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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마태복음 28강 "화 있을진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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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웨슬레조
댓글 0건 조회 32회 작성일 14-10-05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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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마태복음 28강 
말씀 | 마태복음 23:1-39
요절 | 마태복음 23:13
                                                                    화 있을진저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

오늘 말씀은 예수님께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준엄하게 책망하시며 하나님의 심판을 경고하는 내용입니다.

 Ⅰ. 가르치는 사람에 대한 교훈 (1-12)
예수님께서 무리와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2,3절을 보십시오. ‘모세의 자리’란 유대인들이 율법교육과 예배를 위해 사용하던 회당 앞자리에 마련되어 있었던 높은 의자를 말합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모세가 기록한 율법을 해석하고 가르치는 일을 담당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지적하신 그들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첫째, 그들은 말만 하고 행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진리를 가르치는 한 반드시 그 가르침을 행하고 지켜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말씀을 가르치면서도 자신들은 그 말씀대로 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무거운 짐을 묶어 다른 사람들의 어깨에 올리지만 정작 자신들은 그 짐을 지기 위해 손가락 하나 움직이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둘째, 그들은 사람 앞에서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5절을 보십시오. 그들은 하나님보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모든 일을 했습니다. 대표적인 예로, 그들은 경문의 띠를 넓게 만들어서 차고 다녔습니다. 경문은 가죽으로 된 성구함으로서, 그 안에는 중요한 성경 구절이 들어 있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기도할 때 이것을 손목에 차고 이마에 붙였습니다. 옷술은 율법을 기억하기 위해 겉옷 위에 푸른 실로 장식한 것을 말합니다. 사람들은 은혜를 쉽게 잘 잊어버리는 좋지 못한 습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무리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도 시간이 지나면 새 은혜가 필요한 게 사람입니다. 그래서 늘 말씀을 붙들고 투쟁해야 겨우 그 은혜를 유지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인간의 죄악된 본성을 잘 아시기 때문에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고 마음판에 새기도록 하셨습니다. 그러나 점점 그 의도가 변질되어 경문을 넓게 만들고, 옷술을 길게 만들어서 더 경건하게 보이고자 노력했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함으로써 율법을 열심인 것처럼 과시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금박의 크고 좋은 성경을 들고 다니거나, 스마트폰에 좋은 성경프로그램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말씀이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은 읽고 암송하고 묵상하여 심령에 새기고 순종할 때 은혜가 되고 힘이 됩니다.

또한 그들은 회당과 잔치에서 높은 자리에 앉기를 좋아했고,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일반적으로 서기관들이 거리나 장터를 지나가면 백성들은 존경의 표시로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예루살렘의 유지나 세력가들은 잔치를 열면 명성있는 서기관이나 그의 문하생들을 초대하는 것을 영광스럽게 생각했습니다. 그 잔치에 초대된 서기관은 연장자나 그 집안의 부모들보다도 더 높은 자리에 앉는 것이 보통이었습니다. 또 회당에서도 서기관들은 특별히 마련한 자리에 앉았습니다. 그들이 앉는 자리는 율법이 놓인 맨 앞자리에 있는 긴 의자였습니다. 그 자리는 온 회중이 바라볼 수 있는 자리였기 때문에, 서기관들은 그 자리에 앉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또한 서기관들은 자신들을 높이는 칭호를 듣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당시에 일반 사람들은 서기관들에게 말을 할 때에 존경을 표시하는 ‘랍비’, ‘아버지’, ‘지도자’같은 칭호를 사용했습니다. 그들은 사람들이 자기를 이러한 칭호로 불러주기를 은근히 기대하면서 하나님의 대리인 행세를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무엇이라 하십니까? 8-10절을 보십시오. 바리새인들은 ‘랍비’, ‘아버지’, ‘지도자’라 칭함받고 존경받기를 좋아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게 하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무리들과 제자들에게 이러한 인간적인 칭호나 명예에 집착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오직 모든 찬양과 영광과 존경을 받으실 분은 하나님과 그리스도 뿐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 안에서 ‘형제’, ‘자매’들일 뿐입니다. 우리는 특별한 호칭을 통해 존경받기를 조심해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 모임의 리더들은 목자라는 칭호로 평준화가 되어 있어서 좋습니다. 우리 중에는 세상적으로 박사, 교수, 의사, 선생님 등 존경받는 다양한 칭호를 가지고 계신 분들이 많이 있지만 일단 교회에만 오면 리더들은 다 목자입니다. 너도 목자, 나도 목자입니다. ‘먹자’가 아니라 ‘목자’입니다. 우리는 그 어떤 칭호보다 목자라는 칭호를 좋아합니다. 목자라로 하여 양보다 더 우월하다는 것도 아닙니다. 목자란 양을 섬긴다는 뜻이요, 선한목자이신 예수님을 본받고자 힘쓴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진정한 지도자 상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십니다. 11,12절을 보십시오. 호칭이 높다고 큰 자가 아닙니다. 진정으로 큰 자는 섬기는 사람입니다. 존귀한 칭호, 높은 자리를 탐하는 자는 낮아집니다. 그러나 자신을 겸손히 낮추고 섬기는 자는 높아집니다. 겸손과 섬김 이 두 가지가 지도자의 덕목입니다.

Ⅱ. 화 있을진저 (13-39)
13-36절까지는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에게 예수님께서 7번이나 “화 있을진저”하시며 책망하신 내용이 나옵니다. “화 있을진저”라고 시작하는데, 이 말은 성경에서 54회가 나오고, 신약에서 18번 나옵니다. ‘화’는 몸이나 마음, 일 등에 뜻밖의 변고를 당하여 받는 괴로움이나 해를 말합니다. 여기서는 범죄하지 않고 회개하지 않는 자들을 향한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화라는 말에는 진노와 함께 비애가 포함되어 있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화 있을진저’라고 하시는 예수님의 책망에는 죄에 대해서 무섭게 저주하시는 분노와 함께 그런 저주를 받게 되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이 함께 담겨 있습니다. 그러면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형벌을 받을 수밖에 없는 7가지 죄악이 무엇입니까?

첫째, 그들은 다른 사람이 천국에 들어가는 것을 막았습니다. 13절을 보십시오. 그들은 영적 인도자로서 천국 문을 열고 백성들을 천국으로 인도해야 할 책임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자기들도 천국에 들어가지 않을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천국에 들어가는 것도 막았습니다. 그들은 잘못된 해석과 가르침으로 백성들을 그릇된 길로 인도했습니다. 그들은 은혜보다 행위를 의지하게 하여 백성들이 복음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못하게 함으로 백성들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게 했습니다.

둘째, 그들은 힘써 얻은 교인을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만들었습니다(15). 그들은 이교도들을 유대교로 개종시키기 위해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며 전도를 했습니다. 그들의 선교 열정은 대단했습니다. 그러나 한 사람을 얻으면 이들에게 복음대신 율법을 가르침으로 자기들보다 더 열심있는 바리새인이 되게 하여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했습니다. 거짓 종교인일수록 선교에 더욱 열정적입니다. 오늘날 신천지 같은 이단들이 얼마나 극성스럽게 전도합니까? 또 하나님의 교회는 매주 토요일만 되면 온 동네를 다니며 전도합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전도된 사람들은 예수님을 구주로 만나는 것이 아니라 이만희나 안상홍의 교리를 따름으로 배나 지옥자식이 되고 맙니다.

셋째, 그들은 물질주의의 악영향을 끼쳤습니다(16-22). 예수님은 그들을 “눈 먼 인도자여”라고 부르셨습니다. 마치 맹인이 맹인을 인도하는 것처럼 백성들을 잘못 인도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계신 성전보다 성전에 있는 금을 더 중요하게 취급했습니다. 그들은 사람들이 성전으로 맹세를 하면 지키지 않아도 되지만, 성전의 금을 가리켜 맹세한 것은 지켜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또한 그들은 제단을 가리켜 한 맹세는 지키지 않아도 되고, 제단 위의 예물을 가리켜 한 맹세는 지켜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들의 마음에는 오직 재물만이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눈은 탐심으로 인해 어두워졌으며, 그들의 마음은 탐욕을 인해 닫혀버렸습니다. 그들은 거룩한 제단보다 사람들이 드린 제물만을 중요하게 취급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보다 예물과 헌금에 더 관심을 갖고 있었습니다.

오늘날도 물질을 사랑하는 마음이 영적 지도자들의 눈을 멀게 하여 맹인으로 만듭니다. 물질주의에 사로잡히게 되면 모든 것을 물질을 중심으로 가치를 평가하게 됩니다. 이렇게 가치관이 전도될 때 영적 분별력을 잃고 타락하게 됩니다. 물질은 주와 복음을 위해서 사람을 살리는데 가치 있게 써야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넷째, 그들은 율법의 정신을 버렸습니다(23-24). 23절을 보십시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박하나 회향은 향료로 쓰이는 것이고, 근채는 우엉, 당근과 같은 뿌리채소를 가리킵니다. 이런 것들은 보통 마당 한구석이나 화분에서 조금씩 재배하던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이런 작은 것들을 수확했을 때에 그 소득의 십일조를 다 계산해서 드렸습니다. 이런 그들은 참으로 경건한 자들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율법에서 더 중요한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습니다.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율법에서 가장 중요한 핵심입니다. ‘정의’는 헬라어로 ‘크리시스’인데 ‘재판, 판결, 심판, 판단력’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그 백성이 제사를 드리는 것보다 공의와 정의를 행하기를 더 기뻐하십니다(잠 21:3). 긍휼은 공동번역에서는 ‘자비’(mercy)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자비’는 이웃에게 사랑을 베푸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믿음은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믿음과 신뢰, 또는 신실과 충성”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아주 작은 것에도 생색을 내며 십일조를 했지만, 율법의 본질인 정의, 긍휼, 믿음은 실천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마치 하루살이와 같이 작은 벌레는 걸러내고 낙타와 같은 큰 짐승은 삼키는 자들과 같았습니다. 작은 계명은 까다롭게 굴면서도 큰 죄는 예사로 범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들에게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한다고 하십니다. “버렸다”는 말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십일조도 행해야 하지만, 율법이 근본 정신인 정의와 긍휼과 믿음을 반드시 실천해야 함을 말씀하십니다.

다섯째, 그들의 내면에 탐욕과 방탕이 가득했습니다. 5절을 보십시오. 그들은 잔과 대접의 겉은 수세미로 열심히 문질러 씻었습니다. 그들은 매일 머리를 감고 옷에는 향수를 뿌렸을 것입니다. 겉은 이렇게 청결했지만 그 안은 온갖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했습니다. 그들은 겉은 경건한 모양을 하고 말도 거룩하고 경건하게 했지만, 그 내면은 물질과 권세와 명예에 대한 욕심과 음란하고 추한 생각으로 가득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26절을 보십시오. 마가복음 7:21-23절을 보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무엇인가 열거되어 나옵니다. “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둑질과 살인과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질투와 비방과 교만과 우매함이니 이 모든 악한 것이 다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우리 인간의 본성은 타락해서 이 마음이 원하는 대로 두게 되면 자연스럽게 음란한 생각, 욕심, 시기심, 교만 등 온갖 죄악된 생각에 시달리게 됩니다. 그래서 예레미야 선지자는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사람의 마음이라고 하였습니다(렘 17:9). 우리가 어떻게 이 부패한 내면을 깨끗하게 할 수 있습니까? 사우나에 가서 열심히 씻으면 깨끗하게 됩니까? 아니면 선행을 열심히 하면 깨끗하게 됩니까? 우리의 부패한 내면은 우리의 힘과 의지와 노력으로 깨끗하게 할 수 없습니다. 이는 예수님의 십자가 밑에 나아가 마음의 숨은 죄를 고백하고 그리스도의 보배 피로 씻음 받을 때만이 가능합니다.

여섯째, 그들은 회칠한 무덤과 같았습니다(27,28). 27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겉으로는 회칠을 해서 깨끗하게 보이나 속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썩고 있는 송장과 벌레들이 있는 무덤과 같이 그들이 겉으로는 사람에게 옳게 보이되 안으로는 외식과 불법이 가득하다고 책망하셨습니다.

일곱째, 그들은 하나님의 종들을 대적하고 핍박했습니다(29-36). 29,30절을 보십시오. 그들은 선지자들의 무덤을 확장하여 단장하고 의인들의 비석을 꾸몄습니다. 그리고 자기들이 조상 때에 있었더면 선지자의 피를 흘리지 않았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대적하고 핍박하다가 결국에는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들을 심하게 책망하셨습니다.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33). 그들은 아벨의 피로부터 사가랴의 피까지 다 담당해야 했습니다(35,36).

예수님은 일곱 가지 화를 선포하신 후 예루살렘을 향하여 탄식하셨습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더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성전이 있는 곳으로 하나님께서 특별히 선택하신 도시였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많은 은혜와 특권을 부여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배은망덕하게도 하나님의 뜻을 거역했고 또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라고 외치는 선지자들을 죽이는데 앞장을 섰습니다. 이런 그들에게는 무서운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이 있게 됩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들이 불쌍해서 암탉이 위기가 닥쳤을 때 절박한 심정으로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 같이 그들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고자 애쓰셨습니다. 구약 시대부터 많은 선지자들을 보내셨고 또 직접 육신을 입고 찾아오기까지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교만과 욕심으로 하나님의 말씀듣기를 싫어하고 그리스도를 죽였습니다. 38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예루살렘이 황폐화되어 버린 바 되는 심판이 임할 것이라고 경고하셨습니다. 이 예언대로 70년에 예루살렘은 로마 장군 디도에 의해 백만이 넘게 죽임을 당하고 황폐화되었습니다.

결론: 우리는 종교지도자들에게 화를 선포하신 예수님에 대해 배웠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오늘 평안을 누리며 문제없이 사는 것이 다는 아닙니다. 장차 주님이 오실 때 주님이 기뻐하실 열매를 맺는 준비를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말씀 앞에서 내 안에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과 같은 죄악이 있지 않은지 살피고 회개하여 마음을 깨끗하게 해야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경고장을 7개나 받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 같은 사람이 되지 않아야 합니다. 그 대신에 힘써 예수님을 본받는 삶을 통해, 섬김과 겸손의 열매를 맺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사람의 평가보다 예수님의 눈을 평가를 의식하고, 죄를 멀리하고 자기를 낮추고 겸손히 섬기는 삶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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