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마태복음 제 16강 "상한 갈대를 꺽지 않으시는 예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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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마태복음 제 16 강
말씀 | 마태복음 12:1-21
요절 | 마태복음 12:20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시는 예수님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기를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하리니”
파스칼은 저서 <<팡세>>의 서두에서 "인간은 자연 가운데서 가장 약한 하나의 갈대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것은 생각하는 갈대이다. L'homme n'est qu'un roseau le plus faible de la nature : mais c'est un roseau pensant"라고 말하였습니다. 이것은 오늘 본문 말씀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인간은 이 광대무변한 대자연 가운데 '한 개의 갈대'와 같이 가냘픈 존재에 지나지 않으나, 생각하는 데 따라서는 이 우주를 포옹할 수도 있는 위대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생각하는 갈대'란 즉 위대함과 비참함을 함께 지니고 있는 것이지요. 이와 같이 모순된 양극을 공유하는 인간 존재와 그 밑바닥으로부터 싹트는 불안을 이 한 구절이 상징하고 있습니다.
자, 오늘 본문 말씀에서는 형식적인 강박 관념에 근거한 안식일 준수에 몰두했던 바리새인들의 예수님께 대한 비방과 예수님의 진정한 안식일의 의미에 대한 2개의 기록입니다. 당시 바리새인들은 자질 구레하고 터무니 없는 각종 안식일 규례들에 스스로 얽매이고 일반 백성들까지 올무에 빠뜨리기 일쑤였습니다. 어느 정도였냐면, 본문에서 제자들이 밀 이삭을 잘라 먹은 것을 가지고 자기들이 만들어 놓은 39가지 안식일 금지 규정 중 추수, 타작, 도정 금지에 어긋난다고 예수님을 공격했습니다. 현대 정통 유대인들은 지금도 알파벳을 두 자 이상 쓰거나 지우기, 집 안의 스위치를 켜거나 끄기, 승강기의 버튼 누르는 것도 다 일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현대 정통 유대인들이 이 정도이니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들은 어떠했겠습니까? 상상이 잘 안가지요? 즉 그들은 형식적으론 율법을 준수 할 뿐 하나님을 진실로 경외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안식일은 주인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안식일은 인간을 위해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님은 안식일을 포함한 모든 것을 지배할 수 있는 분이십니다. 이 안식일은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인하여 현재적으론 주일의 개념으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성도들은 주일을 지켜나가야 하며, 주일의 주인이 예수님이심을 알아야 합니다.
본문 내용을 살짝 볼까요? 예수님이 안식일에 밀밭 사이로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따라 말씀을 전하고 여러 모양의 사람들을 치료하고 심방하고 섬기며 다니느라 점심 먹을 겨를도 없었습니다. 그들은 배가 고파서 이삭을 잘라 먹었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이삭을 잘라 먹는 것을 본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말했습니다. “보시오 당신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나이다.”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이 무엇일까요? 생각해 보셔야 됩니다. 유대인들의 법전인 미쉬나에 의하면 안식일에 하면 안되는 39가지 금기 사항을 기록하고 있다. 1. 바느질 2. 밭가는 일 3. 농작물을 거두어들이는 일 4. 곡식단을 걷는 일 5. 타작 6. 곡식등을 까부는 일 7. 거두어들인 곡식중에 좋은 것과 나쁜 것을 고르는 일 8. 곡식등을 가는 일 9. 체질 10. 반죽 11. 빵을 굽는 일 12. 양털 깎는 일 13. 빨래 14. 치는 일 15. 물들이는 일 16. 실을 잣는 일 17. 엮는 일 18. 두 개의 고리를 만드는 일 19. 두 개의 실을 엮는 일 20. 두 개의 실을 푸는 일 21. 묶는 일 22. 푸는 일 23. 두 조각을 꼬매는 일 24. 두 조각을 꼬매기 위해 푸는 일 25. 사슴을 덫으로 잡는 일 26. 그것을 도살하는 일
27. 사슴의 거죽을 벗기는 일 28. 그것에 소금을 치는 일 29. 그 가죽을 가공하는 일 30. 그것을 반반하게 만드는 일 31. 그것을 자르는 일 32. 두 글자를 쓰는 일 33. 두 글자를 쓰기 위해 두 글자를 지우는 일 34. 건물을 짓는 일 35. 그것을 부수는 일 36. 불을 끄는 일 37. 불을 켜는 일 38. 망치질
39. 물건을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옮기는 일
이 중에서 제자들이 이삭을 비빈것이 5번 ‘타작’에 해당하는 행위기때문에 안식일에 하지 말아야 할 행동을 했다고 트집 잡은 것입니다. 미슈나 규정은 안식일에 1천m까지 걸어가면 괜찮고, 그 이상 가면 죄가 된다고 합니다. 헐.
이것들을 지키지 않으면 거룩하지 못한 것이고 하나님의 뜻을 위반하는 게 되는 것이 된다네요.
바느질을 두 번 하면 괜찮고, 세 번하면 죄가 된다네요. 손수건을 들고 다니면 일하는 게 되고,
붙이고 다니면 일하지 않은 게 된다고 합니다. 지금도 유대인들은 생활에서 이런 규칙들을 지키고 있다고 합니다.
유대인들은 안식일의 참된 의미와 본질은 버려두고 예수님을 공격하고 비방할 빌미를 찾기 위한
고발의 도구로 전락시켜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한 번 바꿔 봅시다. 안식일 즉 주일에 해서는 안되는 일?
남을 미워하는 일. 남을 비방하는 일. 생명을 죽이는 일.
반대로 안식일 즉 주일에 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남을 사랑하는 일. 남을 칭찬하는 일. 생명을 살리는 일. 기억해 둡시다. 또한 안식일 즉 주일은 하나님께 예배하고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 말씀하신 그 사랑을 실천하는 날입니다. 안식일 뿐만 아니라 평일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에 제자들이 밀 이삭을 잘라 먹은 것을 공격하는 바리새인들에게서 변호해주셨습니다. 7,8절을 보십시오.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을 너희가 알았더라면 무죄한 자를 정죄하지 아니하였으리라.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하시니라.”
또 한 손 마른 사람을 고쳐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을 돌이키고자 예를 들어 말씀하십니다. 그들 중에 어떤 사람이 양 한 마리가 있어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졌으면 어떻게 하겠느냐는 질문을 하십니다. 당연히 끌어내지 않겠습니까? 사람이 양보다 얼마나 더 귀합니까? 그러므로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습니다. 선이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 사람을 살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안식일에 이런 일을 함으로 종교지도자들이 화가 났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안식일 법을 어긴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죽이고자 계획을 세웠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이런 흉계를 아셨지만 다투지 않으셨습니다.
이미 이사야 선지자는 예수님이 메시야직을 수행하신 방법은 예언하셨습니다. 19절을 보십시오. “그는 다투지도 아니하며 들레지도 아니하리니 아무도 길에서 그 소리를 듣지 못하리라.” 그는 조용히 일하십니다. 자기를 드러내지 아니하십니다. 은밀한 가운데 의를 행하십니다. 지혜자는 조용히 말하지만 우레와 같은 영향을 끼칩니다. 예수님은 조용히 일하시지만 생명의 위협을 두려워하지 아니하시고 한 사람을 살리는 일을 하시자 강력한 영향을 발휘하였습니다.
조용히 일한다고 해서 아무런 영향력이 없을 거라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여러분들이 친구 중 1명이라도 예배에 참석토록 인도하거나 일대일 하도록 돕는다면 ??
예수님은 조용한 가운데 어떤 일을 하십니까?
20,21절을 보십시오.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기를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하리니 또한 이방들이 그의 이름을 바라리라 함을 이루려 하심이니라.” 상한 갈대와 꺼져가는 심지는 아무 쓸모가 없어 보입니다. 꺼져가는 심지는 심지가 딱딱하게 굳어서 기름을 빨아들이지 못하던지, 기름이 없어서 꺼져갑니다. 이때 메케한 냄새를 피웁니다. 갈대는 연약함의 상징인데 상한 갈대는 쓸데가 없습니다. 누구를 환영하기 위해서 흔들 수도 없습니다. 상한 갈대와 같고, 꺼져가는 심지와 같은 사람에게 소망을 두기는 어렵습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교통사고로 한 해 6천명이 죽는데 자살하는 사람들은 그보다 5배나 많은 3만 명입니다. OECD 국가 중 1위입니다. 그만큼 우리 사회에 상한 갈대와 꺼져가는 심지가 많다는 것입니다. 누가 이 양들을 도와줄 수 있습니까?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받은 우리가 그들을 도와야 합니다. 우리 시대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시고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시는 예수님만이 유일한 희망이십니다. 예수님의 메시야 사역은 겸손과 은둔과 자기 부정을 통하여 일하십니다.
마태복음의 저자 마태는 상한 갈대와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꺼져가는 심지와 같이 사람들에게 좋지 않은 냄새나 피웠기 때문에 기피의 대상이었습니다. 세리로서 그의 이기심과 물질주의는 동족들로부터 버림을 받게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런 그를 제자로 불러 주시고 죄사함을 주셨습니다. 그에게 소망을 두시고 사도 마태가 되게 키우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겸손과 온유와 사랑은 마태를 살렸습니다.
예수님은 이 일을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하십니다. 즉 모든 악이 정복되고 하나님의 공의가 세워지기까지, 곧 정의가 승리할 때까지 하십니다. 계속해서 상처입고 소망 잃은 영혼들을 하나님 나라로 초대하십니다. 고난과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서 구원의 역사를 이루신 예수님만이 우리의 참된 소망입니다. 저와 JBF형제자매님들이 참된 소망되신 예수님을 더욱 사모하길 기도합니다. 아멘
말씀 | 마태복음 12:1-21
요절 | 마태복음 12:20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시는 예수님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기를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하리니”
파스칼은 저서 <<팡세>>의 서두에서 "인간은 자연 가운데서 가장 약한 하나의 갈대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것은 생각하는 갈대이다. L'homme n'est qu'un roseau le plus faible de la nature : mais c'est un roseau pensant"라고 말하였습니다. 이것은 오늘 본문 말씀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인간은 이 광대무변한 대자연 가운데 '한 개의 갈대'와 같이 가냘픈 존재에 지나지 않으나, 생각하는 데 따라서는 이 우주를 포옹할 수도 있는 위대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생각하는 갈대'란 즉 위대함과 비참함을 함께 지니고 있는 것이지요. 이와 같이 모순된 양극을 공유하는 인간 존재와 그 밑바닥으로부터 싹트는 불안을 이 한 구절이 상징하고 있습니다.
자, 오늘 본문 말씀에서는 형식적인 강박 관념에 근거한 안식일 준수에 몰두했던 바리새인들의 예수님께 대한 비방과 예수님의 진정한 안식일의 의미에 대한 2개의 기록입니다. 당시 바리새인들은 자질 구레하고 터무니 없는 각종 안식일 규례들에 스스로 얽매이고 일반 백성들까지 올무에 빠뜨리기 일쑤였습니다. 어느 정도였냐면, 본문에서 제자들이 밀 이삭을 잘라 먹은 것을 가지고 자기들이 만들어 놓은 39가지 안식일 금지 규정 중 추수, 타작, 도정 금지에 어긋난다고 예수님을 공격했습니다. 현대 정통 유대인들은 지금도 알파벳을 두 자 이상 쓰거나 지우기, 집 안의 스위치를 켜거나 끄기, 승강기의 버튼 누르는 것도 다 일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현대 정통 유대인들이 이 정도이니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들은 어떠했겠습니까? 상상이 잘 안가지요? 즉 그들은 형식적으론 율법을 준수 할 뿐 하나님을 진실로 경외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안식일은 주인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안식일은 인간을 위해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님은 안식일을 포함한 모든 것을 지배할 수 있는 분이십니다. 이 안식일은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인하여 현재적으론 주일의 개념으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성도들은 주일을 지켜나가야 하며, 주일의 주인이 예수님이심을 알아야 합니다.
본문 내용을 살짝 볼까요? 예수님이 안식일에 밀밭 사이로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따라 말씀을 전하고 여러 모양의 사람들을 치료하고 심방하고 섬기며 다니느라 점심 먹을 겨를도 없었습니다. 그들은 배가 고파서 이삭을 잘라 먹었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이삭을 잘라 먹는 것을 본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말했습니다. “보시오 당신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나이다.”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이 무엇일까요? 생각해 보셔야 됩니다. 유대인들의 법전인 미쉬나에 의하면 안식일에 하면 안되는 39가지 금기 사항을 기록하고 있다. 1. 바느질 2. 밭가는 일 3. 농작물을 거두어들이는 일 4. 곡식단을 걷는 일 5. 타작 6. 곡식등을 까부는 일 7. 거두어들인 곡식중에 좋은 것과 나쁜 것을 고르는 일 8. 곡식등을 가는 일 9. 체질 10. 반죽 11. 빵을 굽는 일 12. 양털 깎는 일 13. 빨래 14. 치는 일 15. 물들이는 일 16. 실을 잣는 일 17. 엮는 일 18. 두 개의 고리를 만드는 일 19. 두 개의 실을 엮는 일 20. 두 개의 실을 푸는 일 21. 묶는 일 22. 푸는 일 23. 두 조각을 꼬매는 일 24. 두 조각을 꼬매기 위해 푸는 일 25. 사슴을 덫으로 잡는 일 26. 그것을 도살하는 일
27. 사슴의 거죽을 벗기는 일 28. 그것에 소금을 치는 일 29. 그 가죽을 가공하는 일 30. 그것을 반반하게 만드는 일 31. 그것을 자르는 일 32. 두 글자를 쓰는 일 33. 두 글자를 쓰기 위해 두 글자를 지우는 일 34. 건물을 짓는 일 35. 그것을 부수는 일 36. 불을 끄는 일 37. 불을 켜는 일 38. 망치질
39. 물건을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옮기는 일
이 중에서 제자들이 이삭을 비빈것이 5번 ‘타작’에 해당하는 행위기때문에 안식일에 하지 말아야 할 행동을 했다고 트집 잡은 것입니다. 미슈나 규정은 안식일에 1천m까지 걸어가면 괜찮고, 그 이상 가면 죄가 된다고 합니다. 헐.
이것들을 지키지 않으면 거룩하지 못한 것이고 하나님의 뜻을 위반하는 게 되는 것이 된다네요.
바느질을 두 번 하면 괜찮고, 세 번하면 죄가 된다네요. 손수건을 들고 다니면 일하는 게 되고,
붙이고 다니면 일하지 않은 게 된다고 합니다. 지금도 유대인들은 생활에서 이런 규칙들을 지키고 있다고 합니다.
유대인들은 안식일의 참된 의미와 본질은 버려두고 예수님을 공격하고 비방할 빌미를 찾기 위한
고발의 도구로 전락시켜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한 번 바꿔 봅시다. 안식일 즉 주일에 해서는 안되는 일?
남을 미워하는 일. 남을 비방하는 일. 생명을 죽이는 일.
반대로 안식일 즉 주일에 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남을 사랑하는 일. 남을 칭찬하는 일. 생명을 살리는 일. 기억해 둡시다. 또한 안식일 즉 주일은 하나님께 예배하고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 말씀하신 그 사랑을 실천하는 날입니다. 안식일 뿐만 아니라 평일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에 제자들이 밀 이삭을 잘라 먹은 것을 공격하는 바리새인들에게서 변호해주셨습니다. 7,8절을 보십시오.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을 너희가 알았더라면 무죄한 자를 정죄하지 아니하였으리라.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하시니라.”
또 한 손 마른 사람을 고쳐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을 돌이키고자 예를 들어 말씀하십니다. 그들 중에 어떤 사람이 양 한 마리가 있어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졌으면 어떻게 하겠느냐는 질문을 하십니다. 당연히 끌어내지 않겠습니까? 사람이 양보다 얼마나 더 귀합니까? 그러므로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습니다. 선이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 사람을 살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안식일에 이런 일을 함으로 종교지도자들이 화가 났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안식일 법을 어긴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죽이고자 계획을 세웠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이런 흉계를 아셨지만 다투지 않으셨습니다.
이미 이사야 선지자는 예수님이 메시야직을 수행하신 방법은 예언하셨습니다. 19절을 보십시오. “그는 다투지도 아니하며 들레지도 아니하리니 아무도 길에서 그 소리를 듣지 못하리라.” 그는 조용히 일하십니다. 자기를 드러내지 아니하십니다. 은밀한 가운데 의를 행하십니다. 지혜자는 조용히 말하지만 우레와 같은 영향을 끼칩니다. 예수님은 조용히 일하시지만 생명의 위협을 두려워하지 아니하시고 한 사람을 살리는 일을 하시자 강력한 영향을 발휘하였습니다.
조용히 일한다고 해서 아무런 영향력이 없을 거라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여러분들이 친구 중 1명이라도 예배에 참석토록 인도하거나 일대일 하도록 돕는다면 ??
예수님은 조용한 가운데 어떤 일을 하십니까?
20,21절을 보십시오.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기를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하리니 또한 이방들이 그의 이름을 바라리라 함을 이루려 하심이니라.” 상한 갈대와 꺼져가는 심지는 아무 쓸모가 없어 보입니다. 꺼져가는 심지는 심지가 딱딱하게 굳어서 기름을 빨아들이지 못하던지, 기름이 없어서 꺼져갑니다. 이때 메케한 냄새를 피웁니다. 갈대는 연약함의 상징인데 상한 갈대는 쓸데가 없습니다. 누구를 환영하기 위해서 흔들 수도 없습니다. 상한 갈대와 같고, 꺼져가는 심지와 같은 사람에게 소망을 두기는 어렵습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교통사고로 한 해 6천명이 죽는데 자살하는 사람들은 그보다 5배나 많은 3만 명입니다. OECD 국가 중 1위입니다. 그만큼 우리 사회에 상한 갈대와 꺼져가는 심지가 많다는 것입니다. 누가 이 양들을 도와줄 수 있습니까?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받은 우리가 그들을 도와야 합니다. 우리 시대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시고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시는 예수님만이 유일한 희망이십니다. 예수님의 메시야 사역은 겸손과 은둔과 자기 부정을 통하여 일하십니다.
마태복음의 저자 마태는 상한 갈대와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꺼져가는 심지와 같이 사람들에게 좋지 않은 냄새나 피웠기 때문에 기피의 대상이었습니다. 세리로서 그의 이기심과 물질주의는 동족들로부터 버림을 받게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런 그를 제자로 불러 주시고 죄사함을 주셨습니다. 그에게 소망을 두시고 사도 마태가 되게 키우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겸손과 온유와 사랑은 마태를 살렸습니다.
예수님은 이 일을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하십니다. 즉 모든 악이 정복되고 하나님의 공의가 세워지기까지, 곧 정의가 승리할 때까지 하십니다. 계속해서 상처입고 소망 잃은 영혼들을 하나님 나라로 초대하십니다. 고난과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서 구원의 역사를 이루신 예수님만이 우리의 참된 소망입니다. 저와 JBF형제자매님들이 참된 소망되신 예수님을 더욱 사모하길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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