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마태복음 23 강. 마음으로부터 용서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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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마태복음 23 강
마음으로부터 용서하라
말씀: 마태복음 18:15-35
요절: 마태복음 18:35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은 나에게 죄를 범한 형제를 권면하고 용서하라 말씀하십니다. 말씀을 통해 용서를 배우고 실천하는 삶 살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용서의 목적. 15절을 보십시오.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 예수님은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그 사람과 1:1로 만나서 권고하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권고의 원어는 ‘엘렝코’로 ‘빛으로 가져오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자신의 잘못을 빛 되신 하나님 앞에 비추어 회개하도록 돕는 것입니다. 인간은 죄를 범하면 일단 감추고자 합니다. 죄를 인정하지 않고자 합니다. 죄를 인정하면 자신의 자존심에 상처를 입고 수치를 당하며 벌을 받을까 두려워합니다. 그렇다고 죄를 눈감아주면 죄의 정도는 심해지고 공동체가 병듭니다. 예수님은 어떻게 하라고 말씀하십니까?
15∼17절을 다 같이 읽겠습니다.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 만일 듣지 않거든 한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확증하게 하라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 인격적으로 개인의 비밀을 보장하면서 죄를 범한 형제가 듣도록 권고해야 합니다. 죄에 대해서 권고하는 목적은 형제를 얻는 것입니다. 그 영혼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하나님께로 돌이키도록 돕는 것입니다. 여기서 죄를 범한 형제가 듣도록 돕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그리고 듣고 회개하고 돌이키면 따뜻한 마음으로 영접해 주어야 합니다. 권고의 목적은 형제를 얻는 것이며 하나님의 공동체를 하나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죄를 범한 사람은 쉽게 인정하거나 듣고자 하지 않습니다. 이 때, 어떻게 해야 합니까? 16절에 보면 한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 세 증인의 입으로 확증하라고 했습니다. 무리를 지어 세를 과시하라는 것이 아니라 기도의 지원을 받으면서 형제가 자기 죄문제를 객관적으로 보도록 도우라는 것입니다. 그래도 듣지 않으면 교회에 말해서 교회의 뜻을 따르도록 권고해야 합니다. 교회의 말도 듣지 않으면 그때 가서는 이방인과 세리같이 여기라고 하였습니다. 끝까지 회개하지 않으면 교회의 이름으로 징계를 내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죄문제를 회개하지 않고 감추고자 하고 고집을 부리면 하나님의 교회는 상처를 입고 교회 공동체는 힘을 잃고 분열되기 시작합니다. 교회 안에 죄의 누룩이 퍼지고 사탄이 역사하여 형제들을 이간시킵니다. 죄문제는 분명하게 회개하도록 돕고 회개한 형제는 사랑과 섬김으로 따뜻한 마음으로 영접해 주어야 합니다. 그때 형제를 얻게 되고 교회 공동체를 지킬 수 있습니다.
18절을 다같이 읽어 봅시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예수님은 교회의 바른 권징에 대한 권위를 인정하셨습니다. 교회 공동체가 죄로 인정하는 것은 죄가 되고 교회 공동체가 용서하면 죄가 사해진다는 것입니다. 19∼20절을 다 같이 읽겠습니다.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들을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으리라” 여기서 예수님은 놀라운 말씀을 하십니다. 지금 이곳에 예수님이 함께 계신다고 말씀하십니다. 또한 합심기도의 능력을 가르쳐 주십니다. 합심해서 기도할 때, 성령이 역사하며 형제들의 마음을 얻고, 하나가 되며, 성숙한 공동체를 이룰 수 있습니다.
두 번째는 용서의 한계입니다. 용서는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무한정 하는 것입니다. 형제가 회개하고 돌이킬 때까지 긍휼히 여기는 마음으로 용서해야 합니다. 21절을 보십시오. “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이르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당시 랍비들은 다른 사람들이 자신에게 죄를 범할 때 세 번까지 용서해 주라고 가르쳤습니다. 베드로는 랍비의 가르침을 넘어 7번까지 용서할 수 있다고 자신의 관용을 자랑스럽게 말했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22절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이르노니 일곱 번 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 즉 490번까지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이는 회개할 때까지 무한정 용서하라는 뜻입니다. 영혼에 대한 사랑과 긍휼히 여기는 마음으로 끝까지 인내하며 용서하라 하십니다.
죄문제의 근본적인 해결은 징벌이 아니라 용서를 통해서 완전히 해결 될 수 있습니다. 노아 홍수 때 하나님께서는 철저히 심판하셨습니다. 하지만, 인간은 변화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용서가 얼마나 중요한가 한 가지 비유를 드셨습니다. 어떤 임금에게 1만 달란트 빚진 자가 있었습니다. 1만 달란트는 6천만 데나리온입니다. 1데나리온이 일군의 하루 품삯이니까 요즘 하루 일당 10만원으로 잡으면 1만 달란트는 6천만×10만원하면 = 6조원이 나옵니다. 이 사람은 도대체 무슨 잘못을 했는지 알 수 없지만 일만 달란트, 6조원이나 되는 빚을 졌습니다. 임금은 명령을 내렸습니다. “그 몸과 아내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갚게 하라” 임금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빚을 갚으라고 준엄하게 명령을 내렸습니다. 그 종은 엎드려서 눈물을 뚝뚝 흘리며 절하며 말했습니다. “내게 참으소서 다 갚으리이다” 임금은 이런 그를 불쌍히 여기시고 그의 빚을 탕감해 주었습니다. 그 종이 빚을 탕감 받을 만한 이유는 눈꼽 만큼도 없습니다. 단지 임금님이 그를 불쌍히 여겼기 때문에 빚을 탕감 받을 수 있었습니다.
이 비유에 나오는 임금은 하나님을 가리킵니다. 빚진 종은 우리 인간을, 빚은 우리의 죄값을 상징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저지르는 죄를 별로 심각하지 않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편에서 볼 때, 우리의 죄값은 일만 달란트로서 셀 수 없이 많다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우리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지은 죄가 얼마나 많은지 잘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사야1:18절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희게 되리라” 찬송가 289장 2절에 보면 ‘머리털보다 더 많던 내 죄가’라는 가사가 있습니다. 우리 각자의 죄악은 끝이 없고 그 악함이 우리의 상상을 초월합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우리 인간은 발바닥에서 머리끝까지 성한 것이 하나도 없을 정도로 죄악으로 가득 차 있다고 하였습니다.(사1:6). 오늘 하루 내가 하는 생각들과 말과 행동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노트에 기록해 보십시오. 이 때, 우리는 이기심과 정욕과 거짓과 시기심 등 죄악이 가득한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처음에 지으신 그 아름다운 모습은 어디로 갔을까요? 하나님은 이런 우리를 당장에 심판하지 않으시고 대신 독생자 예수님을 보내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생들 한 사람 한 사람을 불쌍히 여기셨고 그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너무나 커서 우리의 죄값을 다 탕감해주셨습니다. 그 죄값을 우리 각자에게 묻는 대신에 독생자 예수님이 다 감당하도록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아버지여, 저희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일을 알지 못하나이다.” “다 이루었다!”하시며 죄사함을 선포하셨습니다. 왜 기독교에서 구원은 오직 예수님을 믿음으로만, 오직 은혜로만 구원을 얻는다고 말할까요? 이는 우리의 어떤 노력으로도 일만달란트를 다 갚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긍휼과 용서만이 죄사함과 구원의 유일한 길입니다.
그런데 일만 달란트 빚을 탕감 받은 사람은 백 데나이온 - 일만 달란트의 60만분의 1 빚진 동료를 어떻게 했습니까? 28∼30절을 다 같이 한 목소리로 읽겠습니다. “그 종이 나가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료 한 사람을 만나 붙들어 목을 잡고 이르되 빚을 갚으라 하매 그 동료가 엎드려 간구하여 이르되 나에게 참아주소서 갚으리이다 하되 허락하지 아니하고 이에 가서 그가 빚을 갚도록 옥에 가두거늘” 임금에게 빚을 탕감 받은 종이 집으로 가는 길에 자신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자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백 데나리온은 일만 달란트에 비하면 60만분의 1에 해당하는 아주 적은 돈입니다. 더구나 그 사람은 자신의 종도 아니고 동료 친구였습니다. 그런데 그 친구의 목을 잡고 빚을 갚으라고 협박을 하였습니다. 그 친구가 땅에 엎드려서 갚겠다고 간청을 했습니다. “여보게 친구, 내가 그 백 데나리온 꼭 갚을께, 조금만 조금만 시간을 주게나” 그러나 그 사람은 용서하지 않고 친구를 옥에 가두어 버렸습니다.
그럼, 이 사람이 왜 이렇게 은혜를 모르고 무정한 것입니까? 동료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도 없었지만, 그것보다도 그는 임금으로부터 받은 은혜를 까마득하게 잊고 있었습니다. 이런 종에 대해서 임금은 무엇이라 말씀하십니까? 32, 33절 다 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이에 주인이 그를 불러다가 말하되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하고” 물론 내가 다른 사람에게 당한 것을 생각하면 치가 떨리고 용서하기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내가 예수님으로부터 받은 용서와 사랑을 생각한다면 어떤 사람도 용서할 수 있습니다. 그를 위해 중보기도할 수 있습니다. 용서의 사랑만이 사람을 죄에서 자유롭게 하고 또 변화시킵니다. 십자가 상에서 강도의 마음을 변화시킨 것은 무서운 십자가의 형벌이 아니라 예수님의 용서의 사랑이었습니다. 십자가에 죽어가면서도 그를 위해 기도하셨던 예수님의 용서의 사랑이 그를 변화시켰습니다.
35절을 한 목소리로 읽겠습니다.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결론적으로 예수님은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말씀의 결론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일만달란트 죄값을 예수님의 피값으로 다 탕감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피값으로 용서를 선포하셨고 천국문을 활짝 열어놓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죄인도 예수님을 힘입어 천국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놀라운 용서를 받은 우리도 힘써 용서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용서를 통해 한 사람이 변화되고 또 우리가 진정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우리 JBF 학생들 한 사람 한 사람이 용서의 사람 되게 하시기를 기도합니다.
마음으로부터 용서하라
말씀: 마태복음 18:15-35
요절: 마태복음 18:35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은 나에게 죄를 범한 형제를 권면하고 용서하라 말씀하십니다. 말씀을 통해 용서를 배우고 실천하는 삶 살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용서의 목적. 15절을 보십시오.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 예수님은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그 사람과 1:1로 만나서 권고하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권고의 원어는 ‘엘렝코’로 ‘빛으로 가져오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자신의 잘못을 빛 되신 하나님 앞에 비추어 회개하도록 돕는 것입니다. 인간은 죄를 범하면 일단 감추고자 합니다. 죄를 인정하지 않고자 합니다. 죄를 인정하면 자신의 자존심에 상처를 입고 수치를 당하며 벌을 받을까 두려워합니다. 그렇다고 죄를 눈감아주면 죄의 정도는 심해지고 공동체가 병듭니다. 예수님은 어떻게 하라고 말씀하십니까?
15∼17절을 다 같이 읽겠습니다.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 만일 듣지 않거든 한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확증하게 하라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 인격적으로 개인의 비밀을 보장하면서 죄를 범한 형제가 듣도록 권고해야 합니다. 죄에 대해서 권고하는 목적은 형제를 얻는 것입니다. 그 영혼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하나님께로 돌이키도록 돕는 것입니다. 여기서 죄를 범한 형제가 듣도록 돕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그리고 듣고 회개하고 돌이키면 따뜻한 마음으로 영접해 주어야 합니다. 권고의 목적은 형제를 얻는 것이며 하나님의 공동체를 하나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죄를 범한 사람은 쉽게 인정하거나 듣고자 하지 않습니다. 이 때, 어떻게 해야 합니까? 16절에 보면 한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 세 증인의 입으로 확증하라고 했습니다. 무리를 지어 세를 과시하라는 것이 아니라 기도의 지원을 받으면서 형제가 자기 죄문제를 객관적으로 보도록 도우라는 것입니다. 그래도 듣지 않으면 교회에 말해서 교회의 뜻을 따르도록 권고해야 합니다. 교회의 말도 듣지 않으면 그때 가서는 이방인과 세리같이 여기라고 하였습니다. 끝까지 회개하지 않으면 교회의 이름으로 징계를 내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죄문제를 회개하지 않고 감추고자 하고 고집을 부리면 하나님의 교회는 상처를 입고 교회 공동체는 힘을 잃고 분열되기 시작합니다. 교회 안에 죄의 누룩이 퍼지고 사탄이 역사하여 형제들을 이간시킵니다. 죄문제는 분명하게 회개하도록 돕고 회개한 형제는 사랑과 섬김으로 따뜻한 마음으로 영접해 주어야 합니다. 그때 형제를 얻게 되고 교회 공동체를 지킬 수 있습니다.
18절을 다같이 읽어 봅시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예수님은 교회의 바른 권징에 대한 권위를 인정하셨습니다. 교회 공동체가 죄로 인정하는 것은 죄가 되고 교회 공동체가 용서하면 죄가 사해진다는 것입니다. 19∼20절을 다 같이 읽겠습니다.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들을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으리라” 여기서 예수님은 놀라운 말씀을 하십니다. 지금 이곳에 예수님이 함께 계신다고 말씀하십니다. 또한 합심기도의 능력을 가르쳐 주십니다. 합심해서 기도할 때, 성령이 역사하며 형제들의 마음을 얻고, 하나가 되며, 성숙한 공동체를 이룰 수 있습니다.
두 번째는 용서의 한계입니다. 용서는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무한정 하는 것입니다. 형제가 회개하고 돌이킬 때까지 긍휼히 여기는 마음으로 용서해야 합니다. 21절을 보십시오. “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이르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당시 랍비들은 다른 사람들이 자신에게 죄를 범할 때 세 번까지 용서해 주라고 가르쳤습니다. 베드로는 랍비의 가르침을 넘어 7번까지 용서할 수 있다고 자신의 관용을 자랑스럽게 말했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22절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이르노니 일곱 번 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 즉 490번까지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이는 회개할 때까지 무한정 용서하라는 뜻입니다. 영혼에 대한 사랑과 긍휼히 여기는 마음으로 끝까지 인내하며 용서하라 하십니다.
죄문제의 근본적인 해결은 징벌이 아니라 용서를 통해서 완전히 해결 될 수 있습니다. 노아 홍수 때 하나님께서는 철저히 심판하셨습니다. 하지만, 인간은 변화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용서가 얼마나 중요한가 한 가지 비유를 드셨습니다. 어떤 임금에게 1만 달란트 빚진 자가 있었습니다. 1만 달란트는 6천만 데나리온입니다. 1데나리온이 일군의 하루 품삯이니까 요즘 하루 일당 10만원으로 잡으면 1만 달란트는 6천만×10만원하면 = 6조원이 나옵니다. 이 사람은 도대체 무슨 잘못을 했는지 알 수 없지만 일만 달란트, 6조원이나 되는 빚을 졌습니다. 임금은 명령을 내렸습니다. “그 몸과 아내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갚게 하라” 임금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빚을 갚으라고 준엄하게 명령을 내렸습니다. 그 종은 엎드려서 눈물을 뚝뚝 흘리며 절하며 말했습니다. “내게 참으소서 다 갚으리이다” 임금은 이런 그를 불쌍히 여기시고 그의 빚을 탕감해 주었습니다. 그 종이 빚을 탕감 받을 만한 이유는 눈꼽 만큼도 없습니다. 단지 임금님이 그를 불쌍히 여겼기 때문에 빚을 탕감 받을 수 있었습니다.
이 비유에 나오는 임금은 하나님을 가리킵니다. 빚진 종은 우리 인간을, 빚은 우리의 죄값을 상징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저지르는 죄를 별로 심각하지 않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편에서 볼 때, 우리의 죄값은 일만 달란트로서 셀 수 없이 많다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우리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지은 죄가 얼마나 많은지 잘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사야1:18절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희게 되리라” 찬송가 289장 2절에 보면 ‘머리털보다 더 많던 내 죄가’라는 가사가 있습니다. 우리 각자의 죄악은 끝이 없고 그 악함이 우리의 상상을 초월합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우리 인간은 발바닥에서 머리끝까지 성한 것이 하나도 없을 정도로 죄악으로 가득 차 있다고 하였습니다.(사1:6). 오늘 하루 내가 하는 생각들과 말과 행동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노트에 기록해 보십시오. 이 때, 우리는 이기심과 정욕과 거짓과 시기심 등 죄악이 가득한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처음에 지으신 그 아름다운 모습은 어디로 갔을까요? 하나님은 이런 우리를 당장에 심판하지 않으시고 대신 독생자 예수님을 보내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생들 한 사람 한 사람을 불쌍히 여기셨고 그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너무나 커서 우리의 죄값을 다 탕감해주셨습니다. 그 죄값을 우리 각자에게 묻는 대신에 독생자 예수님이 다 감당하도록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아버지여, 저희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일을 알지 못하나이다.” “다 이루었다!”하시며 죄사함을 선포하셨습니다. 왜 기독교에서 구원은 오직 예수님을 믿음으로만, 오직 은혜로만 구원을 얻는다고 말할까요? 이는 우리의 어떤 노력으로도 일만달란트를 다 갚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긍휼과 용서만이 죄사함과 구원의 유일한 길입니다.
그런데 일만 달란트 빚을 탕감 받은 사람은 백 데나이온 - 일만 달란트의 60만분의 1 빚진 동료를 어떻게 했습니까? 28∼30절을 다 같이 한 목소리로 읽겠습니다. “그 종이 나가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료 한 사람을 만나 붙들어 목을 잡고 이르되 빚을 갚으라 하매 그 동료가 엎드려 간구하여 이르되 나에게 참아주소서 갚으리이다 하되 허락하지 아니하고 이에 가서 그가 빚을 갚도록 옥에 가두거늘” 임금에게 빚을 탕감 받은 종이 집으로 가는 길에 자신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자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백 데나리온은 일만 달란트에 비하면 60만분의 1에 해당하는 아주 적은 돈입니다. 더구나 그 사람은 자신의 종도 아니고 동료 친구였습니다. 그런데 그 친구의 목을 잡고 빚을 갚으라고 협박을 하였습니다. 그 친구가 땅에 엎드려서 갚겠다고 간청을 했습니다. “여보게 친구, 내가 그 백 데나리온 꼭 갚을께, 조금만 조금만 시간을 주게나” 그러나 그 사람은 용서하지 않고 친구를 옥에 가두어 버렸습니다.
그럼, 이 사람이 왜 이렇게 은혜를 모르고 무정한 것입니까? 동료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도 없었지만, 그것보다도 그는 임금으로부터 받은 은혜를 까마득하게 잊고 있었습니다. 이런 종에 대해서 임금은 무엇이라 말씀하십니까? 32, 33절 다 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이에 주인이 그를 불러다가 말하되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하고” 물론 내가 다른 사람에게 당한 것을 생각하면 치가 떨리고 용서하기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내가 예수님으로부터 받은 용서와 사랑을 생각한다면 어떤 사람도 용서할 수 있습니다. 그를 위해 중보기도할 수 있습니다. 용서의 사랑만이 사람을 죄에서 자유롭게 하고 또 변화시킵니다. 십자가 상에서 강도의 마음을 변화시킨 것은 무서운 십자가의 형벌이 아니라 예수님의 용서의 사랑이었습니다. 십자가에 죽어가면서도 그를 위해 기도하셨던 예수님의 용서의 사랑이 그를 변화시켰습니다.
35절을 한 목소리로 읽겠습니다.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결론적으로 예수님은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말씀의 결론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일만달란트 죄값을 예수님의 피값으로 다 탕감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피값으로 용서를 선포하셨고 천국문을 활짝 열어놓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죄인도 예수님을 힘입어 천국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놀라운 용서를 받은 우리도 힘써 용서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용서를 통해 한 사람이 변화되고 또 우리가 진정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우리 JBF 학생들 한 사람 한 사람이 용서의 사람 되게 하시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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