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도 온전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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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도 온전하라
말씀: 마태복음 5:17-48
요절: 마태복음 5:48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21-48절에는 살인, 간음, 이혼, 맹세, 복수, 원수 사랑에 관한 여섯 가지 구체적인 실례가 언급되어 있습니다. 함께 6가지 계명에 대해서 공부하겠습니다.
첫째, 살인에 대한 계명(21-26):
옛 사람들은 속으로 수백번 살인을 해도 상관치 않고 실제로 살인만 하지 않으면 된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형제에 대해서 감정적으로 화를 내거나, 골빈 놈, 바보 멍청이라고 욕을 하거나, 미련한 놈이라고 하며 상대방의 인격을 무시하고 정죄하는 것도 살인 행위와 동일하다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겉으로 나타난 행위보다 내면의 숨은 동기를 더 중요시 하시고 행동을 유발시키는 근본원인을 제거하고자 하신 것입니다. 살인의 동기는 미운 감정입니다.
우리는 형제들을 대할 때 기본적으로 사랑을 가지고 인격적으로 대해야 합니다.
또한 부정적인 말보다 긍정적인 말을 함으로써 상대방의 용기를 북돋아 주고 믿음을 심고 덕을 세우기에 힘써야 합니다.
23-26절에서는 형제를 미워하지 않는 소극적인 자세에서 더 나아가 적극적으로 형제와 화목해야 함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둘째, 간음에 대한 계명(27-30): 27,28절을 보십시오.
“또 간음치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간음이란 정상적인 부부관계가 아닌 다른 이성과 성적 관계를 맺는 것을 말합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간음치 말라는 계명을 육체의 간음 행위에만 국한시켰습니다.
그들은 마음으로 몇천번 몇만번 간음을 해도 상관치 않고, 실제로 간음 행위만 하지 않으면 계명을 잘 지키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했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마음으로, 상상으로 죄를 범하는 것조차 금하셨습니다.
음욕을 품는다는 것은 헬라어로 ‘에피뒤메오’(ἐπιφυμέω)로서 ‘갈망하다’ ‘사모하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육의 몸을 입고 있는 한 전혀 음란한 생각을 하지 않고 지낼 수는 없습니다.
음란한 생각이 들 때 빨리 이를 물리치고 건전한 생각을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의 건전한 인격을 형성하고 진정으로 행복한 인생을 살기를 원한다면 죄를 즐기고자 하는 마음을 부인하고 마음에서부터 죄를 짓지 않기에 힘써야 합니다.
마음을 지키는 것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잠언 기자는 “무릇 지킬 만한 것보다도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고 하였습니다(잠언 4:23). 마음은 성과 같습니다.
성을 방비하지 않으면 원수들이 쳐들어와 점령하게 됩니다.
셋째, 이혼에 대한 계명(31,32):
31,32절은 이혼에서 생기는 간음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이는 법을 이용하여 합법적으로 간음하는 것입니다.
모세의 율법에서는 누구든지 아내를 버리거든 이혼증서를 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모세 당시는 여인들을 천시하여 남자들이 별 사유도 없이 함부로 아내를 버렸습니다. 이는 정욕 떄문이었습니다. 모세의 율법은 이혼을 방지하고 여자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 제정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 당시에는 오히려 이러한 법을 이용하여 이혼증서만 써 주고 이혼함으로써 합법적으로 간음을 하는 자들이 많았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들에게 누구든지 음행한 연고 없이 이혼하면 간음한 것이라고 하십니다.
이혼은 하나님의 주권에 도전하는 큰 죄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찌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19:4-6). 우리 믿는 자들은 꿈에서조차 이혼을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넷째, 맹세에 대한 계명(33-37):
맹세에 관한 율법의 주된 의도는 사람이 과장된 말이나 거짓말을 하기 쉬운 것을 억제함에 있었습니다.
당시 백성들은 노예근성 떄문에 거짓말을 잘하고 또 사실이 아닌 것을 진실인 것처럼 과장해서 말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이로 인해 사회는 혼란되고 어느 것이 진실인지 알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반드시 중요한 것만 맹세하고 또 맹세한 것은 반드시 이를 지키도록 함으로써 거짓을 방지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것조차 악용하여 하늘이나 예루살렘이나 자신의 머리(생명)를 두고 맹세하고 이를 교묘히 합리화하여 지키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거짓된 본성을 아시고 아예 맹세를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다섯째, 복수에 관한 계명(38-42):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는 말씀은 반드시 그렇게 복수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이 율법의 목적은 분노와 복수심을 통제하는데 있습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사소한 논쟁 끝에 이를 부러뜨렸을 경우에, 상대방은 분노와 복수심 때문에 그를 죽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율법은 피해자의 이가 부러졌으면 상대방의 이만을 부러뜨릴 수 있도록 공평의 원리를 적용하여 복수심을 통제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대적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더 적극적으로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속옷을 가지고자 하면 겉옷까지 주며 억지로 오리를 가고자 하면 십리를 동행하라고 하십니다(39b-42).
이 말씀은 정말 감당키 어려운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항상 뺨만 맞고 늘 억울한 일만 당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문자 그대로 하라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선을 행함으로 악을 이기라는 것입니다.
당대에 복수하지 못하면 자식에게 복수해 달라는 한 맺힌 유언을 합니다. 본래 눈은 눈으로 갚으라는 말씀은 그들 중에 악을 제하기 위해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할 때 악의 문제가 해결되기는 커녕 악순환만 계속됩니다. 악은 악인에게서 나기 떄문에 악을 악으로 대항하게 되면 꼭 같은 악인이 되어 버립니다(삼상24:13). 교만은 겸손으로만이 이길 수 있는 것과 같이, 악은 선으로만이 이길 수 있습니다(롬12:21).
여섯째, 원수 사랑에 관한 계명(43-47):
43,44절을 보십시오.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원수를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의 속성에 속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하나님은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동일하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골고루 내려 주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끊임없이 하나님을 대적함에도 불구하고 파멸해가는 우리 영혼을 불쌍히 여기사 사랑하는 독생자까지 아끼지 않고 우리 죄를 위해 내어 주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특별 은총입니다.
우리가 이 하나님의 사랑을 덧입을 때 원수까지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손양원 목사님이 사랑하는 두 아들을 죽인 원수를 양아들로 삼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원수조차도 사랑하게 하고 우리를 성숙한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빚어 만드는 힘이 있습니다. 그래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라고 하였습니다(롬13:10).
예수님은 이제 결론적으로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48) 우리가 구원을 얻는 것은 우리의 행위가 전혀 개입되지 않는 100%로 예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그러나 구원받은 후에는 영적으로 성장하기 위해서 우리의 노력이 필요합니다.
말씀: 마태복음 5:17-48
요절: 마태복음 5:48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21-48절에는 살인, 간음, 이혼, 맹세, 복수, 원수 사랑에 관한 여섯 가지 구체적인 실례가 언급되어 있습니다. 함께 6가지 계명에 대해서 공부하겠습니다.
첫째, 살인에 대한 계명(21-26):
옛 사람들은 속으로 수백번 살인을 해도 상관치 않고 실제로 살인만 하지 않으면 된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형제에 대해서 감정적으로 화를 내거나, 골빈 놈, 바보 멍청이라고 욕을 하거나, 미련한 놈이라고 하며 상대방의 인격을 무시하고 정죄하는 것도 살인 행위와 동일하다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겉으로 나타난 행위보다 내면의 숨은 동기를 더 중요시 하시고 행동을 유발시키는 근본원인을 제거하고자 하신 것입니다. 살인의 동기는 미운 감정입니다.
우리는 형제들을 대할 때 기본적으로 사랑을 가지고 인격적으로 대해야 합니다.
또한 부정적인 말보다 긍정적인 말을 함으로써 상대방의 용기를 북돋아 주고 믿음을 심고 덕을 세우기에 힘써야 합니다.
23-26절에서는 형제를 미워하지 않는 소극적인 자세에서 더 나아가 적극적으로 형제와 화목해야 함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둘째, 간음에 대한 계명(27-30): 27,28절을 보십시오.
“또 간음치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간음이란 정상적인 부부관계가 아닌 다른 이성과 성적 관계를 맺는 것을 말합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간음치 말라는 계명을 육체의 간음 행위에만 국한시켰습니다.
그들은 마음으로 몇천번 몇만번 간음을 해도 상관치 않고, 실제로 간음 행위만 하지 않으면 계명을 잘 지키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했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마음으로, 상상으로 죄를 범하는 것조차 금하셨습니다.
음욕을 품는다는 것은 헬라어로 ‘에피뒤메오’(ἐπιφυμέω)로서 ‘갈망하다’ ‘사모하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육의 몸을 입고 있는 한 전혀 음란한 생각을 하지 않고 지낼 수는 없습니다.
음란한 생각이 들 때 빨리 이를 물리치고 건전한 생각을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의 건전한 인격을 형성하고 진정으로 행복한 인생을 살기를 원한다면 죄를 즐기고자 하는 마음을 부인하고 마음에서부터 죄를 짓지 않기에 힘써야 합니다.
마음을 지키는 것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잠언 기자는 “무릇 지킬 만한 것보다도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고 하였습니다(잠언 4:23). 마음은 성과 같습니다.
성을 방비하지 않으면 원수들이 쳐들어와 점령하게 됩니다.
셋째, 이혼에 대한 계명(31,32):
31,32절은 이혼에서 생기는 간음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이는 법을 이용하여 합법적으로 간음하는 것입니다.
모세의 율법에서는 누구든지 아내를 버리거든 이혼증서를 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모세 당시는 여인들을 천시하여 남자들이 별 사유도 없이 함부로 아내를 버렸습니다. 이는 정욕 떄문이었습니다. 모세의 율법은 이혼을 방지하고 여자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 제정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 당시에는 오히려 이러한 법을 이용하여 이혼증서만 써 주고 이혼함으로써 합법적으로 간음을 하는 자들이 많았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들에게 누구든지 음행한 연고 없이 이혼하면 간음한 것이라고 하십니다.
이혼은 하나님의 주권에 도전하는 큰 죄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찌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19:4-6). 우리 믿는 자들은 꿈에서조차 이혼을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넷째, 맹세에 대한 계명(33-37):
맹세에 관한 율법의 주된 의도는 사람이 과장된 말이나 거짓말을 하기 쉬운 것을 억제함에 있었습니다.
당시 백성들은 노예근성 떄문에 거짓말을 잘하고 또 사실이 아닌 것을 진실인 것처럼 과장해서 말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이로 인해 사회는 혼란되고 어느 것이 진실인지 알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반드시 중요한 것만 맹세하고 또 맹세한 것은 반드시 이를 지키도록 함으로써 거짓을 방지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것조차 악용하여 하늘이나 예루살렘이나 자신의 머리(생명)를 두고 맹세하고 이를 교묘히 합리화하여 지키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거짓된 본성을 아시고 아예 맹세를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다섯째, 복수에 관한 계명(38-42):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는 말씀은 반드시 그렇게 복수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이 율법의 목적은 분노와 복수심을 통제하는데 있습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사소한 논쟁 끝에 이를 부러뜨렸을 경우에, 상대방은 분노와 복수심 때문에 그를 죽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율법은 피해자의 이가 부러졌으면 상대방의 이만을 부러뜨릴 수 있도록 공평의 원리를 적용하여 복수심을 통제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대적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더 적극적으로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속옷을 가지고자 하면 겉옷까지 주며 억지로 오리를 가고자 하면 십리를 동행하라고 하십니다(39b-42).
이 말씀은 정말 감당키 어려운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항상 뺨만 맞고 늘 억울한 일만 당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문자 그대로 하라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선을 행함으로 악을 이기라는 것입니다.
당대에 복수하지 못하면 자식에게 복수해 달라는 한 맺힌 유언을 합니다. 본래 눈은 눈으로 갚으라는 말씀은 그들 중에 악을 제하기 위해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할 때 악의 문제가 해결되기는 커녕 악순환만 계속됩니다. 악은 악인에게서 나기 떄문에 악을 악으로 대항하게 되면 꼭 같은 악인이 되어 버립니다(삼상24:13). 교만은 겸손으로만이 이길 수 있는 것과 같이, 악은 선으로만이 이길 수 있습니다(롬12:21).
여섯째, 원수 사랑에 관한 계명(43-47):
43,44절을 보십시오.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원수를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의 속성에 속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하나님은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동일하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골고루 내려 주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끊임없이 하나님을 대적함에도 불구하고 파멸해가는 우리 영혼을 불쌍히 여기사 사랑하는 독생자까지 아끼지 않고 우리 죄를 위해 내어 주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특별 은총입니다.
우리가 이 하나님의 사랑을 덧입을 때 원수까지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손양원 목사님이 사랑하는 두 아들을 죽인 원수를 양아들로 삼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원수조차도 사랑하게 하고 우리를 성숙한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빚어 만드는 힘이 있습니다. 그래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라고 하였습니다(롬13:10).
예수님은 이제 결론적으로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48) 우리가 구원을 얻는 것은 우리의 행위가 전혀 개입되지 않는 100%로 예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그러나 구원받은 후에는 영적으로 성장하기 위해서 우리의 노력이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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