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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마태복음 특강 주여 옳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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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정베드로
댓글 0건 조회 36회 작성일 14-08-10 0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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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마태복음 특강 
말씀 | 마태복음 15:21-28
요절 | 마태복음 15:27
주여 옳소이다
“여자가 이르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니”

오늘 말씀은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두로와 시돈에 가셨을 때 일어난 사건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두로와 시돈은 지중해를 끼고 있는 페니키아의 항구도시로 구약성경에서는 우상숭배와 관련하여 등장하는 이방지역이었습니다. 이곳에서 예수님은 귀신들린 딸아이를 고쳐달라고 간청하는 한 여인을 만났습니다. 예수님은 그녀에게 큰 믿음이 있음을 보시고 그녀의 딸을 고쳐주셨습니다. 저는 오늘 말씀을 통해 가나안 여인의 믿음이 무엇인지, 그녀가 어떻게 그런 믿음을 갖게 되었는지 그리고 이를 통해 우리가 무엇을 배울 수 있는지를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21,22절을 봅시다. "예수께서 거기서 나가사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들어가시니 가나안 여자 하나가 그 지경에서 나와서 소리 질러 이르되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하게 귀신 들렸나이다 하되" 두로는 갈릴리 북서쪽 해안인 게네사렛으로부터 67km 정도의 거리에 위치해 있고 두로에서 북쪽으로 30km 더 올라가면 시돈이 나옵니다. 이곳은 이방지역으로 예수님이 잘 알려지기 쉽지 않은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곳에 예수님을 알아보고 나아온 한 여인이 있었습니다.

그녀는 예수님을 어떤 분으로 알고 있습니까? 그녀는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라고 불렀습니다. 이는 유대인들이 오실 메시야를 부르던 별칭입니다. 그런데 그녀가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라 부른 이유는 예수님이 유대인만의 메시야가 아니라 자기와 같은 이방인들도 구원할 메시야도 되심을 고백한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자기 백성을 구원하고자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 백성에게 배척을 받으셨습니다. 그로인해 그는 슬픔의 사람이 되셔야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전혀 기대할 수 없는 곳에서 한 이방여인을 통해 "다윗의 자손"이란 고백을 받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에게 이는 참으로 기뻐하고 환영할만한 일이었습니다.

그녀는 어떻게 예수님께 나오게 되었습니까? 그녀에게는 귀신 들린 딸아이가 있었습니다. 그녀는 이 아이를 고치고자 나온 것입니다. 여러분, 딸아이가 재롱을 피우면 얼마나 예쁘고 사랑스러운지 모릅니다. 저는 딸은 없는데 제 아래로 막내 동생이 둘째 딸 아이가 있는데 그렇게 노래도 잘하고 재롱을 피워서 온 가족들을 즐겁게 해 줍니다. 그런데 이렇게 예쁘고 사랑스런 딸아이가 귀신에 들려 눈빛에 살기가 등등하고 소리를 지르고 손톱에 날을 세워 공격하는 아이를 바라보면서 엄마의 마음은 얼마나 아팠을까요? 여러분 부활의 리더 김태원 씨라고 알고 있나요? 그는 자폐성 발달장애2급 판정을 받은 둘째 아들이 있습니다. 이런 그의 소원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둘째 아들보다 하루 늦게 죽는 것이랍니다. 왜냐면 이 아이를 죽을 때까지 지켜주고 싶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아이가 자기보다 더 오래 살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그것이 가장 힘들답니다. 여러분 이것이 부모의 마음입니다.

여러분 그런데 귀신들린 문제는 자폐성 발달장애보다 몇 갑절은 힘든 문제일 것입니다. 자폐성 발달장애는 비록 느리지만 조금씩은 좋아진다고 하는데 귀신들린 문제는 시간이 지난다고 좋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정신병은 약물이나 심리 상담을 통해 치유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귀신 들린 문제는 고칠 방도가 없습니다. 이 문제는 시간이 지날수록 깊어지고 나빠지는 것입니다. 그로인해 최후에는 극단적인 방법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문제입니다. 그것이 귀신이 아이를 사로잡은 목적이기도 합니다. 그러니 딸아이를 괴롭게 하는 귀신의 세력과 싸워야하는 여인의 삶은 매일 같이 지옥과 같은 삶이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녀의 말을 통해 그녀의 삶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22절을 다시한번 봅시다. "가나안 여자 하나가 그 지경에서 나와서 소리 질러 이르되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하게 귀신 들렸나이다 하되" 그녀는 예수님께 나아와 귀신들린 딸아이를 고쳐달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그녀는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말합니다. 이는 그녀의 상황이 얼마나 절박한 것인지를 말해 줍니다. 그녀는 딸아이의 문제로 거의 죽을 지경이 된 것입니다. 그녀는 고통의 정점에서 예수님께 나아와 마지막 도움을 청하고 있습니다. 어느 누가 이토록 간절한 여인의 부탁을 거절할 수 있단 말입니까?

이 여인의 간청에 대해 예수님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23절을 봅시다. "예수는 한 말씀도 대답하지 아니하시니 제자들이 와서 청하여 말하되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그를 보내소서." 우리는 여기서 매우 낯선 예수님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예수님은 여인의 간청에 한 말씀도 대답하지 않으셨습니다. 여인은 예수님의 뒤에서 계속하여 소리를 치르면서 도움을 요청합니다. 그러자 이런 상황에 대해 제자들이 도리어 마음이 조급해졌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예수님께 여인의 간청을 거절하실 뜻이면 그를 보내시라고 말합니다. 그때 예수님은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전도여행 보내시면서 하신 말씀입니다. 이는 만민을 구원코자 하시는 하나님의 선교의 원칙이기도 합니다. 사도바울은 이 원칙을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 다음에는 헬라인에게로다" 라고 표현했습니다. 이는 하나님이 정하신 원칙이고 이 원칙은 구약시대부터 지금까지 변함이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방인인 백부장이 하인의 병을 낫게 해달라고 찾아왔을 때 그의 집에 가서 그를 고쳐주고자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이 여인의 간청을 거절하신 이유는 반드시 이 원칙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어찌보면 가혹한 일일수도 있지만 예수님은 먼저 이 여인의 믿음을 시험하신 후에 여인을 돕고자 하셨습니다.

여인은 예수님의 뒤에서 간절히 도움을 청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한 말씀도 대답해 주지 않으셨습니다. 그 정도만 해도 예수님께 실망하고 떠날 사람들이 많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여인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예수님이 자신의 청을 무시하는 듯 해도 포기하지 않고 예수님께 나아왔습니다. 그런데 여인에게 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그야말로 핵폭탄과도 같은 말씀이었습니다. 26절을 봅시다. "대답하여 이르시되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 예수님은 한마디로 그녀를 개 취급하신 것입니다. 이는 전혀 예상할 수 없는 말씀이었습니다. 비록 예수님이시지만 이런 말씀을 듣고 마음이 상하지 않고 속이 뒤집히지 않을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우리 속담에 "여자가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린다."는 말이 있습니다. 자치 잘못하면 예수님의 말씀은 여인의 마음에 두고두고 상처가 될 수도 있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여인에게 거침없이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듣는 당사자인 여인이 가장 힘들었겠지만 이 말씀을 옆에서 듣고 있던 제자들도 무척이나 민망해서 어떻게 수습해야할지 모를 상황이었습니다. 혹시 이 여인이 앙심이라도 품고 미친 척, 개처럼 예수님을 물어버리기라도 하면 낭패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 말씀을 하신 후에 아마도 잠시 정적이 흘렀을 것입니다. 무슨 일이 벌어질 것만큼 같은 불안한 마음에 제자들의 가슴이 콩딱콩딱 뛰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때 여인의 대답이 무엇입니까? 27절을 봅시다. "여자가 이르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니" 참으로 놀랍고 지혜로운 대답입니다. 사람이 아무리 절박한 상황이라고 해도 자존심이란 것이 있습니다. 자존심이 상하면서 분노가 일어나고 극단적인 선택을 할 수도 있는 것이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여인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그토록 사랑이 많으신 예수님에게 개 취급을 받으면서도 그 말씀을 겸손히 받아들였습니다. 그녀가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었을까요? 참으로 궁금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마가복음에 보면 그녀는 수로보니게 출신의 헬라인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알파벳을 만들 정도로 문명화된 사람들로 자긍심이 강한 족속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귀신들린 딸아이의 문제를 겪으면서 자신의 인생이 밑바닥까지 낮아지는 경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귀신들려 바닥을 뒹굴고 기어 다니고 아무것이나 주워 먹기도 하는 딸아이를 감당하며 자신에 대한 자긍심을 내려놓아야했습니다. 자신이 붙들 수 있는 것은 오직 자신을 구원할 분의 자비심뿐이었습니다. 그 자비심을 얻을 수 있다면 그녀 자신은 어떤 취급을 받아도 상관이 없었습니다. 역설적으로 그녀의 겸손과 지혜는 고통스런 그녀의 삶이 가져다준 축복이었던 것입니다.

세상에는 불행이란 이름의 축복들이 많습니다.  고 강영우 박사님은 중학교 재학 중 외상에 의한 망막 박리로 실명한 후, 그 충격으로 쓰러지신 어머니를 잃고 그를 돌보던 누나마저도 병으로 죽는 불행을 겪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모든 것을 잃어버린 그 순간에도 신앙과 꿈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때 그는 한국 최초의 맹인박사가 되었고 부시대통령 당시 백악관 국가 장애위원회 정책차관보를 역임하는 등 장애인의 복지에 큰 기여를 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강연을 통해 많은 분들에게 꿈과 희망을 전하는 삶을 사셨습니다. 이런 그의 자녀들도 미국 사회에서 영향력 있는 사람들이 되었고 그는 하나님 안에서 명문가문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여인의 지혜로운 대답에 예수님은 어떻게 반응하셨습니까? 28절을 봅시다.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때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 예수님은 여인의 믿음을 칭찬해 주셨습니다. 여인의 믿음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여인의 간청에 한 말씀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마침내는 그녀를 개 취급하며 내치고자 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결코 그것을 감정으로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예수님의 말씀을 겸손히 받아들였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인정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개가 불결하고 잡스러운 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집에서 기르는 애완견을 의미한다는 것을 알아차렸습니다. 즉 예수님은 유대인을 자녀로, 이방인을 개로 비유하셨지만 사실 이 둘은 모두 주인의 사랑을 받는 존재라는 것을 발견한 것입니다. 그때 그녀는 개가 가진 긍정적인 의미를 찾아서 지혜롭게 대답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삶의 여러 시련들을 이기고 이를 믿음을 체험하는 기회로 만들기 위해서는 시련 자체가 지니는 긍정적인 의미를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예를 들면 봄 가뭄이 식물에게는 매우 유익하다고 합니다. 모름지기 농사를 모르는 도시인들은 봄비가 많이 내려야 씨앗이 자라는데 유익하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하지만 사실은 그 반대입니다. 농부들은 경험상 봄날의 좋은 날씨가 오히려 식물들로 하여금 뿌리를 얕게 내리게 하여 생존력을 약화시킨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처음부터 충분히 비를 맞지 못한 식물은 물과 양분을 얻기 위해 땅속 깊이 튼튼하게 뿌리를 내리려고 합니다. 그리하여 태풍이나 가뭄이 와도 끄떡없이 견뎌낼 수 있게 됩니다. 봄날의 악천후가 강인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또한 시련을 이겨내는 힘은 무엇보다 먼저 그것을 긍정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안목에서 나옵니다. 제갈량이 오장원두에서 위나라 군대를 맞아 최후의 일전을 치를 때였습니다. 그의 군대가 행군을 하는 도중 거센 바람이 불어 군 깃발이 꺾이자 제갈량은 이를 불길한 징조로 받아들였습니다. 결국 제갈량은 전장에서 병을 얻었고 백방으로 처방을 구했으나 별다른 효과를 거두지 못한 체 세상을 뜨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비슷한 사건을 두고 전혀 다르게 생각해 승리를 거머쥔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청나라 2대 왕인 홍타시입니다. 명나라와 최후의 일전을 앞둔 아침, 그의 밥상 다리가 갑자기 부러졌습니다. 그 바람에 상위에 있던 밥이며 국이며 반찬들이 모두 쏟아지고 말았습니다. 그 때문에 홍타시는 아침을 거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홍타시는 그 순간 무릎을 탁 치며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됐다. 이 싸움에선 우리가 이겼다. 오늘부터 이런 나무 소반이 아니라 명나라 궁중에서 쓰는 금 소반에 밥을 먹으라는 하늘의 뜻이요 계시다' 의기충천한 홍타시와 그의 군대는 필승의 신념으로 명나라 군대를 격파하고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습니다.

우리는 때로 아무리 기도해도 하나님이 듣지 않으시는 것 같을 때가 있습니다. 우리의 인생이 개 취급을 받으며 무시당하는 것 같은 때도 있습니다. 여러분들도 학교에서 공부를 못하거나 운동을 잘 못하면 개 무시당할 때가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자존심이 상하고 내게 상처 준 사람에 대해 분노하고 그로인해 좌절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오늘 말씀에 나오는 가나안 여인을 통해서 분명히 배우는 게 있습니다. 가나안 여인과 같은 그러한 믿음, 그러한 지혜는 귀신들린 딸아이를 통해 배운 것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책을 통해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생에는 책으로 배울 수 없는 것들이 더 많습니다. 특히나 고통이 아니면 배울 수 없는 것들이 있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바로 가나안 여인에게서 나타난 겸손과 지혜입니다.

엄마에게 딸은 결코 벗어날 수도 포기할 수도 없는 문제입니다. 이처럼 우리도 벗어나고 싶어도 벗어날 수 없는 문제, 포기하고 싶어도 포기할 수 없는 문제가 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들에게 귀신들린 딸아이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그것이 무엇이든 그것으로 인해 우리가 당하는 고통의 의무가 무엇인지를 깨닫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 시련의 과정에서 겪은 고통의 의미를 발견한 사람은 반드시 그 고통을 겸손과 지혜로 바꾸게 될 것이고 그런 사람은 반드시 예수님도 놀라게 하는 믿음의 사람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께서 일부러 여인에게 한 말씀도 하지 않으시고 개취급하며 무시하신 이유는 여인의 믿음을 세상에 들어내고자 하신 뜻이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믿음을 세상에 들어내길 원하십니다. 그러기 위해선 가나인 여인이 귀신들린 딸아이를 통해 오랜 시간 시련을 받은 것처럼 우리도 인생의 시련을 통해 인생의 참된 축복이 무엇인지, 참된 지혜가 무엇인지를 깨달아야 합니다. 이를 깨닫기 위해선 반드시 고통이란 과정을 통해 연단이 되어야 합니다. 그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인내입니다. 여러분 지금 당장은 앞이 보이지 않을지 모릅니다. 언제까지 이 길을 가야할지도 모를 수 있습니다. 그래도 인내해야 합니다. 버텨야 합니다. 세상이 나를 개 취급해도 버티시기 바랍니다. 때론 하나님도 나의 기도에 응답하지 않으시고 나를 버리신 것 같을 때도 버티시기 바랍니다. 바로 그것이 하나님의 주실 부스러기 은혜를 온전히 받아 누리는 비결입니다. 여러분들이 가나안 여인을 통해 그녀의 믿음의 비밀을 배우고 참된 겸손과 지혜로 예수님도 놀라게 하는 믿음의 사람들로 다 쓰임 받으실 수 있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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