고 소감을 써보는 것이 좋습니다. 이는 이런 방법들이 하나님의 말씀이 내 마음과 생각 속에 충분한 시간을 머물러 있도록 하는데 매우 효과적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 밭에 부지런히 말씀의 씨를 뿌려 주십니다. 그러나 악한 자는 우리 마음에 뿌린 말씀의 씨를 부지런히 빼앗아갑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 악한 자를 대적하면서 말씀을 받아야 합니다. 말씀을 빼앗기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 기도하고 공부하느라 시간이 없고 바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중요한 말씀을 암송을 해서 우리의 마음과 생각에 말씀이 충분한 시간을 머물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면 제아무리 길가와 같은 마음이라도 하나님의 말씀이 뿌리를 내리고 자라서 열매를 맺게 됩니다. 이를 위해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관심 그리고 충분한 시간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는 일입니다.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우리가 충분한 시간 하나님의 말씀에 집중한다면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은 자라서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둘째, 돌밭, 환란과 박해를 견뎌야 합니다. 20,21절을 보십시오. “돌밭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되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시 견디다가 말씀으로 말미암아 환란이나 박해가 일어날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 돌밭의 흙은 얇습니다. 햇볕이 쪼이면 금방 뜨거워지기 때문에 돌밭에 떨어진 씨는 빨리 싹을 틔우고 자랍니다. 그러나 뿌리가 깊지 않기 때문에 얼마 못가고 이내 시들고 맙니다. 돌밭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 즉시 기쁨으로 받으나 환란과 박해를 당하면 곧 넘어지는 사람입니다. 그들이 말씀을 즉시 기쁨으로 받는다는 것은 그만큼 말씀에 대한 소원이 많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이런 사람들은 말씀을 받을 때 혼자서 말씀의 은혜를 다 받는 거처럼 “아멘, 믿습니다.”하면 열렬히 말씀을 받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보면 참 믿음이 좋아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환란과 박해를 받으면 말씀의 은혜를 금방 잊어버립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까?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감정으로 받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으면 기쁨이 있습니다. 그러니 마음이 좋은 것입니다. 거기에 머물러 있고 싶습니다. 그러나 박해나 핍박을 받으면 어떻습니까? 기쁨이 사라집니다. 마음이 힘들고 슬퍼집니다. 말씀을 받을 때 있었던 기쁨이 사라지니 말씀에 대한 회의가 생긴 것입니다. 이는 아직 말씀의 가치를 지키는 것보다 자신의 기쁨과 만족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환란과 박해를 당해 보면 우리 안에 말씀에 대한 믿음의 뿌리가 얼마나 깊은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때 우리가 기억해야할 것이 있습니다. 아무도 처음부터 넘어지지 않는 사람은 없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아무도 넘어지지 않고 걸음마를 배운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는 수백 번, 수천 번을 넘어지면서 걷는 법을 배웠고 그 결과 우리는 지금 넘어지지 잘 걷고 있습니다. 나무는 수없이 많은 바람에 의해 흔들리면서 땅속으로 깊이 뿌리를 내리는 법입니다.
우리의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환란과 박해를 당할 때 믿음이 흔들립니다. 때로는 넘어지기도 하고 우리의 믿음이 뿌리 채 말라버릴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하나의 과정에 불과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말씀의 씨를 지켜는 투쟁을 해야 합니다. 그때 우리의 믿음은 갈수록 예수님께 깊이 뿌리를 내리게 되고 점차 어떠한 환란과 박해에도 넘어지지 않는 믿음의 거목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소망 가운데 현재 우리의 연약한 믿음을 비난하기보다 도리어 귀하게 여기고 지켜줘야 합니다. 왜냐면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신앙의 거목들도 다 처음에는 연약한 돌밭이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를 보십시오. 그는 대제사장 가야바의 집 뜰에서 예수님이 새벽심문을 받을 실 때 어린 계집종 앞에서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했습니다. 그때 새벽닭이 참지 못하고 “꼬꼬댁 꼬꼬고 , 베드로야 회개하라”고 외쳤습니다. 그때 베드로는 자신의 연약함에 깨닫고 닭똥같은 눈물을 흘렸습니다. 지금은 교회의 반석이라 불리는 예수님의 수제자 베드로도 이렇게 돌밭과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지금 내가 연약하다고 실망할 것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연약할지라도, 아무리 많이 넘어졌을지라도 우리가 예수님 앞에 나아가면 사랑이 많으신 우리 주님은 우리를 다 용서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돌밭과 같은 사람은 말씀으로 인해 환란과 박해가 일어날 때 이를 견디어야 합니다.
셋째, 가시밭, 근심과 유혹의 가시를 제거해야 합니다. 22절을 보십시오. “가시떨기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나 재물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하지 못 하는자요” 가시떨기 밭은 땅의 상태는 좋은데 곡식과 가시가 함께 자라는 것이 문제입니다. 가시가 곡식의 기운을 막아서 결실하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열매를 맺어도 먹을 수 없는 쭉정이 열매만 맺게 됩니다. 예수님은 그 가시가 무엇이라고 하셨습니까? 그 가시는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입니다. 사람들은 많은 염려를 합니다. 어떤 염려를 합니까? 가장 많이 하는 염려는 돈에 대한 염려입니다. 여러분들은 돈을 안 벌어봐서 아마도 잘 모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여러분 돈은 버는 것은 힘들데 쓰는 것은 금방입니다. 그래서 돈은 많이 벌어도 모자라고 적게 벌면 더 모자랍니다. 그러면 수십억원, 수백억원을 쌓아놓고 살면 염려를 없겠네요? 그렇지 않습니다. 이렇게 돈이 많으면 누가 훔쳐가진 않을까? 이 돈을 어떻게 지킬까? 어떻게 하면 이 돈을 더 많이 불리까? 염려하게 됩니다. 또한 우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할까? 말까? 잘 될까? 안될까? 염려합니다. 염려는 우리의 일상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런 것을 염려하지 말라. 이런 염려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방인들이나 하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염려하는 대신 무엇을 하라고요?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그때 우리는 염려를 극복하고 말씀의 열매를 맺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염려하지 말아야 할 또 다른 이유는 세상의 염려는 우리를 물질의 유혹에 빠지게 하기 때문입니다. 얼마 전 실시한 한 여론조사 결과 10억을 줄테니 감옥에 가 전과자가 되어도 좋다는 학생이 초등학생 16%, 중학생 33%, 고등학생은 47%였다고 합니다. 이는 매우 충격적인 사실입니다. 이 결과는 오늘날 물질에 대한 유혹이 어른뿐만 아니라 우리 어린 학생들에게도 얼마나 강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가를 보여줍니다. 예수님의 제자 중에 재물에 대한 유혹에 넘어진 사람이 바로 가륫유다입니다. 그는 물질을 관리하는 일을 맡았는데 평소아무도 몰래 조금씩 물질을 빼돌리곤 했습니다. 이렇게 평소 재물의 유혹을 다스리지 못한 그는 결국 어떻게 되었나요? 은삼십에 예수님을 파는 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우리가 말씀의 열매를 맺으려면 평소 작은 염려와 유혹의 가시부터 빼내야 합니다. 이를 그냥 두면 가시는 더 큰 가시로 자라기 때문입니다.
넷째, 좋은 땅, 백배, 육십배, 삼심배의 열매를 맺습니다. 23절을 보십시오. “좋은 땅에 떨어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니 결실하여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육십 배, 어떤 것은 삼십 배가 되느니라 하시더라” 좋은 땅은 부드럽고 양분이 많습니다. 이런 땅에 떨어진 씨는 잘 자랄 뿐 아니라 열매도 풍성합니다. 영적으로 볼 때 좋은 땅은 어떤 사람입니까? 무엇보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습니다. 말씀을 잘 들으려면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첫째는 말씀에 대한 소원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소원이 없으면 들어도 들리지 않습니다. 들어도 그 말씀이 남아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소원을 갖고 들으면 말씀이 들립니다. 말씀이 남습니다. 그 말씀이 뿌리를 내리고 자라서 열매를 맺습니다. 둘째는 말씀에 대한 지식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지식이 없으면 들을 수 없습니다. 만일 지금 이곳에서 여러분들에게 아이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을 가르친다면 이해하는 분이 별로 없을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것에 대한 지식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 안에 지식이 없으면 들리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들으려면 성경공부을 열심히 해야 합니다. 셋째는 작은 말씀부터 실천해야 합니다. 이는 작은 말씀부터 체험하라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큰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작은 말씀을 순종하다보면 큰 말씀에도 순종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가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가 큰 것에도 불의하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는 얼마나 열매를 맺게 되나요? 예수님은 어떤 이는 백배, 어떤 이는 육십배, 어떤 이는 삼십배 열매를 맺는다고 하셨습니다. 가장 많게는 백배, 적어도 최소한 삼십백의 열매를 맺는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이 말씀이 믿어지십니까? 이 말씀은 사실입니다. 한 사람 안에 시작된 하나님의 말씀은 결코 한 사람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우리 모임은 대학생 청년들을 불쌍히 여긴 고이사무엘 선교사님과 마더 사라배리 선교사님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런데 처음에는 작은 성경공부 모임부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한국뿐 아니라 전세계 약150여개국에 1,500명의 선교사님들을 파송한 영향력 있는 모임으로 성장했습니다. 여러분들 안에 떨어진 하나님의 말씀은 결코 작지 않습니다. 이 말씀의 열매는 사람마다 다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는 반드시 열매를 맺는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어떻게 말씀을 듣고 있습니까? 말씀을 듣는 여러분의 마음은 어떤 마음입니까? 여러분이 이전에 어떻게 말씀을 들었건, 어떤 마음이었건 지금부터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소원을 갖고 들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주실 열매를 소망하며 들으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우리 JBF 형제자매님들을 우리 주님께서 넘치도록 축복해 주시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말씀 | 마태복음 13:1-23
요절 | 마태복음 13:23
말씀이 열매를 맺는 사람
“좋은 땅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니 결실하여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육십 배, 어떤 것은 삼십 배가 되느니라 하시더라.”
봄이 되면 농부들이 열심히 하는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씨를 뿌리는 일입니다. 그들이 열심히 씨를 뿌리는 이유는 무엇인가? 농부가 씨를 뿌리는 것은 시간이 남아서, 혹은 할 일이 없어서 그냥 하는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열매를 얻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이후에 열심히 하시는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말씀의 씨를 뿌리는 일입니다. 이는 우리로 그 말씀을 듣고 열매 맺도록 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참으로 신기한 일은 똑같은 말씀을 받고도 어떤 사람은 열매를 맺고 어떤 사람은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몹시 궁금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늘 말씀은 이러한 우리의 궁금증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입니다. 예수님은 이 답변을 비유로 말씀해 주셨습니다. 이 비유는 일명 “좋은 밭의 비유”라고도 불립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 말씀이 열매맺게 하는 사람에 대해 배울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는 복이 있습니다. 왜냐면 천국은 우리 마음에 떨어진 하나님의 말씀에서부터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그는 백 배와 육십 배와 삼십 배의 열매를 맺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을 우리 모두 잘 듣고 받아서 열매맺을 수 있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첫째, 귀 있는 자는 들으라. 예수님은 어느 곳을 가시든 열심히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가버나움과 같이 갈릴리 바다가 있는 동네에 가셨을 때는 주로 해변가에서 말씀을 가르치셨는데 그때 많이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시원한 바닷바람을 타고 전해지는 예수님의 말씀은 삶에 지친 사람들에게 큰 위로와 감동을 주었습니다. 그런데 뒤에 있는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좀 더 잘 듣고자 밀치는 바람에 예수님은 바다에 빠질 지경이 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해변에 배를 띄워 놓으시고 그곳에 앉아서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그 때 예수님이 가르치신 말씀 중에 하나가 바로 오늘 우리가 배울 “좋은 밭의 비유”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이 비유말씀을 하실 때 참으로 희한한 말씀을 하나 하셨습니다. 우리 함께 9절 말씀을 읽어 봅시다. “귀 있는 자는 들으라 하시니라” 여러분 세상에는 귀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듣지 못하는 사람도 귀는 다 있습니다. 그런데 왜 이 말씀을 하신 것입니까? 왜냐면 말씀을 듣는 것이 참으로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11~17절 말씀이 이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집에서 엄마 말씀을 좀 못 알아 들어도 큰 일 나지 않습니다. 엄마한테 한소리 들으면 끝입니다. 학교에서 수업 시간에 선생님 말씀을 못 알아 들었다고 큰일 나지 않습니다. 시험 볼 때 한 두 문제 틀리면 그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면 어떻게 될까요? 그것은 재앙입니다. 왜냐면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며 죄사함을 받을 수 없고 심판받을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무릇 들을 귀가 있는 자는 넉넉하게 되나 들을 귀가 없는 자는 있는 것 마저 빼앗기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모여서 예배를 드리고 또 말씀을 듣는 것이 별 것 아닌 것처럼 보일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보고 있는 성경이, 또 우리가 듣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얼마나 귀한 것인가를 말씀하셨습니다. 16,17절을 읽어 봅시다. “그러나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많은 선지자와 의인이 너희가 보는 것들을 보고자 하여도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듣는 것들을 듣고자 하여도 듣지 못하였느니라” 우리는 지금 예수님을 볼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경을 통해 예수님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 목자님들과 일대일로 말씀을 공부하면서, 또한 이렇게 예배시간 설교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이 말씀이 얼마나 귀한 말씀입니까? 우리가 잘 아는 구약의 선지자와 의인들이 보고자 해도 보지 못했고 듣고자 해도 듣지 못한 것입니다. 우리가 받은 천국복음의 비밀은 하늘의 천사들도 살펴보기를 원하던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오늘 말씀을 통해서 무엇을 깨달아야하겠습니까? 이처럼 귀한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가 어떻게 듣고 있는지 깨달아야 합니다. 즉 우리 자신을 발견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떻게 하면 말씀을 잘 들을 수 있는지를 깨달아야 합니다. 이를 깨닫는 자는 복이 있습니다. 왜냐면 이를 깨닫는 순간 그 때부터 여러분의 삶에 하나님의 나라가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이를 깨달으면 우리의 삶과 마음이 고침을 받고 열매를 맺고 넉넉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말씀을 듣는 여러분들의 귀가 모두 새로워지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둘째, 길가, 악한 자를 대적하며 들어야 합니다. 19절을 봅시다. “아무나 천국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할 때는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려진 것을 빼앗나니 이는 곧 길 가에 뿌려진 자요” 여러분 길가에 떨어진 씨는 열매는 커녕 땅에 뿌리도 내리지 못했습니다. 왜 뿌리를 내리지 못한 것입니까? 물론 땅이 딱딱해서 그럴 수도 있습니다. 씨가 부드러운 땅보다는 딱딱한 길가에 뿌리 내리는 것이 어려운 것 사실입니다. 그러나 더 근본적인 이유는 씨가 뿌리를 내리기 전에 새에게 먹혔기 때문입니다. 비록 어렵지만 씨는 충분한 시간이 주어지면 길가일지라도 뿌리를 내렸을 것입니다. 왜냐면 씨는 그만큼 생명력이 강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아스파트를 뚫고 올라오는 잡초나 바위를 뚫고 뿌리를 내리는 나무들을 통해 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길가에 떨어진 씨가 뿌리를 내리지 못한 것은 새가 그 씨를 쪼아 먹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도 깨닫지 못하는 사람이 이와 같습니다. 이런 사람들의 마음은 교만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선입견이나 편견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더 근본적인 이유는 이런 사람들이 말씀을 받으면 그 말씀을 즉시 악한 자가 빼앗아 간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에 마음에 뿌리를 내리고 자랄 수 있는 절대적인 시간이 부족한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말씀을 받고도 금방 잊어버린다면 그런 사람은 길가와 같은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말씀을 빼앗기지 않도록 하나님의 말씀을 겸손한 마음으로 관심을 갖고 들어야 합니다. 이런 사람은 말씀을 빼앗기지 않도록 말씀을 암송하고 배운 말씀을 가지고 소감을 써보는 것이 좋습니다. 이는 이런 방법들이 하나님의 말씀이 내 마음과 생각 속에 충분한 시간을 머물러 있도록 하는데 매우 효과적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 밭에 부지런히 말씀의 씨를 뿌려 주십니다. 그러나 악한 자는 우리 마음에 뿌린 말씀의 씨를 부지런히 빼앗아갑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 악한 자를 대적하면서 말씀을 받아야 합니다. 말씀을 빼앗기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 기도하고 공부하느라 시간이 없고 바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중요한 말씀을 암송을 해서 우리의 마음과 생각에 말씀이 충분한 시간을 머물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면 제아무리 길가와 같은 마음이라도 하나님의 말씀이 뿌리를 내리고 자라서 열매를 맺게 됩니다. 이를 위해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관심 그리고 충분한 시간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는 일입니다.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우리가 충분한 시간 하나님의 말씀에 집중한다면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은 자라서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둘째, 돌밭, 환란과 박해를 견뎌야 합니다. 20,21절을 보십시오. “돌밭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되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시 견디다가 말씀으로 말미암아 환란이나 박해가 일어날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 돌밭의 흙은 얇습니다. 햇볕이 쪼이면 금방 뜨거워지기 때문에 돌밭에 떨어진 씨는 빨리 싹을 틔우고 자랍니다. 그러나 뿌리가 깊지 않기 때문에 얼마 못가고 이내 시들고 맙니다. 돌밭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 즉시 기쁨으로 받으나 환란과 박해를 당하면 곧 넘어지는 사람입니다. 그들이 말씀을 즉시 기쁨으로 받는다는 것은 그만큼 말씀에 대한 소원이 많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이런 사람들은 말씀을 받을 때 혼자서 말씀의 은혜를 다 받는 거처럼 “아멘, 믿습니다.”하면 열렬히 말씀을 받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보면 참 믿음이 좋아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환란과 박해를 받으면 말씀의 은혜를 금방 잊어버립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까?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감정으로 받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으면 기쁨이 있습니다. 그러니 마음이 좋은 것입니다. 거기에 머물러 있고 싶습니다. 그러나 박해나 핍박을 받으면 어떻습니까? 기쁨이 사라집니다. 마음이 힘들고 슬퍼집니다. 말씀을 받을 때 있었던 기쁨이 사라지니 말씀에 대한 회의가 생긴 것입니다. 이는 아직 말씀의 가치를 지키는 것보다 자신의 기쁨과 만족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환란과 박해를 당해 보면 우리 안에 말씀에 대한 믿음의 뿌리가 얼마나 깊은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때 우리가 기억해야할 것이 있습니다. 아무도 처음부터 넘어지지 않는 사람은 없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아무도 넘어지지 않고 걸음마를 배운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는 수백 번, 수천 번을 넘어지면서 걷는 법을 배웠고 그 결과 우리는 지금 넘어지지 잘 걷고 있습니다. 나무는 수없이 많은 바람에 의해 흔들리면서 땅속으로 깊이 뿌리를 내리는 법입니다.
우리의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환란과 박해를 당할 때 믿음이 흔들립니다. 때로는 넘어지기도 하고 우리의 믿음이 뿌리 채 말라버릴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하나의 과정에 불과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말씀의 씨를 지켜는 투쟁을 해야 합니다. 그때 우리의 믿음은 갈수록 예수님께 깊이 뿌리를 내리게 되고 점차 어떠한 환란과 박해에도 넘어지지 않는 믿음의 거목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소망 가운데 현재 우리의 연약한 믿음을 비난하기보다 도리어 귀하게 여기고 지켜줘야 합니다. 왜냐면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신앙의 거목들도 다 처음에는 연약한 돌밭이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를 보십시오. 그는 대제사장 가야바의 집 뜰에서 예수님이 새벽심문을 받을 실 때 어린 계집종 앞에서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했습니다. 그때 새벽닭이 참지 못하고 “꼬꼬댁 꼬꼬고 , 베드로야 회개하라”고 외쳤습니다. 그때 베드로는 자신의 연약함에 깨닫고 닭똥같은 눈물을 흘렸습니다. 지금은 교회의 반석이라 불리는 예수님의 수제자 베드로도 이렇게 돌밭과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지금 내가 연약하다고 실망할 것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연약할지라도, 아무리 많이 넘어졌을지라도 우리가 예수님 앞에 나아가면 사랑이 많으신 우리 주님은 우리를 다 용서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돌밭과 같은 사람은 말씀으로 인해 환란과 박해가 일어날 때 이를 견디어야 합니다.
셋째, 가시밭, 근심과 유혹의 가시를 제거해야 합니다. 22절을 보십시오. “가시떨기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나 재물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하지 못 하는자요” 가시떨기 밭은 땅의 상태는 좋은데 곡식과 가시가 함께 자라는 것이 문제입니다. 가시가 곡식의 기운을 막아서 결실하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열매를 맺어도 먹을 수 없는 쭉정이 열매만 맺게 됩니다. 예수님은 그 가시가 무엇이라고 하셨습니까? 그 가시는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입니다. 사람들은 많은 염려를 합니다. 어떤 염려를 합니까? 가장 많이 하는 염려는 돈에 대한 염려입니다. 여러분들은 돈을 안 벌어봐서 아마도 잘 모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여러분 돈은 버는 것은 힘들데 쓰는 것은 금방입니다. 그래서 돈은 많이 벌어도 모자라고 적게 벌면 더 모자랍니다. 그러면 수십억원, 수백억원을 쌓아놓고 살면 염려를 없겠네요? 그렇지 않습니다. 이렇게 돈이 많으면 누가 훔쳐가진 않을까? 이 돈을 어떻게 지킬까? 어떻게 하면 이 돈을 더 많이 불리까? 염려하게 됩니다. 또한 우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할까? 말까? 잘 될까? 안될까? 염려합니다. 염려는 우리의 일상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런 것을 염려하지 말라. 이런 염려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방인들이나 하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염려하는 대신 무엇을 하라고요?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그때 우리는 염려를 극복하고 말씀의 열매를 맺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염려하지 말아야 할 또 다른 이유는 세상의 염려는 우리를 물질의 유혹에 빠지게 하기 때문입니다. 얼마 전 실시한 한 여론조사 결과 10억을 줄테니 감옥에 가 전과자가 되어도 좋다는 학생이 초등학생 16%, 중학생 33%, 고등학생은 47%였다고 합니다. 이는 매우 충격적인 사실입니다. 이 결과는 오늘날 물질에 대한 유혹이 어른뿐만 아니라 우리 어린 학생들에게도 얼마나 강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가를 보여줍니다. 예수님의 제자 중에 재물에 대한 유혹에 넘어진 사람이 바로 가륫유다입니다. 그는 물질을 관리하는 일을 맡았는데 평소아무도 몰래 조금씩 물질을 빼돌리곤 했습니다. 이렇게 평소 재물의 유혹을 다스리지 못한 그는 결국 어떻게 되었나요? 은삼십에 예수님을 파는 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우리가 말씀의 열매를 맺으려면 평소 작은 염려와 유혹의 가시부터 빼내야 합니다. 이를 그냥 두면 가시는 더 큰 가시로 자라기 때문입니다.
넷째, 좋은 땅, 백배, 육십배, 삼심배의 열매를 맺습니다. 23절을 보십시오. “좋은 땅에 떨어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니 결실하여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육십 배, 어떤 것은 삼십 배가 되느니라 하시더라” 좋은 땅은 부드럽고 양분이 많습니다. 이런 땅에 떨어진 씨는 잘 자랄 뿐 아니라 열매도 풍성합니다. 영적으로 볼 때 좋은 땅은 어떤 사람입니까? 무엇보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습니다. 말씀을 잘 들으려면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첫째는 말씀에 대한 소원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소원이 없으면 들어도 들리지 않습니다. 들어도 그 말씀이 남아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소원을 갖고 들으면 말씀이 들립니다. 말씀이 남습니다. 그 말씀이 뿌리를 내리고 자라서 열매를 맺습니다. 둘째는 말씀에 대한 지식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지식이 없으면 들을 수 없습니다. 만일 지금 이곳에서 여러분들에게 아이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을 가르친다면 이해하는 분이 별로 없을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것에 대한 지식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 안에 지식이 없으면 들리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들으려면 성경공부을 열심히 해야 합니다. 셋째는 작은 말씀부터 실천해야 합니다. 이는 작은 말씀부터 체험하라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큰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작은 말씀을 순종하다보면 큰 말씀에도 순종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가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가 큰 것에도 불의하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는 얼마나 열매를 맺게 되나요? 예수님은 어떤 이는 백배, 어떤 이는 육십배, 어떤 이는 삼십배 열매를 맺는다고 하셨습니다. 가장 많게는 백배, 적어도 최소한 삼십백의 열매를 맺는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이 말씀이 믿어지십니까? 이 말씀은 사실입니다. 한 사람 안에 시작된 하나님의 말씀은 결코 한 사람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우리 모임은 대학생 청년들을 불쌍히 여긴 고이사무엘 선교사님과 마더 사라배리 선교사님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런데 처음에는 작은 성경공부 모임부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한국뿐 아니라 전세계 약150여개국에 1,500명의 선교사님들을 파송한 영향력 있는 모임으로 성장했습니다. 여러분들 안에 떨어진 하나님의 말씀은 결코 작지 않습니다. 이 말씀의 열매는 사람마다 다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는 반드시 열매를 맺는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어떻게 말씀을 듣고 있습니까? 말씀을 듣는 여러분의 마음은 어떤 마음입니까? 여러분이 이전에 어떻게 말씀을 들었건, 어떤 마음이었건 지금부터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소원을 갖고 들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주실 열매를 소망하며 들으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우리 JBF 형제자매님들을 우리 주님께서 넘치도록 축복해 주시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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