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ntitled Document
자유|어린이|JBF|찬양부|기도요청|오케스트라|좋은글|도서부

먀태복음 제 12강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 웨슬레조
댓글 0건 조회 65회 작성일 14-05-25 07:14

본문

2014년 마태복음 제 12 강
말씀 | 마태복음 9:1-17
요절 | 마태복음 9:13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것은 단지 인간의 육체적 질병을 고쳐 주시기 위함만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구원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러나 이 사실을 알지 못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점 차 반감을 드러내기 시작합니다.

  첫째, 작은 자야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예수님께서 배에 오르사 건너가 자신이 센터로 삼고 활동하던 동네에 이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을 가르치시던 집에 사람들이 너무 많이 몰려들어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었습니다. 이때 몇 사람이 침상에 누운 한 중풍병자를 데리고 왔습니다. 그들은 지붕에 구멍을 뚫어 위에서부터 침상을 예수님이 계신 곳으로 달아 내렸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나아가기만 하면 자신들의 행동을 용납해 주시고 병을 고쳐 주실 것을 믿었습니다. 그들의 믿음은 실제적이고 행동하는 살아있는 믿음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들을 어떻게 축복해주셨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중풍병자를 "소자야 안심하라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는 말씀으로 치료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그의 믿음을 보시고 육체적 질병은 물론 영혼의 문제까지 해결해 주셨던 것입니다. 물론 성경에서는 육체적 질병이 반드시 죄에서 기인되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질병에 걸렸을 때 죄 때문일 수도 있음을 깨달아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죄사함을 통해 영육의 구원을 받을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중풍병자에게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고 명령하심으로 세상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자신에게 있음을 나타내셨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의 기적은 단순한 치유가 아니라 죄인을 회개케 하고 죄를 사하는 권세로 구원에 이르도록 하는 메시야적 사인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가 영육간의 구원을 이루시는 우리의 구세주이심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둘째, 나를 따르라. 예수님을 믿고 죄 사함을 받으면 다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따라야 합니다. 예수님은 그 곳을 지나가시다가 마태라 하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셨습니다. 앉아 있다는 것은 원어의 의미를 보면 삶의 의욕과 희망을 상실하고 절망적인 상태로 주저앉아 있는 모습입니다. 그는 돌이키기 힘들만큼 너무 빗나간 삶을 살았기 때문에 절망 가운데서 고뇌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마태는 세리가 되어 돈을 벌어서 인생을 즐기며 떵떵거리며 살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세리는 당시 로마의 앞잡이 노릇을 하던 매국노요 죄인으로 멸시받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는 탐욕의 노예가 되어 자신만을 위해 동족도 팔고 양심도 팔고 명예심도 팔고 인간의 고귀함도 팔았습니다. 그는 더 이상 돌이키기 힘든 빗나간 삶을 보면서 절망하고 앉아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의 이런 고뇌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그리고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따르라는 말씀은 그의 제자가 되어 그의 인격과 사상을 배우고 본받으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세리를 제자로 부르셨다는 것은 충격적이고 파격적인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와 함께 생활하시면서 그를 인내하며 치료하셨습니다. 이기심을 극복하고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법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긍휼의 눈으로 마태를 보셨고 그를 사도로 키우셨습니다. 예수님은 소망의 눈으로 마태를 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두신 소망대로 그는 예수님의 사도요 마태복음의 저자가 되었습니다.

  셋째,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느니라.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잔치를 하시는 것을 보고 불평할 때에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나아왔습니다. 그들은 금식 중이었던 것 같습니다. “우리와 바리새인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 당시 요한은 감옥에 있었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선구자인 요한을 위한 구명 운동을 하거나 금식을 함으로 슬퍼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요한은 금욕적인 삶을 살았고 제자들도 금식과 기도를 중심으로 철저한 금욕 생활을 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을 했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바른 금식을 위해 3가지 비유로 교훈하십니다.
신랑의 비유. 신랑은 예수 그리스도를, 신랑을 빼앗길 날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실 날을 의미합니다. 때문에 우리는 예수님의 고난을 생각하면서 고난에 동참하는 마음으로 금식해야 함을 교훈합니다.

두 번째. 생게조각의 비유 . 생베 조각은 예수님의 복음을 의미하며 낡은 옷은 유대교의 교리를 가리킵니다.

새 포도주의 비유. 그리스도의 복음은 유대교의 낡은 전통에 얽매이지도 않고 형식을 추구하지도 않음을 가리킵니다. 성장하고 변화되기 위해서는 우리의 마음이 새 가죽 부대가 되면 복음은 나를 통해서 생명력 넘치는 역사를 이루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죄 사함의 권능을 가지신 예수님, 죄인을 부르러 오신 예수님 앞에 나가 깊이 회개하고 새 가죽 부대가 되어 기쁨이 충만한 신앙생활을 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Total 295건 12 페이지

검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